농지법상 1천 제곱미터(약 300평) 이상의 농지를 경영하거나 한 해 농산물 판매액이 120만 원 이상인 자,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농지에 330 제곱미터(약100평) 이상의 비닐하우스를 설치하여 농사를 짓거나 소 2마리만 길러도 농업인이다. 따라서 농지 300여 평을 가지고 취미 삼아 농사를 지어도, 심지어 전답 한 평 없어도 농업인이 될 수 있다. 농업인은 법적 용어이고 주로 쓰이는 말은 농부, 농민이다.
우리 헌법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천명하고 소작(小作)을 금지하면서도 농지의 임대와 위탁경영을 허용하고 있다. 지주와 경작자가 수확물을 나눠 갖는 소작과 임대, 위탁경영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여담이지만, 요즘엔 지주와 소작농의 처지가 역전된 현상이 허다하다. 소작은 고사하고 그냥 지어 먹으라 해도 손사래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부재지주의 전답을 부쳐 먹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최근에 정부는 농지투기를 뿌리 뽑는다며 농지법을 개정하였다. 농지취득 자격증명 심사요건을 강화하고 투기우려지역 농지취득 자격 심사를 규정하고 농업진흥지역 안에서는 주말농장이나 체험 영농 목적의 농지취득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개정 농지법은 농지의 투기 방지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투자대상으로서의 농지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
우리 농업경영인의 평균연령은 68세이며 2022년 12월 1일 기준 통계자료에 의하면 농가 인구 216만 6천 명 가운데 65세 이상의 고령자는 무려 49.8%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고령 인구 18%에 비하면 농촌은 그야말로 경로당 수준이다. 특히 70세 이상의 고령자가 75만 6천 명으로 34.9%라는 심각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의 기대수명은 84.1세인데 농업경영인 대다수가 남성이고 우리나라 남성의 기대수명은 81.2세이니 10여 년 후엔 현재의 농업경영인 전체가 사라진다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농촌 소멸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전체 102만 3천 농가 중 1인 가구는 22만 2천 가구나 된다.
농가당 경작면적은 1.37ha(4,110평)에 불과한데 1ha 미만 농가가 75만 1천 가구로 전체 농가의 73.5%라는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더구나 농지가 전혀 없는 농가도 7천 가구나 된다. 호주의 농가당 경지면적 373ha, 캐나다 303ha, 미국 82ha에 비하면 실로 조족지혈이다. 농업소득이 연간 1천만 원 미만인 농가는 66만 가구로 전체농가의 65.1%이고 연간 120만 원 미만 농가도 무려 18만 5천 가구로 전체 농가의 18.1%에 달하는 참담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의 농촌 프로그램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장밋빛 성공사례 일색이다. 농촌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에 들어가 농사지어도 썩 괜찮을 거라고 오해할 법하다.
800평의 벼농사를 짓는 어느 농부의 수지분석을 살펴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논갈이와 로타리 작업 등에 부린 트랙터 작업비용, 모내기 이앙기 작업비, 묘 구입비, 비료와 농약 구입비, 수확 작업과 건조에 이르기까지 156만 원이 들어갔는데 수확량은 700 킬로그램 남짓하여 판매액은 159만 원으로 순수익이 3만 원이었다고 한다. 물론 자가 노동력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농촌 지역은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소멸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를 상상하면 끔찍하다. 10년 후 농촌의 65세 이상 고령자는 52%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늙어버린 농촌’에서 새삼스럽게 경자유전을 운위하는가. 아마도 십여 년 후엔 귀신만 사는 농촌 마을이 수두룩할 것이다. 당국자들은 눈이 있다면 당장 농촌 들녘에 나가 과연 누가 농사를 짓고 있는지 둘러보라.
벼농사는 거의 모두 위탁영농이다.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묘시설, 이앙기, 트랙터, 콤바인 등을 갖춘 전문 농사꾼이 주변 마을의 벼농사를 도맡아 볍씨 파종에서부터 수확과 조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내 지인은 주변 마을의 논 약 7만 평(23ha)을 위탁받아 경작하고 있다. 현실이 이 지경인데 경자유전이 무엇이며 자작농이 무슨 말인가. 농정 당국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임대란 무엇인가? 농지를 빌려주고 그 대가로 얼마간의 돈이나 현물을 받는 것이다. 위탁이란 무엇인가? 전문 농사꾼한테 농사를 모두 맡기고 그 삯을 주는 대신 수확물을 인수하는 것이다. 임대와 위탁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실익이 없다. 이러나저러나 비슷한 결말인 셈이다.
농촌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책상머리에 앉아 임대가 어떠니 위탁이 어떠니 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원칙을 새로 정해야 한다. 첫째, 농지에는 농사만 짓도록 한다는 대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농사는 누구나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시인이건 농촌주민이건 자격을 따질 필요가 없다. 셋째, 자신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자유롭게 임대나 위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임대료 횡포를 막기 위해 임대 요율은 법으로 정한 요율 이하로 하도록 한다. 현행 국유농지 대부료를 감안하면 될 것이다. 위탁의 경우에도 매년 정부에서 기준액을 고시하여 그에 따르도록 한다.
밭농사는 또 어떤가? 밭갈이는 역시 기계장이한테 맡긴다. 기계로 수확할 수 있는 작업도 맡긴다. 그러나 밭농사의 기계화율은 10%도 안 된다. 밭농사는 벼농사에 비하여 4~6배의 노동력이 들지만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없기에 일꾼을 사와야 한다. 인부 구하기도 어렵고 품삯도 감당키 어려운데 누가 벼농사를 접고 논에다 콩이나 옥수수를 심고 싶겠는가. 늙은 농부들은 고작 텃밭 농사나 손수 짓고 있는 형편이다. 전업농은 주로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하지만 일손 구하기도 어려운데다 해마다 노임은 마구 오르고 농산물 가격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뒷걸음질을 친다. 비료값, 농약값. 모종값, 연료비, 전기료, 각종 자재비는 경기가 날 정도로 치솟았다. 올해 양파작황이 신통치 않아 값이 오를 조짐을 보이자 당국은 물가를 잡겠다며 잽싸게 수입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똥값’이 되면 무슨 대책입네 하면서 시늉만 낼 뿐 수수방관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오늘 이 땅의 농민은 살길이 없다.
아파트나 상가는 자유롭게 임대차할 수 있는데 농지는 왜 임대차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신고하고 심사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직업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집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농지가 없는 사람은 왜 자유롭게 농지를 취득할 수 없는지 가방끈 짧은 나로선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쌀만 겨우 자급자족할 뿐 밀, 콩, 옥수수 등 여타 곡식은 거의 모두 수입하고 있다. 소, 돼지, 닭도 국내에서 사육한다는 의미가 있을 뿐 사료를 전량 수입하고 있으니 외국산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우리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연간 56.7kg에 불과하다. 1인당 하루 144g의 쌀을 소비하는 셈이니 하루에 밥 한 공기 반도 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쌀이 남아도는 까닭은 생산이 넘쳐서가 아니라 그동안 소비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농막도 엄격히 제한한다고 한다.
농기구나 놓아두고 농사하다가 잠시 쉴 수 있는 좁은 공간만 허용한다고 한다. 말이 아니다. 농막을 제법 주택처럼 지어 그곳에서 가족이 모여 취사도 하고 잠도 함께 잘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대가를 받고 하루 이틀 빌려 줄 수도 있도록 해야 한다. 농민이 민박처럼 농막을 좀 빌려주고 소소한 부수입을 올리는 게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인도 쉽게 농지를 사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야 농촌이 살아나고 농지의 가치도 보존된다고 본다.
쌀과자를 사주면 조금이라도 쌀소비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쌀과자를 애용했었다. 언젠가 포장지를 찬찬히 살펴봤더니 중국산 쌀로 중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과자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이제 ‘경자유전’은 허전한 이상론에 가깝다. 더구나 소작을 금지한다는 헌법 규정은 고리타분하기까지 하다. ‘소작’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근대적이다. 법으로 임대나 위탁영농을 허용하고 있는 마당에 원칙론을 내세워서 무엇에 쓰랴.
중앙정부와 각급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한 토지는 국토면적의 1/3이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의 국공유 토지 비율이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고 호주의 경우엔 대부분이 국유지이긴 하나 아무튼 최대지주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이다. 국유지 가운데 농지는 66,000ha로 전국 경지면적 1,528,237ha의 4.3%이다. 그러나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한 농지는 농지법의 규제 밖에 있다. 1만 제곱미터 미만의 상속 농지나 이농자의 농지도 경자유전 밖이다. 또한 임대와 위탁영농을 허용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경자유전’은 유명무실하고 어쩐지 사회적 약자에게만 엄격한 농지법이 아닌가 싶다.
농촌은 삼한의 소도 같은 금역이 아니다.
향촌 사람 누구나 도시에 나가 직업을 구하고 집을 마련하여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도시인도 누구나 향촌에 농토를 구입하여 그 땅에 아담한 별장도 짓고 땀흘려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휴양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농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되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면 된다.
직접 경영하든 임대 또는 위탁을 하든 농지를 묵히지 않고 경작해야 한다. 임대료는 국유재산 임대료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한다. 임대와 위탁 과정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경작에 따른 직불금, 유기농 지원금 등 각종 지원은 실경작자가 받도록 한다.
첫댓글 농사를 지으면 지은 만큼 손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인가 묵혀버린 땅들이 너무 많습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이 철처히 지켜져야 하는데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여긴바람에
선의의 피해자도 생겨나지 않는가 합니다.
이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니 세심한 법규정리도 필요할것 같습니다.
농촌의 현실은 너무나 암울하고 절망적인데 위정자들은 현장감 없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 나팔을 불어대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일제강점기에나 쓰던 소작이라는 말이 헌법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감각한 농지법과 소멸의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우리 농촌의 현실을 돌아볼 때마다 한숨만 나옵니다
우리의 농촌 현실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시대의 과도기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자유전이 바람직한데 해당 정부기관은 탁상공론만 난무하니 답답하군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주식인 쌀이 자급자족이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농촌 경제가 어려워 농민들이 울상이니 안타깝습니다.
농촌 현실의 어려운 문제점과 정보에 대한 제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안타깝고 답답한 심사에 두서도 없이 적어보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불평불만만 는다더니 제가 딱 그꼴이지 싶습니다.
십년 후엔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 것이 농촌현실인데 몇몇 투기 잡겠다고 욕심부리다가 순진한 농민들만 잡는 꼴이 된 듯합니다.
개발정보를 흘리고 그런 비밀을 악용하여 투기를 일삼는 부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노릇이지 빈대잡겠겠다며 초가삼간을 태우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선생님의 격려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