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마을 유래와 전통의 숨결 안영동(安永洞)
안영동은 금산군과 시의 경계를, 동쪽으로는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정동과 접했고, 서쪽 방향에는 서
구의 복수동, 괴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바깥길이 아닌 안길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안(安) + 길(永) 동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함께 이 곳에 양반들이 정착
해 살면서 평안한 영세를 누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안영동은 원안영, 도장골, 새동네, 신봉 검바우, 부흥동, 창명 새
뜸 성산주막거리, 겸나무 주막거리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안영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 하여 원(元)자가 붙여진 이 원안영(元安永)은 복수동에서 산기슭을 돌아 청수바위를 지나
서 안영동으로 들어서면 첫동리가 바로 원안영인 것이다.
도장골(도장굴)은 한자로 규동(閨洞)으로 표기하는데 세조때의 충신 충정공(忠貞公) 박팽년(朴彭年)과 청재(淸齋) 박심문(朴審
問)의 위패(位牌)를 모신 창계 숭절사 (繪溪 崇節寺)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 도장골은 한자어 규방(閨房)의 순수한 우리말로서 규수가 거처하는 방 안방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이 도장골
은 규수가 거처하는 아늑한 방, 안방같은 포근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안영동이라는 이름도 어쩌면 이 도장골
에서 유래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남부순환도로(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개설로 마을이 거의 수용되었고 현재 다섯집
만 남아있다.
새동네(새뜸)는 성복고등학교(星福高等學校) 정문 앞에 새로 생긴 동리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해철산(解鐵山)이 서쪽으
로 우뚝 서 있는 산밑의 동리로 이곳에는 대둔산으로 가는 고개인 샛고개가 있다.
신봉은 한자어로 신봉(新峰)이라 표기하는데 검바우에서 산기슭으로 약 1.5km가량 내려오면 산골짝에 아늑히 자리한 마을이
다. 지금까지 이곳이 왜 신봉인지 몰랐으나 이번에 남부순환도로의 개설로 산봉우리의 끝자락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결
국 이 곳에 새 봉우리가 생긴 것이기에 신봉이라는 이름이 맞아 떨어졌다고 이 곳의 촌로 (村老) 이득우(李得雨)씨는 증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곳의 몇 개 지명도 다음과 같이 예언대로 맞아 떨어졌다고 설파하고있다.
이 신봉 너머 유등천변에는 기암절벽이 서 있고 그 절벽 가운데 바위 하나가 쪼개진 모습을 하고 있어 지금껏 이 곳 사람들
은 쪽바위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이 곳에 최근 남부순환도로의 개설로 그 일대의 바위가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
래 서 이 바위가 쪽바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도장굴 뒤편에는 소통굴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지금껏 이곳 사람들은 옛날에 이곳에서 소를 잡아 먹었다 하여 소통골이
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작은 길로 통하다고 하여 소통골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곳도 최근 남부순환도로
의 안영터널이 뚫려 차량이 소통되게 됨으로써 결국 교통이 소통된다는 뜻의 소통골이 되었다고들 한다.
그리고 해철산 기슭을 문다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들판은 옛부터 가뭄이 심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30여년전에 이곳
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전전후 농토로 변모시켰다. 따라서 물을 달여 올려서 농사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한 지명이라 고
도 말하고 있다.
겸나무주막거리는 이곳에 소나무가 있어서 소나무거리라고도 했는데 안영동2구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20여호가 있었으
나 최근에 남부순환도로의 개설로 완전 철거되었다.
성복고등학교 서쪽으로 우뚝 솟은 산이 안영동에서 가장 높은 해철산이다.
해철산은 달리 파철산(破鐵山)이라고도 한다. 옛날 신라때 풍수지리에 능한 도선국사(道銃國師)가 이곳에서 지리를 보는 쇠(鐵)
을 놓고 지세(地勢)를 보았다하여 해철산이라 하였고 도선이 화가나서 그 쇠를 깨부수었다하여 파철산(破鐵山)이라했다고 한
다. 그 이유인즉 도선국사가 본 이 산의 형국은 입우형(立牛形) 즉 소가 서 있는 형국인데 주변 마을에 사는 선비들은 한결같
이 와우형(臥牛形) 즉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고집했다. 도선국사는 자기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이 선비들에
게 전달되지 않음을 얹잖이 여겨 그 쇠를 깨부셨다는 것이다. 선비들이 굳이 이 산을 와우형으로 고집한 것은 와우형은 평안하
고 행복한 소를 상징하는 반면 입우형은 고달프고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 마을을 상징하는 와우
형을 선비들은 고집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해철산은 이 서있는 소가 한밭의 넓은들 판을 휘갈고는 안영리의 소막으로 되돌아와 우뚝 서 있는 형국인 것이
다. 소가 밭을 갈려면 긁쟁이보다는 쟁기가 더 날렵하고 효과적인데 이 해철산의 줄기가 복수동의 뒷산 까지 뻗어와 원안영
을 감싸 꼬불아 들었다. 그런데 이 끝 자락을 자세히 관철해 보면 마치 쟁기날처럼 생겼으니 해철산에서 내려온 줄기는 쟁기
의 채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 봉우리를 최근에 이득우를 비롯한 몇몇 문우(文友)들과 지방유지 및 동민들이 뜻 을 모아 쟁기
봉이라 명명하고 성대히 명명식(命名式)을 거행한 바가 있다.
청소바위, 검바위, 쪽바위, 아들바위…
안영동에는 청소바위, 검바위, 쪽바위, 아들바위가 있고 사정동에는 멱바위가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삼암지간(三岩之間)에 가활만인(可活萬人)이라 즉 세 바위 사이에 만인이 편하게 살 길(吉)한 땅이 있
고 또 안영이라는 지명이 영원히 평안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 예언대로 이 곳에는 대전광역시 중구에서 최근에 조성한 뿌리공원과 장수촌 (실버토피아)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앞
으로 이곳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계획이니 안평영원(安平永遠)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억측컨대 이곳의 삼암(三岩)이란 검바위 멱바위, 아들바위를 이름일 것이다.
이 안영동에는 오리골재, 정림재, 소통골고개, 선골재, 샛고개, 부엉재, 성재 등의 고개가 있다. 오리골재는 원안영에서 아랫정림
동인 수밑들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그길이가 오리 (五里)나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림재는 원안영에서 윗정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소통골고개는 도장굴에서 정림동의 모샛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킨
다.
선골재는 안영동에서 서구 괴곡동의 선골(仙谷)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이 고개에는 옛 선인들의 애환과 숨결이 담겨져 있다. 얼
마전까지만 해도 서구 장안동의 장태산 나무꾼들이 나뭇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어 한밭장에다 팔고서 돌아갈 때면 허기진 배
를 막걸리 한잔으로 달래면서 지게작대기를 두드려 홍을 맞추며 홍얼거 리던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는 고개이다. 이 고개
를 안영동사람들은 선골재라 부르지만 반대로 선골사람들은 안영고개라불렀다.
샛고개는 검바우에서 진산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 바로 너머에는 진산땅 구만리가 있다.
부엉재는 달리 부흥재라고도 부르는데 부흥동에서 침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컫는다. 부흥동에서 넘어가는 고개라 하
여 부흥고개라 했는데 지금은 남부순환도로의 개설로 없어졌다.
성재는 창명의 뒤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사정동이 나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전에서 안영동으로 들어가
는 동구에 보를 막아 복수동과 버드내 일대의 들에 물을 적시는 관개시설을 해놓았었는데 이에 따라 이곳을 문문 다리라고불
렀다.
검은 바위골은 안영동 새마을 회관 부근 일대에 남북으로 나 있는 골이며 꽃밭골은 신봉 앞산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수바우(청수바위)는 원안영 동쪽 유등천변에 자리한 바위이며 아들바위는 안영동에서 금산군 진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시계
에서 냇가를 따라 올라가면 산비탈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킨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가 이 바위에 찾아와서 열
심히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아들바위라고 한다.
아들바우 밑, 대전시 청소년 수영장이 있는 산기슭에 부처당이 있다.
이 부처당은 고려시대부터 바위밑에 부처를 모셔온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언젠가 이 곳은 석굴암처럼 인공으로 바위굴
을 만들어 그 안에 부처를 모시고 불공을 올렸던 곳이다.
안영팔경 중 암하석불(岩下石佛)이라 읊은 곳이 바로 이곳인데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자연보호운동의 일환으
로 그 암자가 철거되었다.
안영동은 유등천이 중간쯤에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마을이 크게 동서로 나뉘어져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이겠지
만 일제 강점기에 동쪽 마을에는 공교롭게도 조병옥, 이승만 등의 이름을 가진 마을의 유지들이 살았고 서쪽 편에는 김일성, 박
헌영 등의 이름을 가진 유지들이 각각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면서 농을 곧잘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이
미 죽었지만 해방 이후에 마을 전체의 합동회의가 열릴 때에는 농담반으로 이 회의를 남북 협상회당이라 했다고 이 마을 촌로
들은 전한다.
중구마을 유래와 전통의 숨결 안영동(安永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