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여운형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4. 12:12
한국인물기행 여운형
2024.05.20. 14:36조회 21
*. 중립화 노선으로 민족통일 추구, ‘여운형’(1886~1947)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95]( 1991. 12. 29. 한겨레신문 연재, 이주헌 글)
지난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양쪽 총리가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남북은 분단 이래 처음으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통일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온갖 영욕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 정치사 속으로 사라져간 인물 가운데 아직도 수다히 가슴 졸일 장애를 앞두고 있는 이 합의를, 가장 가슴 뿌듯이 지켜볼 사람은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을 우선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외세의 원심력과 이념의 갈등으로 민족이 갈리는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다가 바로 그 이유로 마침내 한 극우청년이 쏜 총에 맞아 스러졌다. 최근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통일 기운이 싹터옴에 따라 그의 삶과 사상, 정치노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융합의 정치인’ 평가
몽양의 인물 됨됨이와 정치성향을 평하여 ‘영원의 청춘’‘융합과 포용의 정치인’‘진보적 민족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인간적 민주적 사회주의자’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노선이 중도적인 민족자주노선이자 중립화노선으로 “역사적 회고에 그치지 않고 장차 민족통일의 새로운 정치 노선으로 재정립돼야 할 것”(권두영 민족통일연구소장)이란 데 있다.
최근 들어 활발한 그에 대한 조명은 몽양 여운형 선생 전집 발간위원회의 <몽양 여운형 전집>과 심지연 교수(경남대)의 <인민당연구> 출판으로 나타났고 앞으로 강덕상 교수(일본 닛교대)의 <여운형 전기>, 이정식 교수(미국 펜실베니아대)의 <8·15와 여운형>, 심지연 교수의 <여운형 노선 연구> 등이 출간되는 것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몽양전집 발간위 편집간사 여현덕씨(연세대 박사과정)는 “비록 4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제 남북화해가 시작되고 있으므로 지금이 바로 몽양이 조명돼야 할 시기이며 그의 업적이 새롭게 빛날 수 있는 시기”라며 “어쩌면 몽양은 시대정신의 면에서 40~50년을 먼저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몽양은1886년 4월 22일(음력)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아버지 함평 여씨 정현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내고 자유당 선전부장과 민주공화당 고문을 지낸 여운홍씨가 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몽양은 조부 여규신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구한말 중국 정벌을 내세우고 결사를 꾸미다 유배를 갔다온 조부의 웅지를 그는 늘 높이 우러렀다. 이를테면 자주정신을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셈인데 이런 자주정신은 그의 항일독립운동 이력과 맞물려 후일 3·8선을 가르며 남북에 진주한 미국군과 소련군에 대해 그로 하여금 철저히 합리적이면서도 주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미·소와 주체적 관계 유지
“나는 연합군에 대한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하우두 유 두’라 인사할 것이고 둘째번에는 ' 탱큐’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것이고, 셋째로는 ‘굿바이’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런 자주노선은 해방공간 당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의 국제노선과 잦은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해방 전후 몽양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이란씨는 “몽양이 박헌영과 만나 ‘지금 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독재보다 민족의 단결과 통일정부 수립을 통한 독립국가 건설 그리고 외세 축출이 급선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회고한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15살 때 서울에 올라온 여운형은 배재학당`·흥화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는 14세 대 용인 유세영씨 장녀와 결혼했다. 4년 만에 사별한 그는 충주군의 진씨와 재혼했는데 이후 최근 북한여성대표로 남쪽을 찾은 려연구씨를 비롯해 4남3녀 7남매를 슬하에 두었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개화사상에 눈떠 이듬해 노비문서를 불살라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상투를 잘라 봉건인습과의 단절을 꾀했다. 문중 소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여운형은 한일합방 다음해인 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4년에는 중국 난징으로가 이후 3년간 금륭대학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복국으로 송환되기까지 그의 중국시절은 그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자라나는 성장의 시기이자 국제정세의 흐름과 역학관계를 몸으로 파악, 후일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균형감각을 갖도록 밑거름이 되어준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두루 가입해 국공합작에 적극 협조하면서 그는 민족혁명에 있어서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일제는 후일 좌우분립과 분단의 단초가 될 지배방식이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금릉대학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들어간 여운형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을 역임했다. 그 전해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당수로 취임했으며 20년에는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해 21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만든 것은 그해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보내고 이듬해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 조선독립을 요구하도록 하면서 조선민중의 의지를 대표할 명분있는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력 확보 필요성 느껴
김규식의 비설실장을 지낸 송남헌씨는 “몽양의 활동은 3·1운동의 상황요인이 아닌 원동력”이라며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를 국내로 파견해 만세 전 민족대표 등과 연락하게 해놓고 몽양 자신은 만주·베이징 등을 돌며 동지들간의 연락을 취해 3·1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 피압박민족 대표자대회에 참석해 레닌과 요담하고(1921년), 중국 국민당의 쑨원, 공산당의 진독수 등과 교유를 맺으며 ‘한중호조사’를 조직하는 등 정치적·외교적 활동에 중점을 둔 독립운동을 펼쳤다.
29년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돼 조선으로 끌려와 30년 4월 경성지법서 3년형을 언도받고 32년 7월까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한 그는 석방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망명정치가의 딱지를 떼고 조선땅 안에서 합법·비합법 공간을 활용한 항일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조선중앙일보>는 36년 8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돼 이때 몽양도 사장직을 물러났다).
시국은 더욱 암울해갔다.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변절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지하로 잠적한 이 시기 조선체육회장 등 명사로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놓고 활동하면서도 그가 드센 전향압력과 친일 회유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 감화력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 때문이었다.
이란씨는 총독부를 어르고 뺨치며 그 요구를 들어줄 듯 하다가 결국에는 미꾸라지처럼 빠지는 몽양의 정치수완을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는 유도 기술 같은 것”이라고 평한다.
이런 그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은 후일 우익쪽으로부터 “친일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공개적 활동을 할 수 있었느냐”는 조작된 비난을 듣는 원인이 된다.
어쨌든 일제시기에 꿋꿋이 정도를 걸으면서도 꾸준히 그물망 같은 지하조직을 형성, 44년 건국동맹(맹원1만명)·농민동맹을 결성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띄울 수 있었던 몽양의 능력은 그가 탁월한 적응력을 가진 항일운동의 지도자요 동시에 대중정치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해방 뒤 해외에서 활동하던 이승만·김구 등이 속빈강정식의 화려한 허명에 싸여 귀국한 것과는 달리 몽양은 국내에서 민중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인정받은 지도자로 자신을 키웠던 것이다.
몽양은 건국동맹 결성 당시 3·1운동의 교훈도 있고 하여 독립을 준비하되 무장력의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현역장교로 복무하던 박승환은 특히 몽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지시에 따라 만주군 사이에 건국동맹원을 포섭하고 이 무장력의 군대편제를 계획하는 등 몽양의 구상을 핵심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신용하 교수(서울대)는 몽양의 이런 무장력 확보 의지가 국내진공계획까지 이어져 있던 것으로 파악한다.
국내에 있으면서도 무장력을 확보, 일본패망이 다가올 때 이를 활용해 독립국가를 조속히 이루는데 필요한 국제적인 명분을 얻을 생각으로 꾸민 정치적 계획이었던 것이다.
일제 총독부서 치안 맡겨
45년 8월15일 마침내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조선땅에서 물러나야할 운명을 맞은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하루 전날인 14일 여운형에게 조선의 치안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제가 여운형을 치안을 맡길 핵심인물로 선정한 것은 그가 최후까지 투옥될 만큼 (42년말 그는 다시한번 투옥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대중운동과 관계가 있어, 일반 대중한테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15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돼 여운형은 위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던 건준은 정치범을 석방하고 8월말까지 전국에 지부로 인민위원회를 1백45개를 세우는 등 활발한 치안·통치·선전 활동을 벌였는데, 남쪽에서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고 말았다.
통일전신이 아니면 한민족의 미뤄져온 역사적 과제인 근대민족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좌우합작에 주력한 그였지만 그러나 몽양은 결국 미·소 분점 아래에서의 한반도의 역사를 ‘교정’하지는 못했다. 통일민족국가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에 총역량을 쏟은 좌우 사이의 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졌을 뿐 아니라 때맞춰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정착돼 가는 실정이어서 그의 중도좌파로서의 입지가 점점 부식돼 갔기 때문이다. 몽양이 암살된 해인 47년이 본격적인 냉전체제가 시작되는 해임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속에서 그가 안은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미군이 아직 진주하기 전인 45년 9월6일 건준이 모체가 된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이승만이 주석으로, 여운형이 부주석으로 추대됐다.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그해 10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해 총재로 취임했다.
인민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민주주의 민족전선, 미소공위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노선을 같이하는 등 좌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주류파는 온건성이 강했다.
극우청년 총에 맞아 피살
이때부터 얼마 안되는 세월이지만 그는 10차례에 가까운 테러를 받아가며 죽기까지 좌우합작·통일전선을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쏟았다. 몽양은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의 한사람으로 선출됐다.
45년말~46년초 신탁통치 찬·반으로 좌·우익 간의 격한 대립을 보이던 정국이 46년 3월 열린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기대로 잠시 잦아드는 듯하다가 공위가 결렬되면서 다시 정국은 마찰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재개된 미·소공위가 성공하도록 노력하는 등 좌우합작운동에 계속 헌신하던 여운형은 47년 7월 1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단정을 지지하는 극우 청년 한지근이 쏜 총에 맞아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좌우합작이 점점 어려워가면서 주위의 측근들에게 “나는 결국 죽을 거야. 그렇지만 죽더라도 분단은 막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내뱉곤 했다는 그의 ‘예언’처럼 그는 분단의 제물로 사라져 간 것이다.
40여년 뒤 통일을 위한 남북의 노력이 조금씩이나마 구체화되면서 과거의 통일노력 유산을 새삼스럽게 재조명하게 되기까지는 그의 노력은 그렇게 포말로 부서진 채 흘러 다녀야 했던 것이다.
2.
우리 민족운동사에서의 여운형의 투쟁은 1944년의 건국동맹 결성을 고비로 그 전기와 후기로 대별할 수 있으며, 그 전기는 또 1929년에 일본경찰에게 잡히어 국내로 압송되기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그 투쟁의 역사를 일일이 회고할 수 없지만, 국내외 투쟁을 통해 선생은 언제나 최전선에 위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인들의 감옥에서 석방된 선생이 조선중앙일보 사장과 조선체육회 회장이란 합법적 위치에 있던 1934년경 국내공작을 위해 잠입하는 조선의열단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이 선생과 접선하라는 지령을 받고 온 사료들이 남아 있었다. 선생의 경우 합법적∙표면적 위치란 비합법 투쟁을 위한 보호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사의 분단된 오늘 및 통일될 내일과 관련하여 선생의 투쟁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역시 건국동맹 조직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1944년을 국내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알 수 있습니다만, 이 시기에 선생과 같은 지명도 높은 사람이 반일조직이나 항일조직을 만든다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건국동맹은 극비리에 좌우익 통일전선으로 조직되었고 국내 조직을 확대해 가는 한편 중국 연안의 독립동맹 및 중경 임시정부와의 통일전선을 추진했다.
건국동맹은 가혹한 일제의 파쇼체제 아래서 항일운동단체로 조직되었다는 점에도 큰 의미가 있지만, 우리 민족해방동전선의 통일전선을 지향한 단체였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민족의 해방을 한층 더 가깝게 전망한 이 시기의 전체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정치적 통일과 군사적 통일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고, 건국동맹도 바로 국내 좌우익전선의 통일과 해외전선과의 통일을 지향하면서 조직되었다.
일제의 단말마적 탄압 아래서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투쟁하였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아무 거리낌없이 전체 조선의 치안권을 이양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는 그야말로 백두산 아래서 한라산 아래까지 전국적으로 성립된 140여 개 지방인민위원회의 지지를 받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미군의 진주에 대비하면서 좌우익 통일전선정부로서의, 그리고 장차 실시될 총선거를 담당할 임시정부로서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진주한 미군이 인정하지 않는 속에서도 조선인민공화국과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신탁통치 문제로 정국이 분열되고, 민족분단으로 나아갈 조짐이 보이자 ‘인공’과 ‘임정’을 합작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이 노력이 실패하게 되자 몽양은 좌익통일전선체라 할 수 있을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전’과 우익의 ‘독촉’이 대립하여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전망이 흐려지게 되자 선생은 다시 김규식 박사와 함께 남북통일과 좌우익 통일전선을 통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이라 할 수 있을 좌우합작운동을 펴나갔다.
일제 시대 말기의 우리 민족해방운동사를 뒤돌아보면, 몽양의 건국동맹이 전체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전선을 지향한 것과 같이 ‘만주’에서 성립된 조국광복회도 민족적 통일전선을 지향했고, 임시정부는 우익의 한국독립당과 진보세력의 집결체였던 조선민족혁명당,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의 통일전선정부가 되었다. 여기에 연안의독립동맹가지 합류하여 일제 패망 후에는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할 기반이 성립되어갔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패망은 38선 획정과 함께 왔고 이를 계기로 좌우익의 대립은 심화되어갔으며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 추진되던 통일전선운동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몽양을 중심으로 추진된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민주주의 민족전선운동과 좌우합작운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러나 대단히 불행하게도 우익의 일부는 분단국가 수립을 공언하고 나섰고 그 다른 일부는 좌우합작에 소극적이었으며, 좌익은 좌익대로 ‘혁명노선’을 강조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몽양은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몰리면서 몇 번의 테러를 당하다가 기어이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몽양의 죽음은 좌우합작운동의 종말이었고 또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종말이었다. 다음 해에 우익의 일부도 참가한 남북협상이 열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무엇보다도‘8∙15공간’의‘사실’들이‘역사’로서 승화되면 될수록 전국적 지방인민위원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국좌주의∙극우주의을 피한 진보노선, 평화적 통일민족국가 수립노선으로 압축될 수 있을 몽양의 정치노선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이 점덤 부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노선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남북한을 막론하고 그 집권층에 의해서까지 내세워지는 비무력∙비혁명∙비흡수 평화통일노선으로서 되살아나고 있다.
3. 여운형론
… 여운형! 이 이름은 오늘 우리 민족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의 일구수 일투족이 우리 민족 재건에 있어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자 없으리라! … 여운형씨는 경기 양평 출신으로 부유한 양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호방한 성격이 있어 항상 승마와 운동 경기를 즐겼으며, 양반으로의 예절보다 평민적인 활동을 즐겼다. 그리고 남다른 의협심과 뜨거운 동정심을 소유하고 있어 그가 집을 떠날 때는 자기집에 예속된 종과 머슴을 일체 재산을 주어 해방시킨 일이 있다. 여운형씨는 1913년 일제의 합박 밑에서는 그의 호방 불패(不覇)의 생애를 가질 수가 없어 고국을 탈출하여 만주로 나아갔다. 이 땅에서 그는 조국 광복을 획책하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 만주의 온갖 사정은 그의 장지(壯志)를 이해하고 협력할만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의 실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결의 밑에서 남경으로 가서 금릉대학을 졸업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상해에 가서 모 서양인이 경영하는 서점에서 고용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기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종소리가 높아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여운형씨는 온갖 탈을 벗어버리고 민족 해방의 전면에 나섰다. 1919년에는 김규식씨와 더부렁 파리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도록 계획하여 김규식씨를 파리에 파견하였다. 이것이 조선민족 해방을 위한 씨의 거대한 구상의 첫 시험이었다. 그 뒤 여운형씨는 곧 시베리아로 갔다. 연해주 해삼위에서 영문으로 조선독립선언문을 만들어 각국에 산포하였다. 그리고 일크스크에 가서 이동휘씨 등의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였으며 그리하여 이동휘씨 등 선배 및 혁명 동지들을 이끌고 상해로 돌아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 1921년 여운형씨는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서 출석하여 조선의 실정과 조선민족의 자주 독립에의 욕구를 토파(吐破)하였다. 이때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요, 세계 혁명의 모범자인 레닌을 회견하였는데 씨에게 있어서는 이 회견이 생애를 두고 망각할 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고 씨는 늘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씨는 모스코바에서 과세하고 1922년 봄에 상해로 돌아왔다. … 1925년부터 씨는 중국 혁명에 참가하였다. … 1929년 봄에 여운형씨는 남양군도(南洋群島)의 민족들의 요청으로 방문 여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싱가폴, 마닐라, 자바, 수마트라 등 각 중요 도시를 역방(歷訪)하면서 영어로 약소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연을 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씨의 영웅적인 활동은 일본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1929년 7월에 상해로 돌아오자, 일본 영사관 경찰은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7월 11일 상해 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다가 드디어 체포되었다. 씨는 경성을고 압송되어 1930년에 3년간의 징역을 선고받고 대전 감옥으로 이감되어 형기를 마쳤다. 옥중의 씨의 일상 생활을 독서삼매(讀書三昧)이었으며, 모범수이었다 한다. 1932년 출옥하자, 씨는 당시 중외일보의 사장으로 추대되어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편, 씨가 좋아하는 체육 방면에 큰 공로를 끼쳤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표면적인 일이요, 씨는 조금도 쉬지 않고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여 반일 사상의 고취와 조선민족 해방에 대한 이념의 선전에 분망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략을 개시한 이래 일본 정부의 씨에 대한 유혹과 위협은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근위(近衛)와 동조(東條)는 두차례나 여운형씨를 초청하여 장개석씨와의 교섭을 청하였으나, 씨는 시종일관하게 거절하였으며, 투옥과 학살로서의 위협에도 불굴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1940년 동경서 돌아오던 길에 씨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7개월간을 무서운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다. 1943년 봄부터 여운형씨는 동지를 규합하여 건국동맹을 지하공작적으로 결성해가지고 동지들을 전국 각처에 파견하여 동지 획득과 대중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러는 동안 징병 학병 등이 있어 총독 당국의 유혹과 권고와 위협이 있었으나, 그리하여 모든 지사들이 절개를 폐리(弊履)처럼 버리고 대일 협력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도 여운형씨는 끝끝내 고절(高節)을 지키고 불응하였을 뿐아니라 건국동맹을 적극 추진시켜 한편으로 건국방략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외 혁명 단체와 연락하여 내외 호응으로 일대 반일 투쟁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시켰으며, 그리하여 사건의 단서가 발각되어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등 그 화가 씨 자신에게 미칠 위험의 전야에 8월 15일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도 악랄하고, 오만하던 일본제국주의자도, 패전 민족의 신세가 됨에 참으로 못나고 비겁한 자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8월 15일 정무총감 원등(遠藤)은 어제까지 얼르고 달래고 마음대로 모욕하던 여운형씨를 초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등이 일본인의 생명 보호를 애걸함에 여운형씨는 (1) 감옥에 있는 정치범 직시 해방, (2) 청년 학생의 자치대 결성, (3) 정치적 활동의 자유, (4) 3개월간의 식량의 확보 등 4개조를 조건부로 응락하고 돌아오는 길로 동지들로 하여금 자치대를 조직 활동케 하는 한편, 감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혁명가들을 맞아 지하에서 조직되었던 건국동맹, 공산주의 제 그룹 등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탄생시켰다.
해방의 감격에 휩쓸린 인민 대중의 앞에 나타난 여운형씨는 그야말로 민족의 거상(巨像)이었다. 인민의 환호는 이 노투사를 최고의 민족 지도자로서 아낌없이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씨는 인민의 거화(炬火)로서 그의 족적에는 인민 대중이 따라, 불과 한달여에 전국의 각군 지부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건준이 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자, 씨는 겸허하게도 그 최고의 지위를 해외의 망명가에게 돌리고 자기는 부주석에 나아갔다. …
-金午星, ‘指導者群像’ 여운형론, 大成출판사, 1946
블로그/카페 공유수0
클린봇이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
댓글
댓글을 입력하세요
hanjy9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