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혈 보관' 인기속 주목받는 인체은행] 누구나 ‘10억 만들기’의 꿈을 꾸는 세상이고 보니, 나면서부터 은행통장 하나쯤 없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엔 돈 맡기는 은행만 있지는 않다. 이 은행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도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이용할 수 있다. 이자가 붙지는 않지만 대신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바로 사람의 신체 일부를 보관해 주는 곳, 인체 은행이다.
자기가 스스로 쓰기 위해서, 또는 병든 다른 사람을 위해 세포나 조직을 맡겨두고 받아쓸 수 있는 은행들이다. 인체 은행의 종류와 쓰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나 태어났어요"- 제대혈은행
인체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은 탄생 그 직후다.
자궁 속 엄마와 나 사이를 이어주던 탯줄 속 혈액인‘제대혈’의 보관은 요즘 ‘가장선호하는 출산 선물’로 꼽힐 정도로 인기다.
제대는 탯줄의 한자어. 100㎖에 불과한 이 혈액에 뼈(골수)보다 5~10배 높은 농도의 조혈모세포(혈액을 만드는 세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조혈모세포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치료 수단이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 배꼽쪽 탯줄을 끊고 바늘만 꽂으면 1분만에 혈액이 멸균 백에 담기고, 처리과정을 거쳐 냉동된다.
우리나라 첫 제대혈은행은 1997년 성모병원에 생겨 골수이식처럼 무상 기증하고 필요한 환자에게 제공됐다. 하지만 최근엔 자기 아기에게 병이 날때를 대비한 자가 제대혈은행 업체가 10여개 생겨 성업중이다. 15년 보관에 150만원 정도 든다. *희귀 혈액 - 적혈구은행
:성인의 혈액도 예치한다. 조혈모세포 때문이 아니라 수혈해야 할 때를 대비해서다.
*"아이를 맡깁니다" - 정자ㆍ난자ㆍ수정란은행
:2세를 낳기 위해 정자와 난자, 수정란 등 생식세포를 예치하는 곳이다.
*정자가 없는 남성 불임환자를 위한 - 공공 정자은행
:남의 정자를 받아 수정했더라도 엄마의 유전자는 물려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입양보다 선호하는 부부를 위한 것이다.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 조직은행
:시신에서는 세포가 아니라 조직을 얻는다.
*아픈 세포들 모여라 - 연구용 은행
:사람에게 직접 쓰이진 않지만 질병 연구를 위한 은행도 있다.
[기적의 인체] 살아 생전 돈을 내고 자기 세포를 보관하든, 기증을 하든, 인체 은행의 목적은 단 하나다. 바로 생명을 예금하는 것이다. 건강한 정상인에게는 신체가 꾸미는 대상일 수 있으나, 병자에겐 인체 은행에 보관된 신체 일부가 곧생명이다.
"버려질 탯줄이 생명을 구하다" 백혈병 환자인 예은(14ㆍ가명)이는 한달 전만 해도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지난해 3월 처음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항암치료를 계속해 왔지만 완치수단인 조혈모세포 이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은이에겐 언니도, 동생도 있었지만 모두 조직적합성 항원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국조혈모세포은행과 일본의 은행까지 훑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얼마나 황당했는지요. 무슨 생각이 들었냐구요? 지금이라도 예은이 동생을 하나 더 낳아야겠다는 것뿐이었어요.”
그러고 보면 예은이 엄마 박모씨는 한번도 절망한 적이 없었다.
동생을 낳아서라도 예은이를 고치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시간이 기다려 주기만을 기도했던 것이다.
희망은 이럴 때 찾아왔다. 바로 이름 모를 아기들이 남겨놓은 제대혈이었다.
제대혈엔 골수보다 많은 조혈모세포가 들어있어 백혈병 치료에 효과적이나 예은이는 뒤늦게 발병한 경우라 제대혈의 양이 부족했다.
주치의인 삼성서울병원 구홍회 교수는 2명의 제대혈을 동시 이식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제대혈은행에서 조직적합성 항원 6개 중 5개가 일치하고, 혈액형이 B형인 제대혈 2개를 찾아냈다.
예은이는 국내에서 소아에게 2명 이상의 제대혈을 이식한 첫번째 사례다.
“사실 괜히 연구대상 노릇만 하는 게 아닐까 너무나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치료엔 다 처음이 있다’는 의사선생님 말씀이 큰 힘이 됐지요. 지금은 얼마나 잘 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요. 하나는 남자아이, 또 하나는 여자아이의 제대혈이래요.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냥 버릴 탯줄로 한 생명을 살리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제대혈 이식 47일째, 예은이의 백혈구 수치는 3,100(정상 4,000)으로 회복됐고 별다른 부작용도 없다. 약 때문에 식욕이 당겨 볼살이 붙은 게 내심고민이라면 고민이다. 힘든 치료과정을 겪은 예은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젠 괜찮아요”라며 휴대폰 게임에 빠져들었다.
(2004. 05. 20.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