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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연개소문 -4천년 역사에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
익명 추천 0 조회 35 08.01.06 23: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개소문 -4천년 역사에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

국정브리핑|기사입력 2005-10-04 13:41 |최종수정2005-10-04 13:41
 
<당태종을 추격한 고구려>

당태종이 비단을 양만춘에게 주고 퇴각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당태종의 행보에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당태종이 선정한 퇴각로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과 고구려의 쟁패지로 볼 수 있는 요하(遙河)는 발해만(灣)으로 들어가는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진다. 요하 하류는 지금도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해서 곳곳에 자연 늪이 생길 정도이다. 대와시(大洼市)라는 지명도 늪지의 갈대라는 뜻에서 유래했고 곳곳에 못이 많아 이 지역을 요택(遙澤)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둑이 없었으므로 요하 하류는 전체가 늪지대였다.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 당시의 상황이 잘 설명돼 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황제는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니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당 태종은 (원정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전략은 청야(淸野) 전술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이 성 밖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도록 들판을 모두 태워버리고 산성 안으로 들어간 후 길목의 요지마다 쌓은 성을 이용해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이런 전략을 잘 알고 있는 당나라는 수군을 활용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채택했다. 육로로 돌파하기 힘든 요하전선에 수군을 이용하면 많은 군사와 군량미를 운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시성 전투 당시 당나라군은 요동반도 아래에 있는 비사성을 공격했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비사성은 고구려 해안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동서의 바다를 감시할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 당나라 수군이 제일 먼저 비사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배를 정박시켰다. 비사성을 교두보로 선택하고 곧바로 압록강 어귀로 향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당나라 수군, 고구려 수군에 저지 의미

연개소문.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에 수륙양면 작전을 일찍부터 예상했고 또 그의 작전대로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침공에 나섰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그 후에 당나라의 수군의 역할을 적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당나라 수군이 고구려 수군에게 저지당했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에 따르면『구당서』에 고구려군 만여 명이 오호도(烏胡島)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호도는 당이 요동반도 길목에 만든 여러 수군기지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고구려의 수군이 당나라의 수군을 격파하거나 적어도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들었음을 시사해준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의 기록도 이를 증빙하는데, 자치통감에는 '645년 11월 수군 총관 장문한을 참수했다', 신당서에는 '수군 책임자 장량을 옥에 가두었다'고 적혀있다.

이와 같이 당나라 수군 책임자들이 전쟁 후 모두 처벌된 것은 이들이 고구려의 수군에 완전히 격파 또는 봉쇄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당나라 수군 비사성서 봉쇄…늪지대 건너 퇴각

그 당시의 시나리오는 안시성 전투 당시 북쪽에서는 고구려 육군이 당나라군을 압박했고 수군은 비사성 일대에 주둔한 당나라 수군을 철저히 봉쇄했다. 결국 이와 같은 여건 때문에 당태종이 늪지대인 요택을 건너 당나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태종이 계속 요택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고구려 군이 보다 공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에는 퇴각하던 당 태종이 만리장성 끝에 있는 임유관(臨渝關)에서 태자의 마중을 받고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만큼 태종의 퇴각이 긴박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당군에 잡힌 고구려 첩자는 막리지(연개소문)가 조양(朝陽)에 올 것이라고 전했다. 임유관 인근에 있는 조양은 중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중국인민대학교의 황 유복 교수는 북경 인근에서 고구려군의 활동을 증명해주는 단서로 당나라 군사의 창고였던 황량대(謊糧臺)에 주목한다.

황량대는 하북성 풍윤현 평원에 솟아오른 모래언덕 위를 말하는데 그곳은 당나라군이 고구려 군을 속이기 위해 만든 가짜 양곡저장지로 임유관에서 북경 인근까지 모두 10개가 있었다. 당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 권 안에 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황 교수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 군이 활동하던 곳은 북경 근처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는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들어갔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게 북경이 결코 먼 땅이 아니었다.

고구려군 이미 북경서 1시간 거리 고북구까지 진출

고구려군은 이미 북경에서 1시간 거리에 불과한 고북구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들은 서기 49년인 5대 모본왕 때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다. 또한 광개토대왕 때에도 고구려가 어양을 공격한 적이 있다. 신채호는 북경 인근의 순의현(順義縣)에 고려영(高麗營)이라는 표시가 많은데 그곳이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북경 순의현지'에는 고려영의 유래가 당나라 때 고구려인이 이주해왔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군의 주둔지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구려  군이 만리장성 너머 북경까지 당 태종을 추격한 것은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당태종의 침입경로와 고구려의 대응, 당 태종의 비정상적인 퇴각로는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중국 중원까지 추격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로 알려진 당 태종이지만 고구려 원정에서는 처절한 참패를 당한 것이다. 원래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처음부터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자치통감에는 이 당시 신하들의 반대 이유가 적혀있다.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 수송이 어렵고 고구려인들은 수성(守城) 전술이 뛰어나 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당태종 유언 "고구려 공격 그만두라"

그러나 645년 고구려에 침공했다가 철저한 패배를 당하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태종은 연개소문에게 당한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2년 후인 647년 이세적 등을 시켜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다시 설만철을 시켜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역시 실패한다. 드디어 649년 5월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고구려 공격을 그만두라(罷遼東之役).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당태종의 사망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단재는 '구당서', '태종본기', '신당서', '자치통감'에 나오는 당 태종의 사인(死因)이 서로 다른 것을 역사 왜곡의 증거라고 설명했다. 당 태종의 사인을 내종(內腫), 한질(寒疾), 이질(痢疾)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적었는데 황제의 죽은 병을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게 기록한 것은 고구려인의 화살에 맞은 치욕을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라는 주장이다. 특히 요동에서 얻은 병 때문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는 양만춘의 화살의 여독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고구려의 우환은 백제신라가 아니므로 당나라를 공격하자〉

안시성의 혈투 기간 동안 성주는 양만춘이었으므로 그가 당나라군을 격퇴한 장본인이지만 당시 당나라와의 혈투를 총지휘한 사람은 연개소문으로 연개소문이 진정한 안시성 대첩의 승리를 갖고 온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그러나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100만 대군에 맞서 승리한 고구려의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하여 수백의 대신들을 죽이고 665년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한 마디로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군림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부친인 동부(東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자리를 잇게 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소문은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있어 보아서 만일 불가한 일이 있으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간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가엽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뒤를 이은 개소문은 여전히 흉악무도함으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비밀히 의논해 죽이려다가 일이 누설되었다. 연개소문이 휘하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꾸미고 성의 남쪽에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대신들을 초청했다. 그들이 오자 모두 죽이기를 백여 명이나 하고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고 몇 토막으로 잘라 개천 속에 버렸다.’

박작성 전경,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당태종은 철저하게 공격했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현재의 장성은 명나라때 재건축 됐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간교한 꾀로 대인들을 모이게 한 후 왕과 함께 죽이고 그 시신을 토막 낸 희대의 악한이다. 그가 정변을 일으킨 것도 그의 흉폭한 성격을 두려워한 국왕과 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한 데 대한 반발에서였다.

‘개소문은 전국을 호령하고 나라 일을 제멋대로 하며 위엄이 있었는데,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 좌우 사람들이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는 항상 귀인무장을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고 출행할 때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벌여서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구렁텅이나 골짜기라도 가리지 않고 달아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고구려, 당에 화평 VS 강경 세력 양립

그런데 이들 설명이 퍽 과장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몸에 칼 다섯 자루와 숫돌을 차고 다녔다는 '학원'의 일반적인 남자들 복식 묘사에 비추어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살던 당시의 특별한 세계 정황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위로는 당, 아래로는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중에서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의 대제국이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외교적인 유화책을 유지하여 평화를 구가하자는 세력과 당에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세력이 양립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영류왕은 수나라를 격파한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이다. 그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격파하여 고구려를 지켰지만 을지문덕과는 전략적인 면에서 다소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영류왕은 왕이 되기 전부터 강성한 중국과는 화평을 청하고 신라와 백제를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을지문덕은 수나라가 대 고구려 전 패전과 반란으로 힘이 줄어들었으므로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이를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류왕땐 을지문덕 고립…신라 · 백제 공격

그런데 영류왕이 영양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와 화평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을지문덕을 고립시키고 당나라와의 화평에 앞장섰고 신라와 백제를 줄기차게 공격했다.

고구려를 침공한 당나라 군대, 당태종과 고종은 철저하게 고구려를 분석하고 군을 재편하여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연개소문은 을지문덕과 같이 영류왕의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의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지난날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나라의 땅을 빼앗은 적이 있으나 이제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가 되었으므로, 남쪽에는 견제책을 사용하여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는다면 남쪽의 걱정이 없게 되므로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는 것이 옳다. 서쪽은 우리나라와 언제나 양립할 수 없는 나라이니 이것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왕년에 몇 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했다면 중국을 평정했을 것인데 그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양국 교류 확대…도교 수입 당 국학에 유학생 파견도

영류왕 5년(622) 당은 고구려에 남아 있는 수나라군 포로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고구려는 전국을 수배하여 1만 명의 생존자를 찾아서 송환했다. 물론 이 숫자가 모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641년 진대덕이 곳곳에서 살고 있는 수나라 포로들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들 중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중엔 송환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1만 명이나 됐으면 고구려로서는 대단한 성의를 보인 것이다.

이후 양국의 교류는 확대되어 문화·종교·학문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인다. 고구려는 당에서 도교를 수입했고 당의 국학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고구려의 일급비밀인 지도를 중국에 보낸 영류왕>

영류왕이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 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 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영류왕 11년(628)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고구려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냈다. 왕이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지도를 중국으로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은 모두 분개했다.

고구려 일급비밀 영토지도 당에 보내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고 중국도 이를 두려워 했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인 장손사(長孫師)가 와서 수나라 전사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경관(京觀)을 당장 허물어 줄 것을 요청했다. 경관은 수나라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전몰기념묘지 또는 기념탑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으로 볼 수 있다.

영류왕은 그들의 요청대로 경관을 헐어버린 것은 물론 640년에는 세자 환권(桓權)을 당에 보냈다. 세자의 입조는 고구려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조처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왕이나 세자 혹은 왕자들이 친히 입조할 것을 요구한 것은 장수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이나 세자의 입조는 위험부담도 크지만 그만큼 상징성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연개소문 당나라에 드디어 화친 주장

그런데 고구려는 항상 이를 거절했고 이것이 양국 충돌의 빌미가 되곤 했는데 이 해에 드디어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의 실권자인 연개소문도 당나라와의 화친을 찬성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에게 도교의 도입을 건의하자 영류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사의 파견을 당나라에 청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교는 노자가 당나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것 때문에 당나라 왕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류왕의 요청이 있자 당은 곧바로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의 강론이 고구려 궁전에서 매일 이루어지게 했고 마침내 세력은 불교의 사찰들이 도사들이 머무는 도관(道館)으로 바뀔 정도로 강해졌다. 연개소문이 고구려에 도교를 도입하도록 한 것은 당나라의 비호를 받고 있는 도교를 도입해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가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문화를 당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보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신채호는 이 부분을 거짓이라고 단정했다).

답례사절 진대덕은 고구려 지형 · 산천 염탐 간첩

고구려 영류왕, 태자시절(건무)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왕위에 오른 후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으로 연개소문과 갈라서고 결국 쿠데타로 살해되었다(그림 성병예).
그런데 문제는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초창기 고구려와 평화협상을 벌여 시간을 끌면서 638년부터 토번ㆍ서돌궐ㆍ고창국 등을 복속시킨 후 고구려와 일전을 불사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우선 641년 당은 진대덕을 세자의 입조에 대한 답례 사신으로 고구려에 보냈다. 그런데 진대적의 본 목적은 답례 사절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형과 산천을 염탐하기 위한 간첩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진대덕이 “고구려가 고창의 멸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사신 접대가 매우 후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당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4군(郡)의 땅이다. 내가 수만의 군대를 내어 요동을 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모든 국력을 기울여서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에 수군을 동래(東萊)에 보내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을 합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동 주현(州縣)들이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한다.”

당태종은 고구려와 아무리 평화협상을 하더라도 그것은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으며 제반 여건만 갖추어지면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임 용한 박사는 당태종이 고구려와 화해한 것처럼 제스처를 쓴 것은 중국 내부의 사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태종은 644년 10월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하는데 이는 수양제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지 30여년이 지나서였다.

수양제는 당시 전 국민의 5퍼센트가 넘는 인원을 동원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중국인 특히 고구려와 인접한 산동지역의 주민 일가친척 중에서 이런 상처가 아물려면 적어도 한 세대는 족히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 중국 고구려 침공 파악…영류왕 저자세 강한 불만

아무튼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자 무장 출신의 연개소문은 중국의 간교를 파악하고 영류왕의 저자세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영류왕의 시해사건이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는 것이 근래 학자들의 주장이다.

연개소문도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당나라와 유화정책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당태종이 강경책으로 나오자 그가 제거했던 강경파들을 포섭하여 강경론자들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 무렵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의자왕이 즉위 이듬해인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은 대야성을 함락하고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 내외를 살해했다.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것이 더 유리 판단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 했다. 연개소문은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학자들은 그 당시 만약 고구려가 백제를 적으로 삼는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황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갈 경우 대안이 마땅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는 설명했다.

<쿠데타 아닌 반정>

연개소문이 삼국사기에서 천하의 악한으로 묘사된 데는 편찬자들이 이용했던 거의 모든 자료가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그에게 패한 당나라 인들이 증오심으로 묘사한 연개소문의 모습이다. 특히 중국 송나라 사마광이 11세기 후반에 편찬한 자치통감에 많이 의지했다. 이것은 다음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옥중 사진,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나 독립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자료 snow4343).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은 연씨인데 삼국사기에는 천씨(泉氏)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 측 자료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하남성 개봉도서관에는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 등의 묘지명이 보관돼 있는데 연개소문 일가의 묘소와 묘지명이 출토된 곳은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이다. 그 곳의 묘지명도 한결 같이 성이 천씨이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李淵)이기 때문에 기휘(忌諱) 즉 이를 피하기 위해 연씨를 천씨로 둔갑시킨 것이다. 자치통감은 ‘고려 동부대인 천(泉)개소문이 그 왕을 시해했다. 천은 성이며 개소문이란 자는 혹 개금이라고도 불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당서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삼국사기도 연개소문을 고구려인들이 그린 연개소문의 참모습이 아니라 그의 적이었던 당나라 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신채호 중국 발로 누비며 연개소문 활약상 추적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가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중국 곳곳을 발로 누비며 현지의 각종 전승(傳承)과 비사들을 중심으로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추적했다. 신채호의 결론은 연개소문이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는 설명이다.

연개소문의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쿠데타가 승리한 반정으로 볼 수 있는지 또는 실패한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제26대 영양왕(재위 590~618) 때 수(隨) 문제의 위협에 맞서 수나라를 선제공격했으며, 수문제와 수양제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수나라를 멸망케 했다. 그런데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왕자 때 이름 건무)은 수나라와의 혈전 당시 수나라의 수군을 전멸시키는 등 수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고구려 역시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시급히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내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중국과 전투할 여력이 생길 때까지 당나라와의 화해에 몰두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수궁이 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류왕으로서는 연개소문은 아무래도 자신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으로 명령을 내리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올 때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개소문, 영류왕 · 대신 찾아내어 살해 혁명

하나 이 계획이 누설되자 연개소문은 역으로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180여 명의 대신들을 유인한 후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궁에 있던 영류왕도 찾아내어 살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아우인 보장을 새 왕으로 내세웠다. 이 덕일 박사는 영류왕이 대당 강경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정변으로 대응했으므로 이는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반정’이자 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당태종은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가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 후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고 곁가지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인데,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당 태종은 자신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명분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 이세민에겐 이것은 명분이 될 수 없다.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고 그의 형 건성이 태자였다. 그런데 그는 624년 수도 장안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는 소위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다. 이 쿠데타로 이세민은 권력을 장악했고 당나라를 일으킨 고조를 감금했다가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했다. 친형과 동생을 주살하고 아버지를 몰아낸 인물이 ‘시해’, '도륙‘ 운운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당 태종에 대해 보다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당태종은 성명(聖明)하여 세상에서 드문 왕이었다. 난을 제거한 것은 탕왕ㆍ무왕에 비할 수 있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ㆍ강왕에 가까웠다. 군사를 쓸 때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꾀를 냄이 무궁하여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김부식, 당태종과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 낮추어 적어

김부식이 이러한 시각에서 태종을 평가한 것으로 볼 때 당태종과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을 낮추어 적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하튼 당태종은 645년 안시성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647년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 없이 패퇴했다.

648년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퇴각했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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