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참으로 애매하고 모호한 시대다. 믿지 않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조차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통탄할 일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까지 동원해서라도 자기 욕심 채우기에 바쁜 시대다.
왜곡된 복음의 대표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1."기복신앙"이 있다.
종교라는 이름, 신앙이라는 이름을 동원하여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주장하는 신앙이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 종교이다. 문제는 그 "복"의 개념에 있다. 여기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할 때, 그 복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상황적인 형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예수 믿으면 모든 상황이 해결 될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쪽으로 좋은 쪽으로만 풀려질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주목해 보라.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기를 거부했다. 그런 이유로 감옥에 갇혀야 했다. 이것은 구약의 경우이다. 신약의 경우에 있어서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핍박과 환난을 경험해야 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상황적으로 형통하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 "문제해결"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기도가 도깨비 방망이 인가? 마치 도깨비 방망이 처럼 소원을 빌면, 뭐든지 들어주는 게 기도인가? 기도가 알라딘의 요술램프인가? 그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인가?
물론, 성경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더 하시리라는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지적하려고 하는 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관한 개념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기복신앙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위하여서 종교성을 동원하여 하나님까지 이용하여 자기 소원을 채우려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과는 어긋난다.
2.신비체험을 강조하는 분파가 있다.
특히, 이들은 신비한 체험 그리고 신비한 현상을 강조한다. 물론, 신비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이 사실이고 성경에도 그런 신비한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천지창조, 홍해를 가른 사건, 태양이 멈춘... 등등... 그러나, 그럼에도 신비한 체험, 신비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특히, 방언과 병고침의 은사 등을 강조한다. 기적을 강조한다. 성경에서 나타난 참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것과 관련있음에도 이들은 그것 보다는 신비한 체험, 현상 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일 뿐,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이들은 기적을 강조하지만 이들이 들어야 할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지만 참된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분파 중에는 "오순절 파"가 있다. 그들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 역시 신앙의 본질을 방언, 병고침의 은사등과 관련 시킨다. 즉 어떤 현상과 관련시킨다.
3.극단적인 칭의론이 있다.
이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춘다. 사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사상은 루터신학 이래 아니, 그 이전에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극단적인 칭의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것도 잘못된 의의 개념을 가지고서 그렇게 한 나머지 이제 무죄선언되었으므로 내일 죽어도 천국간다는 여기에 신앙의 본질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신앙의 본질이 "무죄선언됨"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교수는 그의 책,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극단적인 칭의론(무죄선언됨)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그의 책을 통하여 "의"라는 개념이 법정적일 뿐 아니라 관계론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죄선언됨만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법정적 칭의는 잘못이다. (이것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참된 칭의는 "무죄선언됨"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 용서함 받았으므로 이제는 죄를 이기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보다 근원적인 관계론적인 개념에서의 칭의론이다.
따라서, "예수믿고 무죄선언되었기에 이제는 죽으면 천국간다"라고 하는 사상은 단지, 그렇게만 강조되는 사상은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신앙의 본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 나라와도 긴밀하게 관련된다. 주권이라는 개념은 통치라는 개념과도 대치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이 통치라는 개념이 바로 "나라"와 관련된다. 즉,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통치가 아닌 화해의 개념이 빠질 수 없다. 그러나, 아무튼 단순화 하여 말하자면 통치라는 개념이 핵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용어는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다. 기복신앙, 오순절파는 이런 개념이 드물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이 드물다는 것이다.
가령 기복신앙의 경우, 자기가 소원하는 바를 위해서 하나님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키는 것을 기도로 여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은 기도를 자기의 욕심과 소원을 꺾고 즉,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며 하나님 그 분이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그 분의 뜻에 자기를 맞추려 한다. 기도의 내용도 자기 소원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과 관련된다.
분명,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놓친다면 이러한 개념이 빠져 있다면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하나님의 편에서 표현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의 또다른 포인트는 "성화론"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의존, 절대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 그것은 절대의존이며, 절대순종의 삶이다.
우리는 앞에서 극단적인 칭의론에 관해 살펴 보았다. 왜 "예수 믿고 죽으면 무죄선언되었으므로 천국간다는 사상이 신앙의 본질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화의 삶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김세윤 교수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고백하면서 그 분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다. 성경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어린아이 같이 받들지 않는자는 결단코 천국을 볼 수 없다. 여기서 핵심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해라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존하듯 의존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튼, 법정적 칭의에만 머물러서 무죄선언됨만을 주장하며 이제는 죽어도 천국간다는 사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즉, 내세천국의 개념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완성될 천국이 중요하지만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이다.
요한일서의 저자 요한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강조한다. 그 사귐은 영원한 사귐이다.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로마서 12장 이후로는 교리적인 내용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언약" 사상이다.
그 언약의 중심내용이 무엇인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여기에 담겨져 있다. 그것은 "관계성"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삶이요.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주라고 하는 고백이요. 그 분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다 형통한 상황만 찾아오지는 않는다. 상황이 형통치 못하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의심하였고 믿음이 부족하여서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상황을 붙들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오히려 예수 믿고 더욱 상황이 풀려지지 않고 어려워 진 때가 많다. 예수의 제자들을 보라.
복음을 전파하면서 돌에 맞는 사도 바울, 밧모섬에 가 있는 요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하는 베드로... 이것이 복음이다.
아니,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은 데 어째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 그러나 그는 거기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단 말을 "상황적 형통"을 많이 생각하고 예수 믿으면 불가능이란 없다. 예수를 잘 믿지 않아서 믿음이 부족해서 의심해서 이렇게 어려운 것이지... 잘 믿으면 상황도 잘 풀리고 (물질적인)복 받고 순탄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상화은 그와는 반대로 감옥에 갇혀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탄한 상황인가? 예수 믿는다고 다 순탄한 상황만을 만나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상황적 형통이 아니다. 상황이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 하시겠단 말과 대립되는 말이 아니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다는 말과 대립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바로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데서 오는 기쁨...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처럼 주와 동행하기에 자족할 수 있는 마음...
믿지 않는 자들 같으면 너무나도 큰 어려움을 만나 쓰러질 수 밖에 없고 좌절하여 자살을 결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 열매 그치고 논 밭에 식물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른 채 죄 가운데 살았던 태어날 때 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자기 중심적인 사람(바로, 죄인)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그 분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그러한 삶을 가정 가운데 직장 가운데 펼쳐 나가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도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영원한 사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이라는 개념을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