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
러시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출생
1818. 11. 9(구력 10. 28) 러시아 오룔~1883. 9. 3(구력 8. 22) 파리 근처 부지발. 대표작으로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1852)·〈루딘 Rudin〉(1856)·〈귀족의 보금자리 Home of the Gentry〉(1859)·〈전야 Nakanune〉(1860)·〈아버지와 아들 Otsi i deti〉(1862) 등을 남겼다. 1856년부터는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 살았다.
오룔주(州)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領地)에서 출생.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6세나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런 복잡한 가정사정이 한 소년의 비정상적인 첫사랑을 묘사한 중편(中篇) 《첫사랑》(1860)에 그 흔적이 엿보인다. 어릴 때부터 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웠다. 1833년 모스크바대학 문학부에 입학하고, 다음해 페테르부르크대학 철학부 언어학과로 옮겼다. 1836년 대학을 졸업,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작품 번역을 시도하였고, 푸슈킨과도 교유하였다. 1838∼1841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고대어 ·역사를 배우고,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그라노프스키, 바쿠닌 등 진보적인 러시아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1841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수렵을 즐기고, 가을에는 바쿠닌을 찾기도 하였다. 내무부에 근무하면서 발표한 서사시 《파라샤 Parasha》(1843)는 비평가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았다. 43년 겨울 페테르부르크에 온 프랑스 여가수 P.비아르도와 알게 되어 매일 그녀와 만났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그녀와의 친교가 계속되어 그가 생애의 태반을 외국에서 지낸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후일 《문학적 회상》(1869)에서 농노제라는 ‘적’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서유럽에 도피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847년 《동시대인(同時代人)》지(誌) 제1호에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 《사냥꾼의 수기(手記) Zapiski okhotnika》의 제1작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호평에 자신을 얻어 속편을 파리에서 썼다.
계속하여 소설을 발표하였고, 1850년 말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농노를 해방시켰다. 1852년 농노제의 비판으로 당국의 미움을 사, 고골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구실로 체포된 후 고향에서 연금생활도 하였다. 이 무렵 농노제에 대한 증오에 찬 단편 《무무 Mumu》를 집필하였고, 1852년 8월에는 《사냥꾼의 수기》가 출판되었는데, 이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 리보노프는 면직당하였다. 1855년,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1830년대 ·1840년대의 ‘잉여인간(剩餘人間)’을 형상화한 장편 《루딘 Rudin》을 발표하여 장편 작가로서의 지반을 굳혔다. 1858년 무렵부터 파리에 살면서 몰락하는 귀족계급에의 엘레지 《귀족의 보금자리 Dvoryanskoe gnezdo》(1859), 농노해방 전야를 배경으로 혁명적인 청년들을 그린 《그 전날 밤 Nakanune》(1860),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부자(父子) 2대의 사상적 대립을 묘사한 《아버지와 아들 Ottsy i deti》(1862), 망명 혁명가들의 퇴폐를 고발한 《연기 Dym》(1867), 나로드니키의 약점을 찌른 《처녀지 Nov'》(1877) 등과 그 밖에 많은작품을 발표하였고, 1882년에는 조국 러시아와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산문시(散文詩)》를 발표하였다. 파리 교외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서 척추암으로 죽었고, 유언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安昌浩, 출생
1878(고종 15). 11. 9 평남 강서~1938. 3. 10 서울.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포르투갈의 신경학자, 정치가, 현대 정신외과술(精神外科術)의 창시자. 에가스 모니스, 출생
António Egas Moniz (Caetano de Abreu Freire) 1874. 11. 9 포르투갈 아반사~1955. 12. 13 리스본. 몇몇 종류의 정신질환의 근치술로서 전두엽절제술(前頭葉切除術 prefrontal lobotomy)을 개발한 공로로 1949년 월터 헤스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리스본대학교의 첫 신경학교수가 되었으며(1911~44), 뇌혈관조영법(腦血管造影法 cerebral angiography)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발전시켰다(1927~37). 이 방법은 목동맥에 X선 흡수물질을 주입하여 X선 사진을 통해 대뇌혈관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이 기술은 뇌하수체 종양과 같은 두개골 안의 질병을 진단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에가스 모니스는 변질된 분열증·심한 편집증 같은 일부 정신병에서 정상적 정신과정을 억압하는 반복되는 사고(思考) 양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낸 뒤 전두엽과 시상(視床)을 연결하는 신경섬유를 자르면 비정상 사고양태가 보다 정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전두엽은 심리적 반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시상은 뇌의 가운데에 있으며 감각신호를 중계함). 1936년 그와 그의 동료 알메이다 리마는 전두엽절제술을 시술했는데 정신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인간대뇌에 행한 첫 수술이었다. 이 수술은 심한 증상 몇 가지를 없애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에가스 모니스는 단지 여러 다른 치료방법들이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후에만 쓰일 수 있는 극단적인 처치라고 주의시켰다. 신경안정제가 등장한 후 시술되지 않는 이 수술은 대뇌의 작용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모니스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03~17년에 수차례에 걸쳐 포루투갈 하원의원으로 일했으며, 마드리드에서 포루투갈 공사관으로 일했고 파리평화회의(1918~19)에 포루투갈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영국 왕, 인도의 황제(1901~10 재위). 에드워드 7세(Edward Ⅶ), 출생
정식 이름은 Albert Edward. 1841. 11. 9 런던~1910. 5. 6 런던. 상당히 인기있고 온화한 성품의 군주로서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앨버트 사이의 2번째 자식이자 큰아들로, 태어난 지 1개월 만에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작위를 받았고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다. 아일랜드의 군부대에서 근무할 때(1861.6~9) 한 여배우와 연애한 적이 있는데, 이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이 아버지 앨버트 공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앨버트 공은 장티푸스로 죽기(1861.12.14) 전에 그의 연애사건으로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후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계승권자인 아들 에드워드에게 국정에 전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는 5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각의 회의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1863년 3월 10일 그는 훗날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가 된 크리스티안 공의 큰딸 알렉산드라와 결혼했다. 성장할 때까지 살아 남은 아이는 5명이었는데, 훗날 조지 5세로 왕위에 오른 요크 공작 조지는 그의 둘째아들이었다. 알렉산드라는 가정에 전념했으나 에드워드는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폭넓은 교제활동을 했으며 스포츠계의 명사가 되었다. 특히 경마와 요트, 그리고 새 사냥에 몰두했으며 사교활동으로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죽자 에드워드 7세로 왕위를 계승했고 1902년 8월 9일 대관식을 올렸다. 그의 통치는 빅토리아 여왕의 오랜 미망인 생활로 다소 가라앉았던 왕실의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02년 다시금 유럽 여행을 떠난 그는 1903년 프랑스 공식 방문중에 온화한 태도와 솜씨 있는 프랑스어 연설로 각계각층의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를 얻어 1904년 양국간 화친협상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의 관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장시간의 정신적 노력이 필요한 일에는 별 수완이 없었던 그였으나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서는 운이 따랐다. 육군 장관 리처드 버든 홀데인(후에 홀데인 자작)의 대대적인 군사개혁과 해군 장관 존 피셔 경의 해군개혁을 지원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사망
본명은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 1880. 8. 26 로마(?)~1918. 11. 9 파리. 20세기초에 프랑스 문단과 예술계에서 번창한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가하고 시를 새로운 분야로 안내한 뒤, 짧은 생애를 마쳤다.
폴란드 망명자인 어머니와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혈통을 비밀에 붙였다. 비교적 자유롭게 자란 그는 20세 때 파리로 가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1901년 독일에서 보낸 몇 개월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때의 경험은 자신의 시적 재능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라인 지방의 매력은 언제나 그의 추억에 남아 있었고, 이 지방의 숲과 전설에 깃든 아름다움은 나중에 그의 시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 아가씨인 애니 플레이든을 사랑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는 런던까지 이 여인을 따라갔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했다. 이 낭만적인 실연에서 영감을 얻어 유명한 시 〈사랑받지 못한 애인의 노래 Chanson du malaimé〉를 썼다. 파리로 돌아온 뒤, 아폴리네르는 문필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의 단골 손님이자 작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나중에 유명해진 몇몇 젊은 화가들, 즉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파블로 피카소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앙리 루소의 그림과 아프리카 조각을 동시대인에게 소개했으며, 피카소와 함께 그림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입체파 미학의 근본 원리를 밝히려고 애썼다. 그는 1913년에 〈입체파 화가들 Peintures cubistes〉을 발표했다.
그의 처녀작 〈타락한 마술사 L'Enchanteur pourrissant〉(1909)는 마술사 메를랭과 요정 비비안이 나누는 이상야릇한 대화를 시적 산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생기 넘치는 단편집을 〈이교 창시자 회사 L'Hérésiarque et Cie〉(1910)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어서 격식을 차린 4행련구로 씌어진 〈동물지 Le Bestiaire〉(1911)가 나왔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알코올 Alcools〉(1913, 영어판 1964)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상상 속에서 다시 체험하면서 때로는 12음절 보격을 가진 정상적인 연으로, 때로는 짧은 무운 시행으로 그 경험을 표현했고, 구두점은 전혀 찍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입대하여(1914) 보병 소위가 되었고, 1916년에 머리를 다쳤다. 제대한 그는 파리로 돌아와 상징주의적 소설인 〈살해된 시인 Le Poète assassiné〉(1916)을 발표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3번째 시집 〈칼리그람 Calligrammes〉(1918)을 발표했다. 이 시집을 지배하는 것은 전쟁의 이미지와 새로운 연애에 대한 그의 집착이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로 쇠약해진 그는 유행성 독감에 걸려 죽었다.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 Les Mamelles de Tirésias〉은 그가 죽기 전해에 상연되었다(1917). 그는 이 희곡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불렀는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프랑수아 풀랭크는 이 경희곡을 희가극으로 각색했다(초연 1947). 아폴리네르는 시에서 대담하고 무모한 기법을 실험했다. 그의 〈칼리그람〉은 독창적인 활자 배열 덕분에 시이면서 동시에 도안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폴리네르는 언어의 색다른 조합으로 놀라움이나 경악의 효과를 내고자 했고, 이 때문에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 있다.
프랑스의 군인·저술가·정치가. 드골(Charles de Gaulle), 사망
1890. 11. 22 프랑스 릴~1970. 11. 9 콜롱베레되제글리즈. 릴 출생.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중상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가 된 적도 있다. 1922년 모교의 교관, 이어서 원수 H.P.페탱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으로 있었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항전을 주장,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페탱이 이끄는 비시(Vichy)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3년 알제리에서 결성된 국민해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대독(對獨)항쟁을 계속하였다.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하여 7년이 넘는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였다. 1962년 10월 대통령 직선을 국민투표에 붙여 승리를 거두어 드골체제를 일단 완성시켰다. 그 후 1963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가맹에 거부권을 발동하였고, 독자적인 핵무장, 미국지휘하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65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위기’로 10년에 걸친 드골체제의 기반이 흔들려 6월 총선거에서는 드골파가 승리하였으나, 1969년 4월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저서 《칼날》(1932) 등의 군사이론서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회고록》(3권, 1954∼1959)이 있고, 은퇴 후에 쓴 그 속편인 《자서전》이 있다.
프랑스의 연극·영화 배우, 대중가수. 이브 몽탕(Yves Montand), 사망
본명은 Ivo Livi. 1921. 10. 13 이탈리아 몬숨마노알토~1991. 11. 9 프랑스 상리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세속적인 매력을 지닌 프랑스인의 전형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2세 때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를 피해 마르세유로 도피해온 유대인 농부였다. 18세 때 뮤직 홀에서 노래를 불렀고,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수입을 보충했다. 파리의 유명한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 밑에서 일하던 그는 1945년 영화 〈어두운 별 Étoile sans lumière〉에 출연했고, 1951년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결혼했다. 〈공포의 보수 La Salaire de la peur〉(1953)에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1955년 자서전 〈내 마음 가득히 햇빛이 Du Soleil plein la tête〉를 출판했고, 그뒤 〈전쟁은 끝났다 La Guerre est finie〉(1966)와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한 3편의 영화 〈제트 Z〉(1968)·〈고백 L'Aveu〉(1970)·〈계엄령 État de siège〉(1973)에서 보여준 연기로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장 드 플로레트 Jean de Florette〉(1986)와 그 속편인 〈마농의 샘 Manon des Sources〉(1986)도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가 부른 샹송 중 〈고엽 Les Feuilles Mortes〉이 특히 유명하다.
1925 독일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SS) 결성 Schutzstaffel(독일어로 '보위대'라는 뜻)의 약어. 친위대라고도 함. 나치당이 편성한 검은 제복을 입은 정예부대.
1925년 4월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소규모 개인경호대로 나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막대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모아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45년 해체될 때까지 책임자는 하인리히 히믈러였다. 처음에는 인원이 300명도 안 되었으나 1933년 나치 집권시 5만 명이 넘게 되었다. 광적인 인종주의자인 히믈러는 독일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완벽한 신체와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만을 대원으로 뽑았다. 윤기 나는 검은 제복을 입고 독특한 휘장(번갯불처럼 보이는 룬 문자 S와 해골 배지, 은 단검)을 단 대원들은 본래 명목상 상위 부대인 요란한 갈색 셔츠의 돌격대( SA) 대원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다.
히틀러가 SS의 도움으로 1934년 SA를 숙청해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자, SS는 히믈러를 통해 히틀러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독립 집단이 되었다. 1934~36년 히믈러와 그의 수석 부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전독일 경찰력을 장악하고 조직의 책임과 활동을 넓힘으로써 SS를 통합정리했다. 동시에 정규군이 배치된 전선마다 SS 특수군이 조직되었다. 1939년이 되자 SS는 25만 명을 갖춘 거대하고 복잡한 관료조직이 되었고, ' 일반 SS'(Allgemeine-SS)와 ' 무장 SS'(Waffen-SS)로 나누어졌다. 일반 SS는 주로 경찰과 '인종' 업무를 맡았다. 가장 중요한 부서는 제국중앙보안국(RSHA)·치안경찰(Orpo)·보안경찰(Sipo) 등으로 이루어졌고, 보안경찰은 다시 범죄경찰(Kripo)과 하인리히 뮐러가 지휘하는 공포의 게슈타포로 나뉘었다 (→ 색인 : 게슈타포). RSHA에는 국내외 정보와 첩보활동을 맡는 보안대(SD)가 있었다. 무장 SS는 히틀러를 경호하는 라이프슈탄다르테, 집단강제수용소를 관리하는 토텐코프페르벤데(해골부대), 제2차 세계대전 때 39개 부대로 늘어났으며 정규군과 함께 정예 전투부대로 활약하면서 광적인 전사로 이름 높았던 페르퓌궁스트루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SS 대원들은 다른 인종을 증오하고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하도록 교육받았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히틀러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이었으며 히틀러는 "충성이야말로 그대의 명예이다"라는 좌우명을 제시했다.
S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 들을 대량으로 학살해 악명이 높았다. 나치 독일이 패배함에 따라 SS는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되었다.
1989 독일분단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 붕괴.
1989 덩샤오핑(鄧小平), 마지막 공직인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직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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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安昌浩...좋네요. 이브 몽탕(Yves Montand)도 좋고, 덩샤오핑(鄧小平)도 역시 좋네요... ^&^
포르투갈 의사우표, 뭔가 독특한 touch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감미하면서도 애달픈 짝사랑이었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 띵~~호 ~와
2차대전에 관련된 자료도 간간이 나오니 무척 좋아요....잘 보고있습니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유태인학살 만행이 떠 오릅니다.
설명이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만 점점 설명이 길어 지는것 같네요 시간이 많이 소요 되실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