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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쓰는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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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보(족보) 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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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行列字) 쓰는 법
항렬(行列)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위한 문중율법(門中律法)이며, 항렬자(行列字)는 이름 중에서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세대(世代)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字)라고도 한다.
항렬자(行列字)는 가문마다 다르다. 갑을병정(甲乙丙丁) 등 십간(十干)순서로 정한 가문도 있고, 자축인묘(子丑寅卯) 등 십이지(十二支) 순서로 정한 가문도 있으며, 일, 이, 삼, 사(一二三四) 등 숫자로 정한 가문도 있는데 대체로 금 수 목 화 토(金 水 木 火 土)의 오행(五行)으로 정하고 있다.
우리 가문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항렬을 몰라서 따르지 못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좋은 이름을 짓는다고 항렬을 무시하고 이름을 짓는 일이 허다한데, 이는 문중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되며 가문의 질서를 문란시키고 자신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겠으니 뿌리의 질서를 지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항렬을 무시하면
첫째, 세대를 분별하기 어렵고,
둘째, 문중의 신의(信義)를 경계(警戒)받게 되며,
셋째, 문중의 법도가 없는 가문의 자손으로 인식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참고로 세(世)과 에 대(代)대하여 설명을 드리면
세(世)란? 예컨대 조(祖)·부(父)·본인(己)·자(子)·손(孫)을 계열의 차례대로 일컫는 말이며, 대(代)란? 사람이 나면서부터 30년간을 1代로 잡는 시간적공간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부자간이 세로는 2세이지만 대로는 1대, 즉 30년간의 세월이 한번 경과하였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선조로부터 아래로 후손을 가리킬 때에는 '세(世)'를 붙여서 시조를 1세(世), 그 아들은 2세(世), 그 손자는 3세(世), 그 증손은 4세(世), 또 그 현손은 5세(世)라 일컬으며 그와 반대로 선조를 말할 때에는 대(代)를 붙여서 일컫는다.
그러므로 후손을 말할 때에는 누구의 몇 세손(世孫)으로 내림차순으로 말하고, 그와 반대로 선조를 말할 때에는 누구의 몇 대조(代祖)라 오름차순으로 일컫는다.
세손 항렬자
제25세 치○(致○)
제26세 진○(鎭○)
제27세 ○준(○濬)
제28세 ○겸(○兼), ○목(○穆), ○근(○根), ○식(○植)
제29세 병○(炳○), 火(외자)
제30세 ○재(○載), 재○(載○), ○재(○在), 재○(在○)
제31세 ○선(○善), ○조(○朝), ○호(○鎬)
제32세 ○연(○淵), ○수(○洙)
제33세 ○모(○模), ○표(○杓)
제34세 ○섭(○燮), ○찬(○燦)
제35세 ○균(○均), ○배(○培)
제36세 종○(鐘○), ○현(○鉉)
제37세 원○(源○), 태○(泰○)
제38세 ○동(○東), ○영(○榮)
▣ 대동보(족보)의 약사
故 유치웅 문장 해설
우리나라에 족보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세기 초·중엽이라 하나, 사실상 임란뒤에 각씨족문중에서 본격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가 뿌리를 내리고 조상숭배사상이 국민의 생활질서를 지배함에 따라 씨족관계제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족보인데, 족보는 요새말로 뿌리를 찾고, 씨족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종전(宗田)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을유보(인조 23년, 서기 1645년)
○ 간 행 대사헌 유철
○ 편집·발문 문충공 유계
우리 기계유씨종중에서 족보를 처음으로 발간하게 된 것은 인조 23년, 1645년의 일인데, 대사헌 유철공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문충 유계공이 편찬하여 대구에서 인쇄 간행했다. 그때 문충공은 각 집안에 전해 내려온 필사보첩을 편집·정리하였는데, 그 보첩은 숙민공(肅敏公)에 이어 충목공 연대에 작성된 것으로, 신라대 이후의 정확한 세계는 기재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원조의 세계와 사유에 대해 문충공도 그 발문과 주에 일말의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또 을유보는 편찬에 시간이 촉박하였거니와, 초기의 족보간행이었기 때문에 체제상 거칠고 잘못된 점이 없지 않았다.
제2차 갑신보(숙종 30년, 서기 1704년)
○ 편집정리 지평 유명함, 목사 유명건(命健)
○ 경비조달 판서 유명홍(命弘)
○ 협 조 판서 유명웅(命雄), 감사 유명응
○ 판 각 현감 유명담
○ 서 문 감역 유명뢰(命賚)
대사헌 유철공은 일찍이 문충공 유계공과 같이 기계유씨 최초의 족보인 을유보를 발행한 바 있으나 그 후 25년만인 현종 10년경에 다시 족보를 정비 간행하려는 일에 착수했다. 왜냐하면 을유보를 간행한지도 30년에 가까워 오고, 을유보가 너무 거칠고, 잘못된 점이 많아 이를 바로잡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던 중, 현종 12년에 갑자기 별세하여 이일은 중단되고 말았다. 갑신보의 편집정리를 당담하고 발문을 쓴 지표 유명함공은 그 발문에서 "대사헌 유철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유씨집안에 전해 내려온 보첩을 시남 유계공이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유철공은 항상 자신들이 발간한 을유보의 거칠고 잘못된 점이 많음을 미안하게 여겨, 이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그런데 그의 중자 목사 명건(命健)공이 일찍부터 선고의 유지를 받들어 계획을 세우고 비로서 각파별로 이를 정리, 추진케하여 삼년 노고 끝에 아문에 훌륭한 새족보가 발간되기에 이르렀으니 명건보는 오종지수"라고 칭찬하면서 갑신보가 편집 정리되기에 이른 경위, 체계와 내용면에서 높이 평가된 족보였고 이래 그 체제하에 발전하여 왔다.
제3차 무오보(영조 14년, 서기 1738년)
○ 간 행 문익공 유척기(拓基)
○ 편 집 좌 윤 유직기, 유언진
○ 서 문 지중추 유광기
영조 14년, 한성판윤으로 있던 문익 유척기(拓基)공은 판서급 경상감사에 재임되었다. 문익공이 두 번째로 경상감사가 되어 기계시조 산소의 국내를 넓히는 일, 을유년에 판각한 을유보의 목판을 찾아 재판하기도 하고, 한편 좌윤 유직기공과 유언진공에게 새로 편집, 정리케 하여 족보를 발간하니 이것이 무오보다.
제4차 병오보(정조 10년, 서기 1786년)
○ 주간서문 충문공 유언호(彦鎬)
○ 편집정리 현 령 유언선, 진사 유해주
○ 인 쇄 서 윤 유한갈, 목사 유언제
영조말경에 족보를 간행하려고, 현령 유언선공이 일년여 걸쳐 편집, 정리를 서두르다가 정조초에 유언선공이 급서함에 따라 족보간행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정조 10년에 충문 유언호(彦鎬)공이 다시 주간하여 진사 유해주공으로 하여금 편집의 마무리를 짓게하고 서윤 유한갈공, 목사 유언제공이 같이 판각, 인쇄에 힘쓰니 이것이 병오보다.
제5차 갑자보(고종원년 서기 1864년)
○ 간행, 서문 효간공 유치선(致善)
갑자보는 병오보가 발간된지 무려 80년만에 간행되었다. 이에 앞서 30여년전 순조말, 헌종초에 종중에서 족보간행의 논쟁과 계획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종중일에 종사해 오던분들이 별세, 또는 귀향한 분들이 많아, 족보간행의 중단은 물론, 수십년동안 종중사업도 활발히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종원년에 효간 유치선(致善)공이 경기도 감사가 되었을 때, 돈을 모아 인쇄, 간행하니 이것이 갑자보다. 특히 갑자보는 우리 종중 최초의 내각 판활자본으로 체제와 모양이 정수하기로 우리나라 족보간행사에 이름이 높다.
제6차 갑인보(서기 1914년)
○ 발 의 유길준(吉濬)
○ 편집감독 유치노, 유치준
○ 교편발문 유창환(昌煥)
○ 인 쇄 유치형(致衡)
○ 협 조 유치흥
한일합방 2년후, 도유사 유길준(吉濬)공의 발의로 기계유씨 대동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대동보는 임자년(1912년) 봄에 발의하여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보작업을 시작한지 3년후인 갑인년(1914년)에 간행을 끝마쳤다. 이 갑인대동보은 일제치하에서 우리 기계유씨는 대동단결하여 하나로 뭉침으로서 생존과 번영을 이룩한다는데에 거룩한 뜻을 두고, 동정공파, 주부공파, 전서공파, 군기시사공파, 부정공파, 부제학공파, 통덕랑공파 등 7개파를 증수하여 총13개파를 비로소 형성케한 것이다.
※ 기존 6개파 : 신계공파, 단성공파, 충목공파, 진사공파, 자산공파, 학생공파
제7차 을사보(서기 1965년)
을사보는 광복후 10년, 갑신년(1964년) 3월 20일, 경종중발의로 대동보재수안을 결의하고, 경문장 유치웅 주재하에 수단고열과 편수교인이 만 1년반 걸쳐 을사년(1965년) 9월에 준역하였으며, 양장6책으로 1,150질이 간행되었다. 이 을사보는 월성군파와 장사랑공파, 2개파를 증수하여, 현재 15개파가 되어 있다.
제8차 신미보(서기 1991년)
1987년 7월에 대동보편찬위원회(위원장 유동준) 발족하여 1991년 11월 완성
총목차는 간행사, 범례, 사진, 역대보 연혁 및 서문 발문 역해, 역대보 범례, 항렬명자강정록, 기계현건치연혁, 발문, 편집위원, 십오파계도, 제1편(상계, 동정공파, 주부공파, 월성군파, 전서공파), 제2편(군기시사공파, 부정공파, 부제학공파, 통덕랑공파, 장사랑공파, 신계공파), 제3편(단성공파), 제4편(충목공파), 제5편(진사공파), 제6편(자산공파, 학생공파), 보유로 되어 있음.
※ 족보 발간 연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부운보 제4호 참조
첫댓글 2차 갑신보 설명중에 "중자 목수 명건공이" 라고 되어있는데 '목수 ->목사'로 오자인듯합니다.
수정완료
제8차 신미보의 '월성공파,"는 "월성군파,"의 오타입니다. 다른 파시조님들은 모두 공(公)을 쓰는데 월성군만은 君을 쓰므로 혼동하기가 쉽습니다.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