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교회100년사 참 자랑스럽습니다. 그동안의 환란과 핍박을 다 이기고 오늘에 이른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대에 걸맞는 카페가 개설되었스므로 이제나마 역사적인 기록을
올리게 됨을 기쁘게 여김니다.
교회창립은 1906년에 했으나 교회건축역사가 전무하니 참 안타까워서 제가 들은데로 올
리고져 합니다. 옛날 신태철 장로님께서 학교(초등학교)짓는 것은 아는데 교회짓는 것은 모
른다고 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참고가 되어 시작하였습니다 초등학교는 교회보다 3년 후
에 개교되고 교장선생님이 첫 부임하는데 말을 타고 부임했다고 해서 이야기에 한목을 합니
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28번국도, 화산교다리, 중앙선 철도도 없고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건축은 교회설립해서 적어도 5년~10년은 돼야 엄두를 낼것 같은데.. 그러면
1911년~1916년 정도 되는데 1910년은 한일합병이 있었고 그 이후는 1919년 삼일독립만
세 사건이 일어 났스므로 1919년 전에 지었다고 생각됩니다 1919년 이후는 일제의 핍박으
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910년에서 1919년 사이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날지 모르겠
습니다. 창립당시 7~8명의 어른들(김준운 이관용 하덕윤 추수동...)이 중심이 되어 그러므로 청
장년이 지개를 지고 연정. 임고. 자천. 정각. 거동. 리수는 아마50리가 넘을 것 같아요!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서 오는데 바로 걷지 못하고 옆걸음을 쳐서오는 길이 많았다고 하니 그 수고 가히
짐작하고 남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오니 힘이 다 빠져서 쉬는데 그냥 앉아서 쉬지
못하고 누어서 쉬는데 그 기별을 교회에 전하니 부인 집사님들이 국수를 장만해서 몇고개를
넘어 그 세참을 드리니 먹고 다시 힘을 내서 왔다고 하니 그것도 몇 번을 했는지 알수 없지요!
당시 교회명이 왕산교회인데 읍4부락중에 왕산동 주막걸이 사람 왕래가 가장 빈번했다고 여
겨집니다. 그것은 5일장이 주막걸에 섣기 때문에 교회도 왕산동에 자리잡았다고 여겨 지며
영남선비들과 장사 하는 사람들이 쉬고 하루를 묵고 한양으로 가는 길목도 되었을 것입니
다. 성기(놋그릇)정 골목을 해서 돈드람 모퉁이를 돌아 봉화재를 넘고... 당시 이길이 한양으로 가는
큰길이 였다고 합니다.
첫댓글 옛날 왕산동 처음 교회당 건축역사의 귀한 자료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버님으로부터 구 교회당을 지을때 자천에서 나무를 지고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