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민속신앙 혼합된 지리산 일대
‘환인·환웅·단군’ 三神을 모시고 있는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의 전경.
우상숭배 결과로 이어지는 지리산 자락의 역사가 필름처럼 스쳐간다. 그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나님을 떠나 있던 반만년 역사의 현장인 이 땅에는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그 결과 하나님을 몰라 엉뚱한 길을 찾던 뭇 영혼들의 피 터지는 격전지가 되었으며 지리산은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 일반인들은 지리산을 유불선과 민족신앙이 어우러진 화려한 문화의 보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와 산자락 자락 마다에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사단의 궤계에 유혹 당해 죽어간 영혼들의 고통을 보게 되면, 문화라는 것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사단이 만들어놓은 고급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리산은 고유신앙인 성모신앙과 산신신앙을 잉태한 산이라고 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며, 신선사상을 낳은 산이다. 고대에는 불교가 수용되면서 이들 고유신앙과 합쳐져 지리산에는 불교의 각종 종파들이 자리잡았다. 8세기경 화엄도량인 화엄사가 자리잡은 뒤 9세기에는 교종불교의 바탕 위에서 선종불교가 일어났고, 12세기 전후에는 고려 불교의 정수였던 천태종과 조계종이 모두 지리산에서 생겨났다. 16세기에는 남명 조식이 지리산에 전승되어 오는 불교사상을 아우르면서 실천적 유학사상을 이곳에서 확산시켰다. 형상우상과 사상우상이 독버섯처럼 일어났던 곳, 이 지역에서는 한국 역사의 고대에서 근 현대까지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싸움터가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일본 왜구가 침입했을 때,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기 영호남을 통과하는 관문으로 내전의 격전지였다. 조선 말기에는 의병과 관군의 진주대첩을 비롯하여 동학 농민전쟁과 농민항쟁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근 현대에 와서는 여순 반란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빨치산들의 주무대가 되었다. 시대 시대마다 지리산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비참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복음과 언약을 잃어버린 땅, 교회가 잠자고 있을 때 사단은 하나님보다 높아진 모든 이론과 사상으로 이곳에 가라지를 뿌려놓았다.
지리산 자락은 지역적으로 크게 서쪽의 섬진강·남원 지역, 동쪽의 남강·진주 지역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서쪽의 섬진강·남원 지역은 남원·곡성·구례·순천 등지를, 동쪽의 남강·진주 지역은 진주·하동·산청·함양 등지를 아우른다.
우리는 이미 지난 호에서 남원, 구례 지역을 밟으며 사단의 적진을 살펴보았고, 이번 호에서는 지리산 동쪽의 하동, 산청, 함양을 밟으며 복음이 없어 메말라 탄식을 금치 못했던 불신자 상태의 현장을 밝혀내고자 한다. |
1.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칠불사 대웅전의 칠불. 2. 칠불사 내에 있는 아자방(亞字房) 내부 모습. 3. 칠불사 주지 동림이 차를 따르고 있는 모습. 4. 지리산의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흐르고있는 불일폭포. 5. 신라시대 중국 선종을 들여온 혜소가 세웠다는 쌍계사 모습. 6. 삼성궁내에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셔놓은 건국전의 내부.. 7.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남명조식을 기리는 덕천서원. 8. 산청군 유평 마을 내에 25년 전에 세워진 유평교회에서 르포팀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 9. 유평교회의 박병택 목사(사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최귀근 사모와 르포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 복음 안에서 ‘칠불사’ 대한 역사적 재조명 필요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서쪽부터 남원, 구례를 이어 이번 현장르포에서는 제일 먼저 남쪽으로 바다와 이어진 하동지역에 먼저 다다랐다. 하동군의 서북쪽으로 지리산 줄기가 뻗어 들어와 남쪽 끝인 금남면에 이르러 그 기운이 남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만큼 북쪽은 높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차로 낮아지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르포팀은 하동군의 서북쪽 화개면 범왕리에 위치하며 지리산 반야봉 남쪽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칠불사에 도착했다. 이곳은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야, 일명 가락국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하여서 칠불사라고 불리고 있다.
칠불사 자료에 따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태어났으며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던 태양왕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 왕자와 삼남 명 왕자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하여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 간 수도하다가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을 짓고 수로왕 62년(서기103년) 모두 생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가야’국의 성립과 김수로왕, 허황옥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데 허황옥은 인도에서 복음을 듣고 셈족이었던 김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한반도 땅에 들어왔다는 설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락국의 신하들이 수로왕께, 자신의 딸들 가운데 예쁜 처녀를 골라서 왕후를 맞이하도록 아뢰자, 수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이 땅에 내려왔으므로 자기의 짝이 될 왕후도 하늘로부터 명령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수로왕이 가락국에 도착한지 6년 후인 AD 48년 남해 바다에는 붉은 돛을 단 배 한척이 붉은 빛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배에는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그를 수행해온 두 신하 내외 그리고 선원 20여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허황옥은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수로에게 그녀가 온 목적을 말했던 것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상제(上帝)는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며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한 AD 48년은 예수의 사도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였으며 외경 ‘도마행전’에는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세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뒤따라 왕과 왕비도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김수로왕은 결혼한 이후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그 가야는 드리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물고기는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용된 암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황옥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밝혀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왜곡되어진 세계사와 교회사, 특히 한국사에 대한 진실들이 복음 안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칠불사에는 아자방(亞字房)이라는 온돌방이 있는데 이 방은 신라 효공왕(897-911) 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 건물을 아자형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초기에는 한 번 불을 때면 석달 이상 따뜻했다고 한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 온돌은 수평인 곳이나 수직인 곳, 높이 있는 좌선처나 낮은 경행처 모두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여 세계적인 건축물로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특히 칠불사는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文殊)신앙의 중심지로서 대지혜를 의미한다는 반야봉을 주봉으로 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지리산은 ‘智異山’로 쓰는데 이 산의 명칭은 대지리문수사리보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출가한지 30년이 되었다는 칠불사의 주지 동림은 득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도를 얻었다는 것은 마음이 허공같이 어디에도 물들음 없이 텅 비어 집착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인간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입 등에서 육체적인 소욕을 제거해버릴 때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잠재의식 속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피나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술객들 보다도 지혜가 10배가 뛰어났다고 한다. 피나는 수행을 통해 겨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종교인들의 목적이라면, 복음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할 때 너무나 쉽게 진정한 득도의 경지에 오르며 세상을 살리고, 정복하는 권세가 주어지게 된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리였다.
◆ 세상 임금 사단이 자리잡은 지리산 현장 이후 우리 팀은 지리산 쌍계사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불일폭포를 찾았다.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흐르는 이 폭포는 높이 약 60m의 아름다운 폭포로 고려 희종 때(1204-1211년) 보조국사 지눌이 폭포 옆 암자에서 수도하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지눌의 사후 희종이 시호를 ‘불일 보조’라 내리자 폭포 이름도 불일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폭포 밑 용소에 살던 용이 등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을 흘러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또 용소 아래쪽에 있는 학못으로 날아오는 학의 모습이 햇빛에 비쳐서 자청색이 영롱하므로 청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부근에서 학이 쉬면서 논다고 하여 청학봉, 백학봉이라 부르고 이 곳을 청학동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지리산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선함과 경외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출애굽기 32장 모세가 하나님께 언약궤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금새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를 했다. 사단은 비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틈타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삼키려 하고 있다.
◆ 선과 수행의 종교행위 극심한 지리산 자락 차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지리산의 화개 골짜기, 이곳에는 예로부터 절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이름이 났던 곳이다. 조선 왕조 인조 5년(1632년)에 나온 ‘진양지’에 따르면 화개면 일대에는 암자와 절이 5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하여 몇몇 암자만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절이 쌍계사이다. 쌍계사는 혜소(774-850)가 세운 사찰로 혜소는 도의와 더불어 중국 선종 제6대 조사인 혜능(638-713)의 남종선을 신라에 들여온 이후 선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를 한 승려였다고 한다. 그러나 쌍계사가 세워지기 전 삼법(?- 740)이라는 승려가 이곳에 머물며 불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삼법은 혜능의 ‘법보단경’을 보고 혜능을 사모하게 되어 혜능의 두개골을 가지고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곡으로 가서 돌상자에 혜능의 두개골을 넣어 보관할 정도였다고 한다.
혜소는 독실한 불교신자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인도의 승려가 와 아들이 되고자 한다는 꿈을 꾸고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낳았다. 부모가 죽자 당나라에 갔다가 출가를 결심하였고, 도의라는 승려와 함께 선을 깨닫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고, 짚신을 만들어 오가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선을 닦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앞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원래 하나님을 떠나 창세기 3장에 사로잡혀 원죄에 빠져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을 찾아 헤매고 애써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 환인·환웅·단군 섬기는 종교집단 청학동 조선 시대의 예언서라고 하는 ‘정감록’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피난지로서 좋은 곳이 열 군데 적혀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지리산 청학동이다. 쌍계사 뒷산에서 지리산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산중 마을인 청암면 묵계리 땅에 가 닿는데, 그 묵계리 중에서도 가장 높이 앉은 두메가 청학동이다. 그러나 자그마치 해발 830미터가 넘는 이 산중턱에 마을이 이루어진 때는 1910년에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점한 뒤에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가솔을 이끌고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현재 지리산 청학동에는 ‘유불선 삼도합일 갱정유도회(濡佛仙三道合一 更正儒道會)’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경사도 많고 크게 길한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러한 사상을 근간으로 자신들의 성전을 건립했는데 그곳은 우리 민족 설화에 등장하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배달 민족 성전 청학동 삼성궁’이다. 삼성궁을 들어가는 입구는 동굴 문처럼 조성되어 그 앞에서 징을 세 번 치자 쇠빗장이 열리며 바위틈으로부터 고구려시대 복장에 삿갓을 쓴 문지기가 홀연히 나타났다. 동굴을 통과하자 인간의 문명세계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있는 듯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1만여 평의 대지에 중앙에는 건국시조인 ‘환웅, 환인, 단군’을 모시고 있는 건국전이 세워져 있었고, 그 뒤로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팔상 누각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이와 함께 건국전 아래로 초가집을 돌아 연못이 하나있었는데 이곳은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인류의 탄생했다고 하는 ‘바이칼 호’를 상징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호수에서 12개의 민족이 퍼져 나갔다고 하는데 그 민족을 다스린 이가 환인이라고 한다. 그 12개 가운데 우리 민족이 장자 민족으로 한반도 땅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한민족 고유 정통 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라는 경전을 가르치고 있으며 홍익인간, 이화세계 등의 건국이념을 설파하고 있다.
삼성궁의 시조는 조선 말기로 올라가는데 만덕진인(1743-1840)의 제자 공공진인(1807-1910)이 구한말 암울한 시기를 당한 나라의 위기를 보며 제자 한빛에게 삼성의 위패를 전달했고, 한빛선사(1860-1945)는 어려서부터 선을 닦아 오며 낙천선사(1902-1984)에게, 낙천선사는 그의 사상을 한풀선사에게 가르쳐 전달했다. 이후 한풀은 삼성사를 삼성궁으로 개칭하여 21일 단식에 들어가며 도를 닦기 시작했고, 단식을 하며 삼성궁 현재의 자리에 솟대 돌탑을 세우고 현재의 삼성궁을 건립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외래종교 및 사상이 득세하고 있는 이 시대에 민족의 주체성과 배달 겨레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 배달 민족 고유의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가르침은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을 그대로 모방한 환인, 그의 아들은 환웅, 환웅과 인간이 결혼하여 낳은 단군을 삼신이라고 하며 곧 하나님이라고 일컫고 있다.
또한 이들이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삼법 사상은 ‘사람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성품과 목숨과 정기를 받았는데 태어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품은 마음으로 목숨은 기로, 정기는 몸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나 마음은 삿된 생각을 하게 되고, 기는 호흡을 통하여 바른 기를 받지 못하고, 몸은 온갖 삿된 것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돌이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삿된 생각을 그치고, 호흡을 고르게 하며, 몸이 삿된 것과 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에는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넘어 바리새인들 같은 선민사상을 뿌리깊게 심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사단과 영적인 문제를 모두 배제한 채 인간의 영·혼·육을 탐구하여 인간 스스로 다스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논리와 방법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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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양군 약수정 식당 주인 박병갑씨(사진 오른쪽)가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있는 모습. 2.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좌상. 3. 천룡정사에서 복음을 듣고 영접한 우순정 권사가(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르포팀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있는 모습. 4. 자연굴을 개조하여 만든 서암. 5. 서암 내부 안에 있는 석불들의 모습.
◆ 복음의 능력으로만 사회변혁 가능 하동을 돌아 르포팀들은 산청에 도달했다. 중산리 계곡 쪽으로 올라가 잠시 길상사라는 절을 방문한 뒤 다시 내려오며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명 조식(1501-1572)이 시대가 혼란했던 조선 후기 중국의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유불선을 폭넓게 받아드리고, 실천적 사상을 강조하며 위정자들의 개혁을 촉구하였던 실학자였으며 경남우도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남명학파를 형성했다.
남명이 태어나고 활동한 시기는 16세기 사림들이 일어나고 기존 정치 세력이 훈구 세력과 대립을 겪으며 연속적으로 사화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조식은 젊어서 유학서적 및 노장과 불서를 섭렵했다. 조식이 19세가 되던 해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로 그의 숙부가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 또한 파직되었다. 이에 조식은 서울 생활을 접고 김해 탄동에서 18년간 학문을 연구했다고 한다. 61세 때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이사하여 거처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자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실천성을 강조했다. 민암부에서 “백성들은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뒤집기도 하네”라며 정치인들이 백성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 노장사상을 수용하였고, 불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인식을 보이며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과도 교유하며 자유로운 입장을 가졌다고 한다.
방장산인이라고 불리 울 만큼 지리산을 경외했다고 하는 조식은 열 두 차례나 지리산을 올랐다고 하며 지리산 유람기인 ‘유두류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단순히 산행으로 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며 그 수양이 한낱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고 현실을 무시한 수양은 신선이 되기만을 꿈꾸는 허상에 불가할 뿐이라고 했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씀 /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남명의 시에서 그의 의식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지리산을 삶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 표현하였다.
이후 남명학파가 형성되어 경상우도 지역에는 그의 학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와 한 학파를 형성했고, 지금까지 그 지역의 주민들은 기질도 과격하고 현실 대응하는 자세가 저돌적이며 직선적인 경향이 다분하다고 한다.
노장 사상이 정치적 분열과 전쟁, 사회혼란, 민생의 피폐를 가져온 춘추전국의 혼란한 시대의 산물이라면 남명 조식의 사상 또한 조선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인간 문화 자체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사상이었다. 이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떠나기 전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회기하자는 기독교의 사상과 너무나 유사하며 이상향을 꿈꾸는 노장 사상은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위 자연설은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한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혼란한 시대의 문제가 창세기 3장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노자나 남명이 말하는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죄사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정확한 복음이 선포될 때 사회와 정치 경제가 변화될 수 있다.
◆ 흑암짙은 지리산 자락에서 발견한 유평교회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 위치한 대원사는 비구니 사찰로 유명하다. 신라 진흥왕 9년 (548년)에 연기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절은 임진왜란과 여순사건 때 화재로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에 승려 법일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특히 절에서 조금 올라가면 용이 100년간 살았다고 하는 용소가 있는데, 바위가 뚫려서 굴처럼 된 것으로, 항아리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우리 팀은 용소를 찾기 위해 대원사 계곡으로 올라가다가 유평마을에서 한 교회를 찾을 수 있었다. 어두워져 가는 저녁 십자가를 발견한 우리들은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지리산 주위의 사찰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작았다. 교인들의 발걸음도 없는 듯 예배당 안은 스산할 정도로 싸늘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유평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박병택 목사(69)를 만났다. 박 목사는 수도권에서 목회를 하다가 2002년에 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질병을 치유 받고 신학을 시작했다고 하는 박 목사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복음의 열정으로 그동안 현장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복음을 전해왔고 부산에서는 선박에서 뱃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사역을 해왔다고 한다. 25년 전에 세워진 유평 교회, 그러나 교회의 분란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둘 떠나버렸고, 이 교회는 부산 Y 교회의 수양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박 목사가 이 교회에 파송을 받은 것이다. 현재 교인들은 한 명도 없었지만 박병택 목사와 최귀근 사모는 새벽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팀은 박 목사와 더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그곳에서 2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늦은 밤까지 박 목사와 팀사역을 하였고, 이날 함께 동행한 고형수 목사(구례 남부교회), 김임태 목사(광주 무등중앙교회)는 이후에도 지속해서 박 목사를 도와 협력사역을 하기로 했다. 흑암이 짙은 지리산 자락에서 영적인 힘이 고갈된 교회의 현장을 보며 우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고 그래도 그 현장을 지키며 흑암과 싸우고 있는 영적인 동역자가 남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이튿날 건강이 쇠약해진 최귀근 사모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팀은 다음 현장을 향해 달려야 했다.
◆ 무속, 민족신앙, 유불선이 혼합된 현장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우리 팀들은 가락국 제10대왕, 양왕과 왕비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있는 덕양전과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에 닿았다. 구형왕릉은 경사면에 피라밋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 올린 특이한 석조물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을 줄여가며 모나게 일곱단을 쌓아올려 전체 높이는 7.15미터였다.
이후 오후에는 함양으로 넘어와 시내 약수정이라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식당 주인인 박병갑(48), 라민숙(42)씨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다. 부부 갈등과 가정의 문제 등 하나님을 떠나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 상태를 지적하자 박씨는 조용히 복음을 듣기 시작했고, 두 부부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영접기도를 했다.
지리산 줄기는 함양군의 남쪽 끝으로 연결된다. 함양의 동쪽으로는 산청군과의 경계가 되었고,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과의 경계가 되었다. 우리 르포 팀은 산청군과 경계되어진 만수천을 넘어 문수암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다가 대종교 성지인 천진전을 발견했다.
이 대종교는 우주 진리와 홍익인간의 이상 실현을 목적으로 하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남한에 배달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지상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상을 가지 고유 신교(神敎)이다. 이들은 하늘과 땅, 인간의 합일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성지를 곳곳에 세웠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강화의 마니산 참성단이다. 그 외에 서울 대종교 총본사를 비롯하여 강원, 곡성, 익산 등 지역 지역마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신전들을 세워놓았다.
한편 문수암은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신 사찰로 문수보살의 손에는 책을 상징하는 두루마기가 쥐어져 있었고, 절 내부에도 단청마다 두루마기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이 일대에서 지식층과 엘리트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과 연관된 것일까? 그러나 우상에게 절하여 얻어진 지혜는 한낱 세상을 좀더 평안히 살아가기 위한 얇은 지식에 불과 한 것이다.
성경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복음의 능력 잃은 기존신자, 구원의 확신 회복 우리는 문수암을 나오며 함양 지역의 지리산 자락을 돌며 굿당을 여러 곳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굿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지리산 천왕할매당에 들어가 흑암을 꺾고 돌아 나오며 휴천면 송전리의 용유담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용유담은 지리산 북쪽의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삼정계곡과 뱀사골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해 엄천강을 이루고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 속에 우레와 같은 폭포 소리를 내며 떨어져 만들어 낸 평평한 호수로 별유천지와도 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용이 놀다가 간 연못이라는 전설이 서려있는 용유담, 이러한 모든 아름다운 자연에 사단은 언제나 그들의 상징인 뱀과 용을 심어놓는다. 고후4:4-5의 말씀처럼 사단은 이 세상을 장악한 신이었다.
용유담 바위 위로 우리는 천룡정사라는 암자를 발견하여 잠시 들렀는데 그 안에는 용왕과 산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칠성당과 자운당(紫雲堂)이 있었다. 자운당에서 흑암을 꺾으며 나오다가 우리 팀은 자운당 옆 주택 안에 한 노모를 발견하고 말을 건네었는데 다름 아닌 S교단의 권사였던 것이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고 하여 기도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우순정 권사(69)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서울 용산에 살고 있는 우 권사는 7년 전에 이웃 교인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친정 어머니는 자신이 7-8세 때부터 산신에게 빌며 극심한 우상숭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그것이 싫었던 우 권사는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며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15년 전에 어머니가 이 암자를 짓고 난 뒤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이 암자를 처분하지 못하고 본인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우 권사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울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했다. 영적인 부분과 우상의 심각성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의 현장을 보며, 애통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우 권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언젠가는 이 암자를 없앨 것을 약속했다.
◆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지리산 현장 사단은 이 아름다운 지리산의 자연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 팀이 마지막으로 탐방한 곳이 벽송사와 서암이었는데 서암에 들어서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서암은 제2의 석굴암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는데 입구에서 대략 30미터까지 거대한 자연석에 사천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입구를 지나 어마어마한 석굴이 등장했다. 바위와 바위사이를 철판으로 길을 만들어 연결해서 바위굴을 만들었고, 이 안에서 승려들이 수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곳이라 매년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50년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벽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말경에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의 선 불교를 연구한 8명의 조사들이 이 벽송사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온갖 종교와 우상들이 가득 차 있는 지리산 현장, 그곳을 살릴 전도자들의 발걸음이 이 현장에는 너무도 필요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확했다. 현장의 기존신자들은 대부분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누리지 못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정확한 복음, 그것만이 이 시대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 방법이었다.
/지리산 하동·산청·함양 지역=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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