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초는 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백범(白凡) 김구(金九)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도산은 1937년 12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경성의전 부속 병원에 입원했다. 열흘마다 120원씩 나오는 입원비로 고통받던 도산의 측근들은 계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계초는 500원을 선뜻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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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20년대 후반 광산 재벌이 된 계초가 신문사 경영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동향 선배인 조만식의 권유였다.
1932년 11월 경영난과 이로 인한 경영권 분규를 겪고 있던 조선일보에 사장으로 영입된 조만식은 재정의 안정을 위해 평소 아끼던 계초 방응모에게 조선일보의 인수를 권했다.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 도산 안창호의 장례에 관한 일제 경찰의 보고에는 방응모 조선일보사장에 관한 기록이 많이 눈에 띈다. 일제는 도산의 장례식을 가급적 한산한 행사에 그치도록 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했고 장례행렬에도 동행을 금했다. 이때문에 조의금을 낸 사람도 12명에 불과했는데 조선일보사장 방응모가 이 명단에 들어있다.
또 3월 12일자 종로경찰서장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사장 방응모는 당서의 주의에 응하지 않고 자가용 자동차로 장의일행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이를 완곡유지(완곡유지:완곡히 일러 단념케 함)시켰다』는 것이다.
또 3월 16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이 총독부에 보고한 「안창호의 사망에 대한 부민의 감상에 관한 건」(경고특비 제5122호)에는 도산의 죽음에 대한 방응모의 논평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안창호는 조선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상깊은 인물이므로 그분의 생애를 생각할때 감개무량하다. 그는 마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에 태어난 것같다. 자기의 주위 사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인물은 드문 법이다.
도산 선생은 1926년 2월 미국을 떠나 중국을 향하였으며 4월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1년 4개월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세번째로 중국에 입국한 것이다.
도산 선생이 1924년 미국에 가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촌 혹은 모범촌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목적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당시 미국의 한인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관계로 미국에서는 자금모금보다는 한인사회를 안정시키는 활동에 더욱 큰 비중을 두셨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생은 미국에서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다시 중국을 향하셨던 것이다.
선생이 생각한 이상촌은 사실 자주독립하여 한민족 누구나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한국의 미래모습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해외를 떠도는 우리민족이 잠시나마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마을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상촌인 것이다. 이런 이상촌은 단순히 자급자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군사·문화·경제·교육 등이 자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그마한 국가조직이었던 것이다.
도산 선생의 이상촌 건설계획은 독립운동 초기부터 꾸준히 모색되어 오던 것이다. 1910년 망명 당시 있었던 청도회담에서 만주 밀산 지역에 무관학교를 세워 그곳에서 동포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고 한 결정은 도산 선생의 이상촌 계획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후 도산 선생은 유일 독립당 결성을 위해 동료들의 대동단결을 꾀하면서 동포들의 생활모습들을 돌아보면서 꾸준히 이상촌 건설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길림성, 산해관, 금주, 호로도 등지를 이상촌 후보지로 보고 살피셨던 것으로 알려진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미국에 가셨을 때조차 몰몬교도들이 자급자족하는 솔트레이크를 방문하여 그 생활모습들을 확인하시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계속 이어진다. 선생은 공산주의자라는 미국정부의 오해로 인하여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하와이에 잠시 머물러 한인사회를 방문하는 것조차 거부당한다. 결국 서둘러 배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쩔 수 없이 직접 중국으로 가는 배를 못타고 오스트레일리아를 들려 홍콩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부리스에인에서도 잠시 머물며 이상촌 건설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9년에는 필리핀까지 직접 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총독부를 방문하여 한인 이주를 논의하기까지 하였다.
1878 0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세, 어머니 황씨는 당 32세, 형은 치호(致浩).
1902 24 김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세브란스)에서 이혜련과 결혼(9월 3일).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를 도산(島山)으로 함.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사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 통학.
1911 33 북만 밀산현(密山縣)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독일·영국 등을 거쳐 미국 뉴욕항에 도착.
1912 34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서 민족성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흥사단(興士團) 조직에 착수.《공립신보》를 《신한민보(新韓民報)》로 개제(改題) 속간. 차남 필선(必鮮) 태어남.
1914 36 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社團法人) 인가를 받음.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거
1919 41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통제(聯通制)·독립 운동 방략 제창.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이 됨.
1926 48 미주에서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사업 추진.
1927 49 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중 동지 200여명과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내 사회 여론이 비등하여 20일 만에 석방.
1928 50 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이때 대공주의(大公主義) 제창.
1931 53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
1932 54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따라 독립 운동 근거지의 건설 계획을 재검토 중인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사건으로 이날 오후 피체되어 일경에 인도됨. 6월 7일 인천에 호송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 대전 감옥에서 복역.
1935 57 2월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 산장에 은거.
1937 59 6월 28일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11월 1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12월 24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1938 60 3월 10일 자정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됨.
아래의 그림은 이곳 홈의 "계초 방응모"란에 있는 글들의 내용만을 토대로 하여, 각 인물들간의 관계를 화살표로 연결해 본 것임.
서로간에 아는 사이였으면, ↔ , 한쪽에서만 아는 경우 → 와 같이 표시함.
만일, 방응모가 군자금을 지원했었다면, 아래의 파란색, 혹은 빨간색 루트로 돈이 흘러갔을 가능성. 확인된 관계만 연결함(미완성).
... 중략..... 1918 만주 안동현 접수리 거주 족형(族兄) 안효제(安孝濟) 순국 도만하여 박광(朴洸)·김삼(金三) 등과 독립운동 대책 논의하고, 백산상회를 합자회사로 개편하였다. ...... 중략
안희제는 1919년 8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증인으로 신문을 받게 된다. 또한 관련자 신문중에는 백산상회가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남형우에게 수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건네주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파견한 점을 계속 추궁하고 있다. 남형우는 백산상회에 상업견습을 위해 온 것으로 위장하고 부산부(釜山府) 영주동(瀛州洞) 대성여관(大成旅館)에 투숙하여 조선국권회복단 부산지역 연락망을 조직하였다. 안희제 등 백산상회 관계자들은 대다수 조선국권회복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남의 지주들이 대다수 참여하여 조직된 대규모의 무역회사였으며 그 설립 목적과 운영은 국내외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는 국내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였는데 백산상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독립신문(獨立新聞)》78)의 국내 보급 통로였다.《독립신문(獨立新聞)》출판부장을 지낸 주요한(朱耀翰)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 조직을 총괄하는 교통사무국을 안동현의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에 두었다. 이륭양행은 영국 「GL쇼」가 경영하는 상점이고 백산상회는 부산 안희제가 시베리아를 방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사귄 뒤 부산에 돌아와 세운 무역회사로 독립신문 보급의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때때로 지방 연락 기구가 적발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피신하여 연락망이 끊기기도 하면서 필사적인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이 연통제 조직을 통하여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독립신문 보급을 위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으며 안희제는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독립신문 보급 등 국내의 중요 독립운동기지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다. ... 중략
백산상회의 설립과 운영
먼저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설립배경부터 살펴보면,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고,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방문하고 1914년 9월 귀국하였다. ... 중략
1938년 3월10일 밤 12시. 지금의 서울대학병원인 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는 평생을 항일 구국운동으로 일관해온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독립정신의 화신이자 민주주의의 선구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향년 59년4개월을 끝으로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이다. 평생 신명을 바쳐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국의 광복을 불과 7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도산의 가족은 당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으나 병간호를 위해 한국에 오면 즉시 일본경찰에 체포될 터이니 오지 말라는 도산의 만류로 그의 죽음도 지키지 못했다. 병상에는 가족이 보낸 단 한장의 영문전보만이 쓸쓸히 놓여있었는데 내용은 『How health you』(건강하신지) 였다고 한다.
와병 당시 도산은 병보석중이었으므로 문병객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었지만 몇몇 친지들은 병석에서 도산이 남긴 몇마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전 감옥에서 위까지 상한 몸으로 이번 다시 종로서 유치장 속에서 삼복염천(삼복염천‥삼복의 몹시 더운 날씨), 좁은 방에 10여명이 가득 누웠으니 내 몸은 견딜 수가 없었소. 누나의 말이 나는 지금 일곱가지 병이 생겼다 하오… 나는 이제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리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오. 일본은 자기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할 것이오.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목인은 일본 명치왕의 이름).
병상에 누워있는 도산의 몰골은 피골이 상접하여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한번은 도산을 취조한 일이 있는 어느 일본경찰이 도산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을 대동하고 문병을 왔다. 그 부인은 도산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혈액형이 같으니 수혈을 하겠다고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도산은 이를 끝까지 사양했다고 한다. 일편단심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도산으로서는 일본사람의 피까지 섞어가며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원칙에 충실했던 도산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1일0시5분 사망”
도산은 병상에서 입원비 문제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고당 조만식은 일경으로부터 도산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도산)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고려대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는 첫말에 대답하고 돈을 보내왔다고 한다. 다만 몇몇 사람은 일경의 감시를 의식해서 응하지 않았다고 주요한이 쓴 「안도산 전서」전기편은 전한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총독부 비밀문서에는 도산이 작고하기 전후의 상황과 도산의 장례식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나와있다. 우선 도산이 숨진 시간에 대한 일경의 보고를 보자.
도산이 숨을 거둔 시간에 대해 위 주요한의 전기에는 『시계가 (1938년 3월10일밤) 12시를 땡땡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각 경찰서장 등에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6분으로, 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5분으로 돼있다. 아마도 당시에 하루 5분쯤 늦거나 빠른 시계는 품질이 좋은 편에 속했을 것이니 사망시간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산의 사망일시가 10일 자정, 혹은 11일 0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므로 일경의 보고서는 11일에 작성됐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보고서의 날짜를 굳이 10일로 작성한 것을 보면 앞다투어 위에 보고하려는 「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같은 날짜로 경기도 경찰부장이 총독부와 기타 관계기관에 보낸 경고특비(경고특비‥경성 고등계 특별 비밀문서) 제513호 「안창호 사망에 관한 건」에는 도산을 「동우회사건의 원흉」, 「민족운동의 거두」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동대문서장의 보고에는 「상민 무직 안창호 당 61세」로 돼있다. 동대문경찰서의 보고서는 가장 자세할 뿐 아니라 몇몇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조의금 12명조문70명
첫째, 도산이 사망한 직후 형 안치호는 도산의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만들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는 이를 적발, 압수해 보관했다고 보고서는 적고있다. 주요한의 전기를 보면 이것은 조각가 이국전의 작품이었다. 일경은 작가뿐만 아니라 작가의 스승 김복진까지 연행해서 취조해 이들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둘째, 보고서를 보면 일경은 도산의 장례식에 오는 조문객들을 극소수로 제한했고 추도식도 금했으며 신문에 부고를 내는 일도 일체 금지했다. 그 때문에 조의금을 낸 사람도 박흥식,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겨우 12명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돼있다. 조전을 보낸 사람까지 합쳐 조문객의 수는 모두 70여명인데 이들의 성명과 주소, 직업, 도산과의 관계 등을 일경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명단에는 김도연, 김병로, 원세훈 등 당대의 거물 지도자들의 이름이 포함돼있다.
도산의 장례는 3월12일 작고한 병원 영안실에서 조만식장로의 집전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는데 일경은 장례행렬을 가급적이면 초라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일경은 그 방법으로 장례식 참여 인사들에게 자가용차 타고 오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중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그들의 저지에 응하지 않고 기어이 자가용차로 장례행렬을 뒤따르겠다고 고집하여 이를 『완곡유지‥완곡히 일러 단념케 함) 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도산이 숨지고 일주일 쯤 지난 3월16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이 총독부에 보고한 경고특비 제5122호 「안창호의 사망에 대한 부인의 감상에 관한 건」을 보면 도산의 죽음에 대한 방응모의 논평이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방응모는 안창호의 장례당일 자동차를 타고 참가하겠다는 것을 만류한 바 있는데 그후에도 다음과 같은 언동을 했음. (이하는 방응모의 도산에 대한 평가) 안창호는 조선 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상깊은 인물이므로 그 분의 생애를 생각할 때 감개무량하다. 그는 마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선에 태어난 것 같다. 자기의 주위사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인물은 드문 법이다… 세상에는 왕왕 금전상 비난을 받는 자가 많은데 안창호는 절대로 남에게 금전을 강요하는 등의 사실이 없이 항상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 지극히 담백했다고 들었다.
○「비판적 여론」 골라 보고
일경은 이 보고서에서 「각 계층 인사들의 감상을 내사」한 결과를 10여건 기록하고 있다. 그중 몇몇 인사는 도산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안창호 같은 자 때문에 조선민족이 더 고생을 한다』는 등의 극언을 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문맥을 보면 일경이 도산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여론을 가급적 비판적인 내용으로 보고함으로써 상부에 아첨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엿볼 수 있다.
한편 일경은 도산의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와 주거지인 대동에 살던 도산의 일가친척, 친구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끈질긴 감시를 계속했다.
1938년 3월31일자로 평안남도 경찰부장이 총독부등에 보고한 평남고비(평안남도 고등계 비밀문서) 제1188호 「안창호의 동정에 관한 건」이라는 보고서에는 도산의 고향유지들이 도산을 지원하기 위해 몰래 거액의 모금을 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 있던 도산의 장남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다.
『(도산의) 장남 필립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배우로서 주급 3백달러를 받고 있는데 안창호의 입원을 알고 2월27일경 미화 3백달러를 보내왔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으나 미확인 상태임.』
여담이지만 안필립은 1950년대말의 미국영화 「전송가」(Battle Hymn)의 주역을 맡아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당시 이 영화는 6·25사변중 미국 공군의 헤스(Hess)대령이 현재 학교법인 휘경학원의 이사장인 황온순(92)여사가 당시 돌보고 있던 수백명의 전쟁고아들을 비행기로 제주도에 긴급 피난시킨 실화를 다루었다.(안창호편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