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에 하마터면 깎여나갈 뻔했던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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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일보> 1925년 7월 11일자
파괴(破壞)되는 북부(北部)의 자연공원(自然公園)
칠백여호 주민의 의사를 무시해버리고
일개인의 이익위해 맹현의 바위를 깨쳐
삼청(三淸), 소격(昭格), 팔판(八判), 화동 주민 분기(花洞 住民 奮起)
<시대일보> 1925년 7월 11일자
인공의 시설이 도무지 없는 북부경성에 천연의 공원을 만들어주는 맹현(孟峴)의 돌바위를 요사이 어떠한 자가 깨뜨려낸다는 문제로 북부 주민 사이에는 일대 문제가 일어나서 삼청동(三淸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화동(花洞) 네 동내에서는 총대를 파견하야 종로경찰서장(鍾路警察署長)에게로부터 경기도지사(京畿道知事), 경성부윤(京城府尹)에게까지 교섭하였으나 아직까지 해결을 얻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총독부(總督府)에까지 교섭하리라는 바 이제 그 사건 내용을 알아본즉 충남 논산군(忠南 論山郡)에 원적을 두고 시방 시내 창성동(市內 昌成洞) 151번지에 거주하는 정희찬(鄭熙燦)이란 자가 그 돌바위를 매수하였는데 전문한 바에 의하면 정희찬은 그 돌바위를 쪼개내서 석재(石材)로 팔고 그 자리에다가는 장차 수백호의 주택을 세워서 팔아먹으면 안팎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여 작년 12월경에 총독부 토목과(總督府 土木課)에 교섭하야 면적 9천여평을 매평 1원씩에 매수하였다는 바 수일전에는 중국인 석공(中國人 石工) 20여명을 데리고 와서 치성제(致誠祭)를 지내고 채석(採石)에 착수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누백년 치성지(累百年 致誠地)
송우암(宋尤庵)의 필적(筆蹟)도 있다
맑은 약수도 흐려저 버리고
쇠망치 소리에 잠도 못이뤄
맹현(孟峴) 돌바위를 깨뜨리게 된 전말은 별항과 같거니와 작년 12월부터 정희찬은 내막으로 총독부에 운동하야 자기 소유를 만들었건마는 그 부근 주민 일동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수일 전에 중국인 석공들이 쇠망치를 들고와서 이곳저속 돌바위를 깨트리므로 그제야 정희찬이가 산 줄을 알고 주민일동이 분기하기 시작하였는 바 그 바위로 말하면 무성한 수목은 없다할지라도 공기가 맑고 아름다운 수풀 사이 밑에 삼처의 약수가 흘러나옴으로 북부주민에게 수천년 동안 천연의 공원이 되었을 뿐아니라 수백년 전부터 삼청동(三淸洞), 팔판동(八判洞) 주민은 산제(山祭)터로 정하고 해마다 치성을 올리는 곳이오 또는 그 돌바위 서쪽면에 대자로 새긴 삼청동문(三淸洞門)이란 액자는 이백여년 전 송우암 선생(宋尤庵 先生)의 필적이므로 고적보존의 필요로 볼지라도 도저히 쇠망치로 깨뜨려낼 수는 없는 맹현이며 더군다나 돌을 깨뜨려내는 때는 반드시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리라 하니 이 부근 주민은 그 돌을 다 깨뜨리는 동안 몇해는 밤낯 불안에 빠질 것이오 지금 당장에 그 밑에 집 세 채는 헐어내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라 하니 아무 방면으로 보든지 일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좁게 말하야도 부근 천여호, 수천의 주민을 하여금 졸연히 쇠망치로 바수어낼 수가 없다고 한다.
집을 내어놓라고 성화독촉(星火督促)
가난한 백성들의 갈곳은 어디이냐
맹현(孟峴) 밑에 오막살이집을 얽매고 살던 조광하(趙匡夏, 98)는 수일 전에 전기 정희찬에게 집을 내놓으라는 독촉을 받고 매우 격분한다는 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즉 그 집 기지는 삼년전 경기도지사에게 허가를 얻어가지고 집을 지은 것인데 정희찬은 수일전에 와서 위협하는 말로 만일 이 집을 내놓지 않으면 내가 관청에 교섭하야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함으로 조광하 노인은 할대로 해보라고 반항하였던 바 그 후에 몇번을 독촉하다가 하루는 조광하 노인은 출입한 동안에 그 집 창문 앞에다가 그 땅은 자기 소유라는 말뚝을 박았으므로 서로 언쟁이 일어난 일까지 있었다는데 어디까지든지 집을 내놓지 않을 작정이라고 한다.
총독부(總督府)에 진정(陳情)
각동민의 대표들은 총독부에 진정할 터
이에 대하여 삼청동(三淸洞), 팔판동(八判洞) 각동에서는 수일전에 동회를 열고 삼청동 총대 안해묵(八判洞 總代 安海默)씨와 각동연합총대회장 전성욱(各洞聯合總代會長 全聖旭)씨 등 제씨는 종로경찰서장에게로부터 경기도 경찰부장 급 도지사에게까지 교섭하였고 또 다시 경성부윤에게 교섭하였으나 그들의 답변은 똑같이 "상부의 결정인즉 우리는 간섭할 수가 없다"고 하므로 시방 총독부에 교섭할 작정이라는 바 장차는 각동 주민의 수천의 연명으로 진정서까지 제출할 터이라고 한다.
[별도자료]
박돌이, "경성(京城)은 일년간(一年間) 얼마나 변했나?"
<개벽> 제64호 (1925년 12월 1일)
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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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현 탈각인촌화(孟峴 脫穀人村化)
북부(北部) 경성의 천연 공원으로 북부 인민(人民)이 조석 등람(朝夕 登覽)하던 맹현 동산(孟峴 東山)이 금년에 와서 껍데기를 쑥 벗겨 버리고 인촌(人村)으로 화(化)하는 중이다. 북경성(北京城)에는 이것이 대표적 변천이다. 원래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혹 경우에는 인간에 이용품이 되기 위하야 인간의 정벌(征伐)을 당하는 것도 좋지 않은 바 아니다.
이용의 눈이 남달리 밝았다 할까. 서울 동대문 밖 정모(鄭某)가 9천원 금으로써 당국으로부터 불하(拂下)를 수(受)하야 껍데기를 뒤집어 벗기고 가옥(家屋)을 무수히 들이박는 중이다. 여기 대하야 삼청(三淸), 팔판동(八判洞), 맹현(孟峴) 부근 주민은 공원 파멸이니 만인 무시(萬人 無視)이니 폭발물 불사용(爆發物 不便用)이니 우암소제(尤菴所題) '三淸洞門(삼청동문)' 불가파(不可破)니 하야 혹은 탄원 혹은 진정 혹은 반항 별수단으로 반대를 기(起)하였으나 결국은 관련(官力) 금력(金力)에 패하고 말았다. 여하간 자연 그대로 보다 좀 더 인간 생활에 실리품(實利品)이 된 것 만은 다행하다고도 할 수 잇다. 다만 정군(鄭君)에게 일언(一言)을 한다. 맹현(孟峴)에서 내리다 보면 식은사택지(殖銀舍宅地)가 된 윤가(尹家)의 고기(古基)를 볼 수 잇다. 그의 후철(後轍)은 밟지 말라는 말이다. 개인의 다소유(多所有)란 결국 까딱하면 그 모양으로 몽땅 바치고 마는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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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상, <서울육백년 1. 북악, 인왕, 무악기슭> (대학당, 1997)에 수록된 '삼청동문' 바위글씨의 모습이다. [사진 속에 노란 테두리는 저작권 침해방지용으로 넣어둔 것임을 따로 적어둔다.]
(정리 : 2008.11.1,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보충]
<서울육백년사 : 문화사적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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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문(三淸洞門)
종로구 삼청동 골짜기의 거암 표면에 '삼청동문(三淸洞門)' 4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에 관하여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는 능서가(能書家) 만고 김경문(金敬文)의 글씨라고 하였고[註] 《한경지략(漢京識略)》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감사 이상겸(李尙謙)의 글씨라고 하였다.[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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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三淸洞)
삼청동 동남쪽 병풍처럼 생긴 바위 즉 병풍바위에는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네 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이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감사(監司) 이상겸(李尙謙)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으며[註] 또 동쪽 언덕 위 동간(東磵)과 서간(西磵) 사이에 운용정이라는 사정(射亭)이 있어 무사들의 활터로 유명하였다. ...... 또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지정 남곤(南袞)은 경복궁 뒤 현 청와대 부근 그 서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옛터에 대은암(大隱岩) 만리뢰(萬里瀨)가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중종 때 문인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청송당(聽松堂)의 유지가 유명하다.
1929년경 공원 설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여 계획을 진행하던 중 1934년 3월에 당시 경성부에서 총독부로부터 '삼청동문' 안의 임야 약 5만 평을 빌려 공원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조명, 의자, 정자 등의 시설은 물론 순환도로 산책로 등을 갖추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친목회를 비롯한 향우회, 군민회 등 모임이 이 곳에서 많이 열렸다. 인조 때의 문인 만교(晩橋) 김경문(金敬文)의 글씨라고도 전해지는 '삼청동문(三淸洞門)'의 대자(大字)와 '임술사월각(壬戌四月刻)'이라는 소자(小字)가 횡각으로 뚜렷이 보이며[註] 건너편 현 국무총리공관 뜰 암석 위에는 '강청대(康淸臺)', '사병(似屛)' 등의 각자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