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과 대중문화의 접속'이라는 테마는 다음 두가지 사항을 함축한다. 우선, 문학과 대중문화는 다른 층위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 '접속'은 한 몸뚱이에서 발생할 수 없다. 서로 다른 몸을 전제로 했을 때만 접속이 가능하다. 그 몸의 건강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더라도 그것이 서로 다른 '육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테마를 성립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 조건이다.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몸이 되었거나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접속'은 서로 다른 것의 하나됨을 의미한다. 이 테마에 따르자면, 문학과 대중문화는 현재 어떤 상태로든 하나의 '육체성'을 공유할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의 일차적인 관심은 문학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육체성의 하나됨의 양상을 엿보는 것이다. 문학과 대중문화가 각각 스스로이기를 그치고 서로의 몸을 빌어 되살아나야만 한다면, 그 겹침의 방식이 문학에 어떻게 아로새겨져 있으며 그 무늬에 의해 문학이 어떻게 다시 '문학'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여전히 '문학'에 매달려 있는 자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기확인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당연히 대중문화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나 그것이 문학과의 만남을 통해 획득한 형질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글에서 대중문화는 다만 문학의 타자로서 규정될 뿐이다.(우월성에 관한 시비, 이를테면, 고급/저급의 이분법을 들이대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의 '차이'를 전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분류체계 하에서 '문학'이 '아닌 것', 비-문학으로 인정되어 온 것들이다.(이렇게 규정할 때의 '문학'이라는 개념 역시 대중문화와 구분되는 비-대중문화로 정의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문학을 표방했으나 문학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어 왔던 것, 아예 문학과 다른 장르에 속하는 것이다. 장정일, 유하, 김영하의 작품들은 문학의 타자인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문학'들이다. 이제껏 '문학'의 영토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던 하위문학 장르, 예컨대, 포르노그라피, SF, 추리소설, 공포물, 탐정소설, 무협지 등과 영화, 대중음악(락, 재즈), 만화, 광고 등 소위 대중문화의 꽃으로 불리우는 여타 장르들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문학 내부에 불어닥친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환기시키며 문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모종의 암시를 시사한다. 어차피 '대중사회'라고 하는 체제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문학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행하는 독백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와 몸을 섞은 문학은 문학을 둘러싼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변화를 자신의 갱신의 조건으로 숙고한다는 점에서 대중사회(이것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옳은가 하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자)를 살아가는 문학의 운명과 어떤 형태로든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 글은 장정일, 유하, 김영하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대중문화와의 접속'이 대중문화가 위세를 떨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부여한 당연한 귀결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대중문화를 먹고 자란, 혹은 먹고 자라지 않을 수 없었던 세대에 속한다. 그들에게 대중문화는 제 2의 자연이다. 그것은 자연의 경험을 대체하며 자연이 사라진 인공의 도시 속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근원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대중문화를 자신의 감수성의 원천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수용하는 방식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글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경험에 대한 각기 상이한 반응 양상이다. '대중문화와 접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입장 표명과 그것으로부터 배태되는 현실에 대한 거리의 문제,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채택한 미학적 포즈와 관련한 태도 표명 등은 이 글의 주요한 관심축을 이룰 것이다. 그 관심축에 따른 독법이 '대중문화와 접속한 문학'이 수행하고 있는 현실에 관한 다양한 전략과 비판적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오늘'의 '문학'으로 불리워지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이 글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장정일에게 현실은 언제나 아버지의 이름을 의미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이후 다른 작품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그의 소설관을 대변하는 인물 <은행원>에 따르자면, 이 세계는 수학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수정궁'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것은 주인과 노예, 유산자와 무산자, 가학성 음란환자와 피학성 음란환자 등 극단적인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 속에서 어차피 '피학환자'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세계가 허용하는 것은 "허구헌 날 유리 저편에서 십원짜리를 백원짜리로, 백원짜리를 다시 천원짜리로" 바꾸는 '무용한 노동' 뿐이다. '자아'라든가 '감정이나 욕망'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 세계는 그들에게 완벽한 '기계'가 되라고 강요한다. 일종의 '거세공포증'으로 상징되는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는 장정일 문학의 출발점이다. 현실은 주체를 위압하는 빗금 바깥의 그 무엇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공포는 대부분의 인간들의 심리구조 속에 내재해 있는 항상적인 불안이다. 그러나 주체의 바깥에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이름(법과 질서)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실과 화해하는 대부분의 해결책과 달리 장정일은 영원히 아버지의 이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온몸으로 이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는 [아담이 눈뜰 때]를 반-성장소설, 성장을 거부하는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정궁을 향한 총쏘기, 가속도에 브레이크 걸기, 즉흥성과 일탈성을 생명으로 하는 재즈에 몸 맡기기 등으로 변주되는 그의 글쓰기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영원히 상상계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원칙으로 귀환하지 않는 문학적 모험은 현실에 관한 '초월'과 '도피'의 양 극단에서 움직인다. 현실을 능가하는 더 큰 힘이 되어 현실이 강제하는 법과 질서의 울타리를 넘어서든가 현실과의 어떠한 접점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밀폐의 공간 속으로 잠입하든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드러난 장정일의 포르노그라피적 글쓰기가 전자의 예에 해당된다면, '유희'를 표방하는 순진한 동심의 세계에 대한 경사(만화적 상상력, 재즈적 일탈)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초월과 도피는 기본적으로 현실 그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 수정궁의 현실은 그 어떤 '공격'과 '장난'에도 끄덕하지 않은 채 그것마저도 자신의 영역 속으로 끌어들이며 부동의 지위를 고수한다. 과격과 위악에도 불구하고 장정일의 글쓰기는 현실에 관한 지독한 환멸만을 맛볼 수 있을 뿐이다. 희생양을 자임하는 장정일의 포즈가 상징계에 사로잡힌 단순한 나르시시즘에 그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글쓰기에는 언제나 죽음(패배)을 눈 앞에 둔 자의 영웅적인 비장미가 내포되어 있다. 빗금 바깥의 현실에 '무지'하지는 않지만 기어이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는 장정일의 글쓰기는 전형적인 '금욕주의자'의 그것이다.(온갖 환락이 숨쉬는 '서울'(지옥)을 떠나 '대구'(고향, 낙원)로 귀환하는 아담이 눈 뜰 때의 구조를 상기하라) 포르노와 만화와 온갖 쓰레기 같은 잡식성 대중문화와 손을 잡는 장정일의 표정은 그것을 즐기는 자의 쾌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자기를 버리기 위하여, 모독하기 위하여, '엄숙하게' 그것과 몸을 섞는다.(서울에서의 마지막 밤, 창녀를 안은 아담이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상징적이다) 창녀의 몸을 씻겨주고 "모든 여자들이 그녀를 부러워하도록, 아주 길게" 키스를 하는 아담의 포즈는 장정일의 문학이 대중문화에 대해 취하는 자세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그것은 제의적 성격을 지닌 일종의 '고행'이다. 그것이 고행에 해당되는 한, 그의 글쓰기는 포르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만화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의도했던 본래의 목표, 즉, '문학'에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역설적인 운명에 놓인다. 장정일을 둘러싼 '외설 파동'이 말하는 바가 그것이다. 창조주 아버지의 이름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했던 아담의 계몽적 프로젝트는 여전히 장정일의 둘레를 맴돌고 있다. 3. 일찍이 무협지적 상상력에 기대어 80년대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풍자했던 유하에게 있어 현실은 팽팽한 대결의 장임과 동시에 그 속에 뛰어 들어 함께 뒹굴 수 있는 환락의 공간이기도 하다. 세운상가와 압구정동 등으로 환유되는 현실은 환멸의 근원이자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의 공간이다.(이 점에서 그는 장정일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소위 '키취 반성자이자 키취 중독자'로서의 그의 개성이 집약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그는 "오직 후끼(중고 제품을 새것처럼 조작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은어)된 진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세운상가 구석구석을 헤맨다. 그리고 그곳의 "흠집많은 중고제품들"과 "등록 거부한 세상"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그 이중성은 "배나무숲을 노루처럼 질주하던 원두막지기 딸"의 "구릿빛 종아리"를 잊을 수 없으면서도 압구정동의 "흐벅진 허벅지"와 "온갖 심혜진 최진실 강수지 같은 황홀한 종아리"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는 욕망의 매커니즘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숨겨진 것, 부재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 것, 현존하는 것의 은폐술과 배제의 과정을 복기하는 것은 유하 시의 표면적 가벼움과 수다 뒤에 가려진 내면적 무거움과 침묵의 근원이다. 그는 "달이 몰락한 그곳에서/둥근 달을 바라본 자"이며 "그 허물어진 이름들 위에서/이제 정적도 노래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다. 그의 뛰어난 말놀이 기술이나 기민한 이미지 포착 능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무거움과 침묵은 '환락'으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그것의 '환멸'을 상기하는 자의 '비애'를 담고 있다. 미인의 얼굴에서 해골을 보는 견자 유하는 "환락과 악수하고 뒤돌아설 때면, 어김없이 내 등을 찌르는 환멸의 비수"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유하는 이 환멸마저도 자신이 노래해야 할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시효 지난 지옥은 지독히도 아름다운 것"으로 변한다. 시간의 마술은 환멸로 가득찬 현실(지옥)을 지독히도 아름다운 것으로 다시 탄생시킨다. 모든 명멸하는 것, 소멸할 운명에 처한 것들에 대한 유하의 사랑은 혈육애를 넘어선다. 그는 "소멸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는 작명가다. 유행가와 흘러간 여배우와 유년의 풍금과 고향의 천막극장이 이 "염산같"이 "쓰린" '정'에 의해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 그것은 광고와 영화의 스크린에 매혹당하는 유하의 감수성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카메라의 푸른 빛이 만들어내는 세계야말로 순간에 사는 것들, 모든 명멸하는 것들의 총체다. "지구의 기나긴 시간으로 보자면" 하나대와 세운상가와 압구정동은 모두 "형광등이 깜박이는 찰나의 전체 속에서 삶이라는 이름으로 붙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소멸하는 것들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차피 이것이 생의 몫이라면/완강히 버텨보리라, 난 천재가 아니므로/난, 세상의 온갖 따라지性을 사랑하는 삼류이므로,/저 파고다 극장처럼 살아 남아, 시커먼/껌의 포충망과 씨름하며 끝끝내 필름을 돌려보리라/설령, 그것이 껌씹는 소리의 삶으로 그친다 해도"라고 노래한다. "세상에서 영영 분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헛됨을 기리는 자"가 되리라고 마음 먹는 자는 세상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서는 자다. 세속 도시는 유하 시의 영원한 저수원이다.(이제껏 주로 유하시의 근원으로 인정되어 왔던 '하나대'는 세속 도시의 잡스러운 환멸에 되비쳐지지 않는다면 시의 표면으로 솟아오를 수 없다. 그것은 현재형이 아니라 항상 과거형의 아늑함 속에 깃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세속 도시가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따라지성'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자 한다. 장정일의 공포와 금욕 대신 유하는 매혹과 쾌락을 선택한다. 현실에 대한 환멸과 온갖 대중문화와의 친연성이라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양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낮은 곳에 임재한 계몽주의자의 비장미는 유하의 몫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따라지들이 제공하는 환락에 도취해 있는 것만도 아니다. "코카콜라를 든 심혜진의 미소"로부터 "폐수 위에 핀 연꽃"을 집어드는 유하의 이중적 부정은 선적 제스추어에 가깝다. 이 선지자가 명멸하는 세속 도시의 네온사인 앞에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삶의 찰나성이다. 환락과 환멸에 동시에 깃든 찰나성은 다시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연민과 비애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자신의 운명으로 되돌아 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향한 비애! "무심한 대지에게 칭얼거리는 억새풀"의 '엄살'은, 그러므로, 그의 영원한 포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4. 「전태일과 쇼걸」은 김영하 소설이 놓인 자리를 암시하는 준거틀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이 동시 상영되고 있는 '서울극장'(이름에 주목하라)은 학생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옛 연인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자 그것이 시연되는 '무대'다. 완전한 소비도시의 외형(소설의 배음을 이루고 있는 명멸하는 광고 카피)을 갖춘 '서울'은 이제 전태일에서 쇼걸, 광주에서 비엔날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경계'를 넘어 그것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며 '벼룩시장'의 면모를 자랑한다. 벼룩시장으로 변해버린 서울은 그것의 리얼리티(역사성)를 상실하고 거대한 '허구', 완전한 '가상'의 세계로 돌입한다. '삼국지' 게임에 열광하는 과거의 학생운동가([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나 '바람이 분다, 게임을 해야겠다'라고 중얼거리는 남자([바람이 분다])는 이미 우리의 역사(혁명)와 일상(인생)이 게임의 세계(사이버 공간)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이 세계를 어떻게 '현실'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이것은 '허구'다!) 김영하 소설은 이러한 '허구 속의 허구'다. 이제 현실은 가상의 빗금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기를 그친다. 그것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순간적인 매혹의 몸짓을 구사하며 쾌락을 약속하다가 곧바로 푸른 빛 저쪽으로 사라지는 경계의 산물도 아니다. 공포와 쾌락은 주체와의 명백한 '거리'의 산물이다. 공포가 주체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면 쾌락은 그것과 순간적으로 뒤섞이는 접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은 주체와 대상간의 명백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허구가 되어 버린 현실은 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주체의 내부로 스며들어 오고 주체는 현실 바깥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현실이 곧 가상이며 가상이 곧 현실인 단형의 세계. 이분법의 빗금이 제거된 동일성의 공간. 김영하 소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어느 순간 한 몸으로 뒤섞여 버린 현실과 허구는 서로 간의 이분법적 거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현실에 관한 모사'(반영론)를 회의하게 한다.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소설)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그의 소설론은 당연히 첫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자살 안내원'으로부터 최근작 [흡혈귀]의 '흡혈귀', [고압선]의 '투명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현실적인 것'에 '현실적인 것'의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른 텍스트들(김영하에게 있어 대중문화는 이 다른 텍스트들의 하나일 뿐이다)로부터 빌어 온 다양한 인유(引喩)가 그의 소설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 다른 텍스트들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그의 소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없다. 무수한 텍스트들의 상호텍스트성에 의지하고 있는 그의 소설은 그동안 모든 텍스트의 준거이자 기원으로 자리잡고 있던 현실을 일고의 가치도 지니지 못한 '쓰레기'로 바꾸어 버린다. 김영하의 소설에 이르러 현실은 모든 기호들의 소실점으로서의 의미의 담지체이기를 그치고 단순한 기호의 하나로 전락한다. 그것은 다만 이미 있던 다른 어떤 것들의 인유로 이루어진 낡은 텍스트(텍스트인 한에서 그것은 이미 허구이자 가상이다)임과 동시에 새로운 텍스트를 형성해 갈 인유의 대상일 뿐이다. 그 텍스트를 대하는 김영하의 태도는 어떠한 공포도 매혹도 알지 못한다. 그는 텍스트들의 유혹에 경도된 성애자(性愛者)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사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는 김영하의 작업은 그러므로 당연히 장정일의 비장미와 유하의 비애로부터 자유롭다. 장정일의 비장한 전복과 유하의 엄살 속에서도 끄덕하지 않던 현실은 드디어 김영하의 텍스트에 대한 사랑에 이르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순간 허구로 돌변해 버린 현실은 이미 현실이라는 기호가 지칭하는 의미를 상실한다. 우리는 다만 김영하의 펄프픽션을 통해 현실에 대한 환멸을 '반영'하던 문학이 환멸 그 자체가 되어 버리는 역전극을 목도할 뿐이다. 환멸을 반영한다고 해서 환멸을 낳는 현실을 조금도 개선시킬 수 없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비장미와 비애를 낳는 원천이기만 했다면, 이제 문학이 해야 할 일은 반영이라는 행위 자체를 의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영하 소설은 그것을 '반영'하는 중요한 '징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