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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THE BEGINNING
리치가 대학에 도착한지 일 년째 되던 1987년 9월, 이번엔 닉의 차례였다. 고등 교육을 받으려는 그의 첫 번째 시도는 단지 2주일밖에는 가지 못했다. 리치처럼 그는 학교에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준비할 학생으로 지명되었지만, ― 주(州) 제도의 학생들에게서 이상하리만치 자주 있는 일이다 ― 그들의 지원서는 받아들여질만한 것으로 여겨지질 못했다. 여름부터, 닉의 A레벨 교사들은 그가 낮은 등급을 받을 거라 예상하고, 포츠머스 폴리테크닉Portsmouth Polytechnic에서 교육 과정을 밟는 것을 최선의 선택지로 제안했다. 존스는 곧 그곳을 혐오하게 되었고, 단 하나의 수업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가 "거나하게 진탕 마시는, Club 18-30*를 통해 보내는 휴일"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지냈다. 이 잃어버린 주말 동안 나온 그의 시험 결과는 A 하나와 두 개의 B였다. 그는 포츠머스보다 더 나은 곳에 갈 자격이 있었다.
*젊은층을 상대로 한 여행 클럽으로 성인 전용 리조트 프로그램
닉의 어머니 아이리니 씨는 웨일즈 대학교에 (그녀의 첫째 아들 패트릭이 공부했던 곳이었다) 전화를 걸어 힘든 협상을 해냈다. 그 다음 주, 닉은 정치학 과정에 등록했고, 두 명의 운동을 좋아하는 타입의 녀석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살게 되었다. 결국 그는 리치와 함께 도시의 높은 곳에 위치한 학생 거주 구역인 킹 에드워드 로드에 있는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학생의 삶은 닉에게는 리치에게 그랬던 것보다도 더 취향에 맞지 않았다. 닉은 대학에서 처음으로 확연한 사회적 차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계급의 특권과, 그들이 그 특권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는지를 알게 됐어. 어떤 사람이 BMW는 고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차를 갖고 있는 걸 말이지. 그런 경험들을 통해 눈을 뜨게 됐어." (리치와 마찬가지로 닉은, 학비 보조금이 생긴 이래로 멸종될 위기에 처한 사회 계급인 '교육 받은 빈민층' 마지막 세대의 일원이었다.) 삼 년 동안 그는 학생회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며 (그가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사실이다), 사실상 술도 한 번 안 마셨고, 마약도 하지 않았고, 쇼핑 카트나 원뿔 모양의 도로 표지 하나도 훔치지 않았으며, 어떤 '싸이코'라는 친구 한 명만을 사귀었는데, 그와는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사실 닉은 보통 학생들이 한다고들 하는 일은 딱 두 가지밖에 해보지 않았다. 첫 번째는 삼 년 동안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가 대학을 떠나는 날 육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평소에 잘 가지 않던 펍에 갔다가 퇴출 시간에 집에서 6 마일 떨어진 곳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하고, 철사를 이용해 차에 시동을 걸려는 한심한 시도를 해보다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뒤 경찰서 유치장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주의를 받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닉은 절대로 학생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학생으로 지낸다는 건 대부분이 앞으로 뭘 하면서 먹고 살지 알지 못하는 채로 삼 년을 더 보내는 거였어. 난 살면서 말 그대로 하루도 일을 해본 적이 전혀 없어. 신문 배달조차도. 그래서 난 사무실에서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많은 애들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대학에 가는 거라고 난 생각해. 그리고 그분들은 항상 나한테 잘해주셨고."
그는 매주 주말 집에 돌아갔고, 주중에는 제임스와 션에게 세 번씩 소식을 전했다. 리치와는 달리 그는 도서관에서도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난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걸 공부하고 싶었지 교육 과정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교수들은 끔찍했다구. 실제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많았거든."
만성적인 결석으로의 내리막이 뒤따랐다. "2학년 때, 사람들은 내가 정말로 그만둔줄 알았어. 나타나질 않았으니까." 공부를 하고 있었어야 할 시간에 그는 땡땡이를 치고 리치와 골프를 치러 갔고, 자신이 그 역할에 잘 어울린다고 주장하며 경솔한 캐주얼 프링글 스웨터를 입기까지 했다. 이것은 무해하기 짝이 없는 취미였지만 닉의 또다른 열정은 훨씬 더 위험했다. 골프를 치러 가기에 적당한 날씨가 아닐 때면, 그는 시내로 종적을 감추고 하루 종일 오락실에서 슬롯 머신에 밥을 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문가 비슷한 것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3000 파운드를 빚진 상태였다. 50 파운드 어치 토큰을 집어넣어서 식사를 사먹을 수 있을만한 4 파운드 어치 토큰을 따는 식이었다 (수학이 그의 강점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적자를 메우기 위한 한 번의 미미한 시도로써 크리스마스에 우체국에서 일을 해보긴 했지만 그것조차 엉망이었다. "우리 아빠가 결국 내가 편지를 배달하는 걸 도와주셨어. 가방이 너무 무거웠던데다가 난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지."
'지루함이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 리치
제임스와 션은 모두 학업 생활을 맛볼 기회가 있었지만 (제임스는 철학을 공부하고, 션은 음악 대학에 다닐 기회였다) 둘 다 이야기된 밴드를 위해 그 기회를 희생했다. 션은 행정직에서 지루한 사무적인 일을 했고, 제임스는 실업 수당을 받게 되었다. 잠시 동안, 'The Blue Generation'의 락의 꿈은 떠내려가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제임스는 그 불꽃을 타오르게 유지했다. 밤에는 동네의 술집에서 광부 일을 하던 사람들에게 브레인스 다크*를 서빙했다 (친절하게도 현금으로 받은 자신의 급료를 축내 닉이 도박 빚을 갚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그에게 5 파운드와 10 파운드 짜리 지폐를 보내주었다). 낮에는 부모님이 일을 나가신 사이에 거실 커튼을 치고 또 다른 클래식 앨범인 건즈 앤 로지스의 Appetite for Destruction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 특이하게도, 제임스는 현재 이 자가 구금을 '굉장히 로맨틱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Brains Dark, 웨일즈 카디프에 본부를 두고 있는 브레인스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다크 마일드 에일
1988년 여름 방학에 다시 모인 이 사인조에게 한 주의 하이라이트는 NME, Melody Maker, Sounds가 블랙우드에 도착하던 수요일 아침이었다 (지금까지도 닉에겐 글자 그대로 기자들에게 리뷰들을 다시 인용해 보내는 불안한 습관이 있다). 매주 그들은 비평가들이 최근 사랑하는 인디 밴드들에게 아끼지 않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읽고는 카디프의 스필러즈에서 소닉 유스나 프라이멀 스크림의 최신 싱글을 주문하고, 매주 과대 선전 뒤의 현실에 참담하도록 실망하곤 했다. 그들은 탈룰라 고쉬Talulah Gosh, 수프 드래곤즈The Soup Dragons, 프리머티브즈The Primitives, 클로즈 랍스터즈The Close Lobsters 같은 밴드를 직접 보기 위해 포트 탤벗Port Talbot에 있는 래플즈Raffles라는 인디 클럽으로 종종 80 마일 짜리 여행을 했는데, 종종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쳐 떠돌이 일꾼들과 함께 철교 아래서 잠을 자기도 했다. 리치는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and Mary Chain을 보기 위해 노팅엄까지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들은 집에 돌아와 왜 신경이 쓰이는지를 궁금해하곤 했는데, 리치는 Select에 이렇게 씁쓸하게 증언했다. "음악 언론에는 밴드들이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지. 그들을 보러 가보면, 거기엔 스무 명 정도 밖에 없고, 밴드는 X나 구린 거야. 모든 노래가, 완전히 전적으로 쓰레기였어. 우린 그게 슬프고 처량하다고 생각했고. 그러고는 우린 집에 돌아가 우리의 오래된 후The Who나 클래쉬의 비디오를 보는 거야. 그것들이 우리에겐 더 많은 의미를 가졌어."
그들이 친밀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밴드는 버드랜드Birdland가 유일했는데 (탬워스Tamworth 출신으로 과산화수소수 펑크를 하면서 잠시 인기를 끌었던 건방진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머서 티드필Merthyr Tydfil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조차 정치에는 맥이 풀리도록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네 명은 자신들의 음반 컬렉션들을 보고 (피스톨즈, 프레슬리, 스톤즈), 인디 잡지의 프론트 커버를 보았다 (원더 스터프Wonder Stuff, 해피 먼데이즈Happy Mondays, 라이드Ride). 실로 열등한 시대였다. 무언가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믿을 수 있는 밴드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행동할 방책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들 스스로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밴드는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가 낳은 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을 리드 기타리스트로 세운 제임스는 텔레캐스터 리듬 기타에 '니키 와이어'로 이름을 바꾼 (그의 뻣뻣한wiry 골격 때문이었다) 닉 존스를, 드럼에는 션 무어를, 베이스에는 '플리커Flicker'라는 (진짜 이름은 마일즈 우드워드Miles Woodward이다) 학교에서 알고 지내던 올드스타일 펑크 락커를 배치하는 라인업을 조직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여성 싱어를 들이는 실험을 해보았지만 ― 제임스는 스스로를 프론트맨으로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다 ―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는 마지못해 스스로 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약간의 가사를 쓰기도 했지만 (그중에는 Oi!*/스킨헤드 씬에 대한 노래인 'Jackboot Johnny'라는 것이 있었다), 재빨리 그리고 기꺼이 그 일을 니키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뚜렷한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리치 에드워즈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70년대 말 영국에서 발생한 펑크의 하위 장르 중 하나
리허설은 브래드필드 가족의 거실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를 회상하며 제임스는 그의 아빠가 "긴 하루를 살아남고 난 뒤" 의식을 잃고 누워 계시던 광경은 영감을 주는 것과는 정반대였으며 ― 그들이 절대 되고 싶지 않던 살아있는 본보기였다고 Melody Maker에 말했다. 니키와 플리커가 피쉬 앤 칩스를 가지고 정오에 나타나면 독창적인 노래들과 (그들의 시적인 노력들 중에서 건져낸 가사를 사용한 것이었다) 커버 버전들을 섞어 연습하고, 비디오를 보고, 격한 논쟁을 펼치곤 했다. 아주 초기부터 시각적인 모습은 청각적인 영향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훗날 니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제임스의 방에서 여덟 곡을 완벽히 배웠어. 위아래로 점프하는 게 제대로 연주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지."
잠시 동안 그들은 밴드 이름으로 베아트리스 달이 출연한 1980년대 학생들의 클래식인 소프트 포르노 영화 37.2˚ Le Matin의 영어판 제목 베티 블루Betty Blue를 사용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생각을 바꾸었다. Manic Street Preachers라는 이름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설은 리치가 재스민 밍크스Jasmine Minks의 앨범 타이틀(All Good Preachers Go to Heaven)에서 이름을 슬쩍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그가 밴드의 멤버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거의 확실하게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제임스가 카디프에 길거리 공연을 하러 갔다가 얻게 된 이름이라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감히 그의 앞에 잔돈을 던졌고, 그는 상가를 따라 그들을 쫓아가 욕을 퍼부어 줬다. 지나가던 나이든 신사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넌 뭐냐, 녀석아? 미친 거리의 전도사라도 되는 게냐?"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그 이름을 골랐던 사람은 제임스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자다가 그 이름이 생각났어." 현재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그냥 나에게로 다가왔던 거야."*
*It just came to me.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건 간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 단어로 이루어진 밴드 이름들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인기를 끌던 (라이드Ride, 커브Curve, 블러Blur) 여백 사이에서*, 그들의 이름은 매닉스만의 구분되는 즉각적인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약에 취한 음악 씬에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라는 바로 그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명이었다. 사이먼 레이놀드Simon Reynolds는 The Sex Revolts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manic'은 졸린 드림팝에 대한 그들의 암페타민 박힌 포기 선언이었으며, 'street'은 내면의 공간에 반대되는 펑크의 도시 공간, 즉 몽상보다는 혁명의 지역으로의 회귀를 뜻했고, 'preacher'는, 드림팝 미학의 흐릿하고 정치에 관심 없는 모호함에 대항해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매닉스의 의도를 알리는 것이었다."
*Among the blank
1988년 크리스마스가 되기 며칠 전, 아주 불쾌한 방법으로 프리처스의 행보가 보류되었다. 12월 22일, 리치와 제임스는 리치의 스물한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뉴포트로 향했다. 오후 7시 경 그들은 맥도날드에 있었는데, 아마 그 시간엔 취하지도 않았을 열다섯 명 정도의 사내들이 쏟아져 들어와 이 둘의 패션 센스를 트집 잡으며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굴에 버거를 쑤셔넣은 다음 리치의 목을 가라테 식으로 내려 치고 얼굴을 찼는데, 제임스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그의 턱 뼈가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제임스는 반 년 동안 노래를 할 수가 없었어." 훗날 리치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그날 밤 그러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어. 아주 신나는 생일이었지. 우린 그 이후로 외출을 안 했어."
무작위로 벌어지는 그런 유혈 사태는 남웨일즈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리치가 이렇게 확인해주기도 했듯이 말이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 특별한 이유 없이 저지르는 폭력은 그냥 받아들여지는 일이었어. 일 년 중 52주 동안 펍에 가서 누군가의 얼굴에 유리를 들이미는 거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그 모든 사건에 있어서 놀라우리만치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얻어 맞는 데에 익숙해지고 있어." 여러 해가 지난 뒤 제임스는 뉴포트 센터에서 한발 더 앞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턱을 부러뜨린 녀석들에게. 너희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니키는 퍼블릭 에너미가 흑인 대 흑인 폭력을 비난했던 것을 따라서, 웨일즈의 이러한 공격성이 상대방 대신 정치적인 방향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기를 바랐다.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야. 사람들은 화를 제대로 표현하지를 못해서 그냥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그들이 시내 중심가로 달려가 테스코나 직업 안내 센터를 부숴버렸다면 완벽했을텐데."
몇 달이 흐르고 1989년의 봄이 찾아와 철사로 고정시켜두었던 제임스의 턱이 낫자, 사인조는 첫 공개 공연을 가질 준비를 갖췄다. 이것은 크럼린 레일웨이 호텔Crumlin Railway Hotel이라는 뉴브릿지Newbridge의 평범한 펍 공연장에서 열린 서포트 공연이었는데, 그곳에는 헤드라이너 (이제는 잊혀진 한 고스 밴드였다) 공연을 기다리는 검은 복장의 락커들과 정기적으로 토요일 밤 술을 마시러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밴드에게는 기쁘게도, 그들의 등장은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폭력이 난무하던 전설적인 초기 공연과 유사한 것을 유발해냈다. 밴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있는 고스족들 앞으로, 형편 없는 화장을 하고, 스프레이로 'KILL YOURSELF'와 'TEENAGE BEAT'라는 문구가 스텐실된 흰 교복 셔츠와 누보 펑크 의상을 입은 채로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첫 번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스네이크바이트*와 블랙커런트* 잔이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매닉스의 전통이 태어난 것이었다.
*Snakebite: 맥주와 사과주를 같은 양으로 혼합한 칵테일
*Blackcurrant: 까막까치밥나무. 여기선 열매로 만든 맥주를 말하는 것 같네요
잔 깨지는 소리 가운데, 그날 밤의 셋리스트에는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Just Like Honey', 언더톤즈The Undertones의 'Teenage Kicks', 섹스 피스톨즈의 'God Save The Queen' 등의 커버곡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독창적인 작품들도 조금 있었는데, 'Anti Social', Rumblefish에 영향 받아 만든 'Colt 45 Rusty James', 'Love in a Make-up Bag' (슬프게도 이 노래들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Suicide Alley', 'Spectators of Suicide', 'Go Buzz Baby Go' ('Motorcycle Emptiness'의 초기 버전이다)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1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홉 곡이 연주됐고, 플로어에는 깨진 유리가 1 인치가 쌓였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마주하게 되면 많은 밴드들은 락앤롤을 좋지 못한 실수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곤 한다. 그와 반대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피학성애적인 녀석들이었던 매닉스는 그것을 모두 다시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그들은 직접 마크 존스라는 리치보다 한 학년 높은 학교 친구를 일종의 매니저로 고용했는데, 니키가 애정을 담아 '돌았다'고 묘사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기행 중에서도 마크는 집에서 만든 로켓에 집착했다). 매닉스의 다음 공연을 예약해준 것은 바로 그였다. 블랙우드 소극장Little Theatre(개조된 감리교 예배당이었다)에서 많은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여러 밴드가 티켓에 이름을 올린 이 행사는 첫 번째 것보다도 훨씬 폭력적이었다. 악명 높은 카디프 시티 훌리건 집단 소울 크루The Soul Crew에서 나온 축구 팬 청년들 패거리가 들어와 시작부터 "너희들은 스완지 시티보다 구리다!" 또는 뭔가 괴상하게도, "심플 마인즈Simple Minds! 심플 마인즈!"라고 조롱하며 매닉스에게 야유를 하는 것으로 크나큰 즐거움을 얻었다. 곧 맥주 병들이 또다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십 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축구 대표단이 무대에 쳐들어와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밴드는 자신들의 악기를 부수면서 똑같이 대응함으로써 공연은 폭파되고 말았는데, 훗날 언론에서는 이를 '허무주의적 분노 소동'이라고 미화했다.
놀랍게도 프리처스는 소극장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예약했고, 뒤이어 집에서 약간 더 멀리 떨어진 폰티프리드Pontypridd 럭비 클럽으로 여행을 하게 됐다. 이 공연은 처참했다. 어리벙벙하고 무관심한 관중을 마주한 매닉스는 파열음을 모두 끄집어내 그들을 약올리는 것으로 응답했다. 마지막에는 플리커가 마이크 앞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외설적인 말을 잔뜩 퍼부었다. 밴드는 무대를 내려가던 순간, 그들이 다시는 폰티에서 공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플리커는 밴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매닉스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데다가, 밴드의 측면에서 봤을 때에도 그에겐 음악적인 소질이 부족했다. 그는 베이스에서 줄 두 개를 없애버렸는데, 부분적으로는 시드 비셔스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요한 이유는 네 줄로 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찾고 있던 변명거리를 얻게 된 제임스, 니키, 션은 이 베이시스트를 인정사정없이 밴드에서 내쫓았다. 그는 대신 브리티쉬 텔레콤British Telecom에 취직했고, 지금은 오크데일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으로 (그러나 마지막은 아니었다), 매닉스는 삼인조로 축소되었고, 니키의 포지션이 리듬 기타에서 베이스로 변경되었다. 6월, 이 셋은 쿰펠린파치Cwmfelinfach에 위치한 사운드 뱅크 스튜디오Sound Bank Studios (SBS)에서 저렴한 가격에 녹음실 시간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 스튜디오는 글렌 파월Glen Powell이라는 지역 뮤지션이 운영하던 것이었는데, 그가 유명했던 주된 이유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딱 한 번 함께 연주를 해봤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음악적으로 더 유능한 매닉스인 제임스와 션만이 실제로 연주를 했다. 40분 동안 ― '친구'에게 해주는 가격이었는데도 그들은 그만큼 밖에 비용을 지불할 수가 없었다 ― 그들은 두 곡을 녹음했고, 파월과 그의 조수 토니가 프로듀싱했다. 청소년기의 불안에 대한 조밀하고 굉장히 단순한 쓰리 코드 펑크 찬가인 'Suicide Alley'는, 당시에도 그들의 최고의 노래라고 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비사이드인 'Tennessee (I Feel So Low)'는 바이블 벨트Bible Belt*의 편협성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에게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노래였다.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지역(근본주의 중심)
마스터 테입 구입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던 그들은 그들만의 제 3세대 복사본을 프레스 공장에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음질이 흐릿하고 탁한 이유이다 (나중에 밴드는 그들이 'Little Baby Nothing' CD 싱글에 이 노래를 실을 계획을 세우고 있던 때, 동시에 이 싱글을 재발매하려던 글렌 파월과 원본의 저작권을 두고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그들은 300 장의 7인치 싱글을 만들어서 박스에 넣어 제임스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들은 필요하게 되는 대로 직접 슬리브를 붙였고, 기자들에게 싱글을 우편으로 부치기 시작했다.
NME의 스티븐 웰스Steven Wells는 'Suicide Alley'/'Tennessee (I Feel So Low)'를 '이주의 싱글'로 꼽았다 (혹은, 그의 정확한 약을 한 트로츠키주의적 언어를 빌린다면, '이주의 백인 락 반란소년 싱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다른 싱글 수령자였던 Beat The Street 팬진의 마크 브레넌Mark Brennan은 충분히 감명받아 링크 레코즈Link Records에서 발매된 펑크/Oi! 컴필레이션인 Underground Rockers에 두 곡을 모두 실었다. 브레넌이 션에게 전화를 걸어 저작권 사용료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묻자 무어는 그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자선 단체로 보내요."
세 명의 매닉스는 뉴포트의 TJ's나 카디프의 스퀘어 클럽 같은 지역 공연장에서 몇 번의 공연을 가졌다 (매니저 마크 존스와 리치의 여동생 레이첼 단 두 명만이 참석했다). 삼류 인디 공연장인 TJ's에서 열린 작고 친근한 이 공연은 세 명의 프리처스로서의 첫 등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니키 와이어의 주장과 같이 밴드가 딱 달라붙는 흰 바지와 흰 던롭 그린 플래쉬 플림솔 신발을 착용하고 무대에 올랐다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기도 한다. 시각적인 수법으로써는 천재적인 솜씨였다. 80년대의 색채 코드가 ― 지친 '대안성'의 기표인 ― 검정이었다면 (닳아진 검정 데님과 맥주에 젖은 검은 스웨이드 부츠), 매닉스는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정리이자, 작별, 관계 청산/꺼지라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깨끗하디 깨끗했고, 깔끔하고 깔끔하디 깔끔했다. (하지만 플림솔 신발은 단순히 편의상 신은 것이었다. 니키의 부실한 발에는 그것이 더 편안했기 때문이다.) 훗날 Sounds에 매닉스의 첫 음악 언론 프론트 커버를 써주게 되는 존 롭John Robb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너무나 문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배기 바지를 입고 있을 때, 그들은 딱 붙는 바지를 입었다. 시류를 거스르는 일이라면 뭐든 했던 것이다."
또다시, 그날 밤 그들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금지당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가죽 옷을 입은 늙어가는 단골 펑크족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했던 재미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가 ― 누군가가 ― 빠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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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IN 1985/I PLACED A BET AND LIED/LOSING ALL THAT I HAD/AT LEAST WITH ALL MY HEART INTACT
몇 번을 봐도 감동적이예요, 이 부분은 특히 더욱, 이렇게 한글로 보니 더더욱, 너무도 부드러운 번역에 더더더욱.
ㅋㅋ그 부분 뭔가 재밌어요. 내기를 해서 모든 걸 잃었다는 말이 삼천파운드 빚을 지게 된 일을 암시하는 건지..?ㅋㅋㅋ
저도 특히 재밌었어요. 실수로 한번 날려서 다시 하느라 니키 대학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재입학 시켜버렸지만 그래도 덩달아 두근두근하더라구요 @_@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