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아름다운 덕련리(德蓮里)
주덕읍지 1058쪽
위치 및 유래
덕련리 창동마을과 조동마을은 주덕읍 소재지인 신양리에서 북쪽으로 신중리 요도천을 건너 제내리 성동마을 앞을 지나 노은면 솔고개로 향하는 약 8km 거리에 위치하며, 원래는 충주군 덕면(德面)에 속한 곳이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 시에 장내리(檣
內里), 조동(鳥洞), 창동(倉洞)을 병합하여 덕련산(德蓮山)의 이름을 따서 덕련리(德蓮里)라 칭하고 주덕면에 편입했다.
마을이름은 옛날에 창고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창동(倉洞)과 조고리로 불리던 조동(鳥洞) 2개 마을이다.
1995년 3월 20일 충주시 조례 제144호('95.2. 28공포)로 주덕면이 주덕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주덕읍 법정리동의 하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련리의 최북단은 산45-1, 산45-2로 노은면과 경계를 이루고, 최동단은 산15번지 관리지역이며 최남단은 83-3번지 임야로 장록리와 맞닿아있으며, 최서단은 산 52번지이다.
1974년의 창동(倉洞)마을 모습으로 지붕개량의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고는 있으나 아직은 정겨운 초가집이 훨씬 더 많이 보이며
초가집이 전부 사라지고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으로 변신하였다. 마을길도 현저히 정리되어 주변에 가로수까지 보이며, 사진 또한 흑백에서 칼라 사진으로 엄청난 변혁을 갖고 왔다.
3) 자연 마을 지명
◇ 두집-담【마을】 조동(鳥洞) 초입 마을.
◇ 공-말【마을】 조동(鳥洞)의 북서쪽에 있는 끝 마을.
◇ 조-동(鳥洞) (조고리)【마을】양달 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공말로 이어 딸린 마을.
◇ 양달-말【마을】599번 도로의 서쪽.
◇ 음달-말【마을】양달말의 동쪽 마을
◇ 중턱-말【마을】양달말의 북쪽 마을.
◇ 창-동(倉洞) (창말)【마을】 덕련리에서 주가 되는 마을로, 양달 말 음달 말 중턱말을 합친 이름으로 옛날에 창고가 있었다고 전해짐
◇ 마을비 : 마을비는 서울에 거주하는 유관수옹(83세)의 아들인 유해윤이 2002년도에 사비(私費) 200만원을 들여 희사하였다.
고향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자(父子)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담겨져 있어 더 웅장하게 보인다.
4) 풍수학으로 본 덕련리(德蓮里)
창동마을 위쪽에서 바라보면 덕련산과 쥐대가리봉이 있다.
풍수학자 재산(宰山) 김대환1)에 의하면 덕련리(德蓮里)는 주봉(主峰)인 덕련산(德蓮山)의 형상이 탈기와 박환을 거듭하여 아주 힘차고, 이쁘게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박쥐 형상의 6개의 낮은 봉우리들이 양명한 귀(貴)혈로 6정승 정도의 큰 인물을 배출할 훌륭한 터전으로 보이며 특히 쥐 대가리봉으로 이어지는 즉, 큰 산에서 넓은 들판 쪽으로 늙은 쥐가 먹이를 찾으러 떠나는 노서하전(老鼠下田)형 1)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로 족보로서 증거를 제시하는 대조풍수학의 거장의 명당혈(明堂穴) 영향으로 인하여 먹 거리가 늘 풍족하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이농(離農)현상으로 고향을 떠나있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귀농(歸農)과 특용작물 재배 등의 고소득으로 인하여 덕련리(德蓮里)의 풍수학적인 참의미를 반드시 되찾을 것이라고 한다. 풍수학적인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동(鳥洞)마을엔 벌써부터 외지인의 터 잡이가 한창일고 있었으며, 2006년 9월 28일 충청북도 최초로 국내 자동차업계를 대표하는 현대 모비스와의 농촌사랑실천 1사 2촌 자매 결연을 맺어 농번기 일손 돕기, 마을농산물 팔아주기, 행사지원, 현대 모비스 견학 등 상호교류계획서를 교환했으며, <덕신사과 작목반>에서의 봉사활동 등으로 각종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다.
또한 이 마을 출신의 이시종의원은 기획예산처에서 행정자치부에 「2007년 정기직제 협의결과 통보」공문을 시행, 2007년 예산을 확보함으로써 그동안 갈망해왔던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中源文化財硏究所)>를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인 충주에 개청함을 확정 시켰다. 그동안 (사)예성문화연구회 등 충주를 비롯한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역 사학자들은 중원문화에 대한 연구 활동을 지속해오면서 한국 역사학계에서 중원문화에 대한 개념이 인정되지 않아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등 주변 문화로 취급 받아온데 대해 한계를 느껴왔었다. 그러나 이번에 문화재청 산하, 경주의 신라문화재연구소를 비롯해, 부여, 창원, 나주등 4곳의 지방연구소에 이어 중원문화재 연구소가 5번째로 충주에 설립됨에 따라 중원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으며 중원문화에 대한 중심이 충주(忠州)라는 것을 국가가 확실하게 인정함으로써 중원문화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재야 학자나 지역 사학자를 중심으로 거론돼오던 ‘중원문화(中源文化)’에 대한 독자적인 조사 및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 돼 한국 역사에 ‘중원문화(中源文化)’라 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또한 내년에 개청하는 <중원문화재연구소>는 충북지역뿐 아니라 강원, 경북 북서부 일원을 조사지역으로 하고 4급, 5급 연구관을 비롯하여 연구직 5명과 4명의 행정·기능직으로 출범하게 된다고 한다.
위의 몇몇 사례들만 보아도 최고(最古)의 양택지(陽宅地)인 덕련리(德蓮里)의 화려한 용틀임은 이미 빛을 발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 할 수 있겠다.
5) 덕련리(德蓮里)의 지형
항공사진을 통해 본 덕련리의 모습은 산과 들, 그 사이를 흐르는 개천의 조화가 잘어우러져 마을을 이루고, 인간이 주거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보여 진다.
6) 덕련리(德蓮里) 마을 홈페이지 http://cjtown.cj100.net
충주시 마을 홈페이지 안에 덕련리(德蓮里) 마을 홈페이지가 함께 운영되고 있다.
우선 마을 소개영역에 이장 인사말, 기본 현황, 지명, 고향사진관, 찾아오는 길 등의 항목이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주변 명소, 마을 장터, 마을회관, 영농 정보, 테마 여행, 사랑방 등의 메뉴로 알기 쉽게 운영되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창동리 이장 이삼영입니다. 마을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예전부터 인심 좋기로 이름이 나있으며 마을 주민 간에서로 화목하고 도우며 더불어 사는 정겨움이 나는 마을입니다. 마을 주민과 더불어 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내 고향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며 다시 찾고 싶은...... 그리고 여러분의 편안한 휴식처가 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우리 마을은 언제나 열려있
습니다. 언제든 방문하십시오. 찾아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도 훈훈한 인심과 고향의 정을 듬뿍 안겨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홈페이지에 머무시는 동안 각종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하시고 좋은 추억으로 오래 간직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조동리 이장 이광순입니다. 우리 마을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존경하는 경로효친사상이 숨쉬는 마을입니다. 또한 우리 마을은 앞으로 친환경농업을 육성 발전시켜 살기좋은 마을로 부응코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끝까지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마을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방문한 이곳은 누구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주문할 수 있고, 직접 방문하여 수려한 경치도 즐길수 있는 곳입니다. 시간이 허락 되신다면 방문 하시어 아름다운 자연정취 속에서 따뜻한 인정과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귀하와 더불어 나누고 시원하게 웃으며 가까운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위의 이장 인사말에서 덕련리(德蓮里)의 밝고 힘찬 미래가 성큼 다가옴을 느낄 수 있으리라......
2. 마을 사람들
1) 자연 마을별 조사
□ 최근 인구동향
구분 년도 가구수 농가 비농가 인구수 남 여
창동 2004 67 64 3 162 84 78
2005 68 64 4 161 83 78
2006 70 67 3 162 83 79
조동
2004 24 21 3 53 25 28
2005 24 21 3 52 24 28
2006 26 21 5 52 24 28
덕련리(德蓮里)의 최근 인구동향을 살펴보면 다른 시골마을에서처럼 급격한 인구감소현상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늘 진취적이고 창의적으로 마을의 살림살이를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이장님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님을 비롯하여 온 마을 주민들의
혼연일치된 단결력이 아닌가한다. 또한 훌륭한 양택지(陽宅地)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양명(陽明)한 기운도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흔히 시골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男兒選好)사상이 이 곳 덕련리(德蓮里)에선 사라지고 있는듯하다.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그 현상은 더 뚜렷한데 1~20세의 남․녀 비율이 창동 마을은 12:16으로 여자가 4명이나 더 많고 조동마을도 남2:여4로 오히려 여자가 배나 더 많다. 다만 21~40세에선 그런 현상이, 특히 창동마을에서는 14:5로 뚜렷이 보이지만 조동마을은 1:1로 별로 눈에 뜨지 않는다. 또한41~60세나 그 이상의 연령대에서도 남.녀의 성비가 아주 안정적으로 보인다. 다만 농촌 등 촌락의 대표적인 특징인 인구의 고령화현상2)만큼은 이 곳 덕련리도 60대 이상이 전체의 49.5%로 2005년 인구센서스의 우리나라 통계치8.7%에 비하면 예외 없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업구조의 근대화에 따른 인구 이동과 이에 수반되는 가족제도의 붕괴에 의한 동거 부양의 감소 또는 핵가족화로 인한 가족의 세대별 분화가 추진되었고, 농촌의 청.장년층이 도시에 집중됨에 따라 젊은 세대가 없는 노인 단독세대가 많이 형성되는 양상을 보이게 마련인데, 이 곳은 창동마을 2세대만이 독거노인세대이고, 조동마을엔 한 세대도 없다.
창동마을의 최고령세대주는 이용구 옹으로 93세이며 가장 어린 세대주는 39세의 김
홍렬, 이문영, 이관희, 이동련이다.
2) 인구의 고령화란 전체인구에 비해 65세 인구가 5%를 넘는 것을 말하며, 노인인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65세 이상을 노인이라 규정 한다
□ 주거 현황
창동마을과 조동마을 주민 모두 자기 소유의 단독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충주시 홈페이지에 수록된 충주시 도시지표 중 주택 보급율이 92.3%인데 비하여 이 마을은 완벽하게 주택 보급률 100%로 나타나고 있다. 도시주택형의 편리하고 아름다운 주택 들이 거의 대부분이며 특히 조동마을 쪽으로는 별장형 전원주택이 이미 여러 채 들어섰으며 도시민 유입장으로의 터 닦기가 한창이다.
□ 조동(鳥洞) : 조동마을은 성주이씨가 6세대로 총 21세대의 35%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집성촌의 모습이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는 박씨부인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한다.
즉 세종의 8남, 영풍군(永豊君)4)의 부인인 순천 박씨(朴氏)부인(박팽년의 딸)의 외손 부인은 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의 딸. 1441년(세종 23) 영풍군에 봉해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난 후로 정치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에 의하여 제거되면서 예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안성에 이배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에 의한 단종 복위사건을
계기로 가산(家産)과 고신(告身)을 몰수당하고 임실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복위기도가 탄로 나자 살해되었다. 1712년(숙종인 성주 이씨들이 집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많이 축소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4) 시호는 정렬(貞烈). 이름은 천(瑔). 세종의 여덟째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혜빈(惠嬪) 양씨(楊氏)
이다.
3) 마을을 빛낸 분들
가. 옛날 인물
① 3.1 독립 운동 가담 이 교설(?~1946)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운동 당시 북어, 미역 등을 팔러 다니는 장돌뱅이로서 청안장과 괴산장에서는 만세운동이 한창이나 음성 원남장에서는 아무 기미가 안보여 동아리 세 분과 함께 술을 한 잔 드시고는 만세운동을 독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지서를 습격하자 놀란 일경은 도망을 가버렸다 한다. 그러나 새오랑이 집에 도착하고 얼마 뒤 또 다른 일본수비대에게 허리띠도 제대로 못 맨 채, 세 분이 모두 붙잡혀가서 심한 매를 맞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고는 음성경찰서 유치장에서 몇 달간이나 옥살이를 하였다한다. 그 후 작고하기 전까지 매년 그맘때가 되면 장독이 도져 평생을 고생하다 결국은 중풍이 발병, 7년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②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 일명, 병하 柄夏)(1859.9.10~1944.5.13)
己未九月十日(1859년 9월 10일) 성주이씨(星州李氏) 통정 이헌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하(柄夏)의 휘(諱)는 교면(敎勉)이고, 字는 여직(汝直)이요, 호(號)는 연은(蓮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입학수학(入學修學) 학문이 뛰어나고 천성이 仁孝하여
鄕里는 물론 인근동리(隣近洞里)에서 굴지(屈指)의 대 유사(大儒士)가 된 것이다. 학교라고는 간혹 한문서당이 전부이던 시절이라 종족(宗族)은 물론이고 향리인근동(鄕里隣近洞) 원거리(遠距離) 주민 및 자녀들이 거의 다 문맹자(文盲者)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내 집 사랑방을 한문(漢文)서당(書堂)으로 제공하고 향리(鄕里)아동(兒童)을 가르침에 원근(遠近)을 물론(勿論)하고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는 학도(學徒)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강론(講論)을 들었으며, 극빈(極貧) 학생들에게는 사재(私財)를 털어 지필묵(紙筆墨)과 서책(書冊)을 무료로 제공, 불철주야(不撤晝夜) 전력(專力)을 다하여 가르치니 문하생(門下生)들이 후(後)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지사(志士)들이 많이 속출(續出)하였다.
1910년 국치(國恥) 후 일제강점(日帝强占) 때는 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强)하여 정미년(丁未年) 의병(義兵) 거사(擧事)시(時)는 음양(陰陽)으로 의병(義兵)을 도와 민족자결(民族自決)의식을 고취(鼓吹)하였다. 어느 날 의병 수명(數名)이 선생(先生)을 찾아와서 부족(不足)되는 군량미(軍糧米)를 요구하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수고한다는 치사(致辭)와 함께 돈과 쌀, 그리고 애마(愛馬)까지 주어 보냈다한다. 즉시 왜경(倭警)이 정보를 입수(入手) 득달같이 달려와 소리치자 선생은 자진(自進)하여 아주 당당하게 내 민족(民族)을 내가 구원(救援)하기로서니 무슨 잘못이 있느냐? 하며 대항하자 왜경(倭警)이 총검(銃劍)을 가슴에 대고 위협(威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자약(泰然自若) 나는 이미 사생(死生)을 결단(決斷)한 자(者)인즉 의리(義理)와 도덕(道德)을 아는 자(者)이면 너희들 양심(良心)에 맡기겠다 고 하며 의지(意志)를 굴(屈)하지 않으니 그들도 가히 대인(大人)됨을 알고 스스로 물러
갔다한다.
그의 문하생(門下生)들도 선생(先生)의 배일(排日) 정신을 본받았는데 안동기(安東基)는 조선(朝鮮)총독(總督)을 살해(殺害)하려고 모의(謀議)하다가 사전에 발각(發覺)되어 일본(日本)관헌(官憲)에 붙들려 투옥(投獄) 5년 후에 출감(出監)되었다한다. 또한 일제(日帝)의 단발령(斷髮令)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손과 문하생들의 귀감(龜鑑)이 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일제(日帝)가 각처(各處)에 사립(私立)강습소(講習所)를 설치(設置)하여 학생(學生)을 모집(募集)하자 선생은 현금(現今) 일제는 저희들의 말을 가르치고 순화(淳化)하려하고 광분(狂奔)하고 있으니 이에 속지 말고 이 서당(書堂)에서 공부(工夫)하기를 역설(力說)하여 한 사람도 강습소(講習所)에 가는 자(者)가 없었다한다.
하루는 왜인(倭人)서장(署長)과 조선인3순사(巡査)가 찾아와서 서당(書堂) 철거(撤去)를 종용(慫慂)하니 선생은 강습소(講習所)는 왜인(倭人)들의 글을 가르치는데요, 여기는 우리글은 가르치는 곳이다 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하(下)에 이들을 추방(追放)하였다. 또한 선생은 덕성(德性)이 온후(溫厚)하고 언소(言笑)가 적으며 아무리 혹서(酷暑)철이라도 대립과 옷을 벗지 않았으며 지절(志節)이 출중(出衆)하고 처신(處身)이 근엄(謹嚴)하였다.
이렇게 강직한 선생이었으나 부모님께서 노환(老患)으로 와병(臥病)중에는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시병(侍病)하였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돌아가심에 3년상을 치루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칭송 않는 이가 없으며 타인(他人)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이로써 훈육(訓育)과 효성(孝誠)박애(博愛)로 일생을 바치시고 저서(著書) 수(數)권(卷)이 있으며 1944년 5월 13일
조국의 광복을 1년여 앞두시고 향년 88세로 졸(卒)하였고 묘소(墓所)는 부흥산(富興山) 도덕골에 있다.
(三蓮亭重修發起文, 1970.4.1. 蓮隱李先生行狀記. 김종훈(84세) 보관문서)
나. 현대 인물
◇ 이시종(1947.4.18)
ㆍ덕신초등학교-충주사범병설중학교-청주고등학교-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ㆍ행정고등고시 합격 (10회)
ㆍ강원도 영월군수
ㆍ1, 2, 3기 민선 충주시장
ㆍ제17대 국회의원
◇ 정호진(1954.4.4)
① 학력 : 덕신초등학교-주덕중학교-충주고등학교-청주과학대 행정전산과 졸업
② 경력 : 증평출장소 기획실장-충청북도공무원교육원 교무담당-충청북도 기업지원과 자금지원담당-충청북도 의회사무처 홍보담당. 의장비서관을 거쳐 현재 충청북도 총무과 인사담당사무관
③ 수상 : 총무처장관 및 대통령 표창
◇ 김선호(1958.4.22)
① 학력 : 덕신초등학교-주덕중학교-충주고등학교-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② 경력 : 충청북도 관광과, 지방과, 기획관실-충청북도 총무과-감사관을 거쳐 현재 충청북도 혁신분권과 성과관리담당사무관
③ 수상 : 행정자치부장관 및 대통령 표창
④ 시조부문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⑤ 저서 : 시집「창공에 걸린 춤사위」, 공저집「차마 그 붉은 입술로도」 출간
◇ 이대희
6.25동란 때 청주경찰서장을 지냈으며 충북도경수사과장, 성북경찰서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소내미에 묘가 있음
◇ 이부영(1927년생)
고려대학교 졸업. 육군대령을 예편 하고 농협중앙회 이사 및 농협중앙회부회장 역임
◇ 이창순(1943년생)
이석환의 아들로 충북대학교 졸업 후 1969년 육군 소위 예편 1986년 주덕 로터리클럽 회장, 1988년 로터리클럽 충주 지역 대표 1990년 주덕농협 조합장 4년간 역임 후
1998년 주덕농협 조합장 4년간 역임
◇ 이구영(1930년생)
고려대학교 졸업. 육군대령 예편. 새마을 운동 본부 사무총장, 새마을 연수원 부위원장, 과학기술대학 사무총장 역임
◇ 유해운(1958.9.22)
① 학력 : 창동마을비를 기증한 유해윤의 동생으로 청주대학교(학사)-연세대학교(석사)-광운대학교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음
② 경력 : 충청북도교육청,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원자력재단, 광운대학교 및 경북대학교 겸임교수를 현재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석 행정원
③ 저서 : 환경갈등과 님비 이론.1997, 공무원관리론.1999, 행정서비스의 혁신.2002
④ 사회 활동 : 한국행정사학회 부회장, 한국부패학회 이사, 산업자원부 전력정책심의위원
◇ 이재인(1936년생)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학사)-한양대학교 대학원(석사)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명예교수
◇ 이장영(1942년생)
청주사범학교를 졸업 후 대구 달성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 이문수(1946년생)
제주항공대를 졸업하고 현재 안동대학교 교수
◇ 이항기
구성사 약방을 운영하였고 국회의원에도 출마하였으며 덕련리 초창기에 마을 이장을 지내기도 함, 연희전문학교 졸업
◇ 이광련(1946년생)
조동마을 초대이장을 역임한 이석희의 손자로 1971년 중원군 내무과, 1993년 노은면 총무계장, 1997년 노은면 부면장 1998년 지방사무관 대우, 2000년 충주시청 기획행정 세정과 계장
◇ 이조영(1925년생)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금가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 이심원(1954년생)
서울 성균관대학교 졸업 후 극동건설 부장-극동건설 감사과장-극동건설 상무
◇ 정동진(1961년생)
충북대학교 졸업. 기술고시. 현재 남원건설 이사
◇ 정동욱(1949년생)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동부지청장, 서울검찰청 검사로 근무한 후 현재 변호사, 홍조근정훈장서훈.
◇ 이혁훈(1965년생)
대전보건대, 신학대학 졸업 후 현재 의정부 교회 목사
◇ 정동윤(1939년생)
청주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법학박사, 부장판사, 고려대학교법과대학장, 학술원회원
행정리 단체명 대 성명 재임시기 재임기간 비고
◇ 이용진(1940. 3. 25)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의 증손자로 태어남.
① 학력 : 덕신초등학교-충주중학교-충주고등학교-한양대학교 체육과를 졸업하고
② 경력 : 중등교사역임,국가대표선수양성공로
③ 표창 : 교육감상 11회, 체육부장관 및 교육부장관상 각 1회, 김영삼대통령표창 1회를 수상하였으며 200.8.31 노무현대통령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음
④ 2005.8.31 수원 송언여자중학교장으로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함. 한마디로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이홍배-이석동-이용진-이근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뿌리 깊은 교육자 집안임을 알 수 있다.
◇ 김종용(1944. 12. 16)
조동마을 김종훈의 동생으로 덕신초등학교-주덕중학교-청주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청주대학교 상학부 상학과를 졸업한 뒤 ROTC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제6128부대에서 소대장을 지내고 1970년 묵호종합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후 1977년 원주여자고등학교, 1980년 태백 황지여자상업고등학교를 거쳐 현재 동해상업고등학교 부장교사로 근무
◇ 이석중(1968. 9. 15)
조동마을 출신으로 덕신초등학교-주덕중학교-충주고등학교-충북대학교, 현재 음성 대소중학교 수학교사로 근무
◇ 이영순(1951년)
1964년 덕신초등학교를 거쳐 주덕중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1년 아리랑택시 국제관광공사에 입사 후
1974년 현대정공본사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며 명지대학교(야간)를 졸업 후
1986년 울산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재 현대중공업부장과 기술본부 팀장을 맡음
◇ 이근백(1970. 11.14)
이교면의 고손자로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컴퓨터교육 석사학위 취득, 현재 천안 계광중학교 컴퓨터교사임
◇ 김황수(1954. 10. 6)
조동마을 김종훈의 아들로 덕신초등학교 16회 졸업 1981년 방송통신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중원군농촌지도소를 거쳐
1984년 이류농업협동조합을 거쳐 1991년부터 청주농업협동조합에 근무 중이며 현재 직위는 상무임
◇ 이상옥, 명옥(1974. 1. 19)
이교면의 고손녀들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박사학위 취득 후 동물자원학과 근육식품연구실에 근무함 이탈리아 로마 Accademia del Gioiello 보석세공 디자인 졸업.
2004 이탈리아 Camera di Commercio Roma 공모전에서 대상 수상
◇ 이석희(1899년생) 호는 고당(孤堂)
마을 초대 이장 역임(조동마을→창동마을로 구역 변경됨)
◇ 홍존류
창동마을 초대 부녀회장 부녀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하였으나 작고함
◇ 이재덕(1940.5.13)
창동 마을 초대 새마을 지도자로 거금 50만원을 희사하여 창동마을 경로당 건립 부지를 구입, 창동마을 경로당 및 마을회관을 직접 설계하여 완공함
1978.2.28 충주문화방송 주최 제 2회 새마을 농민 교실 전 과정 이수
1994.12.1 충청북도지사 표창장
1999.6.10 농림부장관 표창장
1:1 봉사결연서
◇ 어만우(1942.1.25)
주덕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대 4H회장으로 열심히 활동함
◇ 이순임(1961. 5. 10)
새마을 지도자 이재덕의 딸이며 농촌여성지도자로서 건전한 농촌가정을 육성하고 회원간의 친목도모와 밝은 지역사회를 만들고 지속적인 농촌 발전과 농촌 여성의 지위 및 권익 향상에 기여하고자 설립한 <충주시농업기술센터, 생활개선회> 주덕읍 부회장
을 맡고 있음.
◇ 이일훈(1950년 생)
90년대 시설채소(부추) 공동출하 회장으로 전국서예대전 입선 2회, 충북서예대전 입선 2회, 김 생 서예대전 입선
◇ 이삼영(1952.4.26)
창동마을 이장으로 주덕읍지 기초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여 제대로 된 기록물이 되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다
◇ 이만영
1940년대 호상단계 조직함
◇ 김종훈 (1923. 12. 17)
주덕면사무소(1946.3.30~1956.11.15)에서 근무한 후 퇴직.
70년대 조동마을 초대 새마을 지도자, 조동마을 소로길 확장공사, 조동마을회관 건립,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6~7개의 소하천 다리 놓기를 하는 등 6년 봉사
◇ 조우순(1952. 2. 5)
김종훈의 며느리로, 70년대 조동마을 초대 부녀회장으로 10년간이나 역임하였고
1987.11.11.충청북도지사(노건일)로부터 새마을사업에 기여한 공으로 표창,
1996.10.1 충청북도지사(주병덕)으로부터 화목한 가정상 수여
2004.1.18 유도회 주덕지회장(곽호종)으로부터 효부상 수여
◇ 이석환
조동마을 초대 이장으로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으나 작고함(이창순 선친)
◇ 이광순(1954.8.3)
조동마을 이장으로 주덕읍지 기초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여 제대로 된 기록물이 되도록 노력하였으며 2004.12.31 충청북도지사(이원종)으로부터 으뜸충북을 위해 기여한공으로 표창장 수여
◇ 이종인
이웃마을 장록리 출신으로 이동원을 총무로 하는 <덕신사과작목반>을 처음 만들었으나 지금은 탈퇴하고 이웃마을 장록리에서 생활함
<각 종 표창장 및 상패 >
창동마을은 전 주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영농폐비닐 수거에 만전을 기하여 왔을 뿐만아니라 수거실적 평가 결과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2002년과 2003년 연속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상금은 각 30만원이다. 조동마을 또한 2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한다.
4) 마을을 위한 모임
□ 창동
가. 창동(倉洞) 4H
70년대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조직되어 활발하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그 후 창동(倉洞) 시설채소 공동출하반으로 흡수되었다가 청년회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발전회로 개명되어 활동하고 있다
나. 창동(倉洞)시설채소 공동출하반
70년도에 초대회장 이일훈이 10농가를 통합, 조직하여 고추, 오이 등의 농산물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센터에 공동 출하하였으나 현재는 이삼영과 어길선만이 비닐하우스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다. 창동(倉洞) 운영위원회
제 1조 명칭
본 회는 창동 운영위원회라 칭 한다
제 2조 목적
본 회의 설립 목적은 마을주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재정의 운영과 자산의 관리 및 동회의의 결의에 의한 제반 사항 운영을 목적으로 한다
제 3조 회원의 자격
본 회의 회원 자격은 1978년 1월 이후 창동마을에 거주한 자로서 운영위원회의 결의에 의한 출자액을 납부한 자를 회원으로 한다
(단, 분가를 하였거나 전입을 한 자는 1년 이내에 본 회의에 가입하여야하며 가입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을의 제반 경비를 분담하여야 한다)
제 4조 임원의 구성 및 임기
① 임원의 구성은 위원장 1명, 위원 6명, 감사 2명으로 한다.
위원장은 총회에서 선출하고, 위원은 각반 2명을 반원들이 지명, 선출한다. 감사는 위원 8명 중 2명을 총회에서 선출 한다
(단, 1988년 1월 총회 결의에 의하여 이후 전임위원장은 당연직 임원으로 한다)
② 운영위원회의 모든 임원과 마을 이장단의 임기는 각 2년으로 함을 원칙으로 하며 연임은 원칙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제 5조 자산
자산은 현금과 고정자산으로 나눈다
① 현금 : 기본 자산과 회원 출자금 및 기타 잡수입으로 한다
② 고정자산 : 고정자산은 1988년 2월 1일 현재 마을에 있는 공유의 모든 토지, 건물 및 부대시설, 집기를 모두 포함 한다
제 6조 자산의 관리
① 현금은 운영위원장이 관리 한다
여수신업무에서의 채권, 채무관계는 채권자는 운영위원장으로 하고 채무자는 운영위원 1인 이상 승인 확인과 연대보증인 2인의 보증으로 이루어진다
② 고정자산의 관리는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하기위하여 위원회규칙에 명시 한다
․ 이장 관리 : 공공건물 회관내의 모든 부대시설 및 집기 구판장의 부대시설 및 집기
․ 지도자 : 창고내 물품 일절
․ 부녀회장 : 부녀회 그릇
제 7조 회의
① 총회 : 운영위원회 총회는 매년 1월 5일로 한다. 단 필요하다고 인정 될 때는 운영위원회 임원회의 결의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
② 임시회 :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운영위원회 임원회의 결의에 따라 임시총회를 개최 할 수 있다
③ 임원회 : 운영위원장이 운영위원회 운영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수시로 소집할 수 있다.
제 8조 경비의 지출
① 고정경비의 지출은 전례에 의해 명시 한다
이장 백미 7가마, 운영위원장 2가마, 지도자 4가마, 반장 1가마를 각각 지급한다
② 기타 경비의 지출은 필요불가결의 지출을 원칙으로 하며 청구서에 의해 운영위원장이 지출하고 총회 이전에 자산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제 9조 동기의 대여 및 인력동원
마을의 공동사업(작업) 및 회원의 애사에는 인력동원을 할 수 있다.
회원이 본동을 이주한 후 만 3년이 경과한 자는 동기는 무상 대여 받을 수 있으나 인력동원은 불가하다. 만약 인력동원을 받고자 할 때에는 상응하는 대금을 지불하여야한다. 단 회원이 아닌 자가 동기(상여, 천막)의 대여를 할 때에는 백미 5두를 지불하여야 한다.
제 10조 회칙의 개정
회칙의 개정은 임원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동의로 안건을 작성, 총회에 상정하여 총회 과반수 참석과 참석인원 과반수의 동의에 의해 개정 할 수 있다
제 11조 시행일
이 회칙은 1988년 2월 1일 자로 전운영위원회 회칙의 분실로 재 제정 시행키로 한다.
※ 회칙 개정
① 1990년 1월 5일 총회에서 제 8조 1항 개정 임원 보수는 이장 7가마, 운영위원장 1가
마, 지도자 반장 각 5두를 지급 한다
라. 창동(倉洞) 대동계
◇창동대동계 규약
대동계 규약을 살펴보면
- 본(本) 계(稧)는 덕련리(德蓮里)대동계(大洞稧)로 칭함
- 계 장소는 계장(稧長)의 가정(家庭)으로 함
- 구(舊) 신(新) 계원(稧員)은 물론하고 동권(同權)으로 함
- 계원(稧員) 중(中) 3년(三年) 불참(不參) 시(時)에는 여하(如何)한 사정(事情)을 불문(不問)하고 제명(除名)하기로 약정(約定)함
- 계원(稧員) 중(中) 약 타처(他處)로 이거(移居)시(時)에는 본인(本人)이 지면(紙面)으로 이거(移居) 주소(住所)를 명세(明細)히 기재(記載)하여 계장(稧長) 전(前) 통고(通告) 하기로 함
- 엽서(葉書)로 수계일(修稧日)을 통신(通信) 후(後)불응(不應)시(時)는 제명(除名)하기로 함
- 타(他) 동(洞)의 계원(稧員)은 추입(追入)하지 않기로 함
- 타(他)에서 본동(本洞)으로 이주(移住)한 후(後) 1년 내(一年內)에 본(本) 계(稧)에 불입(不入) 할시(時)에는 추입(追入)은 불허(不許)함
- 본(本) 계(稧) 진입(進入) 시(時)에는 회(會)계원(稧員) 의하여 진입(進入)하기로 함.
이상(以上) 규약(規約)은 정(定)한 일자(日字)로 단행(斷行)하기로 함
단기(檀紀) 4292(四貳九貳)년
10월(十月) (巳亥年)
마. 덕신사과작목반
① 홈페이지 주소 http://farm.cj100.net/duksin/
② 덕련리 244번지에 왕의상, 이수창, 심준섭, 이석두, 이정훈, 이석립, 김연창, 박종현, 이관희 등이 1988년도에 <덕신작목반>을 구성하고 2004년 5월 <덕신사과영농법인>을 설립하여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초성재배를 하여 미생물을 살리는 방법으로 토질에 신경을 쓰고, 저 농약으로 질 좋은 사과를 생산하고 있으며 연간 30톤 정도를 가락동 농수산시장으로 납품하고있는 모범적인 작목반으로 널리 알려졌다.현재 법인대표이사는 이석정이 맡고 있다.
③ ☎전화 : 043-846-4138
④ 이메일 : huji4138@yahoo.co.kr
가. 조동(鳥洞) 대동계
조동(鳥洞)마을에 병신년(丙申年1956년) 음(陰)11월(月)초(初)7일(日)부터 오늘날까지의 행사경비내역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상.하(上下) 두 권에 기록, 보전되어 있으나 문서화된 특별한 규약은 없다
처음 기록인 병신년(丙申年1956년)의 기록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보안계(保安稧)>
조동(鳥洞) : (丙申年 陰十一月初七日)병신년당일실봉 상(丙申年 當日實捧 上) (乙未年分配分) 副本合
一. 백미1석(2가마)8두(말)9승(되)5합(홉)정
二. 정조 3석 2말 (註 가. 백미 1석 18두 9승 5합 (신입자 박영근 分 백미 1두 포함)
나. 정조 3석 2두 중에는 동년동답
三. 一제로 벼 17말과 전소작료 10말과 신입자 이완종 分 벼 2말 이상 합계 29말 포함되었음.
당일경비내역
一. 백미 3말 9승
一. 돈육대금으로 1말 5승
一. 용지대 3말
一. 경비 3말
一. 紙價 1말
一. 소임 벼 2말
이상 합계 백미 14말 4되, 벼 2말, 이상을 제하고 잔여수량 왼쪽과 같습니다.
一. 백미 1섬 4두 5승 5홉, 벼 3섬
当日 分配記
一. 李整勳 백미 10말 新斗 保 李憙采
一. 尹昌遠 백미 4두 (平木) 新斗 保 李仁錫
一. 李仁錫 백미 5두 保 尹昌遠
一. 김용배 4두 保 李讚培
一. 李綴淳 벼 1섬 保 李錫魯
一. 李憙采 벼 2섬 1말 保 李致勳 小任으로 제한 것 : 벼2말 잉여분 백미 1되, 정조 1두, 이상 당일 총분배액이 백미 1섬4두, 벼3섬 3말로 끝났고 이어서 정유년(丁酉年)의 기록으로 이어 진다. 그 후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도 총결산 수입지출부를 살펴보면
-전년도 이월금 1,595,590원
-2005. 9. 14 회관도지 : 2가마 290,000원도지
-2005. 10. 15 규산질 뿌리는데
기름값 : 100,000원
-2005. 12. 27 이석정
밭도지 : 2가마 290,000원
고추작목반 : 2,000,000원
이장 논 도지 1가마 : 145,0000원
호상계 : 2,000,000원 등으로
합이 4,620,590원이고
지출은 2,067,330원, 잔액이 2,553,260원으로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나. 조동(鳥洞) 호상단계
1940년대 이만영이 초대회장으로 마을 주민이 상을 당했을 경우 마을주민 모두가 협력하여 일을 치루고자하는 목적으로 조직하였으며 김운배를 거쳐 현재는 이문형이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상을 치루고 난 뒤, 감사의 뜻으로 70~80만원, 많게는 140만원을 기부하여 적립된 금액이 약 800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다. 조동(鳥洞)노인회
창동(倉洞)마을에 비해 노인인구가 적어서 그다지 활발한 모임이 되지는 않으며 필요에 따라 마을회관을 겸해서 함께 사용하고 있다.
라. 조동(鳥洞)부녀회
1970년대 초대회장 조우순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공동모내기 때 모내기는 물론 새참및 점심을 현장에서 직접 제공하였다한다.
현 부녀회장 이윤옥에 의하면 지금 현재 20여명으로 조직되어있으나 40대가 1명, 50대 4명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60대 이상이라는 회원의 고령화로 인하여 마을 내에서의 부녀회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으나 부녀회를 대표하여 주덕읍내 독거노인 김장 담
그기, 경로잔치, 마을 안길 청소, 재활용센터 바자회 등 여러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조동 농산물보관창고 및 농기계 보관창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미역 및 액젓을 판매한 이익금을 보태어 약 400만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한다.
매 년 말에는 전 회원이 모여 총회를 연다고 한다.
창동(倉洞)마을은 주덕영농회사에서 대신 사용하고 각자 보관하며, 조동(鳥洞)마을은 1997년 충주시에서 2,300만원을 보조받아 현재 이장 이광순이 50평을 희사한 땅에 공동보관창고를 건립하여 공동으로 보관, 사용하고 있다.
라. 농업용 시설물
구분 관정 벌크 곡물건조기 저온저장고 육묘장 버섯재배사 비고
창동 밭기반 공사 관정 10 4 3 1
조동 밭기반 공사 관정 10 1 2 1
1084
마. 밭 기반 정비사업
밭기반공사 관정
밭 기반 정비사업 5)이란 논경지정리의 반대개념으로서 농어촌 정비법 제 5조, 제 6조. 제 12조, 제 89조를 근거로 삼아 생산기반시설이 취약한 채소, 과수, 특작 등 주산단지 및 집단화된 밭을 대상으로 용수개발, 농로개설, 용 배수 시설, 밭 경지 정리 등의
기반 정비를 통해 농촌소득증대를 도모하는 사업을 지칭하며 이 사업은 1957년 개간 사업으로서 정부 보조제가 도입된 후 1994년 밭 기반 정비사업이란 명칭으로 착수되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177개 지구 36천ha의 사업이 시행되어 총 목표 사업량 110천ha의 33%를 달성하였다.
기존 문헌조사, 유사사업에 대한 분석결과, 사례지구 현지조사 등을 통해 발굴된 밭 기반 정비사업의 효과는 긍정적 효과로 영농수익 증대, 생산비 절감, 품질향상, 토지창출, 영농편의 증대, 생활환경 개선, 지역사회 안정, 식량면적 확보 등이 있으며, 부정적
효과로 생태계 훼손, 경관훼손, 대형 농기계 운행에 따른 사고 증대, 임시대책 수립곤란 등이 있다.
긍정적 효과 중 영농수익 증대의 주요 내용은 고소득 작목으로의 작부체계 변화 및 경지 이용률 제고, 동일한 작부체계내의 생산량 증대, 도시근교 농업의 경우 소득원 다변화 등이 있다.
생산비 절감은 통작 시간 절감, 수송수단의 적재량 증대, 농기계 수리비 및 감가상각비 절감, 농로 수로 등 유지관리비 절감, 농산물손상 방지에 따른 포장비 절감, 영농 부대비용 절감 등이 있다. 또한 품질향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원활한 용수공급에
따른 상품화율 제고, 먼지피해 방지, 농산물손상 방지 등이 있으며, 토지창출 효과로는길 어깨의 영농지로 사용 가능, 인근 지역 유휴자원 활용도 제고 등이 있다. 그리고 생활환경 개선의 내용으로는 기간 도로와의 연접으로 생활편의 증대, 암반지하수 개발에
따른 생활용수 확보, 자전거 승용차 이용편의 제고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밭 기반 정비사업은 농촌정착의욕을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귀농(歸農)의욕을 고취시켜 지역사회 안정 효과도 있으며, 벼 재배 면적의 확보를 통한 쌀 생산안정을 도모하고, 고용창출 및 연관 산업을 유치하는 기타 효과도 있다.
이곳 조동(鳥洞)마을의 밭 기반 사업은 1999년 농림부와 농어촌진흥공사에서 발행한 농업생산기반 정비사업 통계연보에 의하면
① 인가 년․월․일은 1997년 11월 8일이고
② 공사기간은 1997년 12월 31일~1998년 6월 30일
③ 준공면적은 전(田)29.0ha
④ 사업비는 지방비 250,560천원과 국고보조금 561,440천원으로 계 812,000천원
⑤ 농로 : 규격(5m), 연장(1,745m) 배수의 지선(222m)을 단독으로 설비하는 충주시의 시범사업이었다.
또한 밭기반 정비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두 군데나 견학을 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한다. 그러나 물 공급 부족으로 아주 큰 소득은 올리지 못하였다한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엔 장(場)까지 섰던 번화(繁華)했을, 그래서 예전 이름도 장내미 들이라던 이곳의 현재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4. 마을의 자랑
1) 동제
조동(鳥洞)마을에서는 예전부터 <무제>6)라 부르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3일안에 비가 내리곤 했었다한다.
마을어른들에 의하면 매년 지내온 것은 아니더라도 비가 안와 가뭄이 극심할 때면 마을의 명산(名山)인 덕련산(德蓮山) 절골 어귀에 올라가 맷방석처럼 생긴 큰 바위와 큰 느티나무에 금줄을 매고는 개울 건너에서 술을 직접 빚어 <무제>라 부르는 기우제
(祈雨祭)를 지내곤 했었는데, 1990년에 극심한 가뭄을 이겨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정성껏 <무제>를 지냈건만 비는 내릴 생각조차도 않았다한다. 그러다보니 마을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힘들고 해서 여러 동네어른들의 의견을 모아 1991년부터는
<무제>를 지내지 않는다한다.
그 옛날, 마을에서 무제를 지낼 때면, 그날은 마을 잔칫날로 정하여 하루 종일 여러가지 놀이를 하며 즐겼다하나 이제는 마을행사를 준비하고 이끌어갈 젊은 세대가 부족하며, 밭기반 공사로 관정을 만들어 별 불편을 못 느끼고 또한 세상이 과학적으로 급변
하다보니 <무제>라는 기우제(祈雨祭) 풍습도 자연스레 사라지는 현상을 가져왔다한다.(김종훈. 84세. 증언)
2) 풍속, 민요, 사투리, 놀이
전해지는 독특한 풍속이나 민요, 사투리, 놀이는 없다고 한다.
3) 아름다운 우리 지명
◇ 가장-골【골짜기】아망재산 북쪽의 골짜기.
◇ 강당- (진작골)【골짜기】조동 북쪽의 쥐대가리봉 서쪽 골짜기.
◇ 강탁-골【골짜기】조동 서북쪽의 골짜기. 사과 과수원이 있음.
◇ 공동-묘지【묘】안전 두실골의 동쪽 산에 있음.
◇ 너털미-산【산】창동의 동쪽 산.
6) 원래는 <물제>라 불렸으나 <무제>로 변함
◇ 덕련-교【다리】창동의 중심부 599번 도로에 있음.
◇ 덕련-산(德蓮山)【산】덕련리(德蓮里) 북쪽의 제일 높은 산.
◇ 도둑-골 【골짜기】공말의 서쪽 등갱이 너머의 골짜기
◇ 매-봉(매봉재)【산】리태 골의 북쪽 봉우리. '매봉재'라고도 함,
◇ 민동-산【산】민등산. 창동 북쪽의 높은 산.
◇ 불당-골【골짜기】공말 서북쪽의 골짜기.
◇ 서당-골【골짜기】서당골.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고 전해짐
◇ 새말림-산【산】창동 동북쪽의 산.
◇ 새재미-들【들】양달 말 북쪽의 들.
◇ 새재미-못【못】새재미들의 북쪽에 있음.
◇ 서당-골(사당골)【골짜기】쥐대가리봉 북쪽의 골짜기.
◇ 소-고개【고개】조동에서 유등으로 넘어가는 고개. 호랑이가 나왔다고 함.
◇ 소네미-고개【고개】작은소네미골로 하여 북쪽의 노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 소롱-골(작은소롱골)【골짜기】음달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소리태-골【골짜기】새재미못의 북쪽 골짜기.
◇ 소리태-재【고개】창동의 북쪽 599번 도로로 노은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
◇ 숲-거리【들】지내와 덕련 사이 599번 도로의 동쪽 들. 논으로 쓰임.
◇ 쉽-터【산】조동 북쪽의 절골 북쪽에 있으며 고개를 넘다가 쉰 곳이라 하여 이름 함.
◇ 아망재-산【산】양달말 북쪽의 낮은 산.
◇ 안동산-골【골짜기】민등산 동북쪽의 골짜기.
◇ 안-산【산】숲거리 동쪽의 산.
◇ 여우-고개【고개】지내와 덕련리의 경계지점으로 599번 도로상에 있으나 그다지 고개 같지는 않음.
◇ 여우-골【골짜기 소리태 골의 동쪽 골짜기.
◇ 옻-샘【샘】 조동마을 불당골에 있음. 옛날에 쌍가마가 드나들었다고 할 정도로 약효가 있었다고 하나, 샘 위로 묘를 쓴 이후 약효가 떨어졌다고 함.
◇ 요-골【골짜기】새재미못 동북쪽의 골짜기.
◇ 우리-개【고개】우리재 고개. 조동의 북서쪽으로, 노은면 문성리의 우리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고개 양편에서 서로 자기네(우리) 마을에 딸린 고개라고 다투었다 하여 이름 함.
◇ 자녀울-고개【고개】자녀울 등갱이의 북쪽 골로 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자녀울등갱이-산【산】안자널의 서쪽으로, 유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
◇ 작은 소네미-골【골짜기】새 말림산 북쪽의 골짜기. 작은-소롱골(골짜기)
◇ 장내미-들【들】양달 말 서쪽의 들, 예전엔 이곳에 커다란 장이 섰다고 전해짐
◇ 전두실-고개【고개】음달말의 남쪽으로 안 전두실 골로 넘어가는 고개.
◇ 절-골골짜기】덕련리 산 45-1에 있는 즉, 공말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설운사(雪雲寺)절터가 남아 있으며, 빈대로 인하여
폐사되었다고 전함.
◇ 쥐대가리-봉【산】조동마을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로 건너편 창동마을의 쪽에서 건너다보면 완연한 쥐 형상을 하고 있다
◇ 진작-골【골짜기】강당골
◇ 하학-골 【골짜기】학 골 동쪽의 골짜기. 학이 내려왔다고 하여 이름 불러 짐.
◇ 큰-골【골짜기】공말 서쪽의 큰골짜기.
◇ 가는골【골짜기】부엉재산의 옆 골짜기
5. 마을의 볼거리
1) 문화유적과 유물
가. 삼연정(三蓮亭)
덕련리(德蓮里) 360번지 조동마을에 위치하는 정자로서 조선 철종 10년(1895)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이 서당(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그가 설립했던 서당 장소에 1924년 제자 정재호(鄭在彪) 등 30여명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 하고자 창건한 후, 삼(三)자는 鄕里에 유명한 德蓮山이 있고, 향리(鄕里) 역(亦) 덕련리요, 선생의 아호(雅號)가 연은(蓮隱) 인지라 그의 호(號)를 따라 삼연정(三蓮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그러나 1944년 불의(不意)의 홍수(洪水)로 기지(基地)가 유락(流落)되어 도복(倒伏) 직전(直前)에 있었으나 중수(重修)에 대한 아무런 재정적(財政的) 뒷받침이 없어 문하생들이 회합을 갖고 결의한 결과 성금을 그때 당시 쌀 70가마의 성금을 갹출(醵出)하여 1970년 4월 1일 도랑 건너 현재의 위치에 중수(重修)한 것이라 한다.
이날은 때마침 선생의 증손자인 이용진이 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날 이었다한다.
건물의 규모는 2단의 기단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지은 팔각정 목조 건물로서 공포(栱包)7)는 이익공8)계통(二翼供系統)의 양식을 다르고 있으나, 퇴화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창방(昌枋)9)으로 결구된 기둥사이에는 화각반(花刻盤) 1구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主心道里)10) 장혀11)를 받쳐주고 있다.
내부는 우물 천정으로 단청을 한 겹처마 지붕으로 지재(止齋) 박준구(朴準龜)가 지은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 동문계서(同問契序), 동문생성명(同問生姓名)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 부착된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는 김종훈 글, 동문계서(同問契序)는 김종훈의 선친이며 연은선생의 애제자였던 김영배 글, 동문생성명(同問生姓名)은 연은선생의 친필(親筆)이라한다. (김종훈, 84세, 증언 및 자료 제공)
나. 덕련리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12)
덕련리 창동다리 동쪽으로 이어지는 해골 남쪽 사면에서 고려시대의 토기와 자기조
7) 전통 목조건축에서 앞으로 내민 처마를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과 벽으로 전달시켜주는 조립부분으로 기둥 위에서부터 보[樑]의 아래까지 주두(柱頭)·소로[小累]·첨차(遮)·제공(諸工)·한대(限大)· 살미[山彌] 등의 짧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어놓은 것을 일컫는다. 공포는 구조적 기능뿐 아니라 의장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은 공포가 놓여지는 위치와 결구방법에 따라 주심포(柱心包)형식, 다포(多包)형식, 익공(翼工)형식으로 분류된다.
8) 기둥 위에 덧붙이는 쇠. 촛가지가 둘로 된 익공. 도리 및 장여를 花盤, 기둥 위에는 두공으로 받치고 창방과 두공 또는 보아지가 쇠서 모양으로 바깥에 내민 部材, 또는 그렇게 꾸미는 일.
9) 오량집에 모양을 내기 위하여 대청 위 장여 밑에 대는 넓적한 도리. 한자를 빌려 ‘昌枋·昌防’으로 적기도 함.
10) 기둥의 중심 위에서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도리로 주도리라고도 하며 보통 대들보나 툇보[退樑]위에 얹는 것이나, 상대건물(上代建物)일수록 들보보다 훨씬 위에 올려 긴 서까래를 받친다. 맞배집에서는 측면으로 서까래를 걸지 않으므로 필요하지 않다. 드물지만 맞배집이면서 다포계 형식의 건물에서는 측면 공포(栱包) 위로 도리를 건 것이 있다. 다포계에서는 주심도리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으나 내목(內目)도리는 반드시 사용한다.
11) 목조건축에서 도리를 받친 횡재(橫材).
12) 문화유적분포지도(충주시편.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8. 228쪽 발췌
각 등이 채집되었다. 채집된 유물은 어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수습되는 것이 아니라 산포되어있다. 그러나 채집된 유물과 관련한 유구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2) 고문서
가. 조동마을 대동계문서
조동(鳥洞)마을 대동계 관련 문서로 병신년(丙申年1956년) 음(陰)11월(月)초(初)7일(日)부터 오늘날까지의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병신년(丙申年)이란 1956년이니까 정확히 50년이 된 문서로서 상,하 2권으로 편철되어 있다.
나. 덕련리(德蓮里) 대동계
창동(倉洞) 마을에 전해오는 대동계 관련 문서로 덕련리(德蓮里)가 창동(倉洞) 과
조동(鳥洞)으로 나눠지기 이전인 단기(檀紀) 4292(四貳九貳)년 10월(十月) (巳亥年)
이라고 적혀있으니 지금으로부터 37년이 지난 문서이다
3) 고가옥(古家屋)
가.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 생가
지금은 사람이 기거하지 않아 안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긴 했으나 안채는 안주인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지어졌으며, 사랑채의 서당으로 사용하던 사랑방에선 민족자긍심으로 대쪽같은 기품을 빛내신 스승과 학구열에 불타는 제자들의 두
런거림이 아직도 들리는 듯 했다. 특히 행랑채의 2층 누마루가 아주 기품 있어 보이며 그곳에서 마을을 굽어보며 국가
이교민 생가
의 장래를 고민하는 연은(蓮隱)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듯하다.
풍수학자 김대환에 의하면 양택(陽宅) 명당지(明堂地)의 조건13)으로 주산(主山)이 위엄을 갖추고, 양명하며, 이곳에서 분기된 내룡(來龍)이 행룡(行龍)하면서 순룡(順龍)으로 탈기를 하고 비산비야(非山非野)에 이르러 청룡과 백호가 환포하는 중심점 위치에 결혈된 지점, 즉 혈(穴)이라 부르는 곳에 짓는 것이라 한다.
그런 조건과 잘 부합되며 덕련산(德蓮山)의 힘찬 생기(生氣)가 그대로 파고드는 명당지로 청룡과 백호가 아주 잘 발달되었으며, 안방과 화장실, 부엌 등의 방향이 딱 맞아떨어지는 즉, 양택지(陽宅地)지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가옥이라 한다.
다만 현실생활의 다양화로 인해 후손이 집을 비우고 있어 거의 쇠락한 듯 보이지만, 그 속을 도도히 흐르는 양명한 기운 즉 생기(生氣)는 부정(否定)치 못 함이라......
13) <풍수지리, 양택편>2006. 재산(宰山) 김대환
구분 보호수
지정번호 충주 제4호
수종 명 상수리 나무
유형 정자목
지정 년 월 일 1982년 11월 1일
소유자 및 관리자 덕련리 조동마을
수령 약 268년
수고, 가슴둘레, 수관 폭 23m, 270cm, 21m
보호시설 입간판 130cm× 110cm
전래되는 설화 1)철종 10년 제자들이 연은(蓮隱)이교면(李敎勉)선생을 대청 서까래옆의 상수리나무는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의 부(父),이창용(1736.2. 5~1732. 9. 10)의 첫 돌날 1737년2월 5일 심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하인이 장난삼아 낫으로 내리치려다가 연은(蓮隱)의 조부(祖父)인 이헌규의 불호령을 받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삼연정이 세워지자 동네사람들은 이 나무를 모정(茅亭)참나무라고 불렀다한다.(이용진, 64세)
추모하기 위해 나무 옆에 삼연정 건립함
2)봄에 나뭇잎이 예쁘고 화사하게 돋아나면 풍년을, 그렇지 않으면 흉년을 점쳤다고 함
참고사항 2000년 표주석 건립
박팽년 부인 묘
5) 명묘와 묘비
가. 박팽년 부인 전씨 묘(朴彭年夫人全氏墓)와 묘비(墓碑)조동마을의 큰골에 위치하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14)의 부인 천안 전씨(1417~1499)의 묘와 묘비로 묘역은 약 60평정도이며 근년에 4각 화강암을 다듬은 호석을 두르고 있다. 박팽년사우를 지키는 박종덕의 10대조가 경북 묫골에서 이웃 신니면 신청리로 터전을 옮겨온 것도 바로 이 천안전씨 묘소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호석의 크기는 42×176×246cm로 봉분의 높이는 호석을 합쳐 105cm에 달한다. 묘 앞에 상석 일체가 있고 우측면에 묘비가 있으며 그 앞 양측에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묘비는15) 높이가 203cm인데 좌대와 비신, 옥개석이 별석으로 조성된 조선시대 묘비로 별 특징은 없어 보인다.
높이 133cm, 폭57cm, 두께 20cm인 비
문 앞면에는 정부인 천안전씨지묘(貞夫人
天安全氏之墓)라 새겨져 있으며, 제 2면에는 1줄에 38자로 4줄이고, 제 3면에는 11줄로 즉 670자로 본문이 끝난다. 제 4면에는 이 휘가 짓고 박기정이 근서 했음을 알 수 있는데 비문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박 팽년이 3남 2녀를 두었었는데 장남(헌)과
3남(분)은 후손이 없고 2남(순)은 유복자(일산)를 얻어 손이 이어지는 과정이 기록되어
14) 박팽년은 417(태종 17년)~1456(세조 2년)으로 주덕과 이웃한 신니면 신청리 94번지에 도 지정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박팽년사우가 있다 숙종 때에 복원되어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세워 졌으
나 그 후 노후화되어 1968년 충주시에서 복원 단청되었다.
본관 순천, 자 인수(仁叟),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
(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
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
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
(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 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당 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
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 때 이조
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15) 山水畵에 다소곳 숨어있는 中原文化 이야기(2) 김 왕기. 2005
교동현감 여종의 무덤있다.
딸 2명 중 장녀가 영풍군(세종과 혜빈 양씨 사이의 3남-한남군의 동복 아우)에게 출
가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했다가 화를 입고 부인만 충주관아의 관비가 되어 낙향
했다가 운명하였고, 차녀는 현령 이 린에게 출가하여 청주 미원 수락동 경주이씨 팔판
집을 이루게 되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좌(碑座)는 땅에 묻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곳에서 서쪽 6km 지점에 있는
박팽년 사우가 있는 신니면 신청리 수청마을과 딱 중간 지점인 당우리 유동(버들골)에
는 큰 딸(영풍군 부인)의 묘도 있다한다.
『박팽년이 사육신으로 3족을 멸하는 잔혹한 형벌을 받아 그 후손이 이어지지 못하게 될 처지일 무렵 때마침 둘째아들 순의 아내, 성주이씨는 임신한 몸으로 관비가 되어 경북 달성군 사빈면 묘리의 교동현감(친정아버지)네로 쫓겨 가 금쪽같은 아들을 낳았지만 `아이가 사내면 죽이고 계집아이면 관노비로 보내라'는 나라의 서슬 퍼런 엄명이 떨어져 있었던지라 그 집 노비가 낳은 딸과 맞바꾸어 <박 비>라는 이름으로 그 질긴 목숨을 잇게 됐다한다.
그 후 성종 3년(1472), 그 아이가 다 자라 17살이 됐을 때, 나중에 좌의정을 지내게 되는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감사로 그곳을 들렀다가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울면서 나라에 자수할 것을 권했다한다.
성종은 이때 자수한 아이를 보고 무척 기뻐하며 `일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노비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름자의 뜻이 `유일하게 남 은 옥구슬'이었으니 사육신의 충정은 후대의 임금마저 감동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위의 무덤이 바로 그때, 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을 잇도록 박팽년의 손자를 길러준 교동현감댁 여종의 무덤이었노라고 성주이씨 후손인 조동마을 이찬배(80세)는 이야기한다.
나. 성주(星州)이씨(李氏)문중 선대묘
이곳은 말랭이라 불리는 곳으로 성주(星州)이씨(李氏) 24대인 이영필(李穎弼)과 그 의 부(父)인 23대 이덕민(李德旻)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서 통덕랑 성주이공휘영필 배 숙인 경주김씨 지묘(通德郞星州李公諱穎弼 配淑人慶州金氏 之墓)라는 비석이 있다.
시조인 극신(순유)의 12대손인 농서공 장경을 위시하여 13대 만년, 14대 의인, 15대덕봉, 16대 사분, 17대 춘영, 18대 순문에 이어 19대 양손은 큰골에, 20대 세광은 샘골에 21대 종수는 농고개, 22대 사인은 수청골, 25대 지걸은 도둑골, 26대 성하는 가재골, 27대 기형, 28대 호겸은 참나무 밭에, 29대 헌규는 쌍분으로, 30대 창용은 도둑골에, 31대 연은(蓮隱) 이교면(일명 炳夏)은 도덕골에, 32
대 홍배(弘培)와 33대 석동은 연은(蓮隱) 생가옆에 묘가 있다
다. 남양홍씨 선대묘(南陽洪氏 先代墓)산 40번지 쥐대가리봉에 나란히 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선대묘다. 래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홍묘리의 남양홍씨(南陽洪氏)시조(은열)의 23대 홍명원의 2남인 24대 홍처심을 손자인 이조참판 홍우전이 신해년(현종)에 이곳 덕련리로 묘만 모셨다한다. 쥐혈로 알려진 이곳에 꼬리에 새끼를 졸졸 달고 다니는 쥐의 습성에 따라 처심의 1남인 수항과 3남인 수재, 손자 우현, 고손자 염해까지를 주욱 이어서 묘를 썼다한다.
원래 홍처심의 부(父) 명원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이첨16)의 난 무렵에 상처(喪妻) 중임에도 불구하고 손녀사위를 삼으려했으나 거절했다는 이유로 명과 금을 오가며 상황이 어려웠던 외교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명 황제 앞에서 대국에 끼어 사는 소국의 서러움을 아느냐? 는 지혜로운 외교술로 명 황제는 즉석에서「창덕군자」라는 호와 상금까지 은전 2만냥을 주고는 당신 같은 신하가 내 옆에 없음을 탄하노라 며 사신까지 동행한다고 했으나 거절하고, 귀국했으나 이이첨의 견제를 받아 벼슬을 그만두었다한다.
더구나 정조가 등극하고 난 뒤, 술해의 부(父) 병조판서 계해는 사도세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역적으로 몰려 화를 입고 낙향할 수 밖에 없었다한다. 그래서 처심의 5남 수점의 손자인 계상은 윤정으로 개명 후 이곳 덕련리에 터전을 잡았으나 만영-병일-진성까지 4대가 지난 뒤 또다시 이곳을 떠났다고 전한다. 그때 당시에 이 마을은 어(魚), 홍(洪)이라고 불릴 정도로 어씨와 홍씨들이 득세를 했다고 하며 또한 쥐대가리봉 아래 정미소 부분을 잠시 논으로 변경하자 안 좋은 일이
16) 이이첨은 1560(명종 15)~1623(인조 1).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등과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성종·연산군대의 권신(權臣)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던 좌찬성 극돈(克墩)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우선(友善)이다.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빌미를 주었으며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다가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함.
벌어져 다시금 밭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는 모두가 쥐의 형상을 하고 넓은 들판으로 나가려는 쥐의 혈을 막은 탓이었노라고 전한다. (현재 종친회회장인 병일의 자(子), 홍순철(1922년 4월 7일생). 증언)
통훈대부궁내부시직홍공휘염해지묘, 성균관진사 증 통정
대부이조참의홍공수항지묘 배증숙부인안동권씨부좌(成均館進士 贈 通政大夫吏曹參議洪公受恒之墓 配贈淑夫人安東
權氏祔左), 증가선대부이조참판홍공우칭지묘, 배증정부인한산이씨부좌(贈嘉善大夫吏曹參判洪公禹偁之墓 配贈貞夫人韓山李氏祔左), 증 통훈대부사재감겸정홍공처심지묘,공조정랑지묘(홍수재), 통훈대부 첨정경희국낭공 휘 우현지묘 등의 비석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라. 전의이씨 선대묘(全義李氏 先代墓)
서당골에 있는 전의이씨 선대묘(全義李氏 先代墓)로 사과전의이공휘국경지묘. 배의인 안동김씨(司果全義李公諱國卿之墓. 配宜人安東金氏)라는 비석과 망주석이 세워져있다.
6) 전설 및 설화
가. 빈대 절터
① 위치 : 절골산
② 전설 : 덕련리(德蓮里) 조동 마을 뒷산 덕련산 기슭에 이르면 낙엽송과 소나무가 섞인 송림 사이에 평탄한 한 기(基)의 대(垈)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이 빈대절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절터이다. 조선중엽 이곳에 조그마한 절이 한 채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설운사(雪雲寺)라고 불러왔다. 어느날 40대 중년의 한 스님이 이곳의 주지승으로 와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절을 비 우는 날이 아주 많았다한다. 한 번 시주 길을 떠나면 보통 두 서 너 달씩 각 지를 주유(周遊) 하는 까닭에 사미승(沙彌僧)이 없는 절은 빈 절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되니까 경내(境內)는 잡초가 우거질 대로 우거져 산 짐승들이 밤낮으로 주변을 돌아 다녔고, 법당에 들어가 보면 불상에는 먼지가 가득 쌓이고 ,거미는 여기저기 줄을 치고 있으며 공양(供養)발우는 아무것도 담겨져 있는 것이 없어 황량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다시 바랑을 메고 절을 떠난 주지승은 가을이 되어야 살이 두두륵하게 쪄 가지고 절로 돌아왔다. 배는 툭 불거져 나왔고 기름진 얼굴은 목과 턱의 구별조차 할 수없을 만큼 번들거렸다. 저녁 무렵에야 돌아온 주지승은 석불례(夕佛禮)도 올리지 않고 승방에 들어가 방바닥 먼지를 대충 날리고 나서 그 곳에 자리를 깔고는, 눕자마자 이내 절이 떠나가라 코를 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주지승은 이상하게도 현기증이 일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괴이롭게 생각한 그는 스스로의 몸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몸이 어느 사이엔가 탄력성이 없어져 쭈글쭈글하게 주름지어 있었고 그 살빛은 이미 송장과 다를 바 없었으니......
간신히 일어나 법당에 기어들어가 보았더니 있어야 할 불상은 온데 간 데 없고, 그 대신 지금까지 없었던 기둥(柱)한 개가 법당 복판에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었다. 주지승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기둥을 자세히 눈 여겨 보았더니 그건 나무기둥이 아니라 놀랍게도 수 천, 수 만 마리의 빈대들이 뒤엉겨 기둥을 이루고 있었는데 사람 냄새를 맡은 듯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하더니 기둥이 무너지면서 주지승에게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기겁을 한 주지승은 필사적으로 밖으로 기어 나와서는 빈대가 몰려오지 못하도록 절에 불을 지르고는 경내에 솟아 있는 바위를 끌어안은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한다. 절이 불타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불을 끄기 위해 산으로 달려왔으나 그 때는 이미 절은 완전히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그 마당 모퉁이에 바위를 안고 죽어있는 늙은 중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탄 절 자리에 수많은 빈대가 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불난 이유를 짐작했
다한다.
그 후부터 이 곳에 절을 지으려 하는 스님은 없었고 오래도록 빈 절터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지금도 그 절터 자리에는 죽은 빈대쭉정이가 맑은 날이면 잡초나 돌사이에서 보인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빈대절터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전한다. (김종훈,84세, 증언)
나. 옻샘(소원샘, 약샘)
① 위치 : 조동마을 불당 골
② 전설 : 예전, 옻이 오르면 별다른 처방이 없던 시절에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세 번만 물을 마시면 옻이 말끔하게 낫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샘이다.
옛날 옛적 자손이 귀하던 어느 집안에 아이를 낳기만 하면 알 수 없는 연유로 자꾸만 자손을 잃게 되어서 어느 유명한 무속인에게 물어보니 이 옻 샘을 위하면 건강한 자손을 볼 것이라 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자 정말로 건강한 자손을 잇고 가문 또한 번창 하였다고 하는 전설에서 소원 샘이 라고도 불리 운다.
만세운동을 펼친 이교설의 아들인 이찬배(80세)도 이 옻샘에 치성을 드리고 얻었다한다.
지금도 물소리가 아주 우렁차게 샘솟고 있으며 옛 나그네처럼 풀잎을 뜯어 받아 마셔보니 아주 달고 시원했다. 그러나 발달된 의학 덕분에 옻이 올라도 찾는 이가 없음이 새삼 작은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 아무도 몰래 작은 소원을 한 번쯤은 빌어봄직도 괜찮지 않을까?
6. 옛날의 교육
1) 서당
사설서당이 서당골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조선
철종 10년(1895)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이 지금의 삼연정(三蓮亭) 자리에 서당
(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3) 민속신앙
「우리의 민속신앙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 아득한 상고대의 집단적 제천의식에서
연원하여, 후대 개인적 굿의 현태로 분화 발전되면서 한민족의 종교적 주류를 형성하
여왔다.
물론 이런 민속신앙의 기반위에 불교․도교․유교․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들어와
종교의 적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종교적 현실이라고 생각 된다. 그러나 민속신
앙은 이와 같은 종교문화의 적층 속에서도 한결같이 그 밑바탕에 깔려 저류로 흘러오
며 우리의 정신사적 기층으로 존재하여온 것이다.
동네어귀에 서낭당이 있어서 마을을 수호해주고, 집안의 요소마다 가신(家神)이 있
어서 액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온 민속신앙은 어느 누
구의 권유에 의하거나 또는 일부 지방에만 존재하는 특수현상이 아닌 민간인 누구에게
나 있어왔던 보편적인 민간층의 자연적 사고였다.
이와 같은 민간사고는 민간인들 자신의 생존적 존재근원에 대한 원사고(原思考)라
는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신에 의한 제액초복(除厄招福)의 민간사고는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민간인의 생활을 통해 그 속에서 자생한 자생적 종교현상이며, 또 외래종교가 들어와
도 그것은 민간의 종교의식과는 항상 먼 것이어서 민간 층 속으로 파고들 겨를이 없었
기 때문에 민간신앙이 우리의 종교적 기층으로 주류를 이루면서, 또 민간신앙의 핵으
로 제액초복(除厄招福)의 민간사고가 우리의 종교적 기층이 되어왔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전문화된 신직(神職)의 무(巫)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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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 나무(유동에서 창동 사이 도로변)
체계화된 것이 바로 무속인 것이다.
굿의 기본 제의인 성주굿․삼신굿․지신굿․조왕굿은 민가의 가신(家神)에게 기원
하는 제의이며, 또 서낭굿․당산굿은 마을의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제의로 굿의 제의순
서가 민가의 가신(家神)으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거쳐 우주의 천신으로 이어져 일반
민간인신앙을 집약 체계화시켜 무속의 굿이 진행된다.
무속은 이렇게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 깊
게 자리 잡고 있는 근래까지 살아있던 종교현상이다」17)
즉 수 천 년, 혹은 그 이상의 오랜 세월동안 한민족의 기층적인 종교현상으로 자리를
굳히며 끈질긴 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근래까지 이르고 있었던 우리의 소중한 민속신
앙이 70년대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하여 의미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미신으로 싸잡
아서 황폐화됨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 곳 덕련리(德蓮里)도 예외는 아니었음이 새삼 가슴 아프게 한다.
당우리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성황단의 나무는 거의 방치된 채 흔적을 찾기가 힘든
모습으로 안타깝게 연명하고 있다.
다. 화연정(華蓮亭)
2001년 11월 서울 시청 세정과에 근무하다 지금은 서울에서 이름난 요식업체를 운
영하는 박갑복(朴甲福)의 아들 박희수(朴喜守 서울거주)가 사비(私費) 1,300만원을
희사하여 건립한 창동마을 정자로 정자 둘레에 자바라를 설치하여 비 가림을 하여 날
씨에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매우 창의적으로 보였다.
□ 창동마을과 성균관대학교 자매결연
2006.4.26 창동마을과 성균관대학교는 농도상생(農都相生)의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의 고향인 농촌이 도시와 더불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도․농 교류 활동을 연 4
회 이상 실시함으로써 이러한 자매결연이 지속, 발전되기 위해 상호간에 아래 사항을
약속하며 실천해나가겠다는 취지로 자매결연교류를 맺었다.
18) 70년대 중반부터 92년도까지 실시했던 한미연합방어훈련인데 20만 명의 장병이 참가했다고 한다.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해서 단계적으로 후퇴하면서 역습을 노리기 위한 훈련임
현대모비스와 자매결연
창동마을에서는 도시민들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쉴 수 있도록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
며, 친환경 및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 제공하고 농촌체험에 필요한 프로그램 등을 마
련하겠고 성균관대학교 학생처에서는 농번기 때에 일손 돕기를 비롯 환경보호 봉사활
동과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앞장 서 구매하는 등 농업․농촌발전을 적극 지원하겠
다는 내용의 자매결연증서 및 계획서를 교환하였다
□ 현대모비스(주)와 덕련리(창동, 조동)마을과의 1사 2촌 자매결연
현대모비스 19)(주)(현대그룹부회장 한규환)와 사과의 고장으로 유명한 충주시 주덕
읍 덕련리 창동마을(대표 이삼영) 및 조동마을(대표 이광순) 등 2개 마을과 28일 농촌
사랑실천 1사2촌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 날 국내 자동차업계를 대표하는 현대모비스는 2개 마을과 농번기 일손돕기, 마을
농산물(사과, 고추, 꿀, 참깨 등) 팔아주기, 행사지원, 현대모비스 견학 등 상호교류계획
서를 교환했으며, 2개 마을과 동시에 1사2촌 자매결연을 맺기는 도내에서 이번이 처음
이다.
농협충북지역본부(본부장 채희대)의 주관으로 창동마을회관 앞에서 개최된 이
날결연식에는 현대모비스 정남기 부사장, 황열헌 부사장 등 임직원 40여명, 이재충
행정부지사, 한창희 충주시장, 이시종 국회의원, 농협중앙회 강명구 상무, 마을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기업과 마을대표는 상호간 상생의 동반자로써 도시와 농촌, 기업과 농촌의 협력강화
19) 예전에 <현대정공>이라 불리우던, 현대·기아자동차의 A/S용 부품사업을 인수하고 2002년 1월에
는 플랜트와 중기사업을 로템(주)에 양도함으로써 실질적으로 A/S용 부품판매 사업, 자동차 부품
수출사업, 모듈부품을 제조하는 국내 최대의 자동차부품 제조 전문회사로 2000년 11월 현대모비
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첫 모내기시범 작업(시장)
를 다짐하는 자매결연패를 교환하고, 현대모비스에서는 이들 마을에 앰프와 대형냉장
고를 각각 기념품으로 전달했다.
마을에서는 답례로 특산품인 사과를 기업체 임직원에게 전달하고 마을에서 정성껏
준비한 오찬을 함께 하며 자매의 정을 듬뿍 나누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농번기 때 농촌 일손 돕기는 물론 마을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앞장서 구매하는 등 마을발전을 위해 지원과 교류활동을 통해 농촌사랑을 실천 하겠
다”고 말했다.
특히 현대모비스와의 자매결연을 위해 이 마을 출신의 이시종의원과 주덕농협 김인
숙과장이 무던히 애를 썼다는 뒷얘기를 통해 그들의 고향사랑을 담뿍 느낄 수 있었다.
□ 충주지역 첫 모내기 (2005-04-28 10 : 37충주신문)
충주지역 첫 모내기가 지난 2005년
4월 25일 오전10시 주덕읍 덕련리 창
동마을 이재덕(65,남) 3,500평의 논에
서 실시됐다.
지난 3월 중순 종자소독과 침종을
하고 말경 못자리를 설치, 건묘 육성에
정성을 다해 이날 조생종 월광벼(고시
히가리) 품종으로 기계 이앙을 마쳤다.
이날 모내기는 지난해 4월28일 첫 모
내기에 비해 3일정도 빠르며, 지난 해 에도 이씨가 첫 모내기를 했다.
시 관계자는 올해는 기온 저하로 인해 전반적인 이앙시기가 전년에 비해 3-4일정도
늦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시는 지난 4월10일부터 오는 5월5일까지 벼 재배 계획면적
7,249ha에 53.2ha의 못자리 설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적기 못자리 설치를 추진키로 했
다. 시는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해 기온에 따라 못자리 관리를 철저히 해 건전한 육묘를
생산하고, 이앙 시기를 적기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농가지도에 적극 나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