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회복제, 카페라떼마일드
많이 지치는 요즘이다. 인력부족으로 도맡게 된 수업이 늘었다. 늘어난 수업 시수에 정비례하게 업무량도 늘었다. 늘어난 업무량에 정비례하게 뇌정지가 자주 오는 것은 물론,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마음도 삐죽삐죽 삐뚤삐뚤 하다. 게다가 중등부 시험대비 기간까지 겹치면서 중학생들에게 하는 언행이 더 거칠어졌다. 이를 자각하면서도 입과 마음이 따로 논다. 지친 몸에, 예민해진 신경에다 속상한 마음까지 더해져서 더 심란하다. 이 정도면 삼진아웃인가.
맛있는 걸로 마음을 달래보자 싶어 근처 편의점에서 비건 스낵을 쓸어담는다. 몇 안되는 비건 제품을 찾느라 스캐닝을 할 때면 꼭 눈에 들어오는 논비건 음료가 있다. 그건 바로 매일유업의 마이카페라떼. 이 음료는 마일드, 마일드로어슈거, 제주말차라떼, 카라멜 마끼아또, 말차아몬드브리즈, 벨기에 초콜릿 라떼,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스크림 라떼 현재 총 7종 인 걸로 알고 있다. 논비건 시절에도 곧잘 마시던 음료였다. 이제 보니, 플라스틱 뚜껑은 물론 마개껍질, 빨대, 빨대 포장지, 본 컵 등 이 음료 한잔에 쓰레기도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어쨌든 유제품은 이제 거들떠 보지도 않건만. 이 카페라떼 종류 중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건 바로 이 마일드.
이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날, 나와 일년 간 수업을 했던 당시 초등 1학년 여학생이 내게 선물로 주었던 음료이다. 숙제도 착실히 하고 수업태도도 좋았던 것은 물론, 언행도 예쁘고 패션감각조차 좋았던 아이였다 (참고로 그 어머니께서 옷 사업을 하셨다).
그 마지막 날 아이의 어머니께서 하원 픽업하려고 교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는데, 내게 이 선물에 담긴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며칠 전 아이가 느닷없이 스타벅스 커피 가격을 물어보더란다. 당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가격이 4000원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본 가격대를 얘기해주니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자기 용돈으로 선생님한테 스타벅스 커피를 사드릴 수가 없어서 속상한 마음에 울었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일했던 곳은 1년 담임제로, 학교처럼 1년마다 선생님이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내 근무 마지막 날이 그 반 담임으로 있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와의 마지막 수업 날 그 아이는 내게 자기 용돈으로 커피를 사서 손편지와 함께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돈을 더 보태서 스타벅스 커피 사는 걸 도와주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부했단다. 꼭 자기가 모은 돈으로 선물하고 싶다고. 그리하여 자기 용돈으로 산 커피가 바로 마이카페라떼 마일드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아이의 어머니가 얘기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선물 챙겨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그 마음을 예쁘다는 말만으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이 밀물처럼 온몸을 적셨다.
어느 덧 이직한 직장에서 일한 지 3년차가 되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업을 한지도 어느 덧 10여 년이 넘었다. 가르치다 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 카페 라떼를 선물로 준 아이도 그 중 하나다. 카페라떼 마일드를 볼 때면 그 아이가 생각나면서 그 아이와 쌓았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그 축적된 시간 속에서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선생님이었는지를 떠올린다. 어른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 용돈으로 내게 커피를 직접 사주고 싶을 만큼 나는 그 아이에게 제법 괜찮은 선생님이었구나 싶어 삐죽했던 마음이 마모되는 것을 느낀다.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초심을 회복하고자, 오늘은 (당분간) 마지막 내신대비 토요보강이기도 하니, 비건을 잠시 봉인하고 카페라떼 마일드를 하나 집는다.
첫댓글 세상에나~ 이렇게나 촉촉하고 달콤한 사연이라니. 이 글을 겨울에 읽었더라면 손난로가 따로 필요 없었겠어요. 꼬마 제자의 마음이 너무나 예뻐서 글을 다 읽은 후에 괜히 스마트폰을 꼬옥 껴안았습니다... ㅋㅋㅋ 이 포옹이 그 아이에게 가닿길 바라며! 그나저나 단짱 님, 요즘 많이 바쁘시군요. ㅠㅠ 괜히 제가 더 마음이 아픕니다. 여유로우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래도 단짱 님의 글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전 단짱 님의 글을 볼 때마다 호수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분위기 있어서, 요즘 출판 시장에 판치는 에세이 대열에 끼워넣어도 손색이 없다 여긴답니다. ㅋㅋ 그리고 언제나 환경 보호와 비건에 진심이신 단짱 님을 보며 많이 배웁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늘 쓰레기가 얼마나 나오는지 잊지 말아야겠어요. 끝으로 제가 단짱 님에게 수업을 들은 제자였어도 마찬가지로 선물을 드리고 싶었을 거예요. ^_^ 단짱 님은 좋은 분이니 그럴 수밖에요. 어쨌거나 바쁘신 일 어서 마무리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 잘 챙기시구요! 식사도 꼭 잊지 마세요~ 파이팅!
너무 좋아요. 그 아이의 마음도 좋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고 예쁘게 보는 단짱님 마음도 좋고요. 학창시절 선생님들을 돌이켜보면 학생이었던 제겐 거의 전부이기도 하고, 아이돌이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도 얼마 안되는 용돈을 모아서 이런 저런 소소한 선물들을 드리곤 했는데 (마음이 더 큰 그런 선물들요) 그런 작은 마음에도 기뻐해주던 선생님들이 기억에 아직도 남네요. 카페라떼를 건넨 제자 덕분에 무척 보람있으실 것 같아요- 부럽습니다! 달달하고 기분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따뜻한 사연이.. 이 글 <좋은생각>에 기고해보는건 어떠신지.. 정말 너무 좋아요! 아이들은 어떨땐 정말 밉다가도 저런 아이들은 정말 천사가 아닐까 싶어요ㅠㅠ 단짱님같은 사연이 있다면 저도 편의점에서 음료를 볼때마다 가슴이 찡해지지 않았을까요.. 🥹 초심은 정말 항상 어려운데 그래도 그 아이덕분에 초심을 잡을 수 있는 토템(?)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부럽습니다! ㅋㅋㅋ 단짱님의 이 글이 좋은생각에 실리길 바라며.. 잘 읽었어요!😊
으헝 ㅠㅠ 카페라떼가 제목으로 등장하며 피곤하신 근황으로 글을 여셔서 직장인의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커피 이야기일까 하고 글을 읽어내려갔는데 헝 학생의 마음과 그 학생을 떠올리는 단짱쌤의 마음이 너무 따스해서 눈썹이 절로 팔자가 되었어요 ㅠㅠ 세상에.. 저도 괜히 보면 한 번 사먹게 될 것 같네요. 단짱님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요! 고된 업무 속에서도 이렇게 멋진 글 또 한 편을 나눠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화이팅이에요!!! 응원합니닷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