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 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려 졌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 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비 사태는 면하였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가 그들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 씨의 소생의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소헌왕후 소생인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안평대군
1418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다. 1428년 안평 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양대군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 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 해 계유정난으로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 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고려말의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 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광주 구 영릉터에 있다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놓은 '세종대왕 영릉신도비'의 비문이 대표적이다.
임영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구이며, 자는 헌지이다. 1428년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 제작을 감독하였고, 1450 년(문종1년)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