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1. 【솔일재】(밀양박씨·대사헌공파)대사헌공파 문중의 시원처
글·송은석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벌족(閥族)·벌열(閥閱)」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종족’이라는 의미다.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우리 대구지역에도 많은 벌족가문들이 있다. 오늘 답사지역인 수성구 시지일대에는 ‘밀양박씨·아산장씨·옥산전씨·청주정씨’ 등과 같은 성씨들이 오랜 세월 세거해 왔다.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이번 편에서는 신라왕족으로서 신라·고려·조선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대 벌족가문 중 하나인 「밀양박씨· 대사헌공파」를 한번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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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산·자인·영천·울산」 등지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 「대사헌공파」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큰 문중의 파조 묘소와 그 묘소를 수호하는 재실이 무려 500여년의 세월동안 우리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도 수백 년 세월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대구의 유교문화 유적지. 더 늦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반드시 그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하는 까닭을 밀양박씨 대사헌공파의 재실인 「솔일재」를 통해 알아보자.
우리나라 대표 벌족가문 중 하나인 밀양박씨
비조·득관조·중시조·현조
신라왕족의 후예로 인정받는 성씨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박·석·김」 3성이다. 이 중 오늘의 키워드인 밀양박씨는 신라 시조왕인 「혁거세(赫居世)」를 그 비조(鼻祖)로 삼고 있다. 그리고 「밀양박씨」라는 본관을 득한 득관조(得貫祖·貫鄕祖)는 신라 경명왕의 장자인 「박언침(朴彦忱)」이다. 그가 왕자의 신분으로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본관을 밀양으로 삼은 것이다. (‘밀성’은 ‘밀양’의 옛 명칭)
한편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는 고려조에서 태사중서령을 역임한 밀성부원군 「박언부(朴彦孚)」를 중시조로 삼은 밀양박씨 계파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12명의 중조(中祖)를 분기점으로 하여 크게 「12파」로 분파된다.
「밀직부원군파→대사헌공파」로 내려오는 그들의 분파도를 참고해보면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가 현조(顯祖)로 삼는 인물은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역임한 박중미(朴中美)라는 인물이다. 워낙에 벌족인 가문이라 그 계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대사헌공파의 계보를 단순 요약한다면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겠다.
◾혁거세(비조)→언침(30세)→언부(37세)→중미(44세)→해(45세)
(비조) (득관조) (중조) (현조) (파조)
귀림 박해
대사헌공파의 파조
밀양박씨 대사헌공파의 파조는 조선개국 당시 대사헌을 역임한 「귀림(歸林) 박해(朴晐·1347-?)」라는 인물이다. 박해는 1347년(고려 충목왕3)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의 현조인 박중미의 2자(子) 중 차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죽은(竹隱) 박중미는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역임했고, 홍건적의 난을 토벌한 공훈으로 훈적(勳籍)에도 기록되었으며, 밀직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참고로 박해의 조부인 박진록(朴晉祿) 역시 대제학을 역임했으니, 고려조에서 ‘부자 2대 대제학’을 배출한 문중인 셈이다.
귀림 박해는 30세 되던 해인 1377년(우왕3)에 문과급제를 하고, 45세가 되는 1392년(태조1)에 조선의 개국을 목도(目睹)하게 된다. 당시 박해의 가문은 고려 조정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진퇴를 놓고 생을 건 기로에 섰다.
‘두문동의 현인들처럼 은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시운(時運)을 받아들여 새 왕조와 함께 할 것인가?’
이 때 박해는 후자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개국 이후 그의 처세를 보면 결국은 ‘진퇴’의 중도(中道)를 택한 탁월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박해의 선대 어른들은 태조 이성계와 교분이 있었다. 따라서 개국 후 태조로 등극한 이성계의 제의를 쉽게 뿌리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박해는 당시 시운(時運)을 판단컨대 왕조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판단, 마침내 자신을 불러들이는 이성계의 왕명을 수용했던 것이었다.
대사헌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박해는 이후 정승의 반열에 까지 하마평이 오르내릴 만큼 명망이 있었다. 하지만 박해는 어느 날 자신의 모든 권력과 명예를 벗어 놓고 청주의 계림촌(溪林村)으로 우거(寓居)하게 된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조선의 기틀을 닦은 후 미련 없이 은거함으로써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은혜에 함께 보답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 입향조
조선개국 당시 대사헌을 역임한 귀림 박해는 어느 날 모든 것을 벗어 두고 청주 계림촌으로 은거했다. 이후 다시 영남의 경산현 고산방(孤山坊) 내매리(內梅里)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고 졸하였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박해는 밀양박씨 대사헌공파의 파조이자, 대구입향조가 된 것이다.
내매리는 지금의 신매동이다. 이곳으로의 입향에는 추측컨대 2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청도 풍각 일대에 선조들의 선영과 사패지가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미 이 지역의 유력가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옥산전씨, 아산장씨’ 문중과 처남매부의 인척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는 오늘 답사코스인 덕산재 문중 즉, 아산장씨의 고산입향조인 「장흥부」와는 동서 간이며, 역시 고산 출신으로서 여말 판서를 역임한 문평공 「전백영」과는 처남매부 간이었다.
참고로 시지의 ‘옥산전씨, 아산장씨, 밀양박씨’ 3성은 이때의 인연으로 60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모임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계의 이름은 「강선계」인데 매번 300여명 가까이 모인다고 한다. 몇 일전인 5월 8일에도 경산에서 이 강선계 모임이 있었다.
박해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단성현감을 지낸 모고당(慕古堂) 「박위(朴蔚)」이다. 박위는 다시 6남을 두었는데 「박계조·박승조·박사조·박찬조·박순조·박현조」가 그들이며, 모두 문과와 소과에 입격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후손들 중에는 박순조의 아들인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이라는 인물이 있다. 「청풍당」이라는 호는 성종 임금이 내린 ‘사호(賜號)’로서 ‘시호’와는 달리 살아 있을 때 왕으로부터 받은 호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아무튼 박해의 여섯 손자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경산·자인·영천·울산」 일대에서 각기 명문으로 세전(世傳)되고 있다.
솔일재
「솔일재(率一齋)」는 1400년대 초에 이곳으로 입향한 밀양박씨 대사헌공파 파조인 「귀림 박해」를 추모하는 묘소 수호 재실이다. 재실 북쪽 천을산 기슭에는 500년 전에 조성된 박해의 묘소가 아직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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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일재의 정확한 초창연대는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솔일재 연혁」에 의하면 천법산(天法山·지금의 천을산) 자락에 선조를 장사한 뒤(연대미상)에 재실을 건립했다고만 되어 있다. 솔일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솔일재 연혁」 전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솔일재연혁
본 재는 대사헌공(휘 해·호 귀림)이 벼슬을 사퇴하고, 청주 계림촌에 은거하시다가 다시 경산 내매리로 이거하시어 천년(天年)을 마치시니, 인근 천법산에 장사 지내었다. 그 후(연대미상) 천법산하 시지동에 환주와즙(丸柱瓦葺) 3칸의 재사와 3칸의 포사를 건립하여 묘사시 참제원의 재숙소로 사용하였다. 근자에 소위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편입되어 불가항력으로 1995년 4월 8일에는 철거하게 되니 차탄불이(嗟嘆不已)라. 부득이 포사를 헐고, 그 터에 재사를 중건신축하고 남은 터에 3층 양옥을 건축하여 회관과 관리사로 하고 2년여 공정에 제반공사를 끝내어 금일(1998.4.30.)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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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일재의 정문은 솟을삼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공경히 재계한다는 의미’로 「재경문(齋敬門)」이라는 문호(門號)를 달고 있다. 이 재경문 앞쪽으로는 제법 넓은 터가 있는데 담장 구실을 하는 울타리목에 의해 바깥과는 격리되어 있다. 솔일재는 3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측면 3칸 중 전면으로 1칸은 툇간을 두었고, 서쪽에서 부터 방 2칸, 청(廳) 2칸, 방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은 원기둥에 이익공(二翼工) 양식을 취했고, 창방 위에 화반(花盤)이 놓여 있는 등, 사가의 재실로는 제법 화려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솔일재라는 재호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심벌」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의 「호(號)」. 이런 호가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서 읽혀진다면 그 사람은 한자문화권에서 고수(高手)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암호를 푸는 그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가 한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고전과 함께 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이러한 과정이 체득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솔일」에 앞서 박해의 호인 「귀림(歸林)」을 먼저 한번 풀어보자. 대사헌에 이어 정승반열에 까지 하마평에 올랐던 박해가 어느 날 모든 권력과 명예를 벗어 놓고 청주 계림촌으로 은거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을 했다.
‘나 돌아가리라 계림으로...’
「귀림」이라는 호는 결국 인연과 시운에 따라 중앙정계로 나아갔지만, 필연적으로 다시 향촌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마치 「귀거래사」처럼 말이다.
솔일재의 의미는 주역의 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만물의 흩어지고 모여드는 상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하는데, 「솔일재 기문」에서 해당부분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의 췌괘(萃卦)와 환괘(渙卦)에 모두 이르기를, ‘왕이 사당을 둠에 지극하도다(王假有廟)’라고 하였는데, 사당이라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손자의 정신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천하의 인심을 모아 흩어지는 것을 유지 시키는 방법으로 사당을 지어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집안이나 나라가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한 집안이나 국가는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그 방법은 동일하며, 사당과 재실은 안팎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니, 이것이 응천(凝川·밀양의 별칭) 박씨가 그들의 선조 귀림공을 위하여 산소 곁에다 솔일재를 짓게 된 까닭이다...(생략)
기문의 설명에 따르면 「솔일」은 한 집안의 인심, 나아가 천하의 인심을 「한 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대사헌공파의 후예들은 이곳 솔일재를 그들 문중의 시원처(始原處)로 삼는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에필로그
우리나라 대표적 벌족가문인 밀양박씨. 그 밀양박씨의 한 계파인 「대사헌공파」의 근원처가 되는 「솔일재」. 우리는 번화한 신도시로서의 ‘고산’만 알고 있었지, 500년 내력을 지닌 역사 속 ‘고산’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를 깨우치기 위해서일까? 무성한 아파트 숲 사이 그곳에 귀림 박해공의 500년 묘소와 솔일재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시지의 ‘아산장씨·옥산전씨·밀양박씨’ 3성은 그 선조들의 음덕에 힘입어 6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강선계의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이들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유교문화는 안동과 영주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1601년(선조34)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고 400년 세월동안 대구는 영남의 중심도시였다. 아무리 도시계획을 운운해도 400년 내력의 역사가 불과 수십 년 개발의 역사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지고 무릎을 꿇겠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유교문화를 논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대구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도록 우리 대구유림이 먼저 앞장서야 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누군가로부터 “대구에도 유교문화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당신은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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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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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
첫댓글 후손 중 위(蔚)4(子) 휘,纘祖 왕조실록 근거 성종20년 종부시정 왕실 요직40년기록있슴 근세,휘 박상진 광복군 총사령 의선조님등~~~ 재실 솔일제 좋은 기록 감사함니다 건강하십시요,
박순묵입니다 저는 파조해 할아버지의 17세손이고요 현재 청도군문화관광해설사회장이고요 성균관유도회 청도군 총무국장 솔일재감사직을 맡고있습니다 솔일재 와 강선계에 대한상세한 설명 송은석님 정말고맙습니다 행복한 하루되십시오
박선생님^^ 반갑습니다.. 저의 글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본부 사무국장의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선생님이랑 저랑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네요... 하하하^^ 가까이 계시니 언젠가는 한번 뵈올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송은석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