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 영역 밖
아,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근데 뒤가 근질거려 이 얘기를 남겨놓지 않고서는 스페인으로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차라리 비행기 안에서 자자!' 하는 생각으로 잠자는 것도 뒤로 밀어둔 채,
급한 마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세세하게 ‘속마음’ 문서에 기록을 해두기로 했다.
며칠 씩이나 걸렸던 가방싸기를 끝내놓고, 그러다 보니 다소 훵해진 아파트를 돌아본 뒤 잠자리에 들려고 붙박이장의 침대를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전화가 왔는데,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죽 같은 학교를 다닌 유일한 친구 하 준희였다.
“너, 스페인에 가지?”
“박 기수(P)한테 들었구나!”
“아니, 기수랑은 어제 통화를 했었는데 요즘 니가 통 소식이 없다며 오히려 나한테 니 얘길 묻던데?”
“음, 그래서 어젯밤에 기수가 나한테 전화했던 거로구나.”
“그래? 그랬을 거야. 근데, 너 지금 통화 가능하냐?” 하고,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다소 조심스러운 자세기에,
“참내! 너, 왜 그러냐? 아니, 이렇게 전화를 받다가 끊겠어? 더구나 니 전화를?” 하자,
“아무래도 니가 내일 떠난다니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서... 좀 망설이기는 했는데......”
“아이, 시끄러! 어서 본론이나 얘기해!”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너, 왜 그러냐? 오늘따라 사설이 이렇게 길어?”
“그래, 좋아! 우선, 근데, 너는 그 멀리 가면서 왜 친구들한테 얘기도 없이 떠나려고 해? 사실, 나도 좀 섭섭해.”
“뭔 소리야? 그리고 뭐가 섭섭해? 그리고 뭐,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들어? 몇 달 있다가 돌아올 건데......”
“꼭, 자랑이라야만 얘길 하는 거냐? 그럼 섭하지! 저녁이나 한 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도 밥 타령이냐? 지금 자려고 침대를 펴던 참인데 무슨. 그 말 하려고 그랬던 거야?”
“아니, 이런저런... 그나저나, 잘 갔다 오라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고.”
“응, 고맙다고 얘기하긴 해야겠지만... 뭐, 그런 거까지 신경 쓰고 그러냐? 그건 그렇고, 근데, 너는 어떻게 알았어? 나, 스페인에 간다는 걸......”
“응, 그것 땜에 전화 한 것도 있는데, 야! 나 너한테 한 가지 얘기할 게 있다. 사실은, 고백할 건데. 그동안 참느라 혼났다.”
“뭔, 고양이 풀 뜯는 소리?”
“놀라지 마.”
“?....”
“실은... 나, 니 ‘나팔꽃 얘기’, ‘독백’ 사이트 글 읽었다.”
“뭐라고?” 갑자기 내 온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니가 스페인에 가는 것도 아는 거고, 산티아곤가 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여하튼 음... 그동안 그냥 소리 없이 니 사이트에 들어와서 글을 읽기는 했는데, 뭔가, 그게 찝찝해서. 게다가 어제 기수 전화를 받았는데도, 이 얘기가 목구멍까지 나오는데도 니 소식을 모르는 척하느라, 더 힘들었거든? 그러다 보니 일단 너한테 이 고백을 한 다음에 걔한테 얘길 하든 말든 하려고, 이렇게 전화까지 한 거야.”
“도대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못 알아들어? 니 홈페이지 들어가서 여태까지의 글을 다 읽었다니까!”
“그게 정말이야? 다라고?” 이젠 맥까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 그래서 미안하다고! 아니 까놓고 얘기하면, 미안할 것도 없는 거지 뭐. 너도 거기다 그런 얘길 써 놓았듯, 아무리 비밀스럽다고는 해도 니 홈페이지에 누구라도 들어가 볼 수 있는, 나는 그저 그 사이트의 한 ‘보이지 않는 방문객’일 뿐이었다는 얘기니까. 까놓고 얘길 하면 사실이 그렇잖아? 그리고 내가 너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건, 그저 소리 없이, 그리고 앞으로도 응큼하게 니 글을 계속 읽어 나갈 수도 있지만, 그 건 내 스스로가 좀 찝찝한 데다, 니가 스페인으로 떠난다니 때가 때이니만큼, 그 전에 너한테 속 시원하게 얘길 해버리는 게, 너나 나 둘한테 좋겠다 싶어 이렇게 전화를 건 거지.”
마치 준비해두었던 것처럼 내 홈페이지의 특성을 요점만 간추려 설명하듯 한 준희의 말에, 갑자기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작정하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는 말 같기도 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오던 내 홈페이지에 대한 말의 홍수에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보다는 차라리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재밌는 현상이잖아? 마치 무슨 꾸며낸 얘기 같기도 하고......” 하기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 두려움에,
“그건 또 무슨 말인데?” 하고, 비록 어리벙벙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침을 삼켜가며 내가 묻자,
“그 여자 얘기 말야. 방명록에 글 남기는.....” 하는 데야,
“아!” 하고 내 입에선 얇은 탄식마저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허기야, 그것도 다 알고 있겠구나......” 하는 자포자기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이지. 어차피 처음부터 보기 시작한 건데, 속속들이 다 알지!” 하니,
“아이! 참. 그럼, 내가 빚 얻어 스페인에 간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그 문제가 우선적이자 찝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도, 어제 사이트에 올렸던 글에 또 다른 친구 G(고 영훈)에게 돈 얘길 하려다 말았던 내용을 써넣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렇잖아도 그 일 때문에 전화한 건데. 그렇지만 대놓고 얘길 하기가 뭐해서 말을 좀 돌린 거지, 그리고 니가 사이트에 그 일을 니 인생의 한 커다란 ‘행사’라고 했듯이, 그게 뭐 부끄러울 일이야? 어떻게든 니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 또 너 같은 예술가는 그렇게 해도 사실 안 될 거 없잖아? 정말, 예술가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얘기하는 게 좀 뭐 하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니 여행 경비에 뭔가를 좀 보태려고 생각해 둔 것도 있는데......”
“뭐라고? 그건 또 뭔 소리?”
“응, 내 말은, 나도 다만, 얼마라도 너에게 여행 경비에 보탬이 되게끔......”
“시끄럽다!” 하다간, “그럴 일은 없어!”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래, 나도 니가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지켜보기만 했던 건데, 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고 또 약간 준비도 해두었는데, 감히 얘길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던 거지. 근데, 그냥 넘기기는 뭐하고... 그 얘기는 지금도 유효... 해...... 혹시, 니 은행 계좌번호를 나한테 가르쳐준다면......” 하는데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너, 죽고 싶냐? 그런 일은 없다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렇게 자존심만 내세울 게 아니라, 혹시 알아? 여행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얘길 하면, 이 전화 끊는다!” 하고 단호하게 말하자,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그렇지만 또 거기에 그렇게 나와 있던데, 도대체 마지막 글에 내비친 돈을 융통해 줬다는 니, 그 ‘친구여자’는 또 누구야?” 하고 묻기까지 하니,
“아이! 그 홈페이지를 이사하던지 해야지, 정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아니, 그러지 마! 내가 널 자극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라는 건, 너도 알 거 같은데? 그리고 그, 그림 사겠다고 만났다던 놈 있잖아? 그래, 그건 니가 잘 한 거 같아. 나는 니 편이니까. 그런 놈한테 휘둘리면 안 되지, 넌 예술가니까.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난, 니가 차라리 자랑스럽기까지 하던데...... 아무튼, 근데, 그림 값은 얼마로 한 거야?” 하고 그 미련을 떨치지 못하기에,
“너, 정말 그럴래?” 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니. 다만, 궁금해서 그런 거야. 그래야 다음에라도, 혹시 니 그림을...... 아니, 그런 건 다음 문제고. 그럼, 일단 니가 홈페이지에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건, 묻지 않기로 할 게......” 하고 조금 진정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
“아이고! 인심도, 퍽 쓰시네!” 하게 되었고,
“그게 아니라, 난 널 보호해 주고 싶어서 그래. 어차피 니 홈페이지엔 내 얘기도 있잖아. 프랑스 빠리에 산다는 한 성희 얘기말야. 난 걔가 빠리에 사는 것도 니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지만. 여하튼......” 하는데,
‘아차, 그 얘기도 홈페이지에 있었구나!’ 하고 그제야 나에겐 그녀와의 얘기 한 대목도 떠올려졌다. 그러면서 왜 그런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 너, 말 잘했다. 근데, 너, 성희 얘기 어디 가서 떠들면, 가만 안 둔다!”
“아이! 걱정 마! 내가 애냐? 그리고 그 사달이 다 나 때문에 생긴 건데......”
“알긴 하네! 그러게, 왜 내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하다간, “에이! 그 얘길 지우던지 해야지, 원......” 하면서 나 몰래 나를 동창회 명단에 가입시켜놓았던 그를 나무랐는데,
“나는 니가 그런 일마저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 허긴, 니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야! 그런 얘기 하나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딨냐? 초등학교 동창끼리 서로 연락하며 지내자는데, 그렇게 조심스럽고 나쁘게만 생각할 게 뭐 있어? 허긴,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너 생긴 대로 지껄이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게 제일 좋은 건, 인정을 하고...... 그래야 그걸 보고 나 같은 사람도 호기심에 끌려서 들어가는 거지. 물론 그러니, 나 같은 사람 말 때문에 홈페이지를 없앤다거나 바꾼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는 하지 마라. 니가 싫다면 그런 얘긴 묻지 않을 게. 나 역시 홈페이지에 대해서는 추호도 널 건드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미안!! 다만, 나는 너에게 참고로, 내가 니 홈페이지를 훔쳐봤다는 고백은 해야 될 것 같아서.”
“......” 나는 그 말에 대해선 대답할 수조차 없었지만,
‘참고로 라고?’ 하면서도 또, ‘그건, 그렇기도 하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서 계속 쏟아져 나오던 내 홈페이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들어두어야만 할 것 같기도 했고 또 호기심도 일어난 상태여서 경청하고 있었다는 말이 맞다.
“돈 얘기와 그 여자 친구 얘기도 그렇다 치고 근데, 난 니 사이트에서 벌어진, 그 나팔꽃 글 남기는 여자하고 일어난 사건이 너무 재미 있드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야! 그 게, 누구 재미있으라고 써놓은 거냐?” 하고 버럭 화를 냈는데,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렇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는 얘기지. 특히 요근래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서 수시로 들락거리며 그 글을 읽었고, 또 자주 그 생각도 나드라고. 그리고 뭐 그런 일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줄 알어?”
“더 이상 그 얘긴 하지 말고. 아무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어떻게 알았어? 이 사이트.” 사실 나는 처음부터도 그게 더 궁금했다.
“아차! 그래. 지난 번 겨울에 니네 아파트에 갔을 때, 나, 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잖아? 그래, 내가 너를 ‘동창 찾기 사이트’에 가입시켜놓았다가 또 뭘 찾다가 잘못 클릭했는지, 엉뚱한 창이 뜨드라고. 근데, 그 게 바로 니 ‘독백’ 사이트였어. ‘스페인 여행’도 있고. 근데, 거기 나오는 니 얼굴의 안경 속에서 눈만 깜빡이는 애니매이션 있잖아? 그것부터가 재밌고 시선을 끌더라구. 그래서 들어가 보았는데, 무슨 일기하고 편지 같은 글이 떠서, 그냥 하난가 읽어 보았었지. 뭐, 크게 비밀스러울 것도 없었고 별 건 아니드만. 그리고 그때, 너는 화장실 쪽에서 무슨 전환가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이트 제목도 ‘독백’인데다 괜히 니 일기를 몰래 홈쳐본 것 같아, 차라리 모른 척 하기로 했지. 그런데 그것도, 정말 우연이었어. 그런데 제목이 ‘독백’이라서 그랬는지, 시간이 지나면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지드라고. 그래서 두어 번 더 들어가 보았는데, 뭐 달라진 것도 없고, 그저 그대로드라고. 너, 홈페이지를 한 동안 그대로 몇 달간 내버려 둔 적 있었잖아?”
“......”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거, 싫어?”
“싫고 좋고가 어딨어? 이미 다 벌어진 일인 걸. 게다가 지금 넌 나를 칼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처럼, 어떤 부위를 어떻게 다루느냐 만을 생각하고 있을 텐데, 내가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겠냐는 거지. 지금의 나는 니 처분에 달린 거고. 다만,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어서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나도 알 건 알아야겠다!”
“야! 너무 그렇게 살벌하게 받아들이지 마. 난 이미 얘기했듯이, 니 양해를 구하려는 자센데 그렇게 살벌하게 나오면 어뜩허냐?”
“... 그래? 음... 좋아!”
“그러니, 좋은 식으로 생각해 줘. 그리고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난 니 친구고, 그저 너에게 고마워서 그런 거나 다름없으니까.”
“뭐? 고마워서?”
“그래. 그런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날마다 제공해준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난 재밌었다니까! 진심이야. 뭐, 마음 둘 곳 없고 재미 하나 없는 요즘 세상에, 매일 그런 생생한 실생활의 얘기를 중계하듯 보여준 것만도 참 신선하고 좋았거든. 어쩌면 니 팬이 된 기분이기도 하고......”
“......”
“그래, 기왕에 시작한 거 계속하자. 아무튼, 또 한동안은 잊기도 했지. 그러다 봄에 한 번 들어가 보니, 다시 업로드를 시키더구만. 그래서 가끔 들락거렸는데 나팔꽃 얘기가 등장하면서 뭔가 자리가 잡혀가는 것 같아 고정 멤버가 돼버린 거야. 그런데 어제, 오랜만에 기수한테 전화할 일이 있어서 통활 했는데, 말끝에 기수가 니 얘길 물어 보드라구. 그래서, ‘걔 얘긴 니가 나 보다 더 잘 알지 않냐?’ 하고 물었더니, 너한테서 요즘 통 소식이 없다고 혹시 내가 너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지 물어본다던 거야. 그래서 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는 얘길 해 주려다 문득,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다른 얘기로 돌렸었지. 근데, 그 여자가 안 오겠다고 말하고 홈페이지에서 물러간 무렵 나도 요 며칠 회사 감사 문제로 경황이 없어서 들어와 보지 못했었는데, 기수 전화 받으면서는 니 스페인 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한 거야. 특히 여비 문제. 그래서 어제 밤늦게 접속해 보았더니, 그 여자가 또 들어와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더구만. 그리고 다행히 나머지 여행 경비 문제도 해결됐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내 입장에서도...... 그동안 니 스페인 행에 내가 다 마음을 졸였다니까. 그리고 사실 어제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라도 니 여행 문제에 나설 생각이었다니까. 아무튼 다 해결 돼서 장도에 오른다는데, 좀 늦긴 했지만 최소한 너 떠나기 전에 이 얘기도 하고 또 니 목소리도 들으려고, 오늘 작정하고 지금 방금 집에 돌아와서 씻고, 조심스럽게 전화하는 거야.”
“......”
“야, 근데 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너, 기분 나쁜 거냐?”
“이게 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일이야? 다만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다!”
“그래, 너도 놀라기는 할 거야. 근데, 너도 말했듯이, 어차피 사이버 세상에 던져놓은 얘기니, 이런 일도 벌어진 거 아냐? 아무튼 하던 얘기니까 마저 하자. 아직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한테도 이 얘길 안 했어. 하다못해 우리 집사람한테까지도. 사실은 니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얘기가 신기하고 또 재미도 있어서, 누구한테라도 선전한다는 뜻으로 얘길 해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왠지는 몰라도 그러면 안 될 것 같드라고. 꼭 니 사생활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만은 아닌 것 같아. 뭐랄까? 어쩐지, 그 사이버 세상에서 너에게 일어나던 생생하면서도 진솔한 삶의 얘기는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데, 그건 내 자신에게조차 생소하고 신기한 일이었어. 왜 그런지 나도 니 사이트를 비밀스럽게 지켜두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드라구. 그래서 내 스스로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알리지는 않을 생각이야. 물론 기수한테도. 아니, 몰라, 이렇게 너에게 고백을 했으니, 이제는 맘이 좀 편해져서 하게 될지도. 그렇지만 니가 싫다면 아무한테도 이 얘긴 안할 게."
“좋아, 그건 니가 알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안 하면 좋겠고, 이런 얘기도 해 줘서 고맙긴 하다.”
“정말? 아, 알았다. 아무튼 이렇게 고백을 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야! 남이라면 모를까, 친구 입장이다 보니 더구나 내 얘기도 그 안에 조금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 마치 너에게 무슨 죄라도 진 사람 같았는데, 그게 어디 내 죄야? 하 하 하. 덕분에 이제 난, 니 팬이 된 기분이라니까.”
“....... ”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이 사이트에 어떤 변화를 주겠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미안할 일이니, 이건 부탁이자 당부하는 건데, 나 같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너 하던 대로 계속 했으면 해. 그리고 이사 간다는 말도 했던데, 너 정말 홈페이지 이사할 거야?”
“글쎄......”
“근데, 내 생각은 안 갔으면 좋겠고, 만약 이사한다면 나한테는 살짝 알려주면 안 돼?”
“꿈도 크다!”
“히 히 히. 내가 너와 한 약속 지킬 테니, 나한텐 꼭 알려줘야 돼, 알았어?”
“시끄럽다! 너 땜에라도 이사할 수 있을 테니......”
“더구나 니가 산티아곤가 하는 데 갔다 와서도, 그 일에 따른 얘기도 참 재미있고 또 많을 것 같은데, 나처럼 니가 없는 사이에도 그걸 기다리는 사람도 앞으론 생겨날 거고......”
“기다린다고?”
“그럼! 기다리지. 기다려질 거야. 지금도 뭔가가 머릿속에 그려지니까. 아무튼, 넌 좋겠다! 근데, 그 석 달간 또 홈페이지는 멈출 거 아냐?”
“당연하지!”
“그래서 얘긴데,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린다지?”
“너, 왜 그러는데? 이제 보니, 상당히 웃기는 놈이구나. 기다리지 마!”
“히 히 히. 아무튼 그건 내 얘기고. 기왕에 시작한 일이고, 또 사람들의 호응이 이렇다면 심사숙고해 봐. 재밌는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 해?”
“그렇다니까! 너 여행 갔다 와서 무슨 얘기가 올라올지, 나는 너무 기대가 커. 근데, 궁금해서 하는 소린데 그 여자 왜 그렇게 놔둬?”
“그건 또 뭔 소리야?”
“그 ‘나팔꽃 여인’ 말야.”
“뭐, ‘나팔꽃 여인’? 잘도 갖다 붙이네!”
“그래, 히 히 히. 난 그게 궁금해. 근데, 그 여자 나이가 얼마나 될까?”
“뭐?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긴. 근데, 넌 그게 궁금하지도 않아?”
“그런 말 하지 마라. 전화 끊는다! 나 시간 없다.”
“알았어! 허긴,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근데 아, 그리고 내 생각은, 니가 그 여자랑 잘 해봤으면 좋겠어.”
“뭐야? 이게 미쳤나?”
“좋은 사람 같던데......”
“사람은 알고 보면 다 좋아. 다만 서로가 얼마나 잘 맞느냐가 중요하고 또, 사람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도 많아서 그렇지.”
“그건 그렇지. 어찌 됐든, 내 보기엔 혼자 사는 너한텐 너무 잘 된 일인 것 같은데, 히 히 히. 남들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서 못하는데, 그렇게 자기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는 여자, 나쁠 것 없잖아? 그리고 그 여자의 글을 읽어봐도 너를 이해하고 함께 뭔가를 나누려고 안달이면서 또 지적으로도 상당한 수준 같던데...... 니 안방에서 일어나고 있고,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같던데, 왜 그렇게 끊어버리려고 그래?”
“뭐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 해라!”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건데, 왜 도망치려고만 해? 그 것도 다 니 복이다. 돈 빌려주는 여자도 있고! 똑똑한 제자도 있고! 복. 넌 웬 복이 그리 많아? 여기 저기 여자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복’? 웃기는 소리 하지 말어! 그리고 이 세상일이란 게 어디 니 상상대로 이뤄지더냐? 좌우간, 그런 얘긴 그만 하자!”
“그렇지만, 니가 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지금 너에게 바로 니 안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잖아? 그렇게 여자와 맺어질 수도 있다는 건, 무슨 영화 같은 얘기야. 나 같으면 그런 여자, 어떻게라도...... 헤헤헤. 니가 싫으면 나한테 소개라도 시켜주면... 안 되겠냐? 헤헤헤......”
조금 전 준희에게서 온 전화에서, 그와 나는 정말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너무 장황하고 많은 얘기여서 중간에 끊어버리던지 아니면 그만 지껄이게 하고 싶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내 홈페이지에 대한 얘기는 가능한 한 모두 다 수용해야 할 것 같았고,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것도 느끼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너무 자상한 게 오히려 탈이기도 한 워낙 악의는 없는 놈이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나는 그와의, 너무 세세해서 차라리 조잡했을 수도 있는 대화 내용을 열심히, 어쩌면 지나치도록 추적하고 복기까지 하면서(마치 녹음되어 있었던 것처럼) 기록한답시고 잠도 못자고 애를 썼지만, 빼 먹은 것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실제 말한 것을 글로 옮겨 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 훗날을 위해서, 나는 있었던 그와의 대화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놓는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먹먹하도록 매달려있기는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는 멍청히 깊어진 밤의 신내동 아파트 단지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내 가까운 친구까지 내 홈페이지 상황을 이렇게 다 꿰고 있다는 놀라움은 흥분을 넘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런 내 감정은 새벽 3시가 넘도록 쉬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또, 나는 여전히 아니 어쩌면 이제는 뭔가 확신으로 남기 시작하는, 또 하나거나 두 사람 정도의 방문객이 더 있을 것에 대한 가능성에 따른, 여전히 내가 알 수 없는 내 홈페이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미스테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모르고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그리고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마저 제기되면서는, 어떤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떠날 건데, 초저녁에 써 놓았던 글만으론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최소한 지금 들어오는 사람이거나 내가 없을 때 새로 들어올 사람을 위해서라도 홈페이지에 마지막으로 마무리 말 한 마디 정도를 더 올려둬야 할 것 같아서였다.
6. 14
그동안 1년을 기대하며 기다려왔던 길 떠나는 일이, 왜 이리 겁나는 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아, 차라리......
스르르 잠이 들어 깨어나면 스페인에 도착한 상태고, 또 몇 갠가 꿈을 꾸고, 깨우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일어나면 우리나라의 그 아름다운 가을이어서 내가 어느 들길을 걸으며 상큼한 바람이라도 쐬고 있다면 좋겠다.
혹, 그렇게 된다면, 그 몇 달 사이에 나한테는 무슨 일이 일어나 있을까?
이제, 전화도 인터넷도 끊길 거고 이 홈페이지도 끊길 거고.
비행기에 오르는 일로, 며칠 뒤 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 달 뒤 가을에 돌아오면, 이 사이트는 지금 상태 그대로 남게 될까? 아니면 뭔가 변화가 있을까. 아니, 그 뒤엔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길이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그리고 또,
나팔꽃, 니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근데, 니들도 날 그리워할 거냐?
6. 14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