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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12/21일
12월 21일의 탄생화 : 박하(Mint)
과명 : 꿀풀과
운산지 : 아시아 동부
꽃말 : 덕
아무리 온후한 사람이라도 '박하' 뿌리를 씹으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난폭해진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문집>에서 "박하는 사람 몸을 차갑게 하고 싸움을 못하게 만들므로
전쟁중에 먹거나 심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먹이면 사물이 모두 이중으로 보이게 된다는 마녀의 독약입니다.
박하에는 무서운 독이 있는 전갈에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도 좋다고 합니다.
*박하薄荷 Mint[Mentha arvensis var. piperascens]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꿀풀과의 여러해살이 숙근초. :
야식향(夜息香)·번하채·인단초(仁丹草)·구박하(歐薄荷)라고도 한다. 습기가 있는 들에서 자란다. 높이 60∼100cm이다. 줄기는 단면이 사각형이고 표면에 털이 있다. 잎은 자루가 있는 홑잎으로 마주나고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이다. 잎 표면에는 기름샘이 있어 여기서 기름을 분비하는데 정유(精油)의 대부분은 이 기름샘에 저장된다. 여름에서 가을에 줄기의 위쪽 잎겨드랑이에 엷은 보라색의 작은 꽃이 이삭 모양으로 달린다. 수술이 4개이고 1개의 암술은 끝이 2개로 갈라지며 씨방은 4실이다. 꽃은 주로 오전 중에 피는데 암술은 꽃이 핀 후 3∼4일, 수술은 2∼3일만에 수정된다. 종자는 달걀 모양의 연한 갈색으로 가볍고 작으며 20 → 30 → 15℃의 변온에서 발아가 잘 된다. 【내력】 원산지를 중국으로 보는 학설에서는 태고시대에 중국에서 인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된 것이 서양박하의 기원으로 본다. 옛부터 설사약으로 달여 먹는 풍습이 있었고 습기가 적은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점으로 보아 아주 오래 된 작물로 보이며 BC 1000∼600년경에 이미 이집트에서 재배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채유(採油)를 목적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1750년경이며 독일은 1770년, 미국은 1812년, 일본은 1817년에 각각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호남지방에는 개박하라는 재래종이 있었으며 중국을 거쳐 약용으로 매우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나 채유 목적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1910년경이라 한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도 작물시험장이 박하시범 연구를 실시하여 우량품종 선발과 함께 재배체계를 확립한 바 있다. 【분류】 동양종과 서양종으로 크게 나누는데 서양종은 정유의 성질에 따라 페퍼민트(pepermint/M. piperita)·스피어민트(spearmint/M. spicata)·페니로열민트(M. pulegium)로 구분된다. 동양종은 일본박하(M. arvensis)라고도 하는데 줄기가 붉은 적경종(赤莖種)과 그렇지 않은 청경종(靑莖種)으로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전에 주로 재배된 품종은 적경종·청경종·삼미종·수원1호 등이었으나 방향(芳香)이 좋지 못하다. 【생태】 박하는 대체로 온난한 기후에 알맞은 작물이며 저온이나 고온에서는 멘톨의 함유량이 낮으며 생육기간 중 강수량이 많은 지방에서는 생육은 왕성하지만 유분함량이 떨어지고 녹병이 많이 발생한다. 수확기에는 비가 적게 오는 것이 좋은데 건조 중에 잎줄기가 비를 맞으면 기름샘이 파괴된다. 일조(日照)는 많을수록 좋으나 가뭄에는 약하다. 토양은 배수가 좋은 양토나 사양토가 알맞다. 박하는 꽃이 피기 시작할 때 함유율이 가장 높으므로 이 시기에 수확한다. 건초에서 나오는 정유의 비율은 1%, 정유에서 멘톨이 생산되는 비율은 45%, 박하유 비율은 50% 정도 된다. 멘톨의 함량은 박하의 종류나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본박하는 멘톨 채취량은 많으나 향기는 서양박하보다 떨어진다. 【이용】 박하원유에서 분리해낸 멘톨과 박하유의 주성분은 멘톨이며 이 멘톨은 도포제(塗布劑)·진통제·흥분제·건위제·구충제 등에 약용하거나 치약·잼·사탕·화장품·담배 등에 청량제나 향료로 쓴다. (출처: 두산백과)
[꽃 말] : 덕德, 순진純眞한 마음
[탄생화] : 행복幸福의 별점 아래서 태어난 귀하는 남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因緣이 쉽게 닿지 않는 비극悲劇도 있습니다.
12월 21일 오늘의역사
*[긴긴밤 동지 때에 왜 이런 비극이.........]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12월 21일 베르테르는 롯테와의 사랑에 괴로워하다가 유서를 쓰고 마지막으로 롯테를 찾아간다. 롯테에게 시를 읽어주다가 감정이 격해진 베르테르는 롯테를 포옹한다. 롯테는 "이것이 마지막이예요.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라고 소리친 뒤 그러나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옆방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밤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다.
1431 (조선 세종 13) 유효통, 약용식물 정리한 <향약채집월령> 편찬
1820 (조선 순조 20) 흥선 대원군 석파 이하응 태어남
1885 한일 부산구설해저전선 조관속약(條.款.續.約) 체결
1896 독립문 주춧돌 놓음
1905 이또오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으로 취임
1951 중국 UN휴전안 거부
1961 최인규 곽영주 임하수 등 사형 집행
1961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1963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1965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29세의 청년 곽태영으로부터 피습
1967 박정희 대통령 호주방문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8 경인고속도로 서울-인천간 개통
1970 백두진 제19대 국무총리 취임
1974 TBC, 중앙일보와 합병. 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으로 상호 변경
1979 최규하, 제10대 대통령 취임
1981 중국, 광개토대왕비를 1급 보물로 선정
1983 문교부 학원 사태 제적생 복교허용
1990 소설가 최정희 [崔貞熙, 사망
1995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1995 무노동무임금의 원칙 확정 판결
1999 통일농구 북한 방문단 서울 도착
1999 국내 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발사
2001 서해안 고속도로 완전 개통
2001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
2001 박찬호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계약
2002 일 메이지대학, 고 손기정옹 추모
2006 건설교통부, 도시형 자기부상 열차 시범노선 건설 사업에 본격 착수
해외 오늘의 역사
69 제9대 로마제국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1375 이탈리아 문학가 보카치오 세상 떠남
1620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
1699 프랑스의 작가 라신느 세상 떠남
1795 독일 역사학자 랑케 출생,
1860 미국의 여성 시온주의 조직인 <하다사>의 창설자 졸드(Szold, Henrietta) 출생
1878 그리스도전도회 구세군으로 개칭 .
1879 소련 독재자 요지프 스탈린 태어남
1898 퀴리 부부(Marie Curie, Pierre Curie), 라듐 발견
1906 영국 노동쟁의법 제정
1917 프랑스 모단느서 군용열차 탈선 550명 사망
1917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 태어남.
1918 유엔사무총장. 오스트리아 대통령 지낸정치가 쿠르트 발트하임 출생
1937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상영
1940 위대한 개츠비 의 작가 피츠제럴드 사망
1945 미국 2차대전 명장 조지 패튼 사망,
1946 일본 남해도 시코쿠해역에서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8.0의 진도 발생 1,400명 사망 실종, 가옥피해 13,000여호
1953 오펜하이머(Oppenheimer, Julius Robert), 군 보안 보고서 발표되어 기소당함
1954 미국의 테니스 선수 에버트(Evert, Chris) 출생
1958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1961 모이세 촘베 통일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콩고 분열에 종지부
1962 미국-영국 ,NATO 핵군 창설 합의
1968 미국 아폴로 8호 발사
1971 유엔사무총장에 발트하임 선출
1972 동서독,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 조인
1975 아랍게릴라, 빈 소재 OPEC본부 습격
1977 소련 에너지광선무기 개발
1980 미국 극작가 마르크스 코널리 사망
1983 일본 보이지않는 미사일 개발에 착수
1988 미국 보잉 747여객기, 스코틀랜드 상공서 추락. 258명 사망
1991 아제르바이잔 독립
1991 투르크메니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 카자흐스탄 소련으로 부터 독립
1991 몰도바 독립
1991 우크라이나 소련으로 부터 독립
1991 그루지아 소련으로 부터 독립
1991 우즈베키스탄 소련으로 부터 독립
1991 아르메니아 독립
1991 벨로루시 독립
1991 소련 11개공화국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소련 공식 소멸
1999 유럽 연합 중국에 인권개선과 사형제도 폐지 촉구
2000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상품선물현대화법에 서명
2001 투안구 사예드 시라주딘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선출
2005 엘튼 존, ‘남자와’ 웨딩마치를 울리다
2006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니야조프(Niyazov, Saparmurat) 사망
2006 - 건설교통부, 도시형 자기부상 열차 시범노선 건설 사업에 본격 착수
‘꿈의 기술’ 자기부상열차 세계 3번째로 실용화
선로 위를 1㎝정도 떠서 달리는 자기부상 열차가 오는 2012년까지 한국에 실용화한다.
건설교통부는 지난 14일 사업 총괄수행 기관으로 한국기계연구원을 선정하고 21일 협약을 체결해 도시형 자기부상 열차 시범노선 건설 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이 사업은 올해말부터 2012년까지 4500억원을 투입해 도시형 자기부상 열차의 자동운전 시스템을 개발하고 7㎞ 구간에서 시속 110㎞급 열차를 시범 운행한다. 시범 운행 노선은 내년초까지 신청을 받아 선정하며, 현재까지 부산, 대구, 인천, 대전, 익산 등이 유치를 희망했다.
이번에 한국이 개발하는 자동운전 시스템은 궤도 간격을 기존 200㎝에서 185㎝로, 열차 중량을 1량 26톤에서 20톤으로 성능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자기부상 열차는 바퀴 없이 궤도 위를 떠서 주행하는 새 교통수단으로 소음·진동·먼지가 적으며, 차체가 궤도를 감싸 탈선 우려가 적고, 바퀴·베어링이 없어 유지보수비가 적게 드는 등의 장점이 있다. 지하는 높은 비용 탓에, 지상은 높은 속도 탓에 어렵고, 보통 고가형으로 건설되며, 비용은 경전철 수준이다.
도시형 자기부상 열차는 일본이 지난 2005년 3월 나고야에서 9㎞ 구간에 시속 100㎞의 열차를 운행중이다. 초고속형 자기부상 열차는 지난 2004년 1월 중국이 독일의 기술을 빌려 상하이 푸둥 공항에서 상하이 시내까지 30㎞ 구간에 시속 450㎞의 열차를 운행중이다.
양동인 건설교통부 광역철도팀 사무관은 “현재 일본이 시속 500㎞의 초고속형을, 미국과 중국이 시속 100㎞ 내외의 중저속형 자기부상 열차를 개발·시험중”이라며 “우리가 이 자기부상 열차를 실용화하면 세계에서 세번째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한겨레 2006-12-20 오후 06:43:22
2006 -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니야조프(Niyazov, Saparmurat) 사망
니야조프 [Niyazov, Saparmurat, 1940.2.19~2006.12.21]
21년 독재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급사
심장마비로…후계자 없어 권력 소용돌이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을 21년째 철권통치한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66) 대통령이 21일 갑자기 숨졌다고 <에이피>(AP) 통신이 보도했다.
이 나라 국영 텔레비전은 이날 “대통령이 오늘 새벽 1시10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밝히고, 국기를 배경으로 검은 테두리를 두른 니야조프 대통령의 초상화를 내보냈다. 니야조프 대통령은 1997년 독일에서 심장수술을 받았으며, 지난달에는 심장병으로 일주일에 세 번 약을 먹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 85년부터 이 나라를 통치했으며, ‘투르크멘의 아버지’로 자칭하면서 철권통치를 해 왔다. 야당과 언론자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99년에는 종신 대통령이 됐다. 또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따 달과 날의 이름을 붙이고, 개인숭배에 집착해 화폐와 양탄자, 보드카에까지 자신의 형상을 담도록 했다. 2002년에는 자신의 암살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전직 장관을 텔레비전 공개재판에 세운 뒤,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이런 철권통치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91년 소련 해체 뒤 독립한 인구 500만명의 무슬림 국가 투르크메니스탄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니야조프 대통령이 장기통치하면서 큰 변화를 겪지 않았고, 뚜렷한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료는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에 밝혔다. 이날 정부 소유 신문사 23곳도 신문을 발행되지 않았고 신년맞이 축하행사도 모두 취소됐다.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24일 장례식에 이어, 이 나라 최고 대표자 모임인 ‘국민협의회’ 회의를 26일 소집하고 후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망명한 활동가들은 귀국한 뒤 야당을 조직하겠다고 밝혔다. 후계자가 선출될 때까지는 쿠르반굴리 베르디무흐 아메도프 부총리가 대통령 직무대행직을 맡는다.
이런 가운데 투르크메니스탄이 천연가스 등 세계적 자원 부국인데다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러시아·중국·미국 등도 정국 전개를 주시하고 있다. <아에프페>는 “니야조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이 투르크메니스탄 자원을 확보하려는 세계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6-12-21 오후 06:16:47
2005 - 엘튼 존, ‘남자와’ 웨딩마치를 울리다
엘튼 존, ‘남자와’ 웨딩마치를 울리다
드디어 엘튼 존 경(58)께서 지난 12월21일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된 주인공은 캐나다의 영화감독이자 올해 43살인 오랜 연인 데이비드 퍼니시. 엘튼 존은 게이로서 커밍아웃하기 전 음향 엔지니어 아내와 살았지만, 1987년 이혼 뒤 1993년에 데이비드 퍼니시를 만나 지금까지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왔다. 이번에 동성애 커플에게도 유산, 세금, 연금 등 이성애 기혼자들과 다를 바 없이 동등한 권리가 주어지는 법령이 통과되자 부리나케 식장으로 들어선 것. 결혼식은 윈저시에 있는 17세기풍의 시청에서 양가 부모와 아티스트 샘 테일러 우드 등이 참석한 가운데 45분간 진행됐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은 친절하게 팬과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는 후문이다. 고향집에서 열릴 그의 결혼식 뒤풀이에는 조지 마이클(역시 6월에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오지 오스본 등 유명 연예인이 대거 초대를 받았다.
/씨네21 취재팀·사진제공 REX 2006.01.05
2002 - 일 메이지대학, 고 손기정옹 추모
한국의 마라톤 영웅으로 지난달 작고한 손기정옹의 모교인 일본 메이지대 는 21일 교내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주최측은 메이지대는 이날 저녁 열린 추모행사에서 "손옹은 세계적인 스포츠맨으로 한국의 국민적 영웅이었다"며 "전전 일본의 전체주의 아래서 상상을 초원하는 역경을 감내하면서도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고인을 기렸다.
이날 행사에는 손기정 옹의 유족과 학교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영정에 헌화했다.
(도쿄/연합뉴스) /한겨레 2002.12.22(일) 15:48
2001년] 박찬호,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계약
박찬호가 입단식이 끝난 뒤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기자들의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하고 있다. /조선
박찬호,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계약
2001년 12월 21일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을 결정했다. 2001년 12월 21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박찬호 선수가 아메리칸리그의 레인저스와 5년간 옵션 포함, 7100만 달러(한화 약 923억원)의 조건으로 입단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박찬호는 12월 23일 텍사스주 알링턴시의 레인저스 구장에서 입단식을 갖고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등번호는 다저스 시절과 똑같은 61번. 박찬호의 계약 조건은 공식적으로 5년간 6500만달러로 발표됐지만 박의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에 따르면 600만달러의 옵션이 있어 실질적인 총 연봉은 5년간 7100만달러, 평균 1420만달러로 밝혀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2001년 시즌 73승89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꼴찌로 전락했다. 팀 홈런(246개) 1위, 팀 타율(0.275) 3위의 공격력을 보유했으면서도 팀 방어율 최하위(5.71)를 기록한 허약한 마운드가 문제였다. 자연히 투수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 2001년 스토브리그 기간 중 데이브 버바, 존 로커, 제이 포웰, 토드 반 포펠 등을 무더기로 받아들여 전력 보강을 꾀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땅한 에이스가 없었고, 결국 다저스와의 재계약을 조건으로 배수진을 친 박찬호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2001 -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
언론인 송건호씨 /조선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
한평생 신문기자로 살아온 언론인 송건호(75) 씨가 2001년 12월 21일 별세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자유신문 민국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기자, 논설위원, 편집국장, 대표이사 사장, 회장을 지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68년에는 파리와 베를린에 파견돼, 68혁명이 진행중인 대학 풍경과 베트남 문제를 다룬 평화협상을 국내에 보도했다. 신문기자에서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것은 197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이 계기가 됐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그는 동아일보 광고사태 및 기자 해임에 항의하여 국장직을 사임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해직언론인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의장을 맡아 `말`지를 발행했고,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 초대 사장으로 신문사를 이끌면서 언론계에 복귀했다.
송 회장은 현대사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저작을 남긴 연구자였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공저) 이외에 `한국현대인물사론` `서재필과 이승만` `한국현대언론사` 등 20여종의 저서를 펴냈다. 일평생 언론운동에 종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1999년)과 호암언론상(1994년) 등을 받았다. /조선
영결식 24일 오전 8시, 장지 광주 5·18묘역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을 역임한 청암 송건호 선생(사진)이 21일 오전 6시 서울 은평구 역촌동 28~29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송 선생은 1953년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뒤 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75년 동아일보 기자 150여명이 강제해직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편집국장직을 사퇴한 뒤 재야 민주화운동가로 활약했다. 84년 해직언론인들이 중심이 돼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아 <말>을 발행했고, 86년 <말>을 통해 한국언론의 실상을 알리는 `보도지침'을 폭로해 87년 6월항쟁의 불씨를 틔웠다. 이런 일련의 자유언론 투쟁을 통해 고인은 `우리 시대 언론인의 표상' `해직기자들의 대부' `민족지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인은 87년 국민주 신문 <한겨레>의 창간을 주도하고 88년 초대사장에 맡아 신문사를 이끌었다.
고인은 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연루 혐의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90년대 들어 온몸이 마비되는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97년 이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오랜 기간 투병해왔다.
고인은 한국 현대사 연구 분야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학자였다. 역사학자들이 근현대사 연구를 외면할 때 이 분야에 뛰어들어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사론> <서재필과 이승만> <의열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한국현대사> <김구> <민족통일을 위하여> <한국현대언론사> 등 십수 권의 현대사 관련 저작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순(71)씨와 2남4녀가 있다. 장례는 한국 언론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회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30호. 영결식은 24일 오전 8시, 장지는 광주 5·18묘역이다. 연락처 서울중앙병원 3010-2400, 한겨레신문사 총무부 710-0201~5.
/한겨레 2001.12.21(금) 10:50
2001 - 서해안고속도로 완공
길이 341km로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고속도로이다. 1990년 12월 27일 착공하여 2001년 12월 21일 완공했다.
제1단계 공사구간인 135km 가운데 인천~안산(28km) 구간은 1994년 7월 개통되었고, 안산~당진(61km)·서천~군산(22.7km)·무안~목포(23km) 구간도 1998년 완공되었다. 도로폭은 인천~당진 구간이 왕복 6차선으로 폭 30m, 서천~목포 구간은 왕복 4차선으로 폭 23.4m이다.
또 아산만에는 길이 7.3km, 너비 31.4m(왕복 6차선), 높이 62m의 서해대교가 1993년 11월 착공되어 2000년 11월 완공되었다. 인접한 아산항에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사장교(斜長橋)로 건설되는 이 다리는 교각 사이가 470m에 달해 대형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 /naver
2001 -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선출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말레이시아 국왕 /조선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선출
말레이시아의 신임 국왕에 페를리스주 통치자인 `라자`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이 선출됐다고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2001년 12월 21일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9개 주 최고통치자들의 비밀 투표를 통해 선출된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 새 국왕은 2001년 11월 21일 사망한 살라후딘 압둘 아지즈 샤 전 국왕의 뒤를 이어 13일 제12대 국왕에 즉위했다.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국왕자리는 5년마다 9개주의 최고통치자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왔다. 국왕은 명목상 군통수권자와 3부 수반으로 법령 서명, 장관·판사·대사 임명권을 갖고 있으나, 법률에 대한 거부권은 1983년 상실했다. /조선
2000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상품선물현대화법에 서명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21일] <1581> 상품선물현대화법
2000년 12월21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상품선물현대화법(Commodity Futures Modernization Act of 2000)에 서명했다. 법의 골자는 규제완화. 법은 제정 당시부터 반대가 많았다. 정부 부처가 아니라 대통령 직속 금융대책반이 주관했다는 점에서 적법성 논란도 일었다.
거래추적이 쉽지 않은 파생상품은 규제로 남겨주자는 주장은 애초에 들어갔다. 규제완화 분위기에 묻혀서다. 66년간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 돼온 글래스스티걸(금융권별 전업주의)법이 1999년 폐지된 데 이어 이 법이 마련되면서 미국의 금융규제는 거의 사라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가장 활개친 것은 파생상품. 대출증서를 담보로 신상품을 만들어 팔고 비우량 담보대출도 점조직이 확산되듯 수 없이 증식하며 시장규모를 키웠다. 법이 등장한 2000년까지 매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던 장외 파생상품 거래액은 2008년 말 680조달러까지 늘어났다.
전세계 국내총생산(GDP) 합계액인 65조달러의 10배 이상 수준으로 급성장한 파생상품은 '잠깐 동안의 꿀과 영원한 독'을 함께 안겼다. 극소수 금융회사 임직원들만 상상도 못할 만큼의 연봉과 보너스를 챙겼을 뿐이다. 석유선물시장도 현물보다 크게 오르며 2001년에는 엔론사태까지 불렀다.
언제까지나 성장을 지속할 것 같았던 세계경제도 파생상품 거래로 외형을 잔뜩 키운 리먼브러더스 파산(2008년)을 변곡점으로 하강 기미가 뚜렷하다. 정부의 실패와 시장의 탐욕이 맞물린 결과다.
문제는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경제회생론을 부르짖지만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의 사정은 더 나쁘다. 정부는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고 시장도 여전히 불안하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2/20 18:00:08
1999 통일농구 북한 방문단 서울 도착
남북교류 차원에서 남과 북의 농구선수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펼친 농구대회.
남북의 농구선수들이 경기를 펼치는 남북통일농구대회 첫 대회는 지난 1999년 9월 열렸다. 당시에는 남측의 현대 및 기아(남자), 현대산업개발(여자)이 북한을 방문해 남한-북한 남녀팀이 맞대결을 벌인 뒤 혼성팀으로 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북한 선수단이 기예단과 함께 서울을 방문, 남북한 혼성팀의 경기를 갖고 남북한이 맞대결을 한 바 있다.
이후 4년동안 개최되지 못하다가 2003년 10월 평양의 류경 정주영체육관 개관식을 기념하여 남북통일농구대회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2003년 대회에서 남측 남자팀은 전주KCC를 주축으로 팀을 꾸렸으며, 여자팀은 현대산업개발 선수들을 주축으로 다른 5개 구단 선수가 포함되었다. 특히 북한 남자팀에는 세계 최장신 농구선수인 이명훈도 포함되었다.
한국은 1999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연 1·2차 통일농구에 이어 2003년 3번째 대회까지 통산 여자는 2승1패, 남자는 3전전패를 기록했다.
1999 - 국내 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발사(1999) - 현지시간 20일로~
역사속 오늘[1999년 12월 21일] 국내 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발사
1999년 오늘!
국내 최초의 관측위성인 '아리랑1호'가 켈리포니아주 바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아리랑 1호는 발사 후 81초만에 1단계 로켓에서 분리됐고 13분 48초 후 685km 상공의 우주궤도에 진입하면서 남극 미항공우주국(NASA) 맥머도 지상국과 성공적으로 첫 교신을 했다.
대전 항공우주연구소의 지상국과는 발사 후 6시간 20분만에 교신을 갖고 본격적인 임무수행에 돌입했다.
아리랑 1호는 2002년까지 매 98분 주기로 하루에 지구를 열 네 바퀴 반을 돌며 해양관측, 과학실험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YTN 2009-12-21 월
[오늘의 역사]12월 21일 '아리랑 1호' 발사
1999년 12월 21일 국내 최초의 관측위성인 '아리랑1호'가 미국 켈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아리랑 1호는 발사 13분 48초 후 685km 상공의 우주궤도에 진입했고, 대전 항공우주연구소의 지상국과 교신을 갖고 본격적인 임무 수행에 돌입했다.
아리랑 1호는 매 98분 주기로 하루에 지구를 14바퀴 반을 돌며 한반도 부근의 지도 제작, 해양관측, 우주관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아리랑 1호는 원래 수명인 3년을 훨씬 넘긴 8년 동안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나, 2008년 2월 20일부로 임무가 공식 종료되어 우주 미아가 되었다
이영배 /부산매스미디어뉴스 2009/12/21 11:44
아리랑1호
국내 우주산업의 초석이 될 다목적 실용위성인 아리랑 1호가 21일 오후 4시13분(한국시간) 미 캘리포니아주의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우주로 성공리에 발사됐다.
항공우주연구소는 미 오비탈사가 제작한 토러스 로켓에 의해 우주로 쏘아올려진 아리랑 1호가 발사후 13분26초만에 발사체로부터 완전 분리돼 상공 685㎞의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 지구궤도를 선회중인 것으로 미항공우주국(NASA)의 아리아 비행기와의 교신에서 확인됐다고 이날 밝혔다.
아리랑 1호는 오는 2002년까지 매 98분 주기로 하루에 지구를 14바퀴반을 돌며 한반도및 해양관측, 과학실험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날 토러스로켓에는 보조위성으로 NASA의 소형 태양광 관측위성인 아크림위성도 함께 탑재됐다.
이날 아리랑위성을 탑재한 토러스로켓은 발사후 1분21초만에 1단 모터, 2분46초만에 2단 모터를 분리했다. 이어 곧 3단 모터가 점화되며 발사후 2분53초만에 고도 174㎞에서 위성을 대기의 마찰로 보호하고 있던 페어링(위성덮개)이 떨어져나갔다.
발사후 10분21초에 3단 모터가 분리되고 11분43초에 발사체의 최종 모터와 함께 위성이 궤도진입에 성공했다. 발사후 13분39초만에 발사체와 위성이 완전 분리돼 궤도에 진입했다. 궤도진입후 7분30초가 지나면서 위성체에 전력을 공급하기위한 태양전지판도 펴졌다.
중량 470㎏(높이 235㎝x너비 134㎝x길이 690㎝)의 아리랑 1호는 남극에 위치한 NASA의 맥머도지상국과 이날 오후 4시 44분 두번째 교신을 갖고 위성의 태양전지판 펼침준비와 위성의 주요 상태정보를 전송해왔다.
아리랑 1호는 이어 독일에 있는 지삭지상국과 접촉을 갖고 위성의 상태자료들을 보내올 예정이며 발사후 6시간20분쯤인 21일 오후 10시32분 대전 항공우주연구소의 지상국의 통제를 받게된다.
항공우주연구소의 류장수(柳長壽) 위성사업부장은 '위성이 무사히 궤도에 진입했으나 위성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지는 1-2일 지나야 정확히 알 수 있다'면서 '위성을 통한 영상자료 전송은 1-2개월부터 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아리랑 1호가 발사된 반덴버그 공군기지는 로스앤젤레스 북서쪽 약 240㎞에 위치한 총면적 1억2천평 규모의 미국 최대 발사장으로 지난 59년 세계 최초로 극궤도위성인 디스커버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는 등 그동안 군사첩보위성의 발사를 전담해왔으며 대륙간 탄도탄개발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국내 첫 다목적실용위성인 아리랑1호의 발사 1주년을 맞아 최근 해양관측카메라(OSMI)로 촬영한 한반도 영상을 공개했다.
국내 우주개발의 꿈을 안고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4시13분(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던 국산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1호(KOMPSATⅠ)가 21일로 우주생활 1주년을 맞는다.
위성 개발에서 발사까지 모두 2천242억원이 투입된 아리랑1호(중량 470㎏.높이 235㎝.너비 134㎝.길이 690㎝)는 그동안 지구 상공 685㎞ 궤도에서 매 98분 주기로 하루에 지구를 14바퀴 가량 돌며 한반도 지형관측과 해양관측, 과학실험 등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1995 - 무노동무임금의 원칙 확정 판결
1995년 12월 21일 무노동무임금의 원칙이 대법원에 의해 확정 판결되었다. 1988년 '파업기간 중 임금지급 불가'라는 노동부 지침으로 촉발된 논란은 노동운동에 대한 원천적인 탄압이라는 노동조합측의 입장과 기업의 경쟁력을 주장하는 경영자측의 대립으로 이어져, 이후 노동운동의 주요 논쟁이 되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근로자가 근로 제공을 하지 아니한 쟁의행위 기간 동안에는 근로 제공 의무와 대가 관계에 있는 근로자의 주된 권리로서의 임금청구권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결함으로써 경영자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무노동무임금의 원칙은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문제와 관련해 현재까지도 노사정간에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95 -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정지 등에 관한 사항등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1995년 12월 21일 제정된 법률이다.(동 법 제1조)
관련자들은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으나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5, 합헌 4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결정문에서 헌법재판소는 공소시효의 완성 여부에 관해 가정적으로 두 경우를 나누어 위헌 여부를 판단하였는데, 같은 법률이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사건을 규율하는 것이라면 합헌이라고 보았지만, 공소시효가 완성된 경우라면 위헌이 5인, 합헌이 4인으로서 결국 합헌 결정을 받았다. 헌법재판관 중 4인은 공소시효의 완성 여부는 헌법재판소가 아닌 법원의 판단의 몫이므로 판단을 유보한 것이었고 2인은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을 규율하는 것이므로 위헌, 3인은 공소시효는 완성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입법이므로 합헌이라는 견해였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12.12를 불기소처분하였으나,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고 결정 이유에서 밝혔다. 5.18 특별법 제정할 즈음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성되기 하루 전 날인 1996년 1월 23일 전격적으로 전두환 등을 내란죄와 반란죄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5.18 사건의 경우에는 5.18 특별법의 공소시효 정지규정이 적용될 필요가 없었다. 1997년 3월 대법원은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내란죄 및 반란죄 등의 죄명으로 처벌하였다
관련 판례 /위키백과
1991 - 소련 11개 공화국, 독립국가연합 창설
소련11개 공화국 지도자들이 독립국가연합 창설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조선
역사속 오늘[1991년 12월 21일] 독립국가연합 공식 출범
1991년 오늘, 카자흐 공화국의 최대 도시 알마아타에 소련의 11개 공화국 대표들이 모였다.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대체할 CIS, 즉 독립국가연합을 출범시키기 위해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따라 발트3국이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공화국 간 이해 대립이 첨예화하면서 큰 균열이 생긴 소비에트 연방을 공식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하는 자리다.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되 경제적으로는 강하게 유대하기로 합의했다.
/YTN 2009-12-21 월
소련 11개공화국,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소련 공식 소멸
소련을 구성해 온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등 11개 공화국 지도자들이 1991년 12월 21일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에서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협정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 형태를 공식 탄생시킴으로써 74년동안 이어져 온 소련이 공식 소멸됐다.
CIS 공동 창설자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한 각국의 지도자들은 CIS 창설 협정의 부속 의정서, 가맹국간의 국경 불가침과 민족 자결을 규정한 알마아타 선언, 핵무기의 통일 관리에 관한 협정, 러시아를 UN에서의 소련의 계승자로 하는 성명 등 6개 문서에 조인했다.
독립국가연합은 1993년 10월 그루지야가 가입함으로써 12개 공화국으로 확대됐다. 몇 차례의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1995년 2월 10일의 알마아타 정상회담에서는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에 합의하고, 상호협력 협정을 채택했다. 1996년 1월 19일의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 공산당이 제기한 소련 부활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경제통합에서는 군사·정치 통합의 흐름을 강조했다.
CIS의 조직은 최고협의기구인 국가원수평의회(정상회담)와 그 산하에 총리협의체 그리고 가맹국의 해당 장관들로 구성되어 실무를 담당하는 각료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정상회담은 연 2회 이상 개최하고, 협력체제의 효율적 확립을 위하여 6개월 임기의 순회의장제를 도입했다. 총리협의체는 연 2회, 각료위원회는 연 4회 이상 열도록 돼 있다. /조선
1990 소설가 최정희 [崔貞熙, 1912.3∼1990.12.21] 사망
*함경남도 단천 출생.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를 마쳤다. 1933년 잡지 《삼천리(三千里)》지 사원이 되었으며,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에 단편소설 《명일(明日)의 식대(食代)》 《성좌(星座)》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 이후 많은 순수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한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지맥(地脈)》(1939) 《인맥(人脈)》(1940) 등을 발표하였으나, 1942년부터 《장미의 집》 《야국초(野菊抄)》 등의 친일적인 단편소설과 수필·단문들을 쓰기도 하였다. 1956년 《주부생활》지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1960년 발표한 대표작 《인간사(人間史)》는 일제 말기에서 8·15광복, 남북분단, 6·25전쟁을 거쳐 4·19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역사적 변천사를 그린 작품이다. 1970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고 1972년 여류문인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한편 조연현(趙演鉉) 문학상 운영위원,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작품세계는 체험적 인생주의(人生主義)에서 시작해 객관적 사실주의, 민족적 역사의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인맥》은 사후인 1996년 딸 김지원(金知原)이 앞뒤에 글을 덧대 장편 《소금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단편집으로 《천맥(天脈)》 《바람 속에서》 《찬란한 대낮》 《풍류잡히는 마을》 등이 있고 장편에 《별을 헤는 소녀들》 《녹색의 문》 등이 있으며, 수필집에 《사랑의 이력》 《젊은 날의 증언》 등이 있다. 서울시문화상·여류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3·1문화상 등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1988 - 미국 팬암 여객기 공중폭발
역사속 오늘[1988년 12월 21일] 미국 팬암 여객기 공중폭발
영국 런던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미 팬암사 소속 보잉747여객기!
1988년 오늘 밤, 스코틀랜드 록커비 마을 만 미터 상공에서 공중 폭발한다.
아랍계 테러리스트가 기내에 설치한 플라스틱 폭탄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참사다.
승객과 승무원 등 비행기에 타고 있던 259명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또 비행기 잔해가 록커비 마을로 떨어져 주민 11명이 희생되고 집 40여 채가 불탔다.
/YTN 2009-12-21 월
스코틀랜드 로커비상공에서 폭발된 팬암여객기 잔해물 /조선
팬암기 영국 상공에서 폭발. 269명 사망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 103편 보잉기가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상공 10Km 지점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승무원과 승객 258명 전원과 폭발지점에 있는 마을 주민 11명이 사망했다. 폭발원인은 플라스틱 폭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비행전에 헬싱키주재 미대사관에 익명의 협박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일상적인 협박으로 무시되었고 사건후에도 자신들의 범행이라고 주장하는 두곳의 범행성명이 있었다. 1988년 7월의 미군함에 의한 이란 여객기 추락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명과 1986년 미국의 리비아 폭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명이었다. 1990년에 미국은 2명의 리비아인를 범인으로 지목, 리비아에 범인 인도를 요청했지만 리비아는 이를 거부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88년 팬암 항공기 폭파사건
오후 7시 스코틀랜드 남단의 로커비 마을 상공.
한 시간 전 런던 히스로 공항을 출발한 미국 팬암 항공 소속 보잉 747기가 뉴욕을 향하고 있었다.
‘쾅-’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불길이 치솟으며 어둑어둑한 하늘에 번졌다. 초대형 여객기는 그 속에서 형체를 감췄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평온하기만 했던 마을은 일순 정지된 듯했다. 뒤이어 아비규환의 비명과 공포가 엉켰다.
여객기의 거대한 파편이 마을 곳곳의 농장과 가옥을 덮쳤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11명의 주민은 목숨을 잃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259명은 공중에서 비명(非命)에 사라졌다.
1988년 12월 21일 발생한 ‘팬암 항공기 폭파사건’이다.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날 참사는 최악의 항공기 사고로 꼽힌다. 동시에 뉴테러리즘의 시발(始發)로 불리기도 한다.
기존의 테러리즘은 정치적 명분과 대중의 지지를 중요시 했다. 이 때문에 테러 단체는 스스로 범행 사실을 밝히고 동기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팬암 사건은 달랐다. 무차별적 살상을 노린 데다 범행 주체가 몸을 숨겼다. 테러리스트가 나서지 않은 첫 테러였다.
당장 미·영 합동 수사팀이 꾸려졌다. 3년간 50개국 1만4000여 명을 심문한 수사팀은 1991년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폭발 현장에서 발견된 라디오 카세트와 타이머 장치 파편이 리비아 정보요원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그때부터 미·영과 리비아 정부 간의 끈질긴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미·영 정부는 용의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리비아는 거부했다.
유엔안보리는 1992년부터 리비아에 대해 민간 항공기 운항 금지, 해외 자산 동결, 정유 관련 장비 판매 금지, 항공기 및 무기 수출 금지 등의 제재를 취했다.
이 같은 경제제재로 리비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실업사태와 치솟는 인플레이션 탓에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숨통이 막힌 리비아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제3국에서 재판을 진행한다는 조건으로 1999년 용의자 2명의 신병을 인도했고, 2002년에는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조건으로 유족 한 가구당 1000만 달러(약 125억 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10여 년 만에 일단락된 팬암 사건은 경제제재에 호되게 당한 리비아가 2003년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동아닷컴 2007-12-21 02:58
1981 - 중국, 광개토대왕비를 1급 보물로 선정
이미 8년 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은 주로 고구려사 왜곡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 같다. 이 '공정'의 근본에는 '만주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중국이 경제 성장으로 국력이 커지면서 과거 동아시아 일본 패권 100년에 뒤이어 '팍스 시니카(Pax Cinica)'의 패권 의식이 한족(漢族) 민족주의의 낡은 틀에 걸려 자승자박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다. ...
중국도 오늘의 다민족 통일국가의 국민적 일체감을 만들기 위해 나치스나 군국일본의 민족주의 사관을 닮지 말고 과거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열려진 동아시아 역사관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우선 만주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는 우리 민족사에 대한 자존심의 기념비기도 했다. 그 비명이 만주 지방 등에 고구려의 강토를 넓힌 '광개토'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청'일전쟁을 앞두고 그 지방에 들어왔던 일본군 간첩이 이 비문의 일부를 깎아 변조하여 고대사 왜곡을 시작했다. 이 광개토왕비 자체가 그리고 그 비문이 고구려가 '변방 정권'일 수 없고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없는 확고한 증거가 되는 금석문이다.
“동북공정은 일제 군국사관의 복제품!”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2007/06/16 08:32 /위클리조선 2004-08-27 17:34
1980 미국 극작가 마르크스 코널리[Connelly, Marc,1890.12.13∼1980.12.21]사망.
*본명 Marcus Cook Connelly. G.S.코프먼과 합작한 희극이 많다. 연인을 버리고 돈 많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려고 한 청년 작곡가가 꾸는 악몽을 통하여 미국의 문명 사회를 풍자한 《말을 탄 가난뱅이 Beggar on Horse back》(1924)가 유명하다. R.브랫퍼드의 소설을 각색한 《녹색의 목장 The Green Pastures》(1930)은 성서에 대한 흑인의 생각을 환상적 ·우화적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1979년] 최규하(崔圭夏) 제10대 대통령 취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취임해 10월 27일 새벽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의 대의원 2천5백60명중 2천5백49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의원 8백27명의 추천을 받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비상계엄령을 해제했다.
단독으로 입후보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찬성 2천4백 65표, 무효 84표로 대통령에 당선, 1979년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조선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 /조선
[오늘의 역사]최규하, 대통령 취임
최규하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이 1979년 오늘 취임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자동적으로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게 됐다.
최규하는 취임과 함께 유신헌법을 대신하는 신 헌법과 민주적 선거를 약속한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뜻을 같이하는 군부 세력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1980년 초에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전두환과 다른 정치가들의 강요에 의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고 5월엔 전두환이 계엄령을 내리면서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광주에 계엄군을 출동시키며 발생한 광주 민주화 운동 사건으로 200명의 시민이 사망, 최규하는 사임했으며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6년 10월 22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1975 - 아랍게릴라, 빈 소재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를 습격, 각국 대표 수십명 인질 난동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를 습격한 아랍테러분자들에게 잡힌 인질들의 모습 /조선
아랍게릴라, 빈 소재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를 습격, 각국 대표 수십명 인질 난동
1975년 12월 21일 오전 11시40분,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례 각료회의를 개최하던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가 6명의 게릴라에게 습격받았다. 게릴라들은 3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상 등 각국 대표를 포함 수십명을 인질로 하고 본부를 점거했다. 게릴라들은 TV, 라디오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선택한 아랍제국을 비난했다. 이튿날 아침 게릴라들은 빈에 살고 있는 인질을 석방하고 알제리 공항에서 아랍제국 이외의 인질을 석방했다. 이들은 각국에서 입국을 거부하자 12월 23일 투항했다. /조선
1974 TBC, 중앙일보와 합병. 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으로 상호 변경
1965년 9월 22일 이병철(李秉喆)이 창간하고 그 해 12월 7일부터는 '동양(東洋) 라디오'와 '동양 텔레비전'을 통합 운영하여 신문·라디오·TV의 3개 매체를 겸영하는 첫 언론기관이 되었다.
자매지로 《주간중앙》(1968.8), 《월간중앙》(1968.4), 《소년중앙》(1969.1), 《여성중앙》(1970.1), 《학생중앙》(1973.4), 《영레이디》(1981.9), 《계간미술(季刊美術)》(1976.11), 《문예중앙(文藝中央)》(1978.3) 등을 계속 창간하여 다양한 종류의 매체를 소유한 종합 매스컴 센터가 되었다. 이 가운데 《주간중앙》은 1987년 12월 20일자로 폐간하고 새로 《라벨르》(1990.3)와 《뉴스위크 한국판》(1991.10), 그리고 패션생활지 《쎄씨》(1994.9)를 창간했다. 또한 격주간이던 《이코노미스트》를 1994년 8월 31일부터 주간으로 변경하면서 판형을 확대했다. 2009년에는 타블로이드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판형을 변경했다.
1면에 게재되고 있는 고정 칼럼 <분수대(噴水臺)>와 단평란 <역광선(逆光線)>이 지면의 특색으로 손꼽히며, 이 신문의 영구적 캠페인인 '도의문화운동'의 전개에 따르는 여러 시리즈 기사들을 장기연재하고 있다. 제작기술에서는 다른 신문에 앞서서 컬러 인쇄기술을 도입, 1967년 3월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모노타이프 시설로 부분적으로 신문의 활자주조와 문선공정이 동시 처리되도록 하였다.
창간 13주년이 지난 1978년 12월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였음을 공포할 만큼 경영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1974년 12월 21일 법인체의 명칭도 신문과 방송을 통합한 '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으로 변경하였으나, 1980년 11월의 언론기관통폐합 때 동양 라디오와 TV가 KBS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1981년 1월부터 '주식회사 중앙일보'로 변경하였고, 1985년 9월 22일 신사옥을 준공하였다.
1994년 3월 《중앙일보》와 자매지인 《중앙경제신문》(1988.8)을 통합하여 1편집국 2매체 형태로 운영하다가, 7월 16일 《중앙경제신문》을 폐간(지령 1990호)하고 《중앙일보》에 통합한 뒤 9월 1일부터 종합뉴스·경제·스포츠 등 3개로 나뉜 48면의 3개 섹션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92년 강남사옥, 대구공장, 광주공장, 안산공장을 차례로 준공했다. 1998년 중앙일보뉴미디어의 분사를 시작으로 중앙이코노미스트, 문화사업단, 정보사업단, 월간중앙, 중앙미디어유통, 교육사업단을 차례로 분사하고 1999년 4월 삼성계열에서 분리했다. 2005년에는 일간스포츠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주식회사 형태로 납입자본금은 130억 원이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해외지사가 있다. 사옥은 서울시 중구 순화동에 있다.
1972 - 동-서독 관계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오늘의 경제소사/12월21일] 동서독기본조약
1972년 12월21일 정오,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이 기본조약을 맺었다. 골자는 두 가지. 상호 승인과 유엔 동시 가입이다. 본조약 외에 통행규제 완화, 이산가족 재결합, 우편물 교환 확대 등을 포함하는 각서도 교환, 본격적인 협력의 장을 열었다.
동서독기본조약은 발표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독일 문제의 독일화’라는 원칙이 정해진 것이다. 2차 대전 전범국으로 분단 27년 만에 민족의 운명을 독일인의 의지대로 결정하자는 조약을 성사시킨 주역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1969년 집권 후 ‘동방정책’을 표방하며 소련과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했다.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관계를 개선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원칙’을 기조를 삼아온 서독이 내린 파격적인 조치는 결국 동서독 상호 인정과 화해로 이어졌다.
브란트 총리는 먼저 여건 조성에 나섰다. 승전국의 권리를 가진 미국과 영국ㆍ프랑스ㆍ소련을 설득해 ‘동서독 현안은 독일 내부 문제’라는 베를린협정(1972년 6월)을 이끌어낸 것. 미국의 반대가 없지 않았지만 금-달러본위제를 폐지(1971년)할 정도로 경제사정이 다급한 미국에 최대한 협조함으로써 독일 문제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양독조약을 바탕으로 동서독은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교류를 확대해나갔다. 연간 500만명 이상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하고 동독 시청자의 70%가 서독 TV를 시청하면서 통일 기운도 무르익었다.
결국 1990년 10월, 동서독은 분단 45년 만에 통일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양독조약 체결 이후 통독까지 서독은 연간 평균 32억달러씩을 동독에 퍼부었다. 정권이 교체돼도 통일정책의 근간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일관된 정책과 돈의 힘이 통일을 성사시킨 셈이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2/20 17:54
1971 - 유엔 사무총장에 발트하임(Waldheim, Kurt) 선출
1971년 1월 미얀마 출신의 UN 사무총장 우탄트가 3선 도전을 하지 않겠다 밝혔는데, 거의 1년간의 고민 끝에 발트하임이 후임으로 낙점된 것이다. 그의 53번째 생일(이자 우탄트의 임기 만료 10일 전)에 발트하임을 낙점했음이 발표되었고, 곧 그는 1972년부터 국제연합 사무총장 자리를 맡게 된다. 발트하임의 임기동안 UN은 제 3회 국제 무역개발회의, 제1회 인간환경회의, 제3회 국제식량회의 등 여러가지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재선에 성공한 후에는 미국 카터 대통령과 함께 보이저에 실어보낼 음성파일을 녹음하였고, 1978년에는 UN 사무총장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발트하임의 임기 내내 중동 문제, 특히 이스라엘 문제는 항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당시 이스라엘은 1972년 뮌헨 올림픽 사건과 뒤이어 터진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해 복수에 눈이 벌개진 상태였고, 영화 "뮌헨"에서 보여준 것처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원들을 전세계에서 암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더 분노하게 한 것은 발트하임이 친 아랍 스탠스를 취했다는 것이었다
1970 백두진 제19대 국무총리 취임
백두진
출생
1908년 10월 31일?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군
사망
1993년 9월 5일
대한민국
국적
대한제국, 일본 제국, 대한민국
학력
일본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
직업
정치가, 금융경제인
백두진(白斗鎭,1908년 음력 10월 7일, 양력 10월 31일[1] 황해도 신천군 - 1993년 9월 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경제 관료로, 호는 소계(小溪)이다.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 은행에 들어갔다. 1945년 한국 은행 이사를 거쳐 1949년 외자청장, 식산 은행장을 역임했으며 1951년 재무부 장관, 1952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53년 4월 24일부터 1954년 6월 17일까지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이후 공화당 총재 상담역, 제 7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으며, 제8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으로, 제9대 국회에서는 유정회 회장을 지냈으며 10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제7, 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0년 12월 21일부터 1971년 6월 3일까지 다시 국무총리를 지냈고 1973년에서 1980년까지는 유신정우회 의원이었으며, 1973년에는 유신정우회 의장을 맡아 유신체제에 적극 협력하였다.[2] 이후 제10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냈으나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가 일어나자 사퇴하였다.
[편집] 생애
★백 두 진 (白斗鎭 )
출 생 지 황해 신천
생년월일 1908년 10월 07일 ( 양력 )
학 력 1915 ~ . 휘문고등학교
~ 1934 . 도쿄대학교
~ 1971 .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
~ 1972 . 경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1972 . 필리핀대학교 명예법학박사
~ 1980 . 루이스앤드클라크대학 명예정치학박사
경 력 1934 . 조흥은행
1945 ~ 1950 . 조흥은행 이사
1949 ~ 1949 . 제1대 임시외자총국장
1949 ~ 1950 . 제1대 임시외자관리청장
1949 . 식산은행 은행장
1950 ~ 1980 . 휘문의숙 이사
1951 ~ 1953 . 제3대 재무부 장관
1951 ~ 1953 . 제4대 기획처장
1952 ~ 1953 . 국무총리 서리
1952 . 한미합동경제위원회 대표
1953 ~ 1954 . 제4대 국무총리
1961 . 제5대 민의원
1967 . 제7대 국회의원(공화,전국)
1970 ~ 1971 . 제10대 국무총리
1971 ~ 1973 . 제8대 국회의원
1971 ~ 1972 . 제8대 국회 부의장
1971 . IPI.APU한국위원장
1971 ~ 1984 . 국토통일 고문
1973 . 제9대 국회의원(유정)
1973 ~ 1979 . 제1대 유신정우회 의장
1973 . 유정회 정책위의장
1973 . 한일협력위 회장
1979 . 제10대 국회의원(유정)
1979 ~ 1979 . 제10대 국회 의장
1985 . 민족중흥동지회 고문
1987 . 공화당 상임고문
1991 . 대한민국헌정회 고문
1992 .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고문
주요저서 백두진회고록(전편),1975.4
백두진회고록(후편),1981.2
대한민국 현대인물사,1989
1968년] 경인고속도로, 경수고속도로 개통. 다섯 곳에서 끊은 테이프
1968년 12월 21일은 대한민국 수송혁명의 문이 열리던 날이다.
서울~인천 고속도로(23.4Km, 가좌 인터체인지까지)와 서울~수원 고속도로(31.3Km, 신갈 인터체인지 까지)가 한꺼번에 개통된 것이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 경사였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많았었다. 장비가 없고 기술이 없고 재원이 달렸다. 무경험에서 오는 갖가지 시행착오와 사회적 잡음 등이 항상 이 사업을 괴롭혔다. 숱한 어려움을 오직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슬기로운 신념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오늘 <전국 1일 생활권화>의 서막을 열기에 이른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소재 당중국민학교의 교정에서 열린 개통식의 광경은 당시의 신문들이 큼직큼직한 활자를 사용하여 다투어 보도했다.
‘뻗어가는 고속도로, 삼천리는 이웃된다.’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나붙은 개통식장에 시민들의 축하 인파가 어울어지고 박정희대통령 부처와 삼부요인, 그리고 다수의 주한외교사절이 단상에서 자리를 잡자 경축 일색의 후끈한 분위기가 이날의 쌀쌀한 기온을 가볍게 날려 버렸다.
헬리곱터가 경축비행을 하는 맑은 하늘에 오색풍선이 화려하게 떠오르고, 조국 번영의 탄탄대로를 축하하는 감격적인 팡파르가 드높이 울렸다. 이 역사적 순간의 감격을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흥 연설로 표현했다.
“근대 산업국가에 있어 도로의 혁명 없이 산업의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도로의 근대화 없이 산업의 근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경인고속도로만 하더라도 과거 서울~인천간의 50분 소요시간을 불과 18분으로 단축시킨 것은 혁명적인 사실이며, 더구나 이 고속도로가 앞으로 완공될 인천 제2 도크와 연결되는 날 경인간의 수송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연변의 산업도시가 획기적으로 발전될 것이 예견 됩니다.
서울~부산간의 고속도로가 70년말 까지는 4시간의 거리로 연결될 것이며 이 연변에 새로운 산업발전이 이룩되면 이는 우리 경제개발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특히 이 공사에서 자랑스러운 것은 두 고속도로를 모두 우리기술과 자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이룩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길을 달리면서, 이 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어떠한 산업이 발달되고 이 연도에 어떠한 새로운 산업이 발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 길에는 우리들 세대뿐만 아니라 후세에 우리 후손이 시속 1백Km라는 빠른 속도로서 주야로 이 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나라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흐믓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건설 유공자들에게 훈장과 표창장이 수여되었다. 서울~인천 고속도로 건설공사사무소장의 중임을 다한 한유록씨는 최고의 영예인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박정희대통령은 이날 다섯 군데에서 개통 테이프를 끊고 오색풍선을 날렸다.
먼저 서울~인천간 고속도로의 입구에서 첫 테이프를 끊고 단숨에 가좌인터체인지까지 시주, 그곳에서 테이프를 끊어 경인선을 개통시켰다. 서울~수원 고속도로에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이수교·양재동 톨게이트 신갈인터체인지에서 각각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이틀 전에 발족한 고속도로순찰대 소속 순찰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수원간을 질주 할 때에는 공군기 두 대가 오색 연막을 하늘에 내뿜으며 축하비행, 축제 무드를 한층 고조시키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도로 노면에 샴페인을 산주(散酒)하여 자손만대에 이어질 이 고속도로의 앞날을 축복했다. /Google
1965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Pekingese], 29세의 청년 곽태영으로부터 피습
*[안두희]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으로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예편되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그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1년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시역의 고민》(1955)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김구암살사건 金九暗殺事件] -1949년 6월 안두희(安斗熙)에 의하여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된 사건으로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오전,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그의 거처인 경교장(京橋莊)으로 찾아가 45구경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경호원들에 의하여 붙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응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살해 동기를 진술하였다. 8월 6일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형기는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안두희는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으로서 당수인 김구를 찾아가 어떤 정치문제에 관하여 언쟁을 벌이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다. 복역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안두희를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하여 바로 군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그 후 국회에서 그의 석방과 군 복귀에 관하여 문제가 제기되자 정부에서는 그를 소령으로 예편시켰다. 그 후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 이후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 규명과 안두희에 대한 재처벌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범인인 안두희가 계속 전모를 밝히지 않은데다가 제2공화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재처벌은 물론 사건 진상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두희의 부분 진술이나 지금까지 벌인 조사의 결과 밝혀진 바를 종합해 보면 김구 암살사건은 배후가 있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크다. 안두희는 증언에서 암살의 배후 조종 세력으로 당시의 포병사령관 장은산(張殷山)과 고위 정치 브로커 김지웅을 지명함으로써 이 사건에 군과 경찰, 그리고 정계 요인들이 연관되었음을 암시하였다. 범행 1주일 전에 대통령 이승만을 만났다는 진술까지 하고 있다. 안두희는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김구 암살범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백주대로를 활보하는 데 의분을 느낀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피습 위협을 받아오다가 1996년 10월 23일 버스 운전기사인 박기서(朴琦緖)에게 살해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963년]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 196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이 송금해 온 달러는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가 87달러(62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63년)에 달하고,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61년)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는데, 몰려든 지원자가 2874명이었다.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명.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작업도 간단치 않았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년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아 위로의 말을 하다가 “조국이 가난해서…”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는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견된 광부는 1978년 서독정부가 광부수입을 중단할 때까지 줄잡아 7800명이나 됐다./조선
1961 최인규 곽영주 임하수 등 사형 집행
생애 초반
10세 때 광주군 구천면 상일공립보통학교(上一公立普通學校)에 입학, 4학년 때인 1932년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 속성과에서 1년을 공부한 실력으로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결시험에 합격하였다.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1947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에 편입학하고, 1949년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편집] 정관계 활동
1949년 대한교역공사(大韓交易公社)업무부장으로 들어가 1950년 대한민국 정부의 동남아시아 무역사절단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사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의 해산으로 1951년 발족한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로 옮겨 상무이사로 재직하다, 1954년 대한민국 3대 총선에 자유당 공천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입후보하였으나 신익희에게 패배하여 낙선하였다. 1955년 이기붕의 알선으로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회(UNKRA) 뉴욕주재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같은해 제네바회담에 한국업저버로 참석하였으며,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이 되었다.
1958년 대한민국 4대 총선에 다시 광주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9월에 교통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59년 3월에는 내무부장관이 되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여 4·19 혁명의 한 원인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편집] 만년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원흉으로 지목받아 같은해 5월 3일 구속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21일 곽영주, 임화수 등과 같이 서울형무소에서 교수(絞首)되었다.
< 임화수 >
임화수(林和秀; 1919년 ~ 1961년 12월 21일)는 영화인이며[2] 국내 최초로 한국의 연예계에 성 상납 시스템을 만든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으로 본명은 권중각(權重珏)이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임화수로 개명했다. 21살 때(1939년) 소매치기로 개성형무소에서 2년, 24살(1942년) 때 장물취득혐의로 2년을 더 옥살이하였다. 학력도 없고 배운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극장을 좋아하여 극장 주변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렸다. 광복 후 그는 적산가옥으로 서울의 미나도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았으며 점차 영화계의 대부로 급부상하여 훗날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정재와 더불어 동대문파의 2인자로 떠오른 임화수는 이승만의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비호 아래 국내최초의 외국합작영화인 《천지유정》(1957)을 홍콩과 합작해서 만들어냈으며, 또 《길 잃은 사람들》,《사람팔자 알 수 없다》 등의 영화 15편을 제작했다.
반공예술인단이라는 반공단체를 조직해 단장이 되어 자유당 정권과 더욱 밀착했으며 경무대에서 곽영주의 영향으로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울면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폭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그에 대한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김희갑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합죽이 구타사건으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면 출신지와 나이를 속이기는 물론, 예매표를 조작하여 부당한 이득을 챙겼으며, 남자 배우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젊은 여배우들을 권력자에게 상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이정재가 은퇴하며 물러난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자리를 이어받고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단 책임자가 되었으며, 유지광 등에게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정치테러를 지시하였다.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집단으로 구타, 많은 대학생들을 살상하게 하는 이른바 고대생습격사건을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5.16 군사정변 후 그가 사형당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고대생습격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이정재와 유지광 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는 등 재판 내내 울먹거리며 갖은 잔꾀를 부렸다.
그가 폭로한 화랑동지회 사건으로 이정재는 범죄단체조직 등이 추가되어 사형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는 훗날 유지광의 자서전 대명에도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가족면회를 하던 날에 유지광은 임화수를 만나자 분노가 폭발하여 그에게 구타를 가하려고 했다가 최인규 전 내무장관의 강력한 만류로 간신히 진정되는 일도 있었다.
재판에서 이정재 · 최인규 · 곽영주 · 신정식 등과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에 서울형무소 형장에서 곽영주 · 최인규 · 조용수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곽영주(郭永周, 1924
년 1월 10일~1961년 12월 21일)는 일제 강점기의 군인, 대한민국의 경찰인으로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인 경무대 경호책임자였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 유지광과 더불어 이천 3인방이었던 곽영주는 경성공립직업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고향 선배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를 입교 및 수료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승만의 눈에 띄어 경호하였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1956년 경무대 경찰서장 (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 경무관 직급)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점점 그의 위세는 이승만의 후광으로 더 높아져서, 세간에서는 그를 곽 박사(혹은 미스터 곽,곽 군)라고 불렀으며 권력의 제3인자인 '부부통령'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한편 같은 고향 출신의 선배인 이정재와 막역하여, 정치깡패를 비호하였다.
한편 1957년 박정희가 육군소장으로 진급하는 진급심사위가 열리고 박정희를 소장으로 진급시키는 안이 통과되자 심사장을 찾아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모함하여 박정희의 진급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렬이 박정희를 변호하여 박정희의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하야하고, 얼마 안있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박정희가 실권을 잡고 군정(軍政)이 실시되자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정치깡패를 비호한 것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 하에서 권력남용,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으로 밀려온 시위대에 대해 발포명령을 내려 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명으로 홍진기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2월 19일 재판에서 원심을 깨고 홍진기는 무기징역, 유충렬은 20년형이 선고되었지만, 곽영주는 사형선고되었다.
1961년 12월 21일, 전직 내무장관으로서 3·15 부정선거 때 자유당정권의 명령하에 이를 진두지휘한 책임자 최인규, 제1공화국 당시 정치깡패이자 영화계의 대부로 불리던 임화수, 꿀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정치깡패 신정식과 같이 교수되었다.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 민족일보사 사장 겸 발행인이었던 조용수 사형집행 직전 모습
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이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을 옹호하는 사설 등을 발간한 혐의로 1961년 12월 21일 사형됐다. 1961년 `반공이 국시`임을 내세운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통일과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언론활동을 벌이던 민족일보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적용해 민족일보에는 폐간을, 조용수 사장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민족일보는 4.19혁명의 기운속에서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조국통일을 절규하며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기치아래 1961년 2월 창간됐었다.
조씨의 사형선고에 국제신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 국내 언론인, 문인 등이 나서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결국 조씨는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족일보 사건은 지금까지도 조작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는 대표적 사건가운데 하나이다./조선
1958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 샤를 드골 장군, 자유 프랑스 운동 지도자(1942)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하여 7년이 넘는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였다. /naver
1954년] 미국의 테니스 선수 에버트(Evert, Chris) 출생
1954. 12. 21 ∼
본명은 Christine Marie Evert. 1970년대 중반과 후반에 테니스계를 주도했고, 1980년대 후반기까지 우수한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에버트는 강력한 발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테니스 지도자인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에 익힌 양손 백핸드로 유명하다. 그녀는 1970년 소규모 대회에서 15세의 나이로 랭킹 1위인 마거릿 코트를 이겼다. 1971년 미국 선수권대회의 준결승에 오른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1972년까지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프로 선수로서 90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에버트는 1975~78년 미국 오픈 선수권대회 여자단식을 석권하여, 헬렌 헐 제이콥스(1932~35) 이후 미국 오픈 선수권을 4연패한 최초의 여성선수가 되었다. 1980, 1982년에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한 윔블던 대회 단식(1974,1976,1981), 프랑스 오픈 선수권대회 단식(1974,1975,1979,1980,1983,1985,1986),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선수권대회 단식(1982, 1984) 등에서도 우승했다. 1979~87년 동료 프로 테니스 선수인 존 로이드와 결혼생활을 했다. 1989년 미국 오픈 선수권대회 준준결승에서 패한 후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1953년] 오펜하이머(Oppenheimer, Julius Robert), 군 보안 보고서 발표되어 기소당함
← 오펜하이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르드는 미국정부에 대해,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235U)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 육군은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물리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조직할 책임을 맡게 되었고, 이 연구계획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임무 수행을 위해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를 관장했다. 1943년 그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숙학교가 있던 뉴멕시코 샌타페이 근처의 로스앨러모스 고원을 연구소 부지로 선정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1942년 오펜하이머는 군 보안요원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그와 친분관계에 있는 친구 몇 명이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혐의와 더불어 정점에 달했다. 한 친구는 이 사건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직에서 쫓겨났다. 1954년 안보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들의 조사 가운데 자신의 기여부분은 거짓말투성이라고 진술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탁월한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의 공동 노력의 성과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머고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핵폭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월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했다. 1945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부설 고등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1947~52)으로 재직중이던 1949년 10월에는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
1953년 12월 21일 그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군 보안 보고서가 발표되어 과거 공산주의 활동 경력, 소련 간첩 명단 제출의 지연, 수소폭탄 제조 반대 등과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보안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모반혐의가 무죄임을 발표했으나 그의 군 기밀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켰다. 그결과 원자력위원회와의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과학자동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은 그의 기소를 반대하며 즉각적인 변론에 나섰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적 발견으로 야기된 도덕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애써 시도하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바쳤다. 냉전이 쇠퇴해가던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한 오펜하이머는 다음 해에 후두암으로 죽었다.
1945 미국 2차대전 명장 조지 패튼(1885-194512.21)사망,
*[패튼 대전차군단] -맹렬하고 격정적이며 이기적인 애국자였던 패튼 장군의 유니크한 인간상을 그린 영화로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장군이 이끄는 최강의 독일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중인 미국 제2기갑병단에 패튼 장군이 부임해온다. 이 기갑병단을 재건해야 할 병단장으로서 유능한 부관 브래들리 소장과 함께 왔다. 패튼은 기갑병단을 엄격한 훈련으로 강화하여 롬멜 군단을 분쇄한다. 전공을 인정받은 패튼은 시칠리아섬 침공의 제2병단 사령관으로 영전되어 팔레르모를 탈환한다. 그러나 어느 날 전쟁 노이로제에 걸린 병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 사령관직에서 해임된다. 영국으로 전속을 명령받지만 그곳에서도 폭언을 하여 상부로부터 문책을 당한다. 브래들리는 곤경에 빠진 패튼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일선 사령관으로 영접한다. 패튼의 활약은 파리를 해방시키고 벌지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린다. 독일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난다. 그러나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이 또 물의를 일으켜 실의 속에 지내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제43회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미술감독상, 편집상, 사운드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하였는데, 조지 C.스콧의 남우주연상은 배우들이 수상을 거부해 그 상은 패튼 장군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40 <위대한 개츠비>의 미국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사망.
1940 <위대한 개츠비>의 미국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itzgerald, Francis Scott Key,1896.9.24∼1940.12.21] 사망.
*미네소타주(州) 세인트폴 출생.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군대에 들어가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전후(戰後) 1920년 새로운 세대의 선언이라고도 할 만한 처녀작 《낙원의 이쪽 This Side of Paradise》이 출판되자 문학비평가들이 일제히 그것을 인정해 주었고, 많은 독자를 얻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타고난 외모와 부(富)와 재능에 걸맞게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처녀작이 크게 성공하자 그 여세를 빌려 단편집 《말괄량이와 철인(哲人) Flappers and Philosophers》(1920)을 비롯하여, 장편 《아름답게 저주된 것 The Beautiful and Damned》(1921), 단편집 《재즈 시대의 이야기 Tales of the Jazz Age》(1922),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1925), 장편 《밤은 상냥하다 Tender Is the Night》(1934), 《최후의 대군(大君) The Last Tycoon》(未完:41) 등 많은 작품을 써냈다. 그 중에서, 출판된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술을 밀조(密造)하여 거부가 된 주인공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린 《위대한 개츠비》였고, 할리우드를 다룬 《최후의 대군》도 상당한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1934년에 출판된 《밤은 상냥하다》가 좋은 평을 얻지 못한데다가, 명작 《바빌론을 다시 방문하다》를 포함한 단편집 《기상나팔 소리에 술을 마시다》를 출판하였던 1935년에는 4만 달러의 빚을 갚기 위하여 할리우드로 가서 시나리오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로스트제너레이션'의 인기작가를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섰고, 알코올중독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재기(再起)를 위하여 《최후의 대군》을 집필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사후에 친구 윌슨과 에드먼드의 편집으로 그 작품과 유고집이 출판되었다. (두산백과)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 偉大 The Great Gatsby ] -1925년 발표. 미국 중서부의 노스다코타주에서 빈농으로 태어나 입신출세를 꿈꾸는 순박한 근면가 개츠비의 이야기를, 같은 지방 출신인 니크라는 청년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는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개츠비는 자기의 가난 때문에 지금은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 데이지를 다시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주류 밀매로 거부가 된 뒤 롱아일랜드에 호화저택을 장만하고 데이지에게 접근해 가다가 마침내는 사살된다는 줄거리이다. 설정된 시대는 1920년대의 호경기이고 법석대는 파티의 멋진 묘사 등으로 풍속소설적인 요소도 엿보이나 상징적인 이미지의 구사 등을 통하여 과거의 위대한 ‘미국의 꿈’이 오늘에 이르러 얼마나 큰 비극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감춰져 있다. 20년대의 뉴욕 유산계급의 퇴폐상을 비판한 작품이다. (두산백과)
193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상영
1937년 12월 21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로스앤젤레서의 케세이 서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백 5십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으로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아름다운 왕비가 아기를 가졌다. 왕비는 창 밖의 하얀 눈을 보면서 뱃속의 아이가 눈처럼 하얀 피부에 사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장미빛 뺨을 지닌 아름다운 공주이기를 빌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드디어 왕비는 예쁜 공주를 낳았고 그녀를 백설공주라 불렀다.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백설공주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안타깝게도 왕비가 돌아가시고 새로 들어온 계모가 여왕이 되자 혹독한 시달림을 받았다. 백설공주의 계모인 여왕에게는 신비로운 마술 거울이 있었는데, 여왕이 매일 아침, "거울아 거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지?"라고 물으면, "여왕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여왕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왕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마술 거울에게 질문을 던지자, 마술 거울은 뜻밖의 대답을 들려준다. '여왕님도 아름다우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백설공주입니다'라고.
1918 유엔사무총장. 오스트리아 대통령 지낸정치가 쿠르트 발트하임 출생
1918 유엔사무총장. 오스트리아 대통령 지낸정치가 쿠르트 발트하임[Waldheim, Kurt, 1918.12.21∼] 출생
*오스트리아 외교관 출신의 정치가로 대통령(재임 1986∼1992)과 국제연합 사무총장(재임 1972∼1981)을 지냈다. 장크트안드레뵈르데른에서 출생했다. 빈 영사학교(領事學校)를 거쳐 1944년 빈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45년부터 외무부에 근무하였다. 1948∼1951년 프랑스 주재 대사관 근무, 1951∼1955년 외무부 인사과장, 1955~1956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국제연합사절단 단장, 1956∼1958년 캐나다 주재 공사, 1958∼1960년 캐나다 주재 대사, 1960∼1964년 외무부 서방정치국장, 1964∼1968년 국제연합 주재 대사 등을 역임하고, 1965∼1968년 및 1970∼1971년 국제연합 우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1968∼1970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후 1972년 제4대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되어 두 차례에 걸쳐 사무총장직에 선출되었으나 1981년 사임하였다. 198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나치스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내외 여론이 들끓었으나, 당선되어 1992년까지 재임하였다.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1917 노벨문학상(1972년)수상한 독일소설가 하인리히 뵐 출생
1917 노벨문학상(1972년)수상한 독일소설가 하인리히 뵐[Heinrich Theodor Bll, 1917.12.21∼1985.7.16 ]출생, *1917년 12월 21일 쾰른에서 출생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점의 점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보병으로 종군하여 네 번 부상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대전의 경험에서 취재한 것이 많다. 또 일상적인 일이면서도 박력이 있고 폭로적인 대화를 통하여 전쟁 중과 전후의 혼란한 사회와 인간을 그렸다. 《검은 양 Die schwarzen Schafe》(1951)으로 ‘그룹 47’의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폐허의 문학이라고 불리던 전후문학의 지도적 작가가 되었다. 반(反)군국주의자·가톨릭 좌파(左派)로서 작품을 통하여 정치에 참여하고, 현실변혁을 꾀하였다. 또한 희생자와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애정 및 도덕적 구원을 줌으로써, 그의 작품은 폭넓은 독자층을 얻었다. 주요저서에 《열차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Der Zug war pnktlich》(1949)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1953) 《아홉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 zehn》(1959) 《어떤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1963)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단편과 라디오 드라마 ·평론이 있다. 1971∼1974년 국제펜클럽 회장,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 =뵐(Heinrich Theodor Bll)이 소설로써 문학적 성공을 얻게 된 195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전후 독일 사회의 발전상을 비판하며 가톨릭교회의 사회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작품이다. 부부인 프레드와 케테는 그들의 지난 주말의 체험을 그들의 결혼체험처럼 서술하고 있다. 교회관저의 전화교환수인 프레드는 술꾼이었다. 그는 여러 잡일을 하는데도 끊임없이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렸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집을 얻으려는 그의 시도가 목사와 여자 집주인 때문에 실패하자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이 비좁다는 이유로 집을 나갔다. 소설의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딱지가 묻어 있고 위선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먼지와 더러움이 주요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도시에서의 드로게리 주인들의 회의 장면에서 전후 독일의 황량한 삶의 방식들이 선전되고 있다. 이 회합의 광고문인 ‘그로테스크한 불협화음’은 뵐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가진 문제였다. ‘드로게리 주인을 믿어라’란 선전문은 다시 임신을 한 케테에게는 냉소적으로 들렸다. 프레드가 공동의 삶의 터전을 만드는 어려움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자 케테는 보다 더 광적으로 삶의 투쟁을 결심하고, 프레드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케테는 아이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으며 신부들을 증오하였다. 그녀는 저항으로 벙어리가 된 순수한 순교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는 기독교적이고 개인적 실존주의적 소설의 두 주인공들에게는 유일한 출구였다. 이 작품에서는 이전에 발표한 소설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와는 달리 두 사람의 사랑이 외부의 저항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05 -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조선통감으로 임명
[책갈피 속의 오늘]1905년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 취임
1905년 12월 21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으로 임명된다. 일본은 을사 5조약 제3조에 의거, 주한 일본공사관을 폐하고 외교뿐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하는 통감부를 설치해 통감을 상주시킨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겐 ‘원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다. 출간된 전기만 해도 수십 종이고, 2000년 아사히신문이 ‘지난 1000년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꼽은 조사에서도 10위를 기록했다. 이 같은 인기는 그가 하층 농민의 아들에서 현대 일본의 기틀을 다지는 지도자로 우뚝 선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 차례나 유학을 다녀오고 세계 최고 문물만을 받아들인 그의 눈에, 통감으로 부임했을 당시 조선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밤낮 서구 열강 중 어디에 붙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조선 정부를 나 같은 선각자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대 검술의 달인이었던 그는 통감으로 일할 때는 늘 암살에 대비했지만, 정작 통감 직을 그만둔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1879∼1910)의 총탄은 피하지 못했다. 죽고 난 뒤 하도 재산이 없어 당시 일왕이 체면이라도 유지하라며 돈을 보냈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조국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이런 청렴함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장례(1909년 11월 4일)가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점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순종은 친히 통감부를 방문해 조문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까지 내렸다. 또 유림을 비롯한 13도 대표들은 암살에 대해 사죄하는 사죄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 열기를 북돋우기도 했지만, 군국적 분위기 속에서 조속한 합방의 계기로도 이용되었다.
특이한 것은 한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접근과 일본에서의 안중근에 대한 접근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의 대표적 정론지 ‘중앙공론’에 희곡 ‘안중근’ 전이 발표되었으며, 안중근의 모범적 수감생활에 감동한 간수가 그의 전기를 썼을 정도다. 지금도 일본에는 인간 안중근을 추모하고 연구하는 모임이 많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국내의 인식은 차다. 그것은 피해의 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내년은 을사조약 체결 100년이 되는 해다. 이제 우리도 피해나 가해라는 심리적 억압에서 벗어나 보다 풍요로운 역사인식을 가질만도 하지 않은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동아닷컴 2004-12-20 18:05
1898년] 퀴리 부부(Marie Curie, Pierre Curie), 라듐 발견
← 마리 퀴리
1898년 12월 21일 마리 퀴리(Curie, Marie)가 남편 피에르 퀴리(Curie, Pierre)와 함께 방사선 방출 물질인 라듐을 발견했다. 마리 퀴리는 방사능(radioactivity)의 발견과 순수 라듐의 분리 성공으로 1903년과 1911년 각각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했다.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었고 1918년 퀴리 부부의 딸 이렌도 합류했다. 이 연구소는 곧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H. 베크렐이 처음 발견하고 마리 퀴리가 명명한 '방사능'과 그녀가 남편과 함께 발견한 라듐 등 방사성 원소들은 이후 핵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오늘날 암 치료에서 석유 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방사능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경우 체르노빌 사건과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방사능 폐기물의 처리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96 - 독립문 주춧돌 놓음
[오늘의 역사 12월 21일] 독립문 주춧돌 놓음
서울 서대문에 자리한 독립문 정초식(주춧돌을 놓는 기념식)이 1896년 오늘 거행되었다.
독립문은 대한제국 시대 말에 우리 나라가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독립 정신을 국민에게 일깨우기 위해 서재필ㆍ이상재ㆍ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세운 것이다.
독립문 자리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세워졌던 '영은문'이 있었다.
/소년한국일보 2009/12/20 15:41:52
1885 한일 부산구설해저전선 조관속약(條.款.續.約) 체결
1883년(고종 20) 3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해저전선 부설에 관한 전 5조로 된 조약.
개설
일명 「부산구설해저전선약관(釜山口設海底電線約款)」이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진출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양국간의 신속한 교섭을 위해 통신수단의 개설이 절실해졌다. 이에 일본은 1882년 말부터 해저전선 부설에 관한 외교적 절충을 조선에 요청해왔다.
조선 정부에서도 필요를 인식했으나, 일본측이 전선시설을 위한 대지를 무제한 조차(租借)해 주기를 요구해 타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외무독판(外務督辦) 조영하(趙寧夏)는 일본의 요구가 국권침해라 주장하면서 지조기한(地租期限)을 15년으로 할 것을 고수 했던 것이다.
그 뒤 외무독판이 민영목(閔泳穆)으로 교체된 뒤, 덴마크의 대북부전신주식회사(大北部電信株式會社)를 시공회사로 하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부산까지의 해저전선 부설을 양국이 합의하였다.
경과와 결과
조약 내용은 일본측 제안으로 전선실 지조기한을 25년간으로 하여 지조는 면제하기로 하고, 전선 업무는 일본 정부가 담당하며, 준공 25년 내에 이 전선과 경쟁하게 되는 전선 부설을 제3국에 승인해줄 수 없다는 것 등이다.
이 조약은 조선측 대표 외무독판 민영목, 협판 홍영식(洪英植)과 일본측 대표 판리공사(辦理公使) 다케조에(竹添進一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한편, 청나라도 일본에 대항해 청나라와의 근대적 통신시설의 가설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1885년 7월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하고, 청국전선총국(淸國電線總局)이 공사비 10만냥을 차관해 인천-서울-의주간의 전선을 설치함으로써 한성과 북경이 전선으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조청간의 관계가 긴밀해지게 되자, 일본은 이 조약이 조일해저전선조약 제2조와 제3조의 내용을 위배한다고 항의하였다.
즉, 의주 전선을 통해 조선의 공사간의 전보를 내보낼 수 없으며, 만일 내보낸다면 그로 인해 입은 일본측 손해를 배상해주어야 하며, 부산선은 일본 또는 덴마크 대북부전신주식회사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항의가 있은 뒤 1885년 12월 21일에 「조일해저전선부설조관속약(朝日海底電線敷設條款續約)」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과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高平小五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속약은 전 4조로 되어 있다. 의주선을 부산선과 연결해 해외전신을 수발하고, 양선의 해외 전시비는 동률로 할 것이며, 조일해저전선의 경우와 같이 부산선을 이용하는 일본의 관보통신도 25년간 절반 가격으로 하기로 하였다.
1879년] 소련의 정치가 스탈린(Stalin, Iosif) 출생
스탈린
1879. 12 .21 ~ 1953. 3. 5
← 스탈린(1950)
"서기장인 스탈린 동무는 자신의 손에 무제한적인 권력을 집중시켜 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언제나 충분한 주의력을 가지고 그러한 권한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블리디미르 일리치 레닌, <유서>에서 스탈린은 1922~53년 공산당 서기장과 1941~53년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낸 소련의 독재정치가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열되자 보다 호전적인 볼셰비키에 가담해 지도자인 레닌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말년의 레닌은 스탈린을 불신해 자신이 남긴 유서에서 그를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 사후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그의 경쟁자들을 모두 숙청할 수 있었다. 강력한 경쟁자였던 레온 트로츠키를 몰아냈고 자신과 함께 삼두체제를 이끌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도 제거했다. 테러와 전체주의가 결합된 그의 독재체제하에서 1,000만 명이 넘는 농민이 굶어 죽었으며, 군대가 와해될 정도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다. 한편, 선진공업국에 비해 크게 낙후되었던 소련의 공업은 스탈린 통치 시기에 크게 발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업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강력한 군산복합체를 추진한 결과 소련은 제2의 핵 강대국으로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1878년] 그리스도교 전도회, 구세군으로 개칭
← 윌리엄 부스
구세군(救世軍, Salvation Army)은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naver
1860년] 미국의 여성 시온주의 조직인 <하다사>의 창설자 졸드(Szold, Henrietta) 출생
1860. 12. 21 ~ 1945. 2. 13
미국의 여성 시온주의 조직인 하다사(Hadassah : 히브리어로 부림의 여주인공 '에스더'를 뜻함)의 창설자.
랍비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91년 볼티모어에 러시아 유대인 이주민을 위해 최초로 야간학교를 세웠다. 1888년 미국 유대인 출판협회를 창설하고 1916년까지 이 협회의 편집장과 작가 및 유대 고전의 번역자로 일했다. 1912년 부림절(Purim)에 졸드는 뜻을 같이하는 여성 동료들과 함께 하다사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1916년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의료 센터를 세우고 그곳에 정착했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의 집행부 임원으로 선출되어 보건 및 교육부를 관할했다. 졸드는 어린이복지 및 아동문제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레만 하옐레드(Lemaan ha-Yeled : 졸드 재단의 전신)를 설립했다. 1933년에는 나치에 희생된 젊은이들을 구제하고 이들을 이스라엘에 거주시키는 범세계적 운동인 ‘청년 알리야’(Youth Aliyah)의 책임자가 되었다. 하다사는 후에 미국에서 교육 및 시민 프로그램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브리태니커
1820년]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李昰應) 출생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며, 아들이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다.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 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宗親)과 선파인(璿派人)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는 권력체제의 골간인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했다.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세도문벌의 군사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의 친위병인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하여 병조판서가 통할하게 했다. 또한 〈대전회통 大典會通〉·〈양전편고 兩銓便攷〉·〈육전조례 六典條例〉를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한편, 유교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여,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양반들의 세력확장의 기반이자 각종 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던 서원 정리에 나섰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辨正)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어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대원군은 1862년(철종 13)에 발생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환곡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 민폐가 많던 도장(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는 등 궁방에 대한 억제정책도 시행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는 한편,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철저하게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伽洞)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홍장(李鴻章)의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서울로 돌아왔는데, 운현궁에 반감금상태로 있었다.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그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했다.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1795 독일 역사학자 랑케[Ranke, Leopold von, 1795.12.21-1886.5.23] 출생,
"역사는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의 세계를 예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책은 단지 역사가 왜 실제로 발생했는가를 말할 뿐인 것이다." *새로운 연구방법과 교수법으로 서유럽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학 ·언어학을 수학하고, 1818년 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의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처녀작 《라틴 및 게르만 제(諸)민족의 역사 1494∼1514》(1824)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25년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었다. 그 후 이곳에서 50년 간에 걸쳐 강의를 담당하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사이 1841년 프로이센 국사편수관, 1859년 바이에른 학사원 사학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역사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는 역사학을 현실의 철학 ·정책에서 해방시켜 역사학 독자의 연구시야를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공적이 크며, 이것이 그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연유이다. 주요저서에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1845~1847) 《프로이센사》(1847∼1848) 《16∼17세기 프랑스사》(1852∼1861) 《16∼17세기 영국사》(1869) 등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699 프랑스의 고전비극 작가 장 라신느(Jean Racine 1639∼1699.12.21.)사망
"그것은 이미 내 핏속에 숨어 있는 뜨거운 생각이 아니다. 이제는 먹이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 사랑의 여신 그 사람이다." *17세기 프랑스 고전비극의 최고의 경지 . 프랑스 고전극 3대 거장중의 정점의 작가이며 고전비극 작가로 북프랑스 라페르테밀롱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조부가 사망한 뒤 조모와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포르루아얄수도원으로 이주했다. 1653년부터 54년까지 보베의 기숙학교를 다닌 뒤, 1655년 포르루아얄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와 장세니슴을 신봉하는 얀센파로서 유명한 P.니콜과 그리스 학자 C.랑슬로 등에게 17세기 고전 문학과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얀센파의 엄격한 숙명관 속에서 문학에 대한 꿈을 굳혔다. 1658년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한 뒤 귀족 저택에서 잡무를 맡아보는 일을 하였고, 문단에 드나들면서 우화작가 J.라퐁텐 등과 사귀게 되었다. 1667년 5막으로 이루어진 비극 앙드로마크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정열과 그로 인한 파멸의 진행을 묘사하였다. 1669년 브리타니쿠스를 썼고, 1670년 코르네유와 같은 주제로 동시에 경작하여 베레니스를 써 승리하였다. 1673년 신탁희생물로 지명된 공주를 둘러싸고 왕과 용사가 대결하는 이야기를 그린 미트리다트를 썼다. 1677년 의붓자식을 사랑하는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비극 '페드라'를 상연했으나, 반대파의 모략으로 실패하였다. 하지만 '페드라'는 전 시대를 통틀어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유명한 비극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 뒤 극작을 그만두고 결혼하여 경건한 생활인으로 살면서 얀센파와도 화해하고 왕의 수사가로서 활동했다. 1688년 맹트농부인의 요청으로 생시르어학원의 학생용으로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합창 3막 비극 에스테르(1689)를 썼고, 어전에서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1694년 성가를 작사하였고 1694년부터 99년까지 포르루아얄사요(1742 1767)를 집필했다. 1699년 간장병으로 파리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포르루아얄에 매장되었다가 파리에 있는 생테티엔교회로 이장되었다. 라신느는 17세기 프랑스 고전비극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가였으며, 현대적 관점에서도 비극의 정수를 보여주는 극작가로 평가받는다. *<주요작품> ['라 테바이드'(1664),] ['앙드로마크'(1667)], ['소송광'(1668)], ['브리타니쿠스'(1669)], [ '베레니스'(1670)], ['비자제'(1672)], ['미트리다트'(1673)], ['페드라'(1677) ] (출처: http://www.erato.co.kr/cu_dt_0008181.htm)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
← 필머스 항에 체류하고 있는 메이플라워호의 그림
102명의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1620년 12월 21일 미국 메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했다. 9월 16일 영국의 항구도시 플리머스를 출발했던 이들 이주민들은 미국에 도착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도착지를 플리머스로 명명했다.
이들 중 남자들은 상륙하기 전 선실에 모여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 내용의 '메이플라워 서약서'를 체결했다.
102명의 청교도인들 가운데 35명은 그보다 얼마전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레이덴으로 이주했던 청교도 급진파로서 이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를 찾은 것이다. /조선
복원된 메이플라워호 모습
역사속의 오늘-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미국 매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도착한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은 미국 뉴잉글랜드의 개척자가 되었다.
5월의 꽃이라는 뜻의 선박 메이플라워호는 1920년 9월 영국 플리머스항을 떠나 신대륙을 향했다. 길이 27m, 무게 180t의 메이플라워호는 거친 바다와 폭풍을 이겨내고 11월 미국 프로빈스타운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선박수리와 보급을 받았지만 추위와 질병으로 많은 이주민이 세상을 떠났다. 다시 한 달간의 항해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들은 미국에 도착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도착지를 플리머스로 명명했다.
이주민 가운데 모든 성인 남자들은 상륙하기 전에 선실에 모여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 내용의 ‘메이플라워서약서’를 체결했다. 이 서약서는 플리머스 식민지의 기본법이 되었고 미국 정치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항에 정박했다가 이듬해 봄에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2월 21일
1431 - 유효통, 약용식물 정리한 `향약채집월령` 편찬
향약채집원령 편찬
[오늘의 역사 12월 21일] 향약채집원령 편찬
1431년 오늘 유효통이 노중례와 함께 약용 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집원령’을 편찬했다. 유효통은 1408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향약채집원령’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들도 널리 이용할 수 있도록 식물의 이름이 한글로 표기됐다. 유효통은 또 1433년에는 향약방문으로 된 의학서 ‘향약집성방’을 완성했다.
/소년한국일보 2005-12-20 13:45
1375년] 이탈리아 소설가 보카치오(Boccaccio, Giovanni) 사망
1313 ~ 1375. 12. 21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3대 인문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보카치오가 1375년 12월 21일 사망했다. 단테의 '신곡'에 비해 '인곡(人曲)'이라 불리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는 1313년에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체르탈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단테를 존경해서 '단테전'을 집필하기도 했고, 성 스테파노 디 바디아 성당에서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기도 했다.
'데카메론'은 1348년에서 1353년에 걸쳐 집필된 단편소설집이다. 1348년 피렌체에서 괴질 페스트가 만연하여 수만 명의 시민이 죽어가자, 이 참담한 광경을 배경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교외의 화려한 별장으로 피난해 10일 동안 계속 매일 열 명의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꾸며 '데카메론'을 썼다. 이 소설을 '10일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100편의 이야기는,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우스운 이야기로부터 도덕적인 훈화,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수도자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 등 아주 다채롭다. /조선
69년] 제9대 로마제국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즉위
(영)Vespasian. 정식 이름은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 베스파시아누스, 오스티아에서 발견된 흉상, 로마에 있는 Museo Nazionale Romano 소장
AD 9. 11. 17(?) 라티움 리에티~79. 6. 24.
로마의 황제(69~79 재위).
비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해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는 재정을 개혁하고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여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로마의 대규모 건축공사를 추진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또한 에퀴테스 계층에 속했으나 원로원에 들어간 오빠가 1명 있었다. 초기 시절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그늘에 가려 지냈다. 그의 형은 출세를 거듭해 48년경 도나우 지역의 중요한 지휘권을 맡았으며 네로 치세에는 수년 동안 황실 근위대장을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형을 따라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출세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크레타에서 콰이스토르(재무관)를 지낸 뒤 그는 큰아들 티투스가 태어난 해인 39년 법이 정한 가장 이른 나이에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환심을 샀으며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는 해방노예 출신의 권력자 나르키수스의 후원을 받았다. 43년 브리튼 침공에 참가한 메드웨이 강의 도하(渡河)에서 뛰어난 공훈을 세운 뒤 그는 선봉부대의 좌익을 맡아 아일오브와이트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멀리 데번까지 여러 부족을 정복했으며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이같은 공적으로 그는 개선식을 치렀고 2가지 성직에 임명되었으며 51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54년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으로 권력을 잃게 된 나르키수스가 자살하자 이후 한동안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63년경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엄격한 재정 운영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샀으며, 한번은 지나가던 중에 사람들이 그에게 순무를 던진 일도 있었다. 그가 개인적 치부를 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으나 이후 평생 동안 그에게는 탐욕스런 인물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66년 가을에는 네로를 수행하고 그리스로 갔다가 황제의 예술 공연중에 잠든 실수를 범했으나 67년 2월 별 탈 없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유대는 그 전 해에 로마군이 2차례나 대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유대에는 이전에 군단급 병력이 주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지휘관 임명은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는 대규모 보조병력과 함께 3개 군단의 병력을 할당받았다. 이같은 조치의 이면에는 그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인물이라는 고려도 작용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장수였지만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네로의 통치에 도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네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같은 판단이 확실히 옳았다. 그는 67, 68년 2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68년 6월 네로가 죽자 그는 이내 전투를 중단했다.
그가 전투를 중단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며 이와 함께 아들 티투스를 중개자로 삼아 인접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모종의 의견 조정을 했다. 두 지휘관 사이에 무슨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후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이미 권력 장악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표면에 내세운 주장은 유대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 황제 갈바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형식은 타당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결국 갈바를 인정하기로 했다. 갈바의 귀족 혈통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사회적 지위로서는 감히 맞서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물러 있었고 다음 겨울에 갈바에게 보내는 축하 사절로 티투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도중에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69. 1. 15)을 듣고 그 길로 돌아왔다. 이제 이탈리아는 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주요한 제위 경쟁자들인 오토와 비텔리우스는 모두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번 맞서볼 만한 인물들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후 취한 행동은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오토가 패배해 자살한 4월 16일 직후 그가 지지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7월 1일 사전에 꾸민 계획에 따라 이집트의 2개 군단이 그를 황제로 선포했으며 며칠 후 시리아와 유대의 군단들이 그뒤를 이었다. 이후 제국의 도처에서 같은 반응이 있었던 것은 결코 사전계획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군사혁명이 비텔리우스의 실정(失政)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겨우 7월 중순에야 로마에 도착했음).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한여름에 유대인들을 상대로 단기간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무키아누스가 이끄는 원정군을 디라키움(두라초)으로 파견해 그곳에서 함대와 합류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로마에 대한 곡물 보급을 중단시켰다. 8월중 도나우 지역 군대가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그 지역 군단 지휘관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5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크레모나 부근에서 비텔리우스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크레모나 시를 약탈했다. 이어서 안토니우스는 계속 승리의 행진을 벌이면서 남하해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비텔리우스는 이때 자기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사비누스는 소병력을 이끌고 카피톨(주피터 신전)을 점령하도록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비텔리우스 부대의 습격을 받고 처형당했다. 안토니우스의 침략과 파괴적 행동만 없었더라면 베스파시아누스가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가 신속하게 로마로 건너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불운이었다.
12월 21일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위를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군대가 그를 황제로 선포한 7월 1일을 자신의 통치의 기점으로 꼽았다. 그럼으로써 이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전임자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도 받지 못했던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갈바·오토·비텔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권한이 주어졌는지 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후임자들에게도 그같은 권한이 계승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권한 규정 법령을 보면 명백한 독재권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auctoritas)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등극을 예고하는 신성한 징조들을 주의깊게 퍼뜨렸으며 자기 이름의 앞뒤에 여러 호칭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재위중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짧은 기간에 콘술(집정관) 직책을 겸임했으며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를 콘술 자리에 여러 번 앉혔다. 재위기간 내내 자기 아들들이 차례로 제위를 계승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티투스는 아들이 없었음). 이같은 제위 세습문제를 놓고 그는 76년에 처형당한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같이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다투었던 것 같다. 그러나 헬비디우스와 그 동료들은 70년 초반에 이미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관한 전면적인 염려를 토로한 일이 있었다.
70년 10월경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왔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는 황실의 토지를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는 한편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이집트인들의 원성을 샀다. 이어서 그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국의 재정수입이 약 3배 정도 더 필요하다고 선포하고 자신의 귀환을 전후해 재정조달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속주의 세금을 때로는 2배까지 늘렸으며 그리스어권의 여러 속주와 도시에 부여했던 면세권을 취소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무단점유자들에게서 다시 빼앗고 각양각색의 세금을 신설했으며 이산(離散)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세금까지 로마 국고로 돌리도록 했다. 이같은 조치는 네로가 재정을 탕진하고 내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줄곧 베스파시아누스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러나 70년의 상황에서는 어떤 황제라도 그같은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모은 공공자금의 규모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 자금으로 그는 로마 포룸(광장)과 평화의 신전을 지었으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카피톨 신전의 복구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기간 내내 일관되게 '흔들리는 국가를 먼저 안정시키고 다음에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확고한 방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목공사와 가난한 친구들을 돕는 데 많은 돈을 썼음에도 그는 공공자금의 상당한 잉여분을 자기 후계자들에게 남겨주었던 것 같다.
이같은 안정화 시책의 일환으로 군사문제에도 관심을 돌렸다. 첫번째 과제는 68~69년 내란 이후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귀환 이전에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크게 늘렸던 황실 근위대 병력을 대략 이전 수준으로 감축했으며 변경에 배치된 군단을 재편해 비텔리우스 편에서 싸웠던 군사들을 위험성이 있는 지역에서 이동시켜 놓았다. 동방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티투스는 70년 8월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 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라인란트에서 일어난 반란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사촌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가 진압했다. 그리고 몇몇 변경에서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독일 남부에서는 아그리데쿠마테스를 합병해 바젤에서 라인 강을 경계로 형성된 요각지대(凹角地帶)를 차단했다. 브리튼에서는 더욱 중요한 진공(進攻)이 이루어져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간티아 왕국이 속주에 통합되었다. 웨일스 지역은 완전히 평정되었으며 78년 그나이우스 아그리콜라 장군이 7년 동안 총독 통치를 실시해 로마군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로 진출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 초기에 아들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가 귀환하기 전 수개월 간 오만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했으며 이 때문에 그후 내내 철저하게 하위 직책에 머무르도록 조치당했다. 티투스도 유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의 군대가 자신들을 이탈리아로 데려가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험요인을 안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혼자서 돌아왔다. 티투스는 독자적인 개선식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실질적인 동반자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콘술이 되었으며 친위대의 사령관 직책까지 맡았다.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켄소르(감찰관)가 되었다. 이 직책을 맡고서 그들은 속주의 지방행정을 광범위하게 재편한 것으로 짐작되며 앞서 말한 세제개혁도 이때 실시되었다. 그들은 스페인 전역에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곧 스페인의 모든 도시 행정관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제국의 재정수입도 늘어났다. 또한 그밖에 다른 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이 폭넓게 부여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아울러 그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속주까지 망라해 로마 원로원에 많은 새 의원을 뽑아들였다.
원로원과의 관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초기의 수개월 간 불화가 있었지만 이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말년에 원로원 활동을 시작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기에 그는 '역대 황제 중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위험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들에게는 무자비한 태도를 취했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와 연루된 '철학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했으며, 78년에는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가 처형당했다. 이 인물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활동 초기부터 가장 유능한 지원자였으나 티투스와 유대인 공주 베레니케 사이의 관계를 겨냥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여긴 도발행동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흉상을 통해 잘 알려진 투박하고 고집센 외모에 걸맞게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즐겨 회상하던 비천한 출신성분 특유의 무뚝뚝하고 때로 거칠기까지 한 기풍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러한 기풍은 고된 일을 감당해내는 그의 대단한 능력, 일상생활의 소박함과 더불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당대 귀족계급의 모범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기민하고 빈틈없는 야심가였다. 출발부터 재빠르게 강한 세력기반을 쌓았으며 초기의 관직 임명은 대부분 친족관계나 과거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졌다. 통치정책은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후기의 황제들과 비교해볼 때 별반 두드러진 독창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보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주화에 '팍스'(평화)라는 글자가 기본문양으로 쓰인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임종 때 그는 "아, 나는 신이 되는 것 같다"(Vae, puto deus fio)고 말했으며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플라비아 도미틸라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들 티투스·도미티아누스,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이후 신으로 모셔짐)를 낳았다. 부인과 딸은 모두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으며 이후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처제 안토니아의 해방노예였던 예전의 정부 카이니스를 데리고 살았으나 그녀 또한 그보다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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