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 나광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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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채선생과 주형심여사 나광채선생과 박관수
1933년 5월 7일 전남 함평에서 출생하여
학다리남교 전신인 중앙초등학교를 나왔다.
학다리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학다리 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고
나산중학교 교감과 광주 붕남학원장을 지냈다.
학다리중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지냈으며
금성나씨 대종회 고문을 지냈으며
월간 순수문학에 수필'텃밭'으로 등단하여 수필가로 이름을 등록하였므ㅕ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지냈다.
순수 문학의 상임이사도 하고 한국 한시협회와 대한 한시학회 회원이기도 하였다.
타계하시기 전까지 서울양천향교 한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본인의 산수기념집으로 펴낸 수필집 텃밭을 비롯하여
(제자들이 선생의 글을 엮어 펴냄2012)
漢詩集 鴻影慢吟(한시집 홍영만음 2012)
외에도 양천향교 한시학회창립10주년 기념시집에도 18편의 한시가 있으며
곳곳에 많은 글을 남기셨다.
학다리중고등학교 50년사를 기획하고 펴내는 일을 하신 업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함평군사에 우리 진례의 역사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진례 어르신들이 펴낸 한시집인 進禮風雅(진례풍아)란 책을
한글로 결을 잡아 번역하신 일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장암이 발견되고 8순이 되던 2012년 4월에 24일에 수술을 하고
2016년 1월 27일에 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날 무척 춥고 눈이 많이 왔으나 선생님의 운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다리고등학교에 시신이 들렀는데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200여명이나 나와서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고 한다.
49제날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고등학교에 들러
장례비용 쓰고 남은 1,000만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하고 오셨다고 한다.
나광채 선생님은 아파서 본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면서도
전혀 나에게 내색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작업을 하셨다.
그 분의 고향 진례에 대한 애정과
고향의 어른들과 친지, 친구 그리고 그 후손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었던 그 분이라서 우리의 마음에 잘 새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그분이 쓰신 진례의 글을 발견하면 여기에 실을 것이다.
"회억의 장(回憶의 章)"
홍영 나광채
저만큼에 '이별바위'를 꿇어앉히고도
무슨 사연이 그리도 곡진해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듯이 고개를 갸우뚱 숙인채,
진례벌을 굽어보고 서 있는 속금산,
멀리 동북쪽에서 굽이도는 고막천을 지켜보는 청림산과
동남쪽에 중천포로 통하는 신작로를 끼고
영산강과 도란도란 속삭이듯 앉아있는 '응암산'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넓은 진례들을 지켜보면서,
발밑에 혹은 앞에 옹기종기 마을들을 앉혀두고도 외롭기만한 속금산,
그 속금산이 아침 햇빛이 곱게 비치면
소년은 반곡제의 무너미 언저리에 염소를 몰고 가서
말뚝을 박는 일로 하루 일과를 열고 있었다.
늦잠꾸러기 소년도 어쩌다 새벽 잠을 깨면
'터진방죽'께에서 '손맞이재'를 넘어 은은히 들려오는 '시청이네절'의 종소리를 들으며
부푼 꿈을 키우는 버릇도 어느새 익혀가고 있었다.
여운을 끌며 은은하게 한참동안을 울리던 그 종소리에 익숙해지자
새벽잠을 설치는 버릇도 생겼다.
영산강 너머에 있는 '덕음광산'의 뒷편으로 아련히 보이는
월출산의 잇닿은 군봉의 그림같은 곡선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름다운 꿈과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듯 작은 눈망울을 굴리곤 했다.
쌀이 섞인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고, 십리길 초등학교엘 다녔다.
등교길은 언제나 달리다시피 하기 때문에 종지에 담은
도시락 반찬의 김칫국물이 성가시게 책보자기를 적셨고,
필통에선 연필 수르는 소리가 구성지게 장단을 맞추곤 했다,
'자인동'을 지나 '여시박골'을 저만치 두고 무서워서 발걸음이 빨라지던 공동 묘지를 단숨에 넘어,
'선암재'와 '큰소나무거리'에 올라서서야
'각시바위' 밑에 조용히 자리 잡은 선암 마을을 내려다 보며 한숨을 돌렸다.
하늘을 찌를듯이 지천으로 들어선 '고레끼산'의 소나무 숲을 뚫고 빠져나와,
인적이 거의 없어 으스스한 산길을 몇구비 돌고 돌아 철로를 건너면 바로 학교였다.
하교길은 등교길보다 시간이 몇 배가 더 걸렸다.
혼자 올 때면 보랏빛 들국화에 넋을 잃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해찰을 했다.
여럿이 함께 올 때면, 산길 옆ㄹ으로 휘어 들어, 깊숙한 골짜기에서 풋보리 이삭을 꺾어다가 불에 그을려 손바닥에 넣고 쓱쓱 비빈다음, 입으로 훅훅 불어먹던 '보리끄스럼'을 즐겼다. 목화밭ㄹ을 지날 때면, 달기만 하던 '다래'를 따먹고 혹 문둥이가 되면 어쩌나 가슴을 죄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해,
해방이 되고 그 울창하던 '고레끼산'의 소나무도 다 찍혀 민둥산으로 바뀐 뒤였다.
난생 처음 보는 '지프'차를 몰고 미군들이 학교로 들어오더니
구둣발 그대로 직원실로 들이닦쳤다.
숨을 죽인 채 소년은 지켜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직원실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소년의 반 교실 앞문을 밀치고
여선생님께서 황급히 들어와 뒤쪽으로 피신을 한다. 바로 그 뒤를 쫓아 두 미군이 들섰다.
아무도 구령을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그들을 경계하며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춤하던 그 미군들이 계면쩍은 듯이 희죽 웃더니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교실에도 군홧발 그대로였음은 물론이다.
그 히죽히 웃던 한 사람은 흑인이었는데,
새까만 얼굴에 하얗게 들어나 보이던 이빨 모양이 어찌나 험상했던지,
소년으로 하여금 며칠동안 공포의 꿈 속을 헤매게 하였다.
미군한테 쫓겼던 여선생님은 학생들을 부등켜 안고 얼마나를 우셨는지?
소년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었다.
소년은 오랫동안 그 일을 잊지 못하며 자랐다.
미군에 대한 분노보다도 어떻게 그 꼬맹이들이 구령도 없었는데
일제히 그 무서운 이방인들 앞에 그리도 당당히 임전무퇴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가
못내 궁금해서 잊지 못했던 것이다.
'애인자 인항애지(愛人者 人恒愛之) '라고 맹자에 있는 말이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데 남이 어찌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시며,
남을 공경하는데 어찌 남에게 공경함을 못 받겠는가?
성씨를 뺏어가고,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썼다고 매를 때리고,
'공출'이란 미명으로 곡식을 있는대로 다 긁어가 굶주림에 떨게 하던
그 지긋지긋하던 일제 강점기도 끝이 났다.
두동강이로 갈라진 이 땅의 슬픈 역사적 현실 속에서,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유약함을 감내하며, 고뇌하고,
정문도 유리창도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친 경찰관 파출소의 공권력에
나의 생명과 재산을 맡김 채, 많은 스트레스에 쌓여 살고 있다.
일류대병에 걸린 사지선다형의 노예가 되어버린 재수생들을 상대로
강의하고 있는 소년 아닌 어른임을 자각하면서 실소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말씀에
'불능사기종인(不能舍己從人)은 학자지대병(學者之大病)'리라 하셨는데,
나를 버리고 남을 좇지 못했으니 배우는 자의 큰 병이 되지 않았을까?
'조문도(朝聞道)면 석사가의(夕死可矣)라'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데도 공자는 실천궁행 함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올바른 답으로 사람들은 믿고 산다.
"죽는날까지/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은 옥사로써 몸소 항일투쟁을 실천하였는데,
그 시를 강의실에서 강론하는 자의 양심은 무엇인가?
병은 입을 좇아 들어오고, 화는 입을 좇아 나오는 법이라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부끄움이 없이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새삼스럽게 되뇌어 본다.
"물이악소이불위치(勿以惡小而不爲之)하고, 물이선소이위지(勿以善小而爲之)하라."
악한 것은 작아도 이를 하지 말고, 선은 작아도 이를 반드시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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