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시노 전투(Battle of Monte Cass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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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바라본 폴란드군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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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최고의 격전지 였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룬 곳이다.
몬테카시노 전투(Battle of Monte Cassino)라 불리는 전투는 연합군이 독일군의 중부 이탈리아 방어선을 돌파하여 로마(Rome) 진격을 위한 전투였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은 43년 10월 로마 입성을 목표로 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몬테카시노 지역에서 멈추게 되었다. 이곳은 당시 독일군의 주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Gustav Line)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3년 12월 수도원의 문화적 가치를 잘 알았던 독일의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는 방어선에서 성 베네딕트(St. Benedict)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제외시켰고 이 사실을 연합군에게도 알렸다.
1944년 1월 7일 최초로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군들의 포격이 너무나 정확하자 독일군이 수도원을 포격 관측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연합군 장교들의 의혹이 불어났다. 이로 군사적 관점에서 수도원 폭격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1944년 2월 디몰린 준장은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대한 폭격 요청을 상부에 정식으로 하였다. 그러나 5군단의 마크 클라크 중장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전선 총사령관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수도원을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상부로부터 파괴 명령은 결국 하달되었고 이로 수도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44년 2월 15일 아침 약 270여대의 폭격기가 동원돼 4시간 동안 총 493톤의 폭탄을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쏟아부었다.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는 폭격에 대하여 어떠한 공식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지만, 보좌관 매글리온 추기경은 바티칸의 미국 대사 해럴드 티트만을 불러 폭격이 어마어마한 실수이며 바보짓이라고 항의했다.
훗날의 조사결과 그 날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은 피난처를 찾아 수도원에 숨어든 이탈리아 민간인들뿐이었다. 수도원 내에서 폭격으로 인하여 사망한 독일군은 단 한명도 없었다. 폭격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1969년 최종적으로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인도 사단은 3,000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뉴질랜드 사단은 1,600 명을 잃었다.
무엇보다 전쟁의 참혹은 5월 11일 23시에 일어났다.
영국 제 8군의 1000문의 대포와 미국 제 5군의 60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포격과 동시에 연합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한시간 반 동안의 포격은 이 일대 독일군의 방어지역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몬테카시노 윗편의 산에서 벌어진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교전은 쌍방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는데 이 전투에 참가한 헤일만대령은 이 날의 전투를 '베르덩(Verdun) 전투의 축소판' 이라고 평가하였다. (베르덩 전투는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과 연합군 100만의 사상자를 낸 초유의 전투였다)
5월 18일 폴란드군의 정찰대가 수도원에 도착하였을 때 잔해 속에 남아있는 독일 수비병은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 뿐이었다. 독일 수비군은 전날 밤에 모두 빠져나갔고, 연합군은 저항 없이 수도원에 입성하였다. 연합군의 북상은 계속되어 1944년 6월 4일, 노르망디 상륙을 이틀 앞두고 로마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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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군 묘지 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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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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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헌화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지역을 지날 때면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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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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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카시노 정상에 깃발을 세운 폴란드 정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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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대를 이끌던 Anders 장군은 1972년 죽기 전에 수도원 근처에 병사들의 무덤을
만들기를 원했고, 얼마 뒤 제 2군단의 생존자들이 수도원 근처에 전쟁 기념관을 건설했다.
입구에는 병사들의 용기에 대해 4개 국어로 적은 기념비가 있다.
우리 폴란드인 병사들은
우리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건넸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탈리아의 대지에 주었고,
우리의 영혼은 폴란드에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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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Himalayas) 출신의 구르카 용병들은 산악전에 능숙하였기 때문에
희망을 걸어보았으나 모두 전멸하는 절망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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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몬테카시노 수도원
전사한 영국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인도인, 구르카인과 남아프리카인들을 안치하기
영연방 군인묘지가 카시노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을 위한 묘지는 리리 협곡의 6번 가도 근방에,
미국인은 안지오에, 독일인은 카시노 동쪽 라피도 협곡에 각각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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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군 묘지에서 바라본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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