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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간행된 광주매일신문 남성숙 논설주간이 쓴『호남사람이야기』라는 책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150」에 수록된 송곡 안규동(松谷 安圭東) 어른에 대한 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외곬 붓 인생 영원한 묵혼 송곡 안규동(松谷 安圭東)
1907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출생 1915~20년 김충기 이교천 선생 사사 1963년 광주서예연구회 결성 1987년 별세 저서 : 오체천자문, 오체법첩, 서예의 역사, 한글서예
올바른 것을 올바르다 하고 그릇된 것을 그르다 했던 송곡 안규동 선생.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언행이 정숙했던 분이었다.
제자를 가르치면서 한 획이 되지 않으면 다음 획을 긋지 못하게 했고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던 송곡.
“서예란 올바른 삶의 실천 방법입니다. 글씨 속에서 진리를 찾고 예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붓글씨 쓰는 사람들을 보면 글씨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글씨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없습니다. 글씨 속에서 옛 사람의 깊은 정신을 구하고 자신의 도를 닦아야 합니다.”
한국 서예사에 또 하나의 굵은 획을 그은 송곡은 전남 보성에서 3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8살 때부터 한문을 익히기 시작해 13살 때에는 한학자 이교천 문하에 입문했다. 이후 18살 때 당시의 서예가 이운회에게 사사, 서예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한문학과 서예를 겸비한 선비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키운 셈이다.
청년시절인 일제 말기 31세 때 부인 박정현씨와 결혼해 서울과 강원도 등지에서 간장공장과 송탄유공장 등을 경영하던 중 광복을 맞아 한국민주당에 입당, 정치에 뜻을 둔다. 그러나 송진우의 꺾임을 보고 탈당해 곧바로 금강산에 들어가 유점사와 송림사 등지에서 4년 동안 오직 서예 연마에 온힘을 쏟는다.
그후 한국전쟁을 맞아 낙향했으나 지주계급이라 하여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어수선한 그 시절 사회를 피해 고향 보성군 복내면 천마암에 들어가 5년 동안 한문과 서예공부를 계속하면서 스스로 ‘천마산인’이라는 아호를 쓰면서 한국 서예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49세인 늦은 나이에 외아들 천종을 낳고 51세에 광주로 올라와 한약종 자격증을 취득 한약방을 경영하게 됐다.
한약방을 경영하면서도 틈만 나면 먹을 갈고 종이를 펴서 정갈하게 글씨쓰는 모습을 보고 광주에서는 이미 ‘붓글씨 쓴 사람이 하는 한약방’하면 송곡의 집을 가리킬 정도였다. 스스로 ‘엉덩이의 땀띠가 종기가 되어 몇 달을 고생했던 때’라고 말하는 이 시절 송곡은 ‘시골 서당 글씨 태’를 벗어나 수십여종의 법첩을 두루 섭렵했다.
54세인 1961년 한국화가 의재 허백련 선생이 이끄는 연진회에 참여해 문인화와 글씨를 연구하다가 1963년 근원, 일속, 서림, 지봉 등과 더불어 광주서예연구회를 창립했다.
이후 송곡의 활동력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1964년부터 국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 7회, 특선 2회를 해 중앙에 서서히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국전의 흐름이 정도를 벗어나 잡음이 끊이지 않자 국전 참여를 중단하고 개인 작업으로 돌아섰다.
1965년 58세 되던 해 광주의 첫 서예교육학원인 ‘광주서예원’을 설립, 제자를 모았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고 단순한 획 하나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몇날을 지켜보는 교육방법으로 일관했다. 광주서예원에 들어온 사람은 해서 3년, 초서 3년, 행서 3년, 전서 2년을 꼭 거치도록 했기 때문에 송곡선생 문하에서 5체를 구경하려면 10년이 넘어야 했다.
송곡의 첫 개인전은 60에야 이뤄진다. 40년 갈고닦은 작품을 이때야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다. 이후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전남도전 서예부분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정실심사를 시정해 줄 것을 수차례 요구해 고집이 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글씨는 살아있는 것’이라며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중요시 했던 송곡. 1988년 전라남도문화상 예술본상 수상 결정 소식을 미쳐 못듣고 12월 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제자들은 송곡 사후 작품과 발자취를 모아 <송곡 안규동 서집>을 발간했고 공덕비를 건립했다. 광주예술발전과 서예진흥을 위해 송곡상을 제정해 매년 12월에 시상하고 있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덕스럽고 다사로운 모습의 행서, 순탄하고 홀가분하며 질기고 거침없는 멋갈의 초서, 새롭고 고르고 둥그러움이 바람으로 나타난 전서, 바르고 아름다우며 어엿하고 꾸밈없이 알찬 한글로서 새로은 글씨체를 이루니, 이것을 제자들은 ‘송곡체’라 부르고 있다.
오늘날 ‘송곡체’는 예향 광주의 자랑스런 정신유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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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마산인 규동 아제는 제 부친과 참으로 사이가 좋으셨지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