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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가슴으로 세상을 안고 사는 시인
5월은 1년 중에서도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홍연희 시인이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9살 되던 해 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살씩 터울 진 남동생 셋이 있었는데 그날 날씨도 무척 더워 세 남동생을 데리고 지금도 원주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봉천내라는 곳에 갔다. 동생들을 물 가운데 데려다 놀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부랴부랴 남동생들을 갯가로 옮기는 중 그만 둘째 동생이 갑자기 불은 물살에 둥둥 떠내려갔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때처럼 아득했던 적이 없었다는 홍연희 시인은 울며불며 떠내려가는 아이를 끌어올리는데 어린 나이에 급히 불은 물살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던지. 7살, 3살짜리 동생들도 덩달아 함께 엉엉 울던 생각이 지금도 떠오른다. 남동생들과 모이기만 하면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하마터면 평생 후회할 뻔한 사건이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홍연희 시인은 그 덕에 남매들의 정이 얼마나 돈독한지 모른다고 하시며 그래도 두 번 다시 겪기 싫으시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어릴적 추억과 더불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시인의 큰딸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하셨던 선생님인데 연세도 지긋하셨고, 요즘 좀처럼 뵐 수 없는 분이었다.
스승의 날이면 학부형들이 일일교사 체험을 하는데 그날 홍연희 시인이 일일교사로 학교에 가게 되어 빈손으로 가기가 좀 그래서 롤케익 두 개짜리 한 상자를 준비해서 선생님께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아주 고마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어머니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우리 학급에 우유 못 먹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넣어 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순간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하시며, 그 선생님 덕분에 큰 교훈을 얻었고, 20년 전 스승의 날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홍연희 시인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화가였다.
아버지께서 미술학도셨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셔서 딸이 이루어 주길 바랐는데 가정사정이 어찌어찌하여 대학진학을 하지 못하였고 일찍 결혼을 하면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주부로 살아가던 시인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써오던 일기, 생활 속에서 쓰인 글과 시들이 어느 날 작품으로 탄생 되어 글을 쓰게 되었고, 지금은 사회복지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이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가는 사회복지 일에 아주 만족하고 접혔던 꿈인 그림 그리는 일도 다시 시작해 볼 계획이라고 넌지시 작은 꿈을 이야기 하셨다.
시인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근대사에 남을 소설 ‘토지’를 완성하신 박경리 선생님이라고 했다.
박경리 선생님의 조용하신 성품에 반하여고 적지 않은 연세임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선생님의 열정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리디 여린 심성 속에 숨은 격정적이 이야기 전개와 당신을 앞에 세우지 않으시는 겸손함에 반한 시인은 지금도 그분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때 큰 표본으로 가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홍시인은 지금까지 많은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아끼시는 작품은 어머니의 소원을 노래한 “과수원집 딸”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
함경남도 단천 어촌마을 사부진
열아홉 나이 그녀의
아버지는 달랑 작은 봇짐 하나에
과수밭에 마음 묶인 어미를 버려두고
눈 초롱한 두 동생을 앞세우고
며칠만 다녀 오리라며 떠난 피난 길
인민군의 포탄공세에
뱃길 식구들을 온몸으로 막으신
아버지를 바다에 빼앗기고
슬퍼할 겨를 없이
어린 동생들의 목구멍을 채워야 했던
어린 순정 향죽(香竹)
살아있는 어미의 제사를 20년도 넘게 지내고서야
얼마 전 돌아가신 사연 받고 구슬피 가슴 달래던 노모
하루아침 핏줄이 터지자
한반도처럼
반신불구가 되어
하늘을 바라보며,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고향 땅
돌아 갈 길 지척이어도
마음만 날려 보내고
눈감아,
붉은 사과밭의 추억 속
흰 저고리 검정 빌로도 치마
수줍은 처녀는
옥양목 같은 피부에
흰머리를 얹고
사부진 과수원 옛길을 걷는다.
- 과수원집 딸 - 전문
훌륭한 작품은 아니지만 반신 불구가 되어 가고픈 고향을 그리시기만 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하고 싶었기에 그동안 많은 쓴 작품들 중에 유난히 애정이 간다 한다.
홍시인은 그동안 써 왔던 작품을 묶어 발간한 첫 시집 <비움의 곳간>을 내놓고 많이 부끄러웠다 한다. 필력이 아직은 모자라 보는 이에 따라서는 어눌한 표현으로 보여 질 수 있겠지만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침투하는 일이고, 힘없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고픈 마음도 많이 있었기에 자신의 시를 읽은 독자들의 속을 잠깐이라도 시원하게 했다면 그것으로 자신이 시에서 의도했던 일은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펼쳐갈 시인의 시세계를 이야기했다.
시인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참여시를 쓰고 싶었다.
그 마음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세상일들을 쓰다 보니 아름다운 일보다도 흉측한 일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요즈음, 시인은 마음 따뜻한 일만 생겼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어졌다며 시인은 복효근 시인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을 낭송했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몰래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해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 전문
홍시인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뉴스에 자주 등장하여 국민을 분노케 했던 ‘숭례문 화재사건’이나 ‘어린이 납치사건’등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사람들의 정서가 메마른 탓이라며 우리 시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읽어서 진실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시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세상에 시를 쓴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물질에 눈이 어둔 사람들, 나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 이외의 것들은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심 때문입니다.”하시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회가 무섭고 아이들에게 믿음을 알려줄 용기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말을 맺을 엄두가 없단다.
가슴은
녹슨 수도관처럼
가시 섞인 눈물을 자꾸 토해낸다
서너 살 적 아이만 꿈꾸는
모성이
젖은 길 걷는 심정만
읽어내다가
툭,
걷어채인 한마디로
가슴은 두 쪽으로 동강이 났다
흘끔거리며
동정 살피는 적군처럼
오그라든 작은 어깨
해를 올려다보며
어둔 밤 기다리고
아직은
계속되는 사타구니의 비밀과
눈 내리는 밤의 동거인처럼
시오지심으로
어미를 홀리다
가슴에 생긴 강줄기
그나마 갇힌 눈물이 아니여서
꿋꿋한 근성으로
지키는 중, 어미는.
- 꿈꾸는 모성- 전문
주부로, 몸이 불편하신 시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며느리로, 원교교도소의 교정위원으로, 순간의 잘못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있는 수감자들을 상대로 시 창작 지도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은 작품 활동을 해 오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시인은 마음이 그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고, 아무리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으로 단 한 사람의 독자라도 자신의 작품을 읽고 공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며,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따금 들어오는 작품 청탁으로 게을러질 수 없어 다행이라고 환하게 웃는다.
생리 멈춘 첫 봄
원기 충천하던 그때를 떠올린
아직은 청춘인 듯
온 몸 부풀린
그녀의 나이와
간밤
젖은 창가 흔적 남기고
햇살 뿌린 아침 만난
온통 검붉은 치장으로
거울 앞에 설
출산 앞둔 그대와
웅크려 안은
가득한 가슴 안 궁리는 같다
서로가
또다시 피우고 싶은
욕망.
- 목련 - 전문
홍연희 시인의 작품세계는 처음 습작 과정에서 서정시를 많이 썼지만 참여시에 몰두하다가 지금은 주변의 것들에 마음을 두고 소중하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언제나 시를 쓸 때면 한편의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쓴다는 시인은 첫 시집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작품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구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며 두 번째 준비하고 있는 시집이 조심스럽고 첫 시집보다는 좀더 발전된 작품들로 독자들에게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니, 홍시인의 시정신이 담겨있을 다음 시집이 정말 기대된다. ▣
[편집부 조미은기자] 월간 <광장> 5월호 게재
시집해설
풍성한 곳간(庫間)에서 찾아낸 맑은 영혼
박동진 (시인)
대중 매체를 통해 문학에 대한 감상과 참여의 기회가 늘어난 현대문단, 특히 인터넷의 보급으로 일반 독자들의 창작 참여가 전반적 확산을 가져오게 됨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문예지가 창간되었으며, 문예지마다 무분별하게 작가 및 시인을 배출함으로써 그로 인한 병폐도 거론되지만 아무튼 우리가 문학의 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극히 제한적이던 가정주부들의 창작에 대한 참여는 괄목할만한 현상이며 고무적인 것이다.
더구나 인생에 있어 개인의 주체성이 무엇보다 중시되고 있는 작금의 시대적 조류를 감안하면 이러한 창작 참여 현상은 자칫 독선적인 개인주의로 흐를 수 있는 마음에 상호간 교감을 통하여 정서를 함양시키는 방편으로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홍연희 시인은 부군과 1남 2녀를 둔 중년의 가정주부로,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맹렬 여성이다. 그녀가 짧은 작품 활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마음 깊은 곳에서 토해낸 옥고를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된 것은 본인은 물론 주위 모든 지인의 격려와 찬사를 받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시에 대한 성향이 뚜렷한 시인들이 많지만 문학의 대중화와 함께 작가의 시적 성향 또한 대체적으로 다양성을 띤다. 심지어 판타지 문학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판타지의 문학성 시비까지 계속 거론되는 현실에서 자신만의 성향이 뚜렷한 것과 다양한 형태의 시작에 대해 어느 것이 낫느냐를 논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보다는 이해가 우선시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참여시, 관념시, 감성시 등을 두루 선보이고 있는 홍연희 시인의 시는 자신의 존재나 위치 또는 역할에 대해서 다양한 생의 경험과 상황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낡은 슬리퍼에
빈손이어도 슬프지 않다
고갯마루
고목 아래 마음 눕히고
비우고 다 비워서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닌 바에
오히려 온통
세상은 다 내 것이 되어 있으리
가슴 안에 들어찬 희열이여
내려다보이는 온갖 것들에
마음을 두는 순간
나는 또다시 세상을 향해 허덕인다
넘는 고개가 수십이어도
한 고개 지나칠 때 얻은 인연으로
마음 얻은 곳간(庫間)에 채인 양식이
열두 달 다리 뻗어
한숨 버렸다
- <비움의 곳간(庫間)> 전문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취하는 행태는 경쟁심에 따른 질시와 반목, 그리고 지나친 욕심에 의한 상대에 대한 과해 행위이다. 인간으로서 이성적 행동이 사라지고 순간의 감정으로 비인간적인 행동이 잦아짐에 따라 사회는 혼란이 가중되고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소수집단의 이기나 지독히 개인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인생 중반을 넘기고 있는 시인은 온갖 불만과 욕망을 다 접고 비우고 버림으로써 채워지는 생의 이치, 즉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 초월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럴 줄 알았다
동심으로 환하게 자라야 할,
그때부터 쫓기듯 살던 아이는
칭찬보다도 힐책이 많은 사회에서
서서히 그늘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리고 경쟁답지 않은 경쟁 속에서
불만이 가득하다
TV를 보니
영웅처럼 보이던 사람들은 다 도도한 은팔찌에
과태료 떼먹긴 일쑤이고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은 되도록 적게 낸다
게다가 백 원짜리 눈깔사탕 하나 살 줄 모르는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한 아이 재산이 수백억인 것이 보이고
불러오는 배를 싸안고 국적 버리기 위해 하늘을 날고
곳곳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간섭을 한다
머슴이나 소작인들이야 보리만 먹어도 배부를 테니
기름 둥둥 오른 배통으로 붉은 눈을 더 부라리는
그 영웅들이 다
젊은 시절 팔에 두른 완장으로 한 꺼풀씩 오른 살들을
극에 달하기 시작했을 때, 떼 죽임을 쉬이 해댄 것을 다 보고
이리저리 안타까운 삶,
저도 같을 줄 알고 수류탄에 총을 내갈긴 거지
그나마도 세상을 비출 아쉬운 청춘이 느닷없이 스러져
갈긴 놈만 탓하는 세상에 대고 빛이 되기 전에 경종을 울려준 게야
그럴 줄 알았지
독도도 잊고 5.18도 잊고 사과상자도 잊고
잊고 또 잊고 다 잊다보니
탐스러울 아이들이 병들어 가는 것 마저 잊어
내, 그럴 줄 알았다
- <그럴 줄 알았다> 전문
냉철한 지성으로서 시가 추구하는 건 이상향일까? 답답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시각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토해내는 표현 역시 다를 것이다. 이쯤에서 홍연희 시인은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그리하여 강도 높은 직설로 사회의 곪은 부분을 질타한다. 무릇 시인은 사회 전반에 관하여 보다 적극적인 감성을 갖고 참여함으로써 어떤 방법으로든 한 줄기 빛을 발해야 한다. 그의 확고한 시 정신을 볼 수 있는 병든 사회에 대한 조롱이 빛난다.
나의 더듬이로
그대의 전신이 다 알아질 때까지
천년이 걸리더라도
낮은 포복으로 점령하고 싶다
종일 내리는 비에
전신은 이미 축축해져
내미는 더듬이에 감각이 죽었어도
가슴에서 치솟는 그 열정 하나로
쏟아지는 폭우쯤이야
온몸으로 받아내도 나는 괜찮다
이제,
한 고비도 넘지 못했는데
그대를 포기하는 건
그대로 세상을 포기하는 게지
나는 세상을 등에 업은
껍질 두꺼운 달팽이
그리움을 먹으며 세상을 긴다
- <달팽이> 전문
그런가 하면 “나의 더듬이로/그대의 전신이 다 알아질 때까지/천년이 걸리더라도/낮은 포복으로 점령하고 싶다” (<달팽이> 부분)에서처럼 삶과 세상,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적 확인과 일인 다역의 맹렬함을 드러내고 있는 투철한 현실주의자이다. 우리에게 회피나 체념은 악성바이러스이며 스스로에 대한 모독이다. 그녀의 생의 족적을 살펴보더라도 현실에 대한 건전하고 강한 집념이 잘 나타나 있으며 <투병 1>, <다시 선곡하여>, <해> 등에서 확인해 주고 있다.
초여름 햇살로
눈꽃처럼 흰 살 만들어
둥실 나는 바람에 안기고
폭염에 지쳐
작은 씨를 잉태하고
품은 정열은 만세
한들거리는 바람에
붉은 너울 꽃단장 치르고
한바탕 몸서리 친 후,
이내.
까치들을 불러 모은다
속정으로.
- <대추나무> 전문
대추나무나 대추씨처럼 단단한 이미지를 주기까지 과정은 수월치 않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몸을 만드는 것은 따뜻함과 숭고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시인은 대추나무를 통해 나를 보여준다. 역경을 견디고 맺은 과실을 듬뿍 배인 속정으로 다른 것들에게 나눠주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은 <폐차장 가는 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신은
몇 푼 남은
주머니 속의 동전
빈털터리에게 주는
희열을 내게 안긴다.
터덜터덜
길을 걷다가도
쩔렁거리는 당신의 소리에
마음은 부자
내가 허황된 노름으로
세상을 허비해도
잊힌 주머니에 앉아
나를 기다려 주는
지갑 속 지폐보다
허물어지기 쉬운 벼랑에 있어도
작은 도도함으로
나를 위한 파수꾼
비겁함으로
그대를 주무르긴 해도
내 그대를 잃을까
주머니를 툭툭 털지 못한다.
- <주머니 속 당신> 전문
작은 것에 대한 연민, 우리 삶이 물질의 풍요만으로 채워진다 해서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는 없다. 시가 주는 울림은 사소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소외된 것들을 바라보는 특이한 눈이 시인으로 하여금 사랑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따뜻한 온기를 봇물 터지듯 온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다. 훈훈한 인심과 따뜻한 기류가 흐르는 세상은 결국 내가 사는 곳이다. 줌으로써 받을 수 있는 간단한 이치를 모른 채, 우리는 고난과 번민을 안고 살아간다. “터덜터덜/길을 걷다가도/쩔렁거리는 당신의 소리에/마음은 부자”하찮은 동전 몇 닢에 위로받을 수 있는 마음은 어느 것에도 소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달관했다는 걸 보여준다. “비겁함으로/그대를 주무르긴 해도/내 그대를 잃을까/주머니를 툭툭 털지 못한다.” 미련이 아니고 연민이다. 이런 작은 것에 대한 연민이 큰 사랑을 낳는 것이고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또한 현실적이다는 얘기로 표현할 수 있다.
나보다 먼저 세상 모든 것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시인, 약한 자들을 위한 믿음직한 대변자,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을 펼칠 줄 아는 시인은 서두에서 말한 바대로 자신의 현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해냄은 물론 평범한 주부나 어머니를 뛰어넘어 세상 모두의 친구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아픔과 역경을 소리 없이 이겨내며 큰 가슴으로 모두를 감싸주는 휴머니스트로서 시인은 이제 보다 완숙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 주리라 믿는다.
홍연희
2004년 격월간 신문예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2004년 대한민국 최고대상 시부문 최우수상 수상. 한국문학협회 이사, 시와창작 작가회 부회장, 강원시인협회감사, 한국문인협회 강원지부 정회원, 원주문협 정회원. 법무부 원주교도소 시창작 지도강사. 시집 ‘비움의 곳간’ 공저 ‘사랑이 나에게 아름다운 것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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