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튜브에 내돈내산 후기가 인기잖아
그 걸 몇 번 보니까 돈 내고 배우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설파하고 다니던 내가 떠오르는거야
내 돈 내고 배워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거지
뭘 배웠나 곰곰히 생각해봤어.
대학 다닐 때
명덕네거리 옆 서실에서 붓글씨를 한 일년 쯤 배웠나
지금은 없어진 한일로 이름도 가물가물한 빌딩 일층에서 등공예를 서너달 배웠지
효성여고 정문 근처 앞마당에 봉선화가 피던 한옥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받기도 했어. 선생님은
첫 모습이 샤프한 커트 머리라 성깔 있게 보였는데 겪어보니 너무 순둥이라고 하셨었는데
사실 성질을 숨겨서 그렇지 내가 못됐긴 해.
발령을 받고 탁구를 2년 정도 열심히 치기도 했지.
포핸드 백핸드 자세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점수 따는 건 젬병이야
일부러 못 받게 넘겨주는 건 왠지 비겁하게 느껴지거든
못 배웠다기 보다는 승부욕 미달 성격인거지
가톨릭 문화관에서 단소를 딱 한 달
역시 노래만큼이나 관악기는 나에게 안 맞아
동신초에 계시던 선생님께 꽹가리도 두 세달 배웠고
어쩌다 장구까지 배워서 어린이 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거든
나중엔 6학년 아이들 데리고 비산농악 연습해서 가을 예술제 때 2번이나 공연도 했어.
서툰 솜씨라 좀 부끄럽기도 했어. 그 때 우리 애들이 장구 채편에 구멍을 많이 냈거든.
그건 그 아이들 잘못이 아닌 건 확실해.
나한테 장구 치는 자세를 제대로 못 배웠으니까 그랬던거야.
다음 학교에 가서는 그 부분만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어.
구멍낸 장구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말이야.
육아휴직을 하던 중에 문화센터에서 영어회화를 배웠어.
북구문화회관 까지 갈 정도로 의욕적이었거든.
아이구 그 때 생각하면, 수업 시간에 아기를 놀이실에 맡겼거든
우리 막내가 안 떨어질려고 왜 그렇게 울었나 몰라.
애 키운다고 육아 휴직 중인 내가 할 말은 아닌거 맞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도자기도 등록해서 배웠어.
재수강 안한다고 교수 작가인 선생님께서 살짝 삐치시던 모습도 떠오르네,
최근까지 나의 오랜 취미가 된 퀼트 공예도 그 때 시작했지.
아이들이 자라면서 테디베어 인형 만들기도 수강했어.
아이들이 곰 인형을 좋아라 했지. 그 때 만든 인형,
곰돌이 나이가 한 스무살 쯤 되어 가네
십자수는 아주 조금 맛만 보았고
수채화 배우는 선배를 부러워 하다가 쫄래쫄래 따라갔거든
3,4년 열심히 그려서 그룹 전시회도 두 번이나 했어.
그 후엔 채색화로 옮겨가서 일 년 쯤 하고 나니까
작품도 점점 늘어나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그래서 그림 그리는 것도 그만 뒀어.
조금 심심하던 차에 친구가 아동문학 수강을 권하는 거야.
고향 선배님이 강사이신데 수강생을 좀 늘려야 한다고
슬그머니 제대로 배워 글을 좀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터라
냉큼 등록하고 6개월을 수강했지만 그게 쉽지는 않더라구
글을 써야 늘지 배운다고 되는 건 아닌 걸 확실히 알게 됐지.
뭘 하면 좋을까 하던 차에 또 다른 친구가 배드민턴이 엄청 재미있다는 거야.
솔깃해서 동호회에 가입하고 레슨도 등록했어.
퇴근 후에 열심히 다니고 홀딱 빠져서 주말에 MT도 가고 승급 대회에도 나갔지만 재야의 고수들이 너무 많았어.
결국 초급도 못 달고 친구하고도 삐긋해서 동호회까지 그만 둬 버렸어.
계속 배웠더라면 고지혈증 같은 건강 걱정은 안 했을 텐데 아쉽다.
2~3년을 새로 배우는 것하고 담을 쌓고 있다가 안되겠더라.
너도 나도 한다는데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것 같아서 골프를 시작했어.
골프 그거 참 보기보다 어려워. 자세랑 거리, 정밀한 홀인, 삼박자가 맞아야 하니
멋지게 날리는 친구 부러워 하다가 연습장 하루 이틀 빼먹고 그러다가 결국 거리를 두게 된거야. 거액을 주고 산 골프장에 두고 온 골프채 잘 있는지 걱정스럽다.
고급지기까지 한 잔디가 좌악 펼쳐진 그린이 가끔 그립긴 해.
가장 최근에 수강 등록을 했던 분야는 음악이었어. 가곡!
음을 다스릴 줄 모르는 나를 몰라보고 후배가 증말 재미있다고, 힐링이라고, 부담없이 그냥 오기면 하면 된다고 해서 간거야. 역시 음악은 나의 절친이 될 수는 없었어.
합창을 하면 립싱크로 버티어 보겠는데 강사님이 프로 중에 프로였지.
한 주에 팀별로 한 사람씩 독창을 시키시는데 못한다고 계속 꽁무니를 빼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
알고 보니 독창이나 무대 위 공연을 위해서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하는 코스도 따로 있는거 있지. 개인 레슨 받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던 즈음에 코로나가 시작되고 휴강을 드문드문 하길래 아주 줄행랑을 쳐 버렸지.
분위기 있고 세련된 분들과 친구가 될 기회였는데 삶의 질 업그레이드 생각보다 어려워.
곰곰 생각해보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하는 나의 학구열은 짧게는 한 달 길어도 3년을 넘기기 힘들었어. 지루해지는데다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의욕이 확 떨어지는 거 있지. 그리고 결과물이 집안에 쌓이면 뿌듯하기보다 ‘저것들을 다 어떻게 하나’ 답답해지니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거든.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고 했던가. 아마 나는 이것저것 배우는 것으로 사랑을 하고 있나봐. 한 두 번 쯤 잊혀진 사랑도 있을 걸.
그래도 다행인 것은 코로나가 시작되기 3년 전 쯤 시작한 뜨개질은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아주 긍정적인 사실이야. 이제는 수강료를 따로 내지 않고 주로 패키지나 실 재료만 사서 하는 셀프 뜨개질이니 조금 다르기는 해. 아주 사연이 없는 건 아니고 대바늘 뜨개를 하다가 지금은 코바늘 뜨개질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 사연이라면 사연이지. “너 또 벌써 싫증 난거잖아. 엄연히 대바늘과 코바늘은 다른 분야라고!”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건 모른 채 해주길 바래. 사실 예전에는 한 가지에 매진하지 못하는 내가 불만스럽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늘 아쉬웠거든. 지금은 이런 내가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인정하기로 했어. 그 덕분에 많이 편해졌지. 블랭킷이라고 무릎덮개 담요나 침대보 같은 나름 대작을 떠서 나의 세 아이들에게 하나씩 안겨 줄 꿈에 부풀어 있어. 뜨개질 오래 할려면 이제부터 눈 건강도 챙기고 체력도 더 길러야 하는 숙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긴 하단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좋은 친구야. 고마워. 안녕.
첫댓글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주절주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