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D-001]구오(九五) : 《주역》괘에 구(九)와 오(五)는 영위(陽位)이므로 임금에 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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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京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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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양주쪽으로 경계까지 23리이고 고양 경계까지 35리이며. 서쪽으로 교하현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 장단 경계까지 20리이며, 적성현 경계까지는 33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2리이다.
【건치연혁】 파평현(坡平縣) 파(坡)를 파(波)라 한 곳도 있다. 본래 고구려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인데, 액봉(額蓬)이라 한 곳도 있다. 신라 경덕왕이 파평(坡平)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장단현에 예속시켰고, 문종(文宗) 17년에는 개성부에 예속시켰으며, 예종이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서원군(瑞原郡)은 본래 고구려 술이홀현(述爾忽縣) 이(爾)를 미(彌)라 한 곳도 있는데, 신라에서 봉성(峯城)이라 고쳐서 교하현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뒤에 서원 현령(瑞原縣令)으로 만들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그 고을 아전과 백성이 호소함으로써 승격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7년에는 서원ㆍ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으로 만들었다. 태종조에는 교하현을 없애고 이 고을에 내속하였다. 15년에 1천호가 넘었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년에 다시 교하현을 설치하였는데, 부는 천호 미만이므로, 당연히 강등하여 군으로 될 터이나, 아전과 백성이 다시 호소하여서 그대로 두었다. 세조 6년에는 왕비의 고장이라는 것으로 승격하여, 목으로 만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목사ㆍ교수 각 1인. 『신증』 연산 갑자년 본주(本州)를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였는데, 지금 임금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파해평사(坡害平史)ㆍ액봉(額蓬)ㆍ파평(坡平)ㆍ영평(鈴平)ㆍ술이홀(述爾忽)ㆍ봉성(峯城)ㆍ서원(瑞原)ㆍ원평(原平)ㆍ곡성(曲城).
【성씨】 본주 지(智)ㆍ윤ㆍ방(邦)ㆍ백ㆍ피. 봉성(峯城) 서(徐)ㆍ염(廉)ㆍ야(夜)ㆍ차(車) 촌성(村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주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혜음령(惠陰嶺) 주 남쪽 35리 지점, 고양군 경계에 있다. 반룡산(蟠龍山) 북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월롱산(月籠山)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주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미라산(彌羅山)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파평산이라 하기도 한다. 표산(瓢山)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산(童山) 주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그곳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장산(獐山)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깎아지른 봉우리가 우뚝 일어나서 서쪽으로 저포(猪浦)를 임했다. 용발산(龍發山)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발산(鉢山)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보신천(寶信川)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서 교하현 학당포(學堂浦)에 들어간다. 마담(馬潭) 미라산 밑에 있다. 가연(嘉淵)이라 하기도 한다. 임진도(臨津渡) 주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장단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신증』당고(唐皐)의 시에, “양쪽 언덕은 석벽이고, 물은 복판에 흐른다. 뱃놀이는 다만 임진에만 알맞다. 명월은 뱃전에 비쳐 교교하고, 미풍(微風)은 귀밑에 불어 우수수하다. 가정년(嘉靖年)에 현도(玄菟) 사신으로 되었더라면, 동파(東坡)는 적벽(赤壁)놀이를 못했으리라. 같이 온 텁석부리 이 정승에 묻노니, 시를 지어 내가 아직 신선 못 되었음을 비웃는가.” 하였다. 저포(猪浦)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곧 임진도 하류이다. 또 서쪽으로 흘러서 압포(鴨浦)로 되는데, 그 아래쪽은 곧 낙하도(洛河渡)이다. 장단부 조에도 적었다. 장포(長浦)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주 북쪽 가을두동(加乙頭洞)에서 나와서 임진도에 흘러든다. 우포(牛浦) 파평산 밑에 있다. 물 근원이 적성현 경계에서 나와서 임진에 흘러든다. 서편 언덕 위에 궁궐 유지(遺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남았다. 장보포(長甫浦) 주 서쪽 10리 지점인 광탄(廣灘) 하류에 있다. 또 서쪽으로 낙하도에 흘러든다. 이천(梨川)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주 북쪽 목령동(木嶺洞)에서 나와서 장보포에 들어간다. 광탄(廣灘) 주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양주 고령산(高嶺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10리 지점을 경유하여 장보포로 된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말 위에서 든 잠이 방금 깊어, 기틀을 잊게 함이 한음(漢陰) 같다. 구름은 먼 멧부리와 연했고, 마을 달 아래에는 다듬잇 소리 나네. 물새는 갔다가 오고, 물고기는 떠 올랐다가 잠긴다. 여울 소리 공연히 목메이네. 남북으로 나의 마음 부끄러워라.” 하였다.
【토산】 은어ㆍ게ㆍ웅어ㆍ숭어ㆍ석창포.
【봉수】 대산 봉수(大山烽燧) 주 서쪽 6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장단부 도라산(都羅山)에 응했고, 남쪽으로 고양군 소질달산(所叱達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주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누정】 임진정(臨津亭) 임진도 남쪽 언덕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여러 번 임진도를 건너다가, 우리 집을 물가로 옮겼다. 모래는 멀리 언덕까지 연했고, 단풍 잎은 맑은 물결에 내린다. 사람은 동서 길을 가고 조수는 12시에 난다. 달 밝자 뭇 동물이 쉬는데, 사공[亭長]만이 홀로 시를 읊는다.” 하였다.
【역원】 마산역(馬山驛) 주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냇물과 둑이 둘렸는데, 길은 멀리 이어졌다. 홀로 말 채찍 쳐서 뜻이 호연(浩然)하다. 떨어진 꽃은 땅에 가득한데, 붉은 것이 덧없고, 방초(芳草)는 하늘에 연했는 듯, 푸른 것이 더부룩하다. 나무 끝 저녁 볕에 까마귀 깃들이고, 하늘 반쯤 노을에 기러기 지나간다. 장안(長安)은 몇 리일까. 보이지 않고, 청산은 백 굽이, 물은 천 돌림이어라.” 하였다.
분수원(焚脩院) 주 남쪽 24리 지점에 있다. ○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을 피해서 분수원에 이르렀는데, 안렴사(按廉使) 안숭원(安崇源), 충주 목사(忠州牧使) 박희(朴曦)가 와서 뵈었다는 곳이 곧 여기이다. ○ 채련(蔡璉)의 시에, “빗 줄기가 삼대같이 어지러워서, 갈지 말지 결단하지 못하였다. 뒤에는 푸른 재가 높다랗고, 앞에는 시냇물이 목메인다. 지경이 궁벽지니 중이 궁벽지고, 하늘이 까마득하니 나는 새 안 보인다. 난간에 기대서 꿈을 꾸니, 꿈속에서 금궐(金闕)에 조회하였다.” 하였다.
광탄원(廣灘院) 광탄 언덕에 있다. ○ 권근이 지은 기문에, “광탄원은 두 곳 서울 사이에 있다. 양쪽으로 거리가 비슷하므로, 나그네가 여기에 많이 유숙한다. 그런데 원은 담이 무너지고 주추가 깨어져서, 우접할 곳이 없었다. 판화엄 오공(判華嚴悟公)이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다시 지으면서 그 앞쪽에다가 다락집을 건립하였다. 아래로 큰 길에 임하여 들판을 굽어 보는데 올라서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하여 속세의 번잡함을 씻을 만하다.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므로, 내가 승낙하고 그 시말(始末)을 물었다. 오공이 말하기를, ‘산야에 묻힌 몸이 임금의 오랜 지우를 받아서 은택이 두터웠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라도 하여, 임금을 위해 장수를 기원하고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 하였다. 그 뒤에 또 이르기를, ‘기문하는 것은 남이 알아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 공덕이 어찌 남이 알고 모르는 데에 관계 있으리요. 이것은 기문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내 또 응낙하고 짓지 않았다. 기묘년 여름에 내가 옛 서울에 가다가 여기에서 아침밥을 먹고 이것을 원의 처마에다 기록하여, 전일에 응낙했던 것에 막음하고 또 나의 걸음을 기록한다. 그때에 오공은 왕명을 받들고 석왕사에 갔으므로, 서로 거리가 천리나 된다. 오공이 이미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나도 또한 오공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
혜음원(惠陰院) 주 남쪽 26리 지점에 있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 몰아 작은 시내 건너서 가니, 지는 해 옛 빗돌에 풀어 성하다. 산 마을 4월에 길손이 적어 깊은 숲에 꾀꼬리 제대로 운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옛 동산의 세 가닥 길을 차마 묵게 할 수 있겠는가? 필마(匹馬)로 어디 가나 또 석양이구나. 버들 빛은 바람이 푸름을 당기고, 송화(松花)는 빗물에 누렇게 붙는다. 나물 곁들인 오리다리, 시골 국이 좋고, 고깃 발에 술 걸러서 야미(野味) 향긋하다. 자모(慈母)를 영접하여 서울에 돌아오니, 이번 놀이는 풍경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 하였다.
회원(檜院)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천원(梨川院) 이천 언덕에 있다. 도솔원(兜率院) 임진도 남쪽 언덕에 있다. ○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 선봉이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렀다. 왕과 공주는 남쪽으로 가면서 임진을 넘어서 도솔원에 막차하였다. 왕이 강 언덕에 대가(大駕)를 멈추고 산하를 돌아보면서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은 풍경에 경들이 연구(聯句)하기 꼭 알맞다.” 하였다. 대가가 출발하면서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 이씨(次妃李氏)가 탄 말이 여위고 약하여서, 보는 자가 모두 눈물 흘렸다.
○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말로(末路)가 구구하게 한가하지 못하다. 중선루(仲宣樓) 위에서 홀로 한번 웃노라. 길은 지세를 따라 높았다가 낮았다가, 사람은 관교(官橋)를 향해 갔다가 돌아왔다가, 비 뒤에 봄빛은 나무를 단장하고, 아침에 서늘한 기운은 강산을 뒤덮는다. 시골 능첨지야 피하지 마소. 나도 화한 빛으로 그 사이에 섞이고 싶소.” 하였다.
【불우】 금강사(金剛寺) 미라산에 있다. 상양사(上陽寺) 백운산에 있다. 호명사(虎鳴寺) 반룡산에 있다. 용상사(龍床寺) 월농산에 있다. 항간에 전하기로는, 고려 왕이 일찍이 피란하여 여기에 주필(駐蹕)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 이름이 되었다 한다. 영은사(靈隱寺) 용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능묘】 공릉(恭陵)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이다. 순릉(順陵)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곧 공릉 남쪽 둔덕에 있다. 윤관 묘(尹瓘墓)ㆍ송거신 묘(宋居信墓) 분수원 북쪽에 있다. 허조 묘(許稠墓)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조연 묘(趙涓墓)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심회 묘(沈澮墓)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임 묘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 고파평현(古坡平縣) 주 동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자운사(慈雲寺) 임진 서쪽 언덕에 있다. 고혜음사(古惠陰寺) 혜음령에 있다. ○ 김부식의 기문에, “봉성현(峯城縣) 남쪽 20리 지점에 작은 절 하나가 있었다. 황폐한 지가 벌써 오래이나, 고을 사람은 그 지역을 아직도 석사동(石寺洞)이라 한다. 동남쪽 여러 고을에서 서울로 오는 자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자는 이곳으로 길을 잡지 않은 이 없다. 때문에 사람은 어깨가 맞부닥치고 말 발자취가 잇달아서 일찍이 끊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산이 깊고 초목이 무성하니, 범이 제대로 몰려들어 편한 집, 편리한 곳으로 알고 가만히 숨어서 엿보다가, 시시로 나와서 사람을 해친다. 이것뿐만이 아니고, 간혹 도둑과 짠지패가 그 지역이 깊어서 숨기 쉽고, 사람이 두려워해서 겁탈하기 쉬운 것을 편리하게 여겨서, 여기에 와서 살며, 간악한 짓을 이룬다. 그러므로, 양쪽 길을 가는 자는 주저하여 감히 앞서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여 많은 무리로 짝짓고, 병기를 가진 다음이라야 지나간다. 그렇게 하여도 오히려 화(禍)를 못 면하고 죽는 자가 해마다 수백 명이었다. 임금이 이소천(李少千)에게 명하여 중 백여 명을 모집하여, 그곳에 가서 초막을 지어 머물게 하였다. 또 비구 응제(比久應濟)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제자 민청(敏淸)을 부책임으로 하였다. 기계를 편리하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모아서, 경자년 봄 2월에 시작하여, 임인년 봄 2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재사(齋舍)와 부엌ㆍ광까지 모두 구비되었다. 또 승여(乘輿)가 남쪽으로 가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불행하게 여기에 주필하게 된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 하여, 드디어 별원(別院) 하나를 지었는데, 또한 경치가 아름다워 볼 만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자, ‘혜음(惠陰)’ 이라고 사액하였다.
화석정(花石亭)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지돈령 이명신이 살던 곳이다. ○ 서거정의 시에, “화석정 위에 구름 천년이고, 화석정 밑엔 강이 제대로 흐른다. 주인은 적선(謫仙)의 후손으로 풍류와 시주(詩酒)를 계승했구나, 어느 해에 주인이 여기에다가 살 터를 잡았던가. 청전(靑氈) 옛 별업(別業)이 아니었던가, 이것은 이원(李原)의 반곡(盤谷)이 아니었고, 덕유(德裕)의 평천장(平泉莊)이 여기로구나. 주인이 일찍이 벼슬에 올랐으나, 용감히 물러나 시골에 돌아갔다. 강산 풍월(風月)과 지기(知己)가 되고, 지나간 잠발(簪紱)은 뜬 구름 같았다. 정자엔 사시로 꽃 가득 피어 붉고, 흰 것이 비단 무더기일세. 정자 앞엔 흐르는 물 유유하여라. 물이 불을 때엔 포도주 되듯 한다. 가끔 흥나면 작은 배 띄워 상앗대로 물결을 가로지른다. 중류에 배 띄워 가는 대로 가며, 호탕한 얘기 소리 우레 같아 용을 놀라게 한다. 잔 잡고 달을 보니, 빛이 더 밝다. 달은 지지 않고 물결이 잔다. 왼편엔 황학(黃鶴)을, 오른편엔 백구(白鷗)인데, 하루살이[蠛蠓] 인생이 무슨 상관이리. 그대여 이 즐거움을 아는 이 없소. 그대 같은 명철한 사람 고금에 드무오. 내 또한 별장이 장단에 있어, 십년을 가고파도 아직도 못 가니, 어찌하면 돛배가 물결 가르며, 많은 술 싣고 한 번 찾아가서 고래가 삼키 듯 흠뻑 취해서 노래 부르며, 두 다리로 뱃전을 칠까.” 하였다.
『신증』이숙함(李淑瑊)의 기문에, “나의 문생(門生)으로서 전일 홍주(洪州) 원이었던 덕수(德水) 이후(李侯) 의석(宜碩)이 그의 아우이자 나의 동료인 의무(宜茂) 씨를 보내 와서 말하기를, ‘파주 관아 북쪽 10리쯤에 율곡(栗谷)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나의 조부 강평공(康平公)의 옛 별장이고, 별장 북쪽 깎고 지른 듯한 봉우리에다가 정자를 지었다.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 진기한 소나무와 괴이한 돌을 많이 심어 놓고 관상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폐(頹廢)해 버렸고, 다만 옛터만 남았다. 의석은 오직 조부의 기업이 황폐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옛터에다가 중건하였다. 정자는 장단 쪽을 향했는데, 석벽이 병풍처럼 되었고, 임진강 상류를 임하여 지세가 매우 험하다. 난간에 기대서 바라보면, 한양 삼각산과 송도(松都) 오관산(五冠山)이 저 하늘 아득한 중에 머리카락만큼 약간 드러나는 바, 이것이 정자의 경치이다. 그러므로 자네가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하여 아름답게 하기를 바라네.’ 하였다. 나는 찬황공(贊皇公)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기(平泉莊記)〉 가운데의 말에서 화석(花石)이란 것을 따서 이름 지었다. 그 기문이란 것을 상고하니, ‘평천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제가 아니다.’ 하였다. 그 훈계한 것이 지극하다. 강평공의 별장과 정자에도 찬황공이 자손에게 훈계한 것과 같이 훈계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은 모르거니와, 후(侯)는 오랫동안 퇴폐한 옛터에다가 화석정을 잇달아 지었다. 옛 떨기에서 꽃이 피고, 옛 자리에 돌이 앉은 것을 주인이 보면, 선조께서 북돋우고 심어서 애완하던 공력을 생각하여, 상재(桑梓)보다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팔기를 즐겨하겠으며, 주기를 즐겨하겠나. 그 즐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 찬황공이 비록 간절하게 훈계하였으나, 가씨(賈氏)가 기록하기를, ‘평천장의 꽃과 돌이 많이 유력(有力)한 자의 차지하는 바 되었다.’ 하였으니 후사가 있다 하겠는가. 강평공은 비록 훈계가 없으나, 후(侯)가 능히 지켜서 팔지도 주지도 않고, 선조의 마음에 맞게 하였으니, 뒤를 능히 이었다 하겠다. 그 사람의 어질고 불초한 거리가 이와 같이 멀다. 누가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은가 같지 않은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가. 정자가 황폐하여지니 꽃과 들도 함께 황폐해지고, 정자가 새로워지니 꽃과 돌도 함께 새로워졌다. 물(物)은 비록 앎이 없으나 만남은 각자 때가 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이것도 적을 만하다. 그리고 외로운 배에 명월을 싣고 청평에 낚싯줄 드리움 같은 것은 후의 세상 밖 그윽한 정취이다. 만약 후를 따라 정자 위에 놀게 되면, 다시 후를 위해서 글을 지으리라. 이것으로 기문한다.” 하였다.
○ 이의무의 부(賦)와 서(序)에, “나의 중백씨(仲伯氏) 홍주 통판(洪州通判)이었던 의석이 벼슬을 그만둔 그해에 파주 율곡 별장에다가 정자를 지었는데, 실상 우리 왕부 강평공의 옛터이다.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으로써 이름을 짓고, 아울러 기문하여 아름답게 하였다. 아, 꽃과 돌은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나 선조의 수택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나를 감개하게 하므로 이에 글을 지어 이를 자랑함이 어찌 무심하리요.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중백씨의 뜻을 또한 알 것이다.” 한다. 그 글에 이르기를, “계묘년 3월 기망(旣望)에 율곡장을 관람하는 객이 있어, 거닐면서 읊조리고 조망(眺望)하였다. 주인이 기쁘게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화석정에 오르니, 비스듬한 석벽이 강물을 임하였다. 앞으로는 관도(官道)가 보이고, 뒤로는 우정(郵亭)을 굽어본다. 뭇 산이 몰려드는 듯하고, 들이 넓으며 호수가 질펀하다. 이것이 실상 높이 올라 바라보기에 훌륭한 경지로서, 천지가 빚어 만든 것이다. 그때에 봄볕이 한창 성하여서, 온갖 화초가 다투어 피었다. 새빨갛고 허연 것이 바람에 춤추어서, 모습이 가냘프다. 상긋한 것은 웃는 듯하고 비틀거리는 듯 낮은 것도 걸터앉은 듯하다. 간간이 괴상한 돌과 뾰족한 바위 돌이 기이하게 벌려져 있다. 객이 이에 눈썹을 쫑긋하고 눈을 들며 자리에서 물러나, 주인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는 장쾌하다. 내가 능히 주인의 즐거움을 알았다. 대개 성질이 굳은 것도 돌이고 물성(物性)이 고요한 것은 꽃이다. 아름다움을 군자와 견주면 향기로운 덕을 들 수 있고, 흥(興)을 시인(詩人)에게 붙이면 갈고 닦는 공부에 더함이 있다. 이러므로 고인 달사(高人達士)가 여기에 많이 의탁하여 자연의 본성을 수양한다. 이렇다면 주인이 화석에 의탁하여 물을 완상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쾌하게 하는 것이 어찌 공연한 일이겠나.’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 나의 왕부께서 이 정자를 지을 때에 만족함을 알 나이로서 나라가 태평한 기회를 만났으나 공명 버리기를 신짝 버리듯 하고, 마음은 세상 밖에 두어서 집을 짓고 고반(考槃)하여 화석의 주인이 되었으니, 어찌 하여 부귀로써 마음을 옮기리요. 그러나 일조에 영원히 하직하니, 누가 능히 이 터를 지킬까. 내 어떤 사람인데 편히 주심을 받았던가. 애석하게도 벼슬에 얽매어서 골몰하다가 10년 만에 돌아오니, 풀이 무성하고 이끼가 끼었다. 다행히도 전원이 그냥 남았으므로, 이에 다시 짓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내가 이 정자에 있으면서, 꽃피는 것을 보면 선조께서 북돋우고 심느라 근로하심을 생각하고, 기이한 돌을 보면 신조께서 어루만지고 쓰다듬던 사랑을 생각하여, 숙연하게 지시를 받드는 듯하고 완연히 갱장(羹墻)을 보는 듯하다. 남긴 사랑을 잡고 공경을 일으킴은 상재(桑梓)보다 백 배나 더하다. 거의 조상의 유풍을 떨어뜨리지 않으니, 여가를 틈타 두루 놀리라.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로 위로하고, 가끔 높은 둔덕에 올라 강산과 풍월을 보아도 평생에 못다한 회포를 풀기에 족하리다. 또한 천지 사이에 만 가지 물이 있고, 물을 보는 마음도 사람에 따라 갈래가 많다. 지나간 옛날이나 닥쳐오는 지금이나, 누가 능히 돌리어 보는가. 가령 이춘(移春)이 헌함(軒檻)에 있음으로써 사치하는 마음이 점점 방자했고, 반한당(半閑堂)이 이루었으니, 국세(國勢)는 어디에 의지하리. 육랑(六郞)의 모습은 깊이 풍부한 형태를 짓고, 사녀(士女)가 서로 주는 것은 오직 희롱하는 것으로 본다. 혹 도사(道士)에게 꾸지람 당해도 그 술법(術法)은 상고할 수 없고, 중에게 머리 끄떡여도 말이 또한 진실이 아니다. 무창(武昌) 언덕 위엔 망부정녀(望夫貞女)라는 낭설(浪說)이 전해 오고, 곡성(谷城) 산 밑에는 글 주었다는 노인이 누구일까. 이것은 꽃과 돌이 바로 병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꽃과 돌에게 혹됨이 고기 눈알을 보배와 혼동함과 같은 것이 있음이다. 그러나 방초(芳草)를 자리삼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기이한 돌을 만지고 그윽한 향기를 거둬들인다. 굽어 봐도 쳐다보아도 양심에 부끄럼 없이 거닐며 돌아다닌다. 연붉은 장소[軟紅]를 단념하고 허백(虛白)한 곳에 흥겨워하여, 걱정도 즐거움도 다 잊고 총애도 욕스러움도 모른다. 이것은 선조께서 생각하시던 바이고, 내 여기에 욕되게 함이 없음을 안다. 비록 그러나 내 일찍이 들으니 흥하기도 폐하기도 하는 것은 물의 예사이고, 착하기도 악하기도 하는 것은 마음의 기미라 한다. 선조께서 능히 열어놓으셨으나,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한다. 자손 중에 혹 지키더라도 황음(荒淫)한 지경이 됨을 면하지 못한다. 마침내 마음의 즐거운 대로 하여서, 고황(膏肓)된 지경으로 몰아간다면, 이 정자에 다시 풀이 성하고 이끼가 깊어서 길이 선조의 뜻을 저버리게 될지 어찌 알리요. 이 점은 내가 두려워서 마음 편하지 못하는 것이며, 거의 후대에도 이 정자를 버리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객이 유연히 웃으며 일어나 노래하기를, ‘아득한 외로운 정자, 강위에 높이 지었다. 석인(碩人)이 즐거워하여 세월 보내며 마음 편하다. 산에 황정(黃精 약 이름)을 심고, 물가에서 백구와 친한다. 잡패(雜佩)를 가져다 주고자 하나, 그대는 오지 않고 주저하네.’ 한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이후(李侯)는 자손으로서 어질기도 하다. 당(堂)이 지금도 황폐하지 않았다. 어느 물, 어느 둔덕 소윤(少尹)이 슬퍼했고, 꽃 하나 돌 하나도 평천(平泉)보다 낫다. 현주(玄洲) 바람 비는 서해에서 오고, 적현(赤縣) 멧부리는 반공에 솟아났다. 강평공 남긴 뜻이 영원함을 알고자 하면, 마을 가득한 풍경이 세전(世傳)이다.” 하였다. 성산 고성(城山古城) 석축이며 둘레가 2천 9백 5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본조 유규(柳規)ㆍ남륜(南倫)ㆍ안상진(安尙縝) 모두 부사가 되었다.
유효진(柳孝眞) 목사가 되어 다스림이 제일이어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신증』 여윤철(呂允哲) 정사를 함이 청렴하고 공평하였다.
【인물】 고려 윤신달(尹莘達) 태조조에 공신이었다. 윤금강(尹金剛) 신달의 손자인데, 벼슬이 복야(僕射)에 이르렀다. 윤집형(尹執衡) 금강의 아들인데,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윤관(尹瓘) 집형의 아들이고, 신달의 4대 손이다. 문종조(文宗朝) 과거에 올라,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여진이 정주(定州)에 마구 들어와서 약탈하였다. 왕이 윤관을 동북면 행영 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삼아 공격하여 쫓았다.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경계로 하고, 구성(九城)을 설치하고, 개선(凱旋)하였으며, 벼슬이 대보 문하시중(大保門下侍中)에 이르러 죽었는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군중(軍中)에 있을 때라도 항상 오경(五經)을 가지고 다녔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함이 당시의 첫째였다. 뒤에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윤언이(尹彦頤) 윤관의 아들이다. 인종조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문장을 잘 하여 일찍이 《역해(易解)》를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 온다. 늙은 뒤에도 불법을 아주 좋아하였다. 늙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파평에 살면서 중 관승(貫乘)과 불가의 도우(道友)가 되었다. 관승이 부들로 암자 하나를 만들었는데 간신히 한 사람 정도 들어가 앉을 만하였다. 먼저 죽은 자가 여기에 앉아서 죽기로 약속하였다. 하루는 언이가 소를 타고 관승에게 가서 관승에게 이별을 고하고 바로 들어왔다. 관승이 사람을 시켜 암자로 보냈으므로 언이는 웃으면서, “선사(禪師)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드디어 붓으로 벽에다가 쓰기를, “봄이 다시 가을 되니, 꽃이 피었다가 잎이 진다. 동에 가나 서에 가나, 마음을 잘 기른다. 오늘 도중에서 이 몸을 돌이켜보니, 긴 하늘 만리에 한 조각 구름이다.” 하고, 쓰기를 마치자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윤린첨(尹鱗瞻) 언이의 아들이며, 자는 태조(胎兆)이다. 의종조(毅宗朝)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윤돈신(尹惇信) 언이의 아들인데, 벼슬이 병부 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다. 윤상계(尹商季) 돈신의 아들이며, 벼슬이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이르렀다. 염신약(廉信若) 봉성(峯城) 사람이다. 인종조 과거에 올라, 광주 장서기(廣州掌書記)로 조용(調用)되었고, 여러 번 옮겨져서 정당문학 예부상서(政堂文學禮部尙書)에 이르렀다. 사람이 키는 작아도 담은 크다. 부(符)를 나누고 월(鉞)을 맡아서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윤관의 7대 손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평생에 살림을 돌보지 않고, 오직 경사(經史)를 즐기었고, 문장이 깨끗하고 숙달하였다. 윤안숙(尹安淑) 벼슬이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염제신(廉悌臣) 곡성(曲城)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가 죽고, 고모부(姑母夫)였던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태정제(泰定帝)가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금중(禁中)에 숙위(宿衛)하도록 명하였다. 오랫동안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휴가를 청하거늘, 황제가 명하여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게 하였고, 원에 돌아가서는 강소(江蘇)ㆍ절강(浙江)에 사신으로 가서 청백(淸白)하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황제가 휘정원(徽政院)에서 전별연을 하사하여 보냈다. 왕이 친히 그의 얼굴을 그려서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시중은 중국에서 배웠고 성품이 고결하니, 조정 딴 신하와 견줄 바 아니라.” 하였다. 벼슬이 영문하부사 곡성백(領門下府事曲城伯)에 이르렀다. 총재(冢宰) 지위에 있은 지 무릇 39년이었다. 윤세유(尹世儒) 윤관의 손자이다. 희종조(熙宗朝)에 우어사가 되었고,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났다. 조정의 정사가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시(詩)에 의탁하여 비방하니 그때에는 광인(狂人)이라 불렀다. 윤척(尹陟) 안숙의 아들인데, 벼슬이 영평군(鈴平君)에 이르렀다. 윤승례(尹承禮) 척의 아들이다.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본조 윤곤(尹坤) 개국공신이며, 벼슬이 파평군(坡平君)에 이르고,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윤번(尹璠) 승례의 아들이고, 관의 후손이다. 벼슬은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정(貞靖)인데, 우리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생부(生父)이다. 윤형(尹炯) 벼슬이 좌참찬이었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윤자(尹慈) 과거에 올라 벼슬이 경기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윤암(尹巖) 숙경옹주(淑慶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좌익 공신(佐翼功臣)으로서 파평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윤사분(尹士昐) 윤번의 아들이다. 벼슬은 우의정이었으며,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윤사균(尹士昀) 사분의 아우이다. 정통 원년(正統元年)에 장원(狀元)하여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윤사흔(尹士昕) 사균의 아우이다. 좌리공신에 참여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파천 부원군(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아들 계겸(繼謙)은 익대 좌리공신에 참여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호(尹壕) 과거에 올라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증』 윤필상(尹弼商)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몸이 작으나, 담략(膽略)이 있었다. 성화(成化) 15년에 황제가 건주 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고자, 우리나라에 군사를 청하였다. 성종(成宗)이 필상에게 군사를 거느려 도와 치게 하니, 크게 전첩(戰捷)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조서로써 포창하고 상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연산 갑자년 죽음을 당했다. 김인후(金麟厚)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이첨(李詹) 동산(童山) 밑에 살았다.
【제영】 여헌풍심견인수(旅軒風簟牽人睡) 이규보의 봉산현 시에, “산허리 기우는 해 처마에서 더딘데, 깨끗한 시구는 오직 두자미(杜紫薇)만 읊조리네. 시냇가 대나무 짙은 그늘에 죽순이 뭇 자라고, 뜰 앞 매화나무 비 넉넉하니 열매가 굵다. 여란 마루 대자리는 사람의 잠을 끌어 들이고 야점(野店 시골에 있는 상점)의 봄나물은 객의 시장기를 달래는구나. 먼 곳에 유람하는것 누가 위문하리. 석루(石樓)의 중의 집은 연기와 노을에 잠기네.” 하였다. 신경서반구경동(新京西畔舊京東) 남재(南在)의 시에, 작은 고을 관아를 요긴한 골목에다 지었는데, “새 서울의 서쪽이고, 옛 서울의 동쪽이라고 하네.” 하였다. 삼도회래도(三道會來途) 권근의 시에, “두 서울 중간에 유숙하는 곳, 3도에서 모여 오는 길이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임진보(臨津堡) 임진(臨津)의 남안(南岸)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별장(別將) 연강(緣江)을 설치하고 관성(關城)을 쌓았는데 좌우의 길이가 백 3십 3보이며 진서문(鎭西門)이라고 불렀다. ○ 별장은 한 사람이다. 장산보(長山堡) 임진도(臨津渡)의 아래로 2리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보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백여 보이다. 또 돈대(墩臺)를 여덟 곳에 쌓았다. ○ 별장은 한 사람이고 이상 이보(二堡)는 총융청이다.
【영아】 방영(坊營) 영종 40년에 장단(長湍)으로부터 방영(坊營)을 본주로 이사했다. ○ 병마방어사 한 사람이고 본주의 목사가 겸한다. 총융중영(摠戎中營) 인조조에 설치. 총융우영(摠戎右營)이었는데 후에 중영(中營)으로 고쳤다. ○ 속읍으로는 파주ㆍ고양ㆍ교하(交河)ㆍ적성ㆍ속보(屬堡)ㆍ임진ㆍ장산(長山) 등이다. ○ 영장(營將)은 본주의 목사가 겸한다.
【토산】 석회(石灰)가 난다.
【성지】 마산고성(馬山古城) 서쪽으로 2리이며, 백제 때에 쌓았는데 본조 선조조에 중수하였고, 둘레는 2천 9백 5척이다. ○ 대로의 요충지에 홀로 우뚝 솟아 그에 상대할 만한 봉우리가 없다. 파평고성(坡平古城)ㆍ월룡산고성(月龍山古城) 모두 남은 터가 있다.
【누정】 풍락정(豐樂亭) 읍내에 있다.
【방면】 주내(州內) 마지막이 10리이다. 광탄(廣灘)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자곡(紫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17리이다. 천점(泉岾)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조리동(助里洞) 남쪽으로 처음이 13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오리곡(烏里谷) 서쪽으로 20리이다. 파평(坡平) 동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칠정(七井)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마정(馬井)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신속(新屬)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진도】 임진도(臨津渡)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저포진(猪浦津)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돌거리진(突巨里津) 동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사원】 파산서원(坡山書院) 선조 무진년에 건축하여,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성수침(成守琛)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당(聽松堂)이며, 창녕(昌寧) 사람으로 벼슬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이르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수종(成守琮) 자는 숙옥(叔玉)이며, 수침의 아우이고, 세칭(世稱) 절효선생(節孝先生)이니,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 수침의 아들이니, 경도 문묘(京都文廟)에 보인다. 백인걸(白仁傑)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庵)이며, 수원(水原) 사람이니 벼슬은 부참찬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자운서원(紫雲書院) 광해주(光海主) 을묘년에 건축해서 효종(孝宗)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朴世采) 모두 경도 문묘(京都文廟)에 보인다. 풍계사(豐溪祠) 숙종 갑술년에 건축해서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오두인(吳斗寅) 자는 원미(元微) 호는 양곡(陽谷)이니, 해주(海州)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抗疏)하여 절개를 지키어 죽었다.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세화(李世華)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이고, 부평(富平)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抗疏)하였으며, 벼슬은 행 이조 판서(行吏曹判書)이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태보(朴泰輔)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제(定齊)이고, 나주(羅州)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하여 절개를 지키어 죽었다. 벼슬은 응교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능묘】 장릉 구기(長陵舊基) 주(州)의 북쪽 운천리(雲川里)에서 영종 7년 교하(交河)로 옮겨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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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京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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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 교하현까지 21리이며, 남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9리인데, 서울과는 37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고봉현(高峯縣)은 본래,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봉이라 개칭하여 교하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왕(遇王) -일명 왕봉(王逢)이라고 한다.- 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는 행주(幸州)라고 개칭하였고, -일명 덕양(德陽)이라 하기도 한다.- 현종 9년에는 고봉ㆍ행주 두 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부원현(富原縣)은 본래 과주 용산처(果州龍山處)인데, 고려 충렬왕 11년에 부원 황조향(富原荒調鄕)이라 고쳤으니, 본래 부평부(富平府) 속현이었는데,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설치하고, 행주ㆍ부원ㆍ황조향을 고봉에 예속시켰다. 태종 13년에 고봉ㆍ덕양 두 현의 이름에 가리어 지금 이름인 고봉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만들었다. 성종 2년에는 경릉(敬陵)ㆍ창릉(昌陵) 두 능이 있다는 것으로써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 갑자년에 본군을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나머지 땅은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갈라 붙였고,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군을 설치하였다.
【군명】 달을성(達乙省)ㆍ고봉ㆍ행주ㆍ개백ㆍ우왕ㆍ왕봉ㆍ덕양.
【성씨】 고봉 고ㆍ진(秦)ㆍ강(康)ㆍ송ㆍ전(田). 행주 최ㆍ김ㆍ강(康)ㆍ부(夫)ㆍ은(殷)ㆍ기ㆍ고ㆍ전(田)ㆍ칙(則)ㆍ나(那)ㆍ차(車)ㆍ이(李) 내성(來姓)이다. 용산 변(邊)ㆍ이ㆍ강(康) 모두 내성(來姓)이다. 건자산(巾子山) 황보(皇甫).
【산천】 장령산(長嶺山) 군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대자산(大慈山)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령산(高嶺山)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지산(星知山)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건자산(巾子山)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견달산(見達山) 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혜음령(惠陰嶺)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압도(鴨島)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22리이다. 갈대가 생산되는데,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베어가서, 나라의 쓰임에 충당한다. 박만도(朴萬島)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가둔천(街頓川)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서, 교하현 학당포(學堂浦)에 들어간다. 북포(北浦)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덕수천(德水川)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근원이 청당동에서 나와서 북포에 들어간다.
【토산】 웅어ㆍ게ㆍ은어.
【봉수】 소질달산 봉수(所叱達山烽燧)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파주 대산(大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서울 모악(母岳)에 응한다. 고봉성산 봉수(高峯城山烽燧)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교하현 금단산(黔丹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 봉수(蜂峴烽燧)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고봉 성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모악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정이오의 기(記)에, “태조께서 천명을 맡은 지 3년 만인 갑술년에 도성은 한양에다가 정하고, 고봉을 갈라서 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갑오 가을 8월에 고봉ㆍ덕양을 합치고, 왕지를 받들어 고양이라 이름을 바꿨으니, 대개 덕양은 곧 형주를 겸한 명칭이었다. 홍희(洪熙) 기원 갑진년 8월에 현감 하군(河君)이 처음 와서, 공관(公館)이 무너지고 더러워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돌아보고, 군은, ‘이렇게 되어서는 왕인(王人 왕의 사신)을 예대(禮待)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병오년 봄에는 거의 다 무너졌으므로, 감사 심도원(沈道源)에게 고하여, 조정에 전문(轉聞)하게 하여 윤허하는 교지를 받들었다. 재목을 모으고 장인을 불러서 그해 가을 8월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집이 높고 아름다우며, 제도가 크고 넓으니, 질서가 있게 단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다. 담장을 두르고 꽃나무를 섞어 심어서 무성하였다. 동헌(東軒) 앞에는 못을 파서 연(蓮)을 심었고, 서헌(西軒) 앞에는 돌을 빼고 우물을 팠다. 여름과 봄 사이에는 햇볕이 명랑하고, 연꽃이 향기로우며, 샘물이 차고 맑으니, 이것은 또 다른 현에는 없는 것이다. 문묘(文廟)와 학교를 건립하고, 남별관(南別館)과 옛 관청도 옛 제도에 보태기도 하고 새 집을 창건하기도 하여, 차례로 이루니 웅장한 모습이 서로 바라보인다. 무신년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하군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대저 하군이 고양을 다스림과 고양이 하군을 만남이 다른 때가 아니고, 오늘이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지금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백성은 수송하는 수고로움이 없으며,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을 일삼았으니, 원된 자는 정령이 번거롭지 않아도 공이 쉽게 이루어졌음을 알겠다. 더구나 하군은 인(仁)으로써 어루만져 사랑하고 의(義)로써 시행하고 있다. 그 역사에 무리 지어 달려와서 공역을 도운 것이 반드시 분명하다. 수령은 백성과 가까운 관직이니 백성이 편하면 이것으로 족하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감사를 공경하는 데에 있고, 감사를 공경하는 것은 성심으로 법을 준행하는 것 뿐이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지금 감사는 주ㆍ현과 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자가 많다. 감사는 오로지 주ㆍ현을 사찰하고자 하고, 주ㆍ현은 오로지 가려서 덮어두려 한다. 그러지 말고 성심으로 함께 하며, 주ㆍ현이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는 바가 있거든, 가르칠 만한 것은 가르치고, 독촉할 만한 것은 독촉할 것이다. 그래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중에서 심한 자를 가려서 한 둘을 쫓아 버리어, 여러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심공과 하군은 한 마음으로 함께 다스린 자라 할 수 있다. 하군의 이름은 부(傅)이며, 전조의 재상이었던 원정공(元正公) 집(執)의 후손이다. 관직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으니, 이번 일만 보아도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내 하군과 같은 고을 진주 사람이므로 문사(文辭)가 졸렬하지만,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를 위해서 기쁘게 쓰는 바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군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벽제역(碧蹄驛)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이 역에서 반드시 유숙하게 된다. ○ 예겸(倪謙)의 시에, “길은 왕경(王京)으로 들어가는데, 이 밤 기온이 차다. 두 행렬의 횃불이 말안장에 번지는구나. 청산을 지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눈을 들어 보지 못하였네.” 하였다.
○ 기순(祈順)의 시에, “초가에 우는 닭이 4경을 알렸는데, 가라말이 객을 재촉해 왕경에 가자 한다. 많은 역부(驛夫)는 분주해 구름 모으는 것 같고, 여러 횃불은 얼기설기 불성[火城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줄지어 늘어세운 횃불]이런가 의심한다. 좋은 산은 길을 껴서 경치를 분변하기 어렵고, 다리를 지나 흐르는 물은 소리만 들리네. 날이 환하게 밝자 가랑비 내리는데, 황은(皇恩)을 선포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사신이 전번에 산을 바쁘게 지나는데, 가려는 맘 급해 바라보는 눈이 아찔하다. 초목은 무정(無情)하다고 나를 웃을 것이다. 풍랑은 곳곳마다 제영을 남기지 않았네. 돌아가는 행장엔 청유막(靑油幕)을 가졌고, 가는 말은 그대로 벽옥 발굽 뒤집는다. 기러기가 물가를 따른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다. 진흙 눈의 자취가 동서를 함부로 가네.” 하였다.
『신증』 왕창(王敞)의 시에, “사성(使星)이 어젯밤에 요서(遼西)에 비치더니, 동쪽으로 돌아와서 벽제역을 지난다. 준마 뼈에 채찍질 해 천리마를 재촉하고, 향기로운 혼이 땅에 가득하니, 당리(棠梨) 꽃이 떨어졌네. 수목은 여름에 들어 겹 그늘에 합쳤고, 새는 사람을 멈추기 위해 뜻이 있게 운다. 청쇄(靑鎖 궁문)를 떠나온 뒤에 꿈에도 그리웠는데, 문득 사적(仕籍)을 통해 금규(金閨)에 올린 것을 보았네.” 하였다. 덕수원(德水院) 덕수천 남쪽 언덕에 있다.
○ 이색이 덕수에서 비를 만나 지은 시에, “성문을 나기 전부터 비가 동이로 쏟더니, 성문을 나서니 경위(涇渭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음. 즉 사물의 청탁을 이른다)를 분간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흥이 나면 우중(雨中)에도 중의 집을 보았는데, 오늘은 시름 깊어 여관에서 빗소리만 듣는다. 벽을 사이한 빠른 우레는, 샘에 돌이 떨어지고 처마에 가득한 찬 기운 남에 구름이 핀다. 남북으로 잦은 나그네 길 꺼리지 않는 건, 반쯤은 나의 어버이, 반은 임금을 위해서.” 하였다. 인후원(仁厚院) 군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이태원(梨泰院) 군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중방원(重房院) 군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신증』 흥복원(興福院) 군 북쪽 6리 지점에 있다.
【불우】 대자암(大慈菴) 대자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절 안에서 고승(高僧)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기우는 날에 전조의 능[前陵]을 조상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마소. 다락집 오르니 한이 많네.” 하였다. 정인사(正因寺) 경릉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중창기(重創記)〉에, “능침(陵寢)에 절이 있음은 무슨 일일까.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모하여 능침 측근에 절을 세워 인사(仁祠)로 삼아서 삼보(三寶)를 높이고, 명혼(冥魂)을 천도(薦度)하기 위한 것이다. 한ㆍ당 이래로 영명(英明)하고 의로운 임금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제왕이 근본에 보답하고 영구하게 추모하는 데에 극진함을 다하는 도리였다. 천순(天順) 기원 가을 8월에, 우리 의경대왕(懿敬大王)이 승하하시었으므로 고양군 동쪽 봉현(蜂峴)에 장사하였다. 장사한 다음 해에 세조 대왕께서 내수사에 전지(傳旨)하기를, ‘내 아들 의경이 불행하게 수명이 짧아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초상 장사에 일이 거창하였으니, 거듭 국가를 번폐스럽게 하지 않고자 한다. 너의 내수사는 현실(玄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 한 구역을 만들어라. 혹시라도 폐단을 끼치지 말고 완성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그 해 모월 모일에 능 동쪽에다 절의 터를 잡고 터를 넓혀서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열두 달을 지나서 마쳤다. 신묘년 봄에 우리 인수 왕비(仁粹王妃) 전하께서, ‘절을 당시에 급속하게 지었으므로 재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지음새가 정밀하지 못하였다. 가령 오래 되지 않아서 썩고 허물어지면 무엇으로써 후세에 보일 것인가.’ 하고, 이에 판내시부(判內寺府) 신(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물품 중에 일찍이 절약한 것을 쌀과 베로 계산한 약간을 내수사에 주었다. 장차 날을 가려서 예전 집을 철거하고 새로 창건하려는 데, 대왕대비 전하께서, ‘의경 대왕과 예종 대왕 두 능의 현실(玄室)이 아주 가까와서 한 절의 종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곳이다. 만약 인수 왕비의 개축하려는 원심(願心)을 인해서, 힘을 합치고 재물을 함께 하여 정인(正因)의 일을 도우면 공이 쉽게 이루어지고, 내가 의경ㆍ예종을 위해 천복(薦福)하는 정성도 또한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수사에 특별히 신칙하여 돈과 곡식을 더 내도록 하고, 이어 진실로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알리어서 그 쓰임에 보태게 하였다. 그 해 2월에 시작했는데, 백성들을 부역시키지 말고 백성을 뽑아 노역에 싻을 주도록 명하였다. 마침 서울 가까운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늙은이 젊은이를 막론하고 앞을 다투어 품팔아 먹었다. 삽을 멘 자가 구름같이 모이고 동아줄 당기는 데에 개미처럼 붙어 두드리거나 치는 것을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기꺼이 일에 나아가므로, 겨울 10월 일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졌으니, 총 1백 19칸이었다. 방앗간과 변소도 각각 제자리에 있고, 바르고 칠한 단청을 휘황 현란하게 하였다. 전당(殿堂)과 골마루가 통활 장려하고, 방과 헌함과 문이 선명 정밀하였다. 집이 높다랗고 상설(象設)이 빛나서 사찰로서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서로 첫째 둘째로 될 만하다. 전당 제도와 칸살의 넓고 좁음은 모두 전일에 판화엄 대선사 설준(判華嚴大禪師雪峻)이 아뢰어서 윤허를 받은 대로였다. 인수왕비 전하께서, ‘절은 있으나 곡식이 없으므로 중이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 특히 미곡 백 섬을 시주하여, 본곡(本穀)은 남겨 두고 이자만 이용하여서, 식륜(食輪)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무릇 집기 등속도 죄다 여유 있게 구비하였다. 계사년 4월 초파일에 낙성 법회를 크게 실시하고, 대승(大乘) 여러 경(經)을 인출하였다. 이날 오색 구름이 있고, 이상한 향기가 골에 가득하며,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쳤다. 원근에 있던 중 수 만여 명이 쳐다보고 절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임을 감탄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모자간 은혜와 부부간의 윤기(倫氣)는 천지간 떳떳한 의리에 근본한 것으로 천자로부터 서인에까지 통한 것이다. 우리 의경대왕과 예종대왕은 한창 시절이었고 성덕이 새로워지는 중이었는데, 문득 여러 신하들을 버렸다. 이 때문에 대왕대비 전하와 인수왕비 전하께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비록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이르도록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온 나라 신민이 한갓 두 대비가 선왕의 명복을 위해서 삼보를 독실히 믿고, 사찰을 장엄하게 한 것이 이 같음을 알 뿐이고, 두 대비가 모자간의 은혜를 돈독히 하고 항려(伉儷)간의 예의를 삼가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는 것이 억조 군생이 보고 감동하는 기회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큰 역사를 마쳤으나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을 수고롭게 함이 있을까 걱정하고, 큰 공덕은 완성했으나 한 자만큼의 베라도 나라 것을 소비했을까 염려하여, 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신 전전긍긍한 심회는 또 신민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두 대비 전하의 지극하신 뜻을 받들고, 선왕의 지극하신 은택을 생각하여 시절 따라 친히 거둥하여 몸소 희생과 폐백을 능에 드리며, 신정(宸情)이 생생하여 서리와 이슬에 출척(怵惕)하는 감회를 견디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절이 능침 곁에 있으므로 이에 왕지(王旨)를 내려, ‘우리 인수 왕비께서 시주하신 전지(田地)와 노비 외에 여러 가지 요역(徭役)을 다 면제하고, 승도(僧徒)들을 편히 살게 하여 번뇌가 없게 하라.’ 하시었고, 은사(恩賜)가 여러 번이나 많았다. 이것은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념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생각하는 지극하신 덕으로서 진실로 천재(千載)에 없었던 성스러움이었다. 이것은 대개 효도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극치(極致)로서 신명에 통하고, 불승(佛乘)을 감동시켜서 하늘의 온갖 복을 받음이 억만 년일 것이며, 자손 만대에 한없는 경사를 누릴 것이다. 아, 성한지고.” 하였다.
○ 정인지의 시에, “원릉은 채색 구름 가에 엄숙하고, 사찰은 빼어난 메 앞에 높다랗다. 금벽 채색 빛나서 아침 햇볕이 쬐고, 달랑거리는 풍경 소리는 바람이 멀리 전한다. 불등(佛燈)은 넓게 삼천계(三千界)를 미치고 국운(國運)은 응당 억만 년에 뻗치리라. 정맹(精猛)한 두타(頭陁)는 법좌(法座)에 올라 묘법을 말하고, 진전(眞詮)을 부연한다.” 하였다.
○ 최항(崔恒)의 시에, “달은 주림 삼계(珠林三界)의 그림자를 흩고, 비는 금지 시방(金地十方)의 추위를 나눈다. 후산(緱山)에 학이 가니 공연히 구슬프고, 정수(鼎水)에 용이 옮기니 다시 아득하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목어(木魚)가 소리나니 아침 멧부리 고요하고, 돌말[石馬]이 소리 없는데 새벽 능침이 춥다. 주수(珠樹)에 두견이 우니 봄이 적적하고, 정호(鼎湖)에 용이 가니 달이 망망하다.”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산(橋山)에 아름다운 기운이 성한데, 탑묘(塔廟)는 원침(園寢) 앞에 높다랗다. 바다도 안 보이는 구름 탄 신선이 멀고, 공덕이 성취하니 각월(覺月)이 불등(佛燈)을 전한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서쪽으로 능원을 바라보니 어디쯤인가, 송추(松楸)에서 보일락말락 절문 앞일세. 산 중에는 구름이 아침마다 변하고, 달 아래 종소리가 밤마다 들려온다.” 하였다. 나암사(羅巖寺)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화사(小華寺) 군 남쪽 15리 지점, 호숫가에 있다. ○ 고려 인분(印份)의 시에, “파초 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 오는 줄 알겠고,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하였다. 어침사(魚沈寺) 고령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 무을고리(無乙古里)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하나는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행주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능묘】 경릉(敬陵) 본조 덕종(德宗)의 능이다.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이다. ○ 강희맹의 시에, “노반(露盤)이 구름가에 솟았으니, 멀리 원릉이 절 앞에 있는 줄 알겠다. 만 구렁 송추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감쌌고, 상방(上方) 종 소리는 묘한 여운(餘韻)을 전한다. 조정에 나아가던 금학(禁鶴)은 일찍이 어느 날이던가. 교산(橋山)에 장사한 것도 이미 옛날이었다. 큰 경사는 마침내 보력(寶曆)을 빛나게 했다. 하찮은 신하는 머리 조아리며 말을 마친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생학(笙鶴)으로 하늘에 조회하며 돌아오지 않는다. 성 서쪽 10리쯤이 곧 후산이구나. 연기와 노을은 송(松)ㆍ삼(杉)이 서 있는 길을 어둡게 잠갔고, 구름과 안개는 범과 표범 굴을 깊게 감추었다. 이날 빈번(蘋蘩)은 깨끗하여 제물로 올릴만하고, 당년 궁검(弓劍)은 아득하여 부여잡기 어렵다. 두견새 소리 괴로워라 마음 상한다. 봄 바람에 눈물 뿌리니 점점이 아롱진다.” 하였다.
『신증』연산군 10년에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부장하였다. 창릉(昌陵) 본조 예종의 능이며,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부장하였다. 경릉 북쪽에 있다. 고려 공양왕릉(恭讓王陵) 견달산(見達山)에 있다. 최영 묘(崔瑩墓) 대자산에 있는데, 무덤 위에 지금도 풀이 나지 않는다. ○ 변계량의 시에,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말 배우는 거리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천추(千秋)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하였다. 성녕대군 묘(誠寧大君墓) 대자산에 있다. 월산대군 묘(月山大君墓)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황치신 묘(黃致身墓) 군 북쪽 16리 지점, 덕수촌(德水村)에 있다. 김전 묘(金詮墓)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고적】 고고봉현(古高峯縣) 지금 관아(官衙)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봉(峯)을 봉(烽)이라 한 곳도 있다.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 미녀(美女)가 달을성현 높은 산 위에 봉화를 올려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뒤에는 고봉(高烽)으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봉 폐현(王逢廢縣) 곧 행주이다.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 김부식이 이르기를, “한씨 미녀가 개백현(皆伯縣)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왕봉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 하였다. 부원 폐현(富原廢縣)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에 내속하였는데, 곧 용산처(龍山處)이다. 지금 성 밑 10리 지역은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다. 황조향(荒調鄕)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섭리(注葉里)라는 속칭이 있다. 율악 부곡(栗岳部曲) 고봉현에 있다. 군 서쪽 12리 거리이다. 장사향(長史鄕) 군 동쪽 10리 지점 건지산 밑에 있다. 파을곶소(巴乙串所) 행주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건자산 밑에 있다.
【인물】 고려 기홍수(奇洪壽) 행주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썼고, 문장에 능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무반(武班)을 좇아서, 벼슬이 특진벽상 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特進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郞)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의(景懿)이다. 기수전(奇守全)ㆍ기자오(奇子敖)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꾸민 이후로 권신(權臣)이 잇달았으나, 자오는 조용하게 도리로써 끝까지 왕실(王室)을 보좌하여, 옛 왕업을 잃지 않게 하였다. 막내딸이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제2왕후가 되어,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으므로 원 나라에서 자오에게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으로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였다.
본조 기건(奇虔) 청렴하고 조촐하여 현달(顯達)하였다. 벼슬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우거】 본조 신효(申曉)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사간원 정언으로서 파직되었다. 시골에 돌아가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하였다.
【효자】 본조 배철중(裵鐵重) 호군 형효(護軍亨孝)의 아들이다. 어미 이씨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철중이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먹였더니, 어머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열녀】 본조 석금(石金) 고을 아전 식배(植倍)의 아내이다. 노산군(魯山君) 때에 식배는 역당(逆黨)에 연좌되어서 사형되었다. 석금이 6일 동안이나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면서, “나는 예(例)에 의하여 먼 지방에 유배될 것이며, 반드시 데리고 가는 자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드디어 목 매어 죽었다. 신씨(申氏) 참판 송영(宋瑛)의 아내다. 영이 죽자 3년 동안 여묘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복을 마치고도 조석 전(奠)을 생시와 똑 같이 하였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행주(幸州) 서남쪽으로 30리 강변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의 개백(皆伯)이다. 문주왕(文主王) 원년에 고구려가 취하여 왕봉(王逢)으로 고치고, 뒤에 신라로 돌아가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우왕(遇王)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행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양주(楊州)에 속했다가 본조 초에 이에 속하게 되었다. ○ 읍호는 덕양(德陽)이며 고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부원(富原) 남쪽으로 50리에 있으며, 한성부조에 자세하다.
【성지】 고봉고성(高峯古城) 옛 현 북쪽에 있다. 행주고성(幸州古城) 옛 현 남쪽에 있다. 고토성(古土城) 사포면(蛇浦面) 들판 가운데에 남은 터가 있다.
【봉수】 해포(醢浦)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역참】 혁폐ㆍ행주역(幸州驛)ㆍ벽제참(碧蹄站).
【방면】 원당(元堂)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리이다. 구이동(九耳洞)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사리대(沙里垈)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하도(下道)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구지도(求知道)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중면(中面)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사포(蛇浦)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산(松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른쪽으로 5면이 모두 국변을 연해서 들이 있다.
【혁폐】 황조향(荒調鄕) 서쪽으로 35리에 있는데, 지금 주엽리(注葉里)이다. 본래는 원평(元平)에 속했었으나, 본조 태조 3년에 여기에 속하게 된 것이다. 장사향(長史鄕)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율악 부곡(栗岳部曲) 서쪽으로 22리, 고봉(高峯) 근처의 땅이다. 건자산소(巾子山所) 서남쪽으로 20리인데, 별아산(別阿山)이라 부른다.
【진도】 행주진(幸州津) 양천(陽川) 공암진(孔巖津)과 마주 있다. 임의진(壬意津) 서쪽으로 35리이며, 김포(金浦) 간로(簡路)와 통한다.
【사원】 문봉서원(文峯書院) 숙종 무진년에 건립하여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민순(閔純) 개성편에 보인다. 남효온(南孝溫) 자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며, 의령(宜寧)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정국(金正國) 장단(長湍)편에 보인다. 기준(奇遵)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인데 행주(幸州) 사람이다. 중종 신사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전한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정지운(鄭之雲)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며, 경주 사람인데,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의 소유자였다. 홍이상(洪履祥)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며, 풍산(豐山)사람이다. 벼슬은 대사헌 증 영의정(大司憲贈領議政)이었다. 이신의(李愼儀) 자는 경측(景則), 호는 석탄(石灘)이며, 금의(金義)사람이다. 벼슬은 □조 참판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이다. 이유겸(李有謙)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懷)이며, 우봉(牛峯)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참의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기공사(紀功祠) 순조(純祖) 신축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권율(權慄) 자는 언신(彦愼)이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판서 도원수 영가부원군(戶曹判書都元帥永嘉府院君)이었으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능침】 희릉(禧陵) 원당리에 있으며, 중종비(中宗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으로 기신은 3월 2일이다. 초장(初葬)은 헌릉(獻陵)의 오른쪽 언덕에 했었는데, 중종 무자년에 이 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 직장(直長)과 참봉이 각 1인. 효릉(孝陵) 희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종 대왕의 능이다. 기신은 7월 1일이고,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를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7월 29일이다. ○ 별첨(別添) 참봉이 1인. 명릉(明陵) 경릉(敬陵)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대왕의 능이다. 기신은 6월 8일이고,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도 합장하였다. 기신은 8월 4일이다. ○ 별첨 참봉이 1인. 익릉(翼陵) 경릉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능이다. 기신은 10월 26일이다. ○ 영(令)ㆍ참봉이 1인. 홍릉(弘陵) 창릉(昌陵) 왼쪽 언덕에 있으며,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능인데, 기신은 2월 15일이다. ○ 영ㆍ참봉이 1인. 순회묘(順懷墓) 경릉의 왼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조(明宗朝) 순회세자의 묘이다. 기신은 9월 26일이고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기신은 2월 3일이다. ○ 수위관(守衛官)이 2인. 소현묘(昭顯墓) 효릉(孝陵)의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 조의 소현세자의 묘이다. 기신은 4월 26일이다. ○ 수위관이 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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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쪽으로 연천현 경계까지 34리이며, 남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16리이고, 같은 현 경계까지 20리이다. 북쪽으로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경계까지 39리인데, 서울과는 1백 40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양골현(梁骨縣)인데, 신라에서 동음(洞陰)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뒤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승격하여, 영흥 현령(永興縣令)을 두었고, 본조 태조 3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동음ㆍ양골ㆍ영흥.
【성씨】 본현 신(申)ㆍ영(英)ㆍ전(田)ㆍ강(康)ㆍ연(燕)ㆍ마(麻)ㆍ박ㆍ윤. 모두 속성(續姓)이다. 유석(乳石) 서ㆍ임(任)ㆍ하(何)ㆍ윤.
【형승】 천층 산은 북쪽에 우뚝하고, 한 줄기 물은 남으로 흐른다. 성임(成任)의 시에, “천층 산은 북쪽에 우뚝하고, 한 줄기 물은 남쪽으로 흐른다.” 하였다.
【산천】 백운산(白雲山) 현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혜재산(惠才山)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수일산(水日山)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금동산(金銅山)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보장산(寶藏山)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장산(金藏山)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관음산(觀音山)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청계산(靑溪山)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자등산(慈燈山) 현 동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풍류암(風流巖) 현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살여울[箭灘]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포천 경계에서 나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한다. 곧은 여울[直灘]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곧 철원 체천(砌川) 하류이다. 마흘천(磨訖川) 현 서쪽 35리 지점인 연천 경계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와서, 두기진(頭耆津)에 들어간다. 유리연(流里淵)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동철(銅鐵) 수일산에서 생산된다. 주철[水鐵] 현 북쪽 금동(金洞)에서 난다. 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ㆍ오미자ㆍ산개(山芥)ㆍ신감채(辛甘菜)ㆍ벌꿀.
【봉수】 며로곡 봉수(㫆老谷烽燧)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강원도 철원부 적골산(適骨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포천현 독산(禿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양문역(梁文驛) 현 동쪽 9리 지점에 있다. 항간(巷間)에서 독흘(獨訖)이라 부르는데, 양골(梁骨)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불우】 백운사(白雲寺) 백운산에 있다. 원통사(圓通寺) 청계산에 있다. 보장사(寶藏寺) 보장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동쪽 1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이정녕 묘(李正寧墓) 현 남쪽 10리 지점 추동(楸洞)에 있다.
【고적】 유석향(乳石鄕)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용곡소(龍谷所)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석성(古石城) 둘이 있다. 하나는 현 동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리이고, 하나는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2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무너져 없어졌다.
【제영】 찬봉돌올의도삭(攢峯突兀疑刀削) 정흠지(鄭欽之)의 시에, “모인 봉우리 우뚝하여 칼로 깎은 듯 의심되고, 떨어지는 잎사귀 어지러워 가위로 마름질하는 듯하다. 호구는 해마다 증가하고 전야도 넓어지니, 성조(聖朝)는 원래 어진 인재를 등용했음이다.” 하였다. 현소민무송(縣小民無訟) 성임의 시에, “고을이 작아서 송사하는 백성이 없고, 전지가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 든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10년에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포천현(抱川縣)을 여기에 옮겨 함께 설치하였다. 경기 감영을 본부(本府)에서는 신영(新營)이라 불렀다. 인조 원년에 파했다 포천에 다시 현령(縣令)을 두기를 원하였다. 헌종조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 양주진관의 병마동첨제절사를 겸하였다. 1명이다.
【성지】 고성(古城) 동쪽으로 12리에 있으며, 둘레는 1리가 넘는다. 고성(古城)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둘레는 2리가 넘는다.
【봉수】 적골산(適骨山)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방면】 읍내면 끝이 10리이다. 일동(一東)면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동면 처음이 20리, 끝이 70리이다. 남면 처음이 70리, 끝이 15리이다. 서면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 한편으로 본래 조량면(助良面)ㆍ주지면(注之面)ㆍ상리면(上里面)ㆍ하리면(下里面)ㆍ서남면(西南面)ㆍ당효면(當孝面)이 있다. 부석향(浮石鄕)면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용곡소(龍谷所)면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오른쪽으로 두 곳을 폐하였다.
【사원】 옥병서원(玉屛書院) 효종 무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박순(朴淳) 개성 편에 보인다. 이의건(李義健) 광주(廣州)편에 보인다. 김수항(金守恒) 양주 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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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가평현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 양주 경계가지 30리이며, 남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36리이며, 북쪽으로 영평현 경계까지 26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마홀현(馬忽縣)인데 일명 명지(命旨)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견성군(堅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천(抱川)이라 고쳤다. 성종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파하였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감무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고쳐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마홀(馬忽)ㆍ명지(命旨)ㆍ견성ㆍ포천ㆍ청화(淸化).
【성씨】 본현 노ㆍ유(兪)ㆍ현ㆍ백(柏)ㆍ박ㆍ방(房)ㆍ전(田)ㆍ김ㆍ윤 내성(來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운악산(雲岳山)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해룡산(海龍山)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산 위에 감지(鑑池)가 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속설에 전해 오기로는, “군마(軍馬)가 산 위를 짓밟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구름이라도 낀다.” 하였다. 왕방산(王方山) 해룡산 남쪽에 있다. 수원산(水源山)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현등산(縣燈山)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항적산(香積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무둔산(無芚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계류산(界流山)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불정산(佛頂山)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현 서쪽 21리 지점에 있다. 심곡산(深谷山)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엽산(注葉山)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재벽동(滓甓洞)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우리 태조 잠저(潛邸) 때에 전장(田莊)이 여기에 있었다. 고교천(高橋川)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현 남쪽 축석현(祝石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수원산에서 나온다. 합류하여서 이 냇물이 되고, 영평현 경계로 흘러든다.
【토산】 사기그릇[沙器]ㆍ벌꿀ㆍ산개(山芥)ㆍ신감채ㆍ송이. 『신증』 녹반(綠礬) 현 남쪽 안양사에서 난다.
【봉수】 독산 봉수(禿山烽燧)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영평현 미로곡에 응하고, 남쪽으로 잉읍점(仍邑岾)에 응한다. 잉읍점 봉수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독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양주 대이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안기역(安奇驛) 현 북쪽 4리 지점에 있다. 『신증』성현(成俔)의 중수기에, “삼가 상고하니, 선철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일을 가리지 않고 그 직책을 편하게 여기는 것은 큰 충성이다.’ 하였는데, 훌륭한 말이다. 신하 된 자가 몸을 국가에 맡겼으면, 각자 그 직책을 책임져서 상황에 따라 그 힘을 다해야 한다. 혹 벼슬이 작다하여, ‘족히 직책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하거나, 미관(微官)이라 하여, ‘깊이 염려할 것 없다.’ 하여, 편하게 놀면서 세월을 보내며, 구차하게 임기까지만 그렁저렁 지내어, 꾀하는 바가 자신을 위한 꾀이고 국가를 위한 계책이 아니라면, 비록 이름은 사판(仕版)에 올라도 실상 나라의 죄인이다. 지금 외방에 있는 관원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정사를 시행하는 자를 수령이라 하고, 역우(驛郵)를 설치하여 순검(巡檢)하는 자를 찰방이라 한다. 목민자(牧民者)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통할하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에 그 세력이 중하고, 역우를 관장하는 자는 다만 말만 맡은 까닭으로 그 세력이 가볍다. 비록 현감과 품계는 같다 하더라도 내리어 9품 승(丞)과 임무가 같은 까닭에 사람이 업신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 그러니 깊이 염려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은, 그 형세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안기(安奇)는 포천현에 속한 역으로서 고을 안에 있으며, 서울과 거리는 백 리쯤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유숙한다. 그러나 사신들의 큰 행차는 모두 고을에 들어가고, 여기에 우접하는 자는 모두 사사롭게 여행하는 자들이고 잡스런 빈객들이므로, 관장하는 자는 오직 눈앞에 닥쳐온 급무에만 힘쓴다. 까닭에 이 역이 여러 번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았다. 신축년 봄에 내가 채기지(蔡耆之)와 함께 지달산에 가면서 저물녘에 이 역에 와서 냇가에서 저녁밥을 먹고, 밤에 여관에 드니, 집이 기울어져서 사람을 용접할 수 없고, 마판도 무너져서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전에게 물으니, ‘아, 읍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읍에 가는 자는 귀한 신분이고, 역에 모여 오는 자는 낮은 신분입니다. 오직 귀한 분의 꾸지람을 면하고자 할 뿐이지, 낮은 자의 폐를 돌아보겠습니까. 그러하기를 신축년에서 신유년까지 무릇 20년입니다. 그러면 신축년 이전이 또 몇 10년인지 모르거니와, 고쳐 지어서 새롭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이번에 비로소 윤후(尹侯)를 얻었습니다. 윤지(尹漬) 후는 군자이며, 대대로 선비 집안이다. 그 관직을 더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그 힘을 다해서 이미 평구역(平丘驛)을 새롭게 했으며, 또 양문(梁文)을 새롭게 하고, 지금에 또 나머지 힘을 빌려서 이 역을 새롭게 하기를 경영하니, 그 공이 보통보다 뛰어남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에도 없습니다.’ 한다. 이에 후의 덕을 찬미하기를, ‘우(郵)의 관사(館舍)에 있어서 물가에 임했다. 예전에는 비오면 빠졌는데, 지금은 집이 날 듯하네. 깎고 새긴 것이 합당하여 장대하고 아름답다. 한갓 보기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오는 손님이 돌아가기 잊었네. 우에 역 있는 것은 왕명을 전하려는 것이다. 만약에 말이 병들면, 그 정사에 알맞지 못한다. 후가 능히 길러서 모두 생명을 이루게 하였네. 이 마판에 말이 많아서 구름같이 성하도다.” 하고, 찬을 마치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후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실덕을 읊은 것이다. 이제 현양(顯揚)하여서 빛나게 하지 않으면, 후의 덕이 민멸하여서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때문에 말을 기록하여 벽에 달아서 후일 찰방되어 와서 이 직을 계승하는 자에게 후의 덕을 본받게 하노라.” 하였다. 벽탄석원(碧呑石院) 현 남쪽 32리 지점에 있다. 공덕원(功德院)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수원사(水源寺) 수원산에 있다. 안양사(安養寺)ㆍ향적사(香積寺) 아울러 향적산에 있다. 해룡사(海龍寺) 해룡산 감지 곁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주엽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성산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김질 묘(金礩墓)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성석린 묘(成石磷墓) 현 서쪽에 있다.
【고적】 쌍곡역 옛터는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수암소(垂巖所)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산 고성(城山古城) 석축이다. 둘레 1천 9백 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열녀】 본조 김씨 상낙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의 손녀로서, 사성(司成) 홍의달(洪義達)에게 시집갔다. 홍이 죽고 자식이 없었으나, 상사(喪事)에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복을 마친 뒤에도 아침 저녁의 전(奠)을 생시와 꼭 같이 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10년에 영평과 합하였다가 인조 원년에 다시 갈랐다.
【읍호】 청화(淸化)읍 고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관원】 현감 양주진관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1명이다.
【성지】 고성 북쪽으로 1리에 성산(城山) 사방이 험악한 데에 고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37척, 우물이 두 개 있다. 광해주 10년 영평에 감영을 설치하여 이 성을 수축하고, 중군(中軍)을 두었다가 인조 원년에 혁파하였다.
【방면】 읍내면 끝이 10리이다. 가산(加山)면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내동(內洞)면 동남쪽으로 처음 15리, 끝이 30리이다. 동촌(東村)면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청량(淸涼)면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흘산(所吃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서면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내북(內北)면 동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외북면 서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 수암소(垂岩所)면 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사원】 화산서원(花山書院) 인조 을해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항복(李恒福)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인데 경주 사람이다. 광해주 무오년에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으나, 북청(北靑)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영의정 오성부원군 전문형(領議政鰲城府院君典文衡)이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용연서원(龍淵書院) 숙종 신미년에 세웠으며,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이덕형(李德馨) 자는 명숙(明肅), 호는 한음(漢陰)인데, 광주(廣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이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조경(趙絅)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州)인데, 한양(漢陽) 사람이다. 벼슬은 판중추 전문형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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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31리이며, 서쪽으로 장단부 경계까지 8리이고, 파주 경계까지는 8리이다. 북쪽으로는 장단부 경계까지 20리인데, 서울과는 1백 8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중성(重城)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장단현에 예속시켰다. 문종 17년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이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칠중성ㆍ중성ㆍ내별.
【성씨】 본현 유(劉)ㆍ신(申)ㆍ김ㆍ노ㆍ최ㆍ현(玄)ㆍ조(趙)ㆍ서ㆍ양(梁).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동쪽으로 감악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을 눌렀다 김반(金泮)이 지은 〈혜민당기(惠民堂記)〉에,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설마현(雪馬峴)을 넘어 수십 리 지점에 적성현이 있는데, 동쪽으로 감악 높은 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부 큰 강을 눌렀다. 지역이 가장 궁벽하고 좁아서 백성의 삶이 가난하였다.” 하였다.
【산천】 감악산(紺岳山)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 고려 임춘(林椿)의 시에, “조물은 어린아이라, 참으로 희롱하기를 좋아하네. 모래를 모아 많은 봉우리를 만들었구나. 이 산이 머리에서 끝까지 여러 고을을 걸터앉아, 하늘 밖에 날 듯한 것이 춤추는 봉새 같구나. 내 일찍이 산하와 연분 없음의 한탄이여, 지팡이를 버티고 유람하는 것 오래 못하였다. 그윽함을 찾고 기이함을 골라냄은 지금부터 하리라. 한가한 사람과 함께 빠른 말 달리어 딸깍딸깍 길을 걸으며, 원숭이와 앞 다투고 당기고 붙들매, 비로소 옷 무거운 줄 알겠다. 옥실(玉室)과 금당(金堂)은 한사(漢士) 같구나. 가만히 오악(五岳)과 통해서 그윽한 골이 있네. 도인(道人)의 안력(眼力)이 하늘 교묘함을 엿보고, 바위에 걸쳐 집 지어서 다락이 솟아난 듯. 내가 와서 나이를 물으니, 웃으며 대답 않고, 여상(藜床)에 오뚝 앉아 맞이하거나 전송하지 않는다. 집 밑에 흐르는 샘물 맑아서 마실 만한데, 처음 맛보니 차가 와서 이가 어는 듯하다. 영지(靈芝)는 흰 구름 피는 둔덕에 나고, 늙은 잣나무는 돌 틈에 자란다. 새벽 바람이 눈을 몰아 나무 가지에 지네. 아찔한 두 눈동자는 구르는 수은 같다. 헌함에 임해서 한 번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바라보니, 가슴 속에 운몽택(雲夢澤)이 아홉이로구나. 이 사이에 내 시(詩)가 없어서야 될쏜가. 하물며 연하풍경(煙霞風景)이 나의 읊조림을 돕는 데에랴. 인생 만사는 머리 한 번 돌리는 동안에 바뀌는 것, 숨을 터 잡아 고고하게 삶 누가 함께하리. 집이 없어도 처노(妻孥) 나무람 겁날 것은 없지만, 즐거움을 행하는 데에 어찌 반드시 기생 따르랴. 만약 돌아와서 한구렁을 오로지 하겠다면, 다른 해 이 지역에 뗏집을 지으리라.” 하였다.
용두산(龍頭山) 현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4면으로 돌이 깎아 지른 듯하고, 둘레는 1리이다. 높이는 50보(步)이며, 위에 40여 인이 앉을만하다.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설마령(雪馬嶺)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마동(所磨洞) 현 남쪽 5리쯤에 있다. 청학동(靑鶴洞) 설마령 밑에 있다. 두지진(頭只津)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장단부 임진도(長湍府臨津渡)에 자세하다.
구연강(仇淵江) 현 동쪽 9리 지점에 있다. 『신증』 권우(權遇)의 시에, “몇 번이나 서로 생각했던가, 지금에야 돌아옴 기꺼워라. 맑은 강 한 굽이 둘러 있고, 여러 멧부리 사방으로 에워쌌다. 언덕을 격해 배불러 건너고, 마을 찾아 길 물으니 희미하구나. 아이들 나오는 줄 알고 서로 끌며 사립문에 나서더라.” ○ “옛날에 한 차례 놀던 이 지역, 산은 깊고 초목은 무성하구나. 깨끗한 시냇물 가면서 찾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쉰다. 멀리 봐도 인적은 보이지 않더니, 곁을 보니 모두가 사슴들 놀이터이네. 지금 와서 치우치게 기뻐하는 건, 채(寨) 안에서 농사하기에 족하구나.” ○ “서늘한 강가에 초정(草亭)이 하나, 눈앞 경치는 형용하기 어렵다. 바람이 살짝 부니 물결이 일고, 안개가 날아가니 비가 오려나. 푸른 산은 겹겹으로 돌벽을 임했고, 백조(白鳥)는 쌍으로 모래에 내린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와서 봉양을 편히 하매, 내 지금 문안함을 다행히 여기시네.” ○ “앞에는 맑은 강 뒤에는 산, 한 구역 형승(形勝)을 하늘이 숨겨뒀던 곳, 꼬불꼬불 작은 길 밭고랑 복판, 보일락말락 빈다락 수목 사이네. 동산에 가득한 토란ㆍ밤 맛이 멋지고, 곳마다 풍경은 볼만도 하다. 진세(塵世)에 끌렸던 일 한스러워라. 어찌하면 이 지역에서 한가히 놀까.” 하였다. 용지(龍池) 감악산 서쪽 꼭대기에 있는데, 가물어도 장마가 져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고,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휴근도(朽斤渡) 현 동쪽 17리 지점에 있다. 『신증』 차력산(硨礫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 오지그릇[陶器]ㆍ적토(赤土)ㆍ벌꿀ㆍ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ㆍ산무애뱀[白花蛇].
【궁실】 객관 서거정의 기(記)에,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 적에 여러 번이나 개성ㆍ양주 양부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래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편벽되고 민물(民物)이 잔약하여 요역(徭役)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죄다 걱정하였다. 고려 말에 죄신(罪臣) 임치(林緻)의 집을 몰수하여, 고을로 만들어 옮겼다. 태수(太守) 한옹(韓雍)이 관청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사군(使君) 이명성(李明誠)ㆍ박흥군(朴興君)ㆍ박하신(朴河信)이 잇달아 지어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비좁았고 세월이 오래 됨으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졌다. 뒤에 원으로 오는 자가 그대로 했을 뿐이고 수리하지 않았다. 정통(正統) 기원 10년 을축년에 견성(甄城)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와서 정사에 임하면서, 1년이 채 못 되어 정사가 정리되고 폐단이 없어졌다. 이에 민중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대저 관사라는 것은 빈객을 받들고 관부(官府)의 위의를 엄하게 하는 곳이거늘, 이제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수령이 되어서 그 직책에 마땅하지 못할까 크게 두려워 엎어지고 넘어진 것을 그냥 보기만 하고, 걱정을 뒤에 오는 원에게 남기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철거하여 일신하게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니, 뭇사람이, ‘모두 명에 따르겠다.’ 하였다. 후가 이에 감사에게 보고하여 나라에 알려서 윤허를 얻었다. 후가 녹봉을 내어서 쓰임새에 밑천으로 하고 또 백성으로서 품 팔려는 자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공인(工人)과 재목을 모아서 옛터에다가 제도를 보태기도 줄이기도 하였다. 남북으로 대청 세 칸을 각각 세웠는데, 크고 넓으며 모두 앞뒤로 달아내어서 동쪽 곁에는 온돌방이 있고, 또 넓혀서 마루를 만들었다. 남쪽으로 긴 골마루를 만들었고, 복판은 마루이다. 창고와 행랑이 총 약간 칸이라, 모두 단청을 칠했는데, 옛날에 빠졌던 것이 지금은 완전하다. 썩은 것을 갈아서 견고하게 하고, 기울어진 것을 바꿔서 바로 세우며,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낮은 것을 높게 하였다. 보는 자가 장하게 여기고, 사신과 빈객으로서 이 고을을 지나는 자도 또한 후의 훌륭한 치적을 알았다. 금년 가을에 임기가 차서 임금이 불러 가려 하니, 그 고을 부로(父老)가 만류하고자 하여도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글을 지어서 그 사람이 간 뒤에 사모하는 듯을 표시하기를 원하고, 드디어 나에게 기문하기를 청하였다. 거정은 후의 친속이다. 평소부터 후의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에 탄복하였거니와, 지금 또 고을 사람에게 물었다. 후가 적성에 정사한 지가 6년이 되었으나, 백성의 애모하는 마음이 하루 같고 또 수십 년이나 황폐했던 관사를 수리하였으니, 백성에게 폐단이 미쳤을까 의심되나, 일 전이라도 백성들에게 징수한 것이 없었고, 노역이 농군(農軍)에게 미치지 않았다 하니, 또한 어렵지 않은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도로써 백성을 시키면 백성이 비록 수고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물며, 수고시키지도 않은 것이랴. 후의 다스리는 재주 있음을 내가 더욱 알게 되었다. 아, 짓는 어려움보다 중수하는 것이 더 어렵다. 지금 후의 이번 거조는 또한 그 어려운 것을 겸했다 할 수 있다. 대저 앞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은 뒷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후를 이어 오는 자도 능히 후의 애쓴 것을 저버리지 않으면, 적성의 관사는 전일과 같이 염려하지 않을 것이며, 적성 백성도 또한 그 덕을 입을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희(俶喜)인데, 세족(世族)의 주손(冑孫)이다.” 하였다.
『신증』 안침(安琛)의 시에, “그림같은 산 끝이 없고, 물빛은 똑같이 푸르기도 하다. 천석(泉石)을 좋아하는 병 고칠 수 없어, 오가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하였다. ○ “마음은 화악(華岳) 밖에 머물렀고, 집은 죽계(竹溪) 가에 있노라. 시름하느라 살쩍이 희어졌는데, 전원에 가고파도 벌서 틀렸다.” 하였다. 혜민당(惠民黨) 현 서헌(西軒)이다.
【학교】 향교 현 서쪽에 있다.
【역원】 상수역(湘水驛)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 김수온의 시에, “싫증나는 벼슬살이 남북(南北) 길 멀다. 옛 역에 사람 없고 국화만 폈다. 헌함에 기대 누우니 가을 저문데, 회암산(檜巖山) 빛이 울창도 하다.” 하였다. 단조역(丹棗驛) 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불우】 감악사(紺岳寺) 감악산에 있다. ○ 고려 황빈연(黃彬然)이 과거하기 전에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동각(東閣) 김신윤(金莘尹)이 술에 취해서 미친 말을 하다가, 권신에게 미움을 받고 도보로 감악에 들어와서 스스로 늙은 병졸이라 하며 기숙하기를 청하였다. 빈연이 그가 늙었고 또 곤궁함을 민망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다. 종일토록 형상 아래에 있으면서 말 한 마디 없다가, 우연히 부젓가락을 잡고 재를 모아서 글자 모양을 만들었다. 좌중(座中)에서 모두, “저 늙은이가 문자를 제법 안다.”고 지목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신윤의 아들 온기(蘊琦)가 이미 과거에 올라 아비를 찾아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니, 빈연이 땅에 엎드려서 사과하였다. 신윤은 웃으면서, “범수(苑雎)가 이미 진(秦) 나라 정승이 된 줄을 궁한 늙은이가 어찌 알리요.” 하고, 서로 더불어 북쪽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밑 돌에 앉아서 함께 술 마시며 한껏 즐거워하였다. 송풍(松風)을 제목으로 하여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빈연은, “원숭이 휘파람 소리 끊어졌다 다시 들리고, 학의 충천하는 기운 우뚝하게 날개치는구나. 깜장 원숭이 휘파람 불어 보내고, 흰 학 충천하는 기운 드날린다.” 하였고, 동각은, “날 추우니 학이 잠들기 어렵고, 중이 선정(禪定)에 드니, 귀머거리 같다.” 하였다. 빈연이 머리를 조아리며 수업(授業)하기를 원하였다. 두어달 머물러서 《전한서(前漢書)》를 다 읽고 돌아왔다. 운계사(雲溪寺)ㆍ신암사(神巖寺) 둘 다 감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감악사(紺岳祠) 항간에 전해 오기는, “신라에서 당 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산신(山神)으로 삼았다.” 한다. 본조에서도 명산으로 중사(中祀)에 기재하고, 봄 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한다. ○ 고려 현종 5년에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감악사에서 정기(旌旗)와 군사가 없는 듯하므로, 거란 군사가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앞으로 가지 못하였다 한다. 또 충렬왕이 장차 원 나라에 가서 황제를 도와 내안(乃顔)을 토벌할 참인데, 신(神)을 제2로 봉해서 도만호(都萬戶)로 삼았으니, 대개 신이 가만히 돕는 공을 바란 것이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이견기 묘(李堅基墓)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권홍 묘(權弘墓)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고적】 토탄 고성(吐呑古城) 일명 성산(城山)이다.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9백 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미성(阿未城) 현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고, 둘레는 1천 9백 37 척이다. 수철성(水鐵城)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적암향(赤巖鄕)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 신라 필부(匹夫) 무열왕 때 현령이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와서 포위하였으나 필부는 20여 일을 버티면서 싸웠다. 마침내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려 하였는데, 대나마(大奈麻) 북삽(北歃)이란 자가 가만히 사람을 보내서 성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전력이 궁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하여 고구려 군사가 다시 공격하였는데, 필부는 북삽의 머리를 베어서 성밖에 던졌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번 호통하니 앓던 자도 모두 일어났다. 본숙(本宿)ㆍ모지(謨支)ㆍ미제(美濟) 등과 함께 적을 막아 싸웠다. 화살이 필부에게 집중하여서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서 죽었다. 왕이 통곡하고 급창(級滄) 벼슬을 추증하였다.
『신증』 본조 김세우(金世愚)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효자】 고려 정빈(鄭贇) 효행이 있어 정려하였다.
【제영】 야단수성미(野斷水成湄) 권제의 시에, “산이 높으니 구름이 멧부리에서 나오고 들이 끝난 곳이 물가로 되었다.” 하였다. 감악부천반(紺岳浮天半) 함부림의 시에, “감악이 반공에 떴고, 암성(巖城)은 물가에 임했다.” 하였다. 중산환소읍(衆山環小邑) 권람(權擥)의 시에, “여러 산은 작은 읍을 둘렀고, 구부러진 길은 강가를 굽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마전(麻田)에 속했다가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지치[紫草]ㆍ꿀[蜂蜜]이 생산된다.
【방면】 현내면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서면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남면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북면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적암향(赤巖鄕)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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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6리이고, 고양군 경계까지는 26리이다.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 풍덕군 경계까지는 9리이다. 북쪽으로 장단부 경계까지 25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9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천정구현(泉井口縣)이다 일명 굴화군(屈火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며, 한양 속현이었던 심악(深岳)과 부평의 속향(屬鄕)이었던 석천을 내속시켰다. 태종 14년에 석천은 원평부(原平府)에 예속시키고, 심악은 고양현에 예속시켰는데, 뒤에 다시 예속시켜서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선성(宣城)ㆍ천정구(泉井口)ㆍ굴화(屈火)ㆍ원정(原井).
【성씨】 본현 노ㆍ김ㆍ이ㆍ옥(玉)ㆍ박ㆍ윤ㆍ전(田) 내성(來姓)이다. 심악 이ㆍ박ㆍ전(全). 석천 야(夜)ㆍ염(廉)ㆍ차ㆍ호(扈).
【산천】 검단산(黔丹山)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심악산(深岳山) 현 남쪽 21리 지점에 있고 심악현이다. 와동산(瓦洞山) 현 동남쪽 15리이다. 오도성산(烏島城山)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한록산(漢麓山)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옛 석성(石城) 터가 있는데, 둘레가 1리쯤이다. 약산(藥山)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탄포(炭浦)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낙하(洛河) 하류이다. 금척진(金尺津)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도봉산에서 나와서 장관포에 들어간다. 일미도(一眉島)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물이 불으면 잠긴다. 심악강(深岳江) 심악산 서쪽에 있다. 낙하도(洛河渡) 현 북쪽 26리 지점에 있는데, 임진 하류이다. ○ 권람의 시에, “가을 바람에 외로운 객이 서쪽으로 가니, 장마 비 처음 개고 길바닥 물도 맑다. 말 한 마리, 동자(童子) 하나라고 관리(關吏)가 웃으나, 다른 해에는 집버린 사람이라고 응당 말하리라.” 하였다. 장관진(長串津)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금척진 하류이다. 율포지(栗浦池)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토산】 숭어ㆍ웅어ㆍ붕어ㆍ게.
【봉수】 검단산 봉수(黔丹山烽燧) 서쪽으로 풍덕군 덕적산을 응하고, 남쪽으로 고양군 고봉성산을 응한다.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냉정원(冷井院)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낙하원(洛河院) 낙하도 언덕에 있다.
【불우】 검단사(黔丹寺) 검단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오도성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윤번 묘(尹璠墓)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황희 묘(黃喜墓)ㆍ황수신 묘(黃守身墓) 둘 다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박중손 묘(朴仲孫墓) 탄포 오고미리(炭浦烏古美里)에 있다. 윤사흔 묘(尹士昕墓) 현 남쪽 15리 와동(瓦洞)에 있다. 조온 묘(趙溫墓) 현 남쪽 7리 남촌(南村)에 있다.
【고적】 심악 폐현(深岳廢縣)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예전 보신향(寶薪鄕)이다. 고려 현종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한양에 예속시켰으며, 본조 태조 3년에 본현에 내속시켰다. 석천향(石淺鄕)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성 산성(烏島城山城) 석축이고 둘레는 2천 71척이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여기에서 합류된다.
【인물】 본조 노한(盧閈)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노사신(盧思愼) 노한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고,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학식이 넓고, 글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신증』 노공필(盧公弼) 노사신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교성군(交成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제영】 창해여파접현문(滄海餘波接縣門) 박연(朴堧)의 시에, “푸른 바다의 남은 물결은 고을 문에 닿았고, 화사한 봉우리의 푸르름은 붉은 구름에 비친다. 온 마을이 뽕밭이라, 다른 일이 없어 우리 님께 푸른 비단 드리고자 하네.” 하였다. 화악삼봉대현문(華岳三峯對縣門) 이적(李迹)의 시에, “화악 세 봉우리는 고을 문과 마주대하고, 무심히 하얗게 구름이 머무르네. 3년 동안 나그네 신세 크고 작은 한은 어버이 생각 아니면 님 생각이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파주(坡州)로 넣었다가 다시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조 7년에 장릉(長陵)으로 읍치(邑治)를 옮겼다 치소를 지금의 치소인 동쪽으로 5리 금성리(金星里)로 옮겼다. 후에 치소를 또 장명산(長命山) 동쪽으로 옮겼다. 승군(陞郡) 읍호 선성(宣城)ㆍ원정(原井).
【관원】 군수(郡守) 양주진관(楊州鎭管)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1인.
【방면】 현내(縣內)면 서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아동(衙東)면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탄포(炭浦)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신오리(新五里) 위와 같다. 와동(瓦洞)면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지석(支石)면 본래 석천향(石淺鄕)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청암(靑巖)면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2리이다. 석관(石串)면 서남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3리이다.
【사원】 신곡서원(新谷書院) 숙종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윤선거(尹宣擧) 자는 길보(吉甫), 호는 노서(魯西)인데, 파평 사람으로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벼슬은 집의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능침】 장릉(長陵) 서북쪽으로 10리, 약산(藥山)의 동쪽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80리이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능이며, 기일은 5월 8일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를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12월 9일 이다. 능이 처음에는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영종 7년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 영ㆍ참봉이 각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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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강원도 춘천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양근군(楊根郡)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79리이고, 북쪽으로 영평현 경계까지 54리인데, 서울과는 1백 3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근평군(斤平郡)이다 일명 병평(竝平)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가(加)를 가(嘉)라 한 데도 있다. 고려 현종 9년에 춘주(春州)에 예속시켰고, 본조 태조 5년에 감무를 두었다. 태종 13년에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고 강원도에서 옮겨 본도에 이속시켰다.
【속현】 조종현(朝宗縣) 현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심천현(深川縣)인데 일명 복사매(伏斯買)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준천(浚川)이라 고쳐서 가평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조에 가평과 함께 춘주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조 때에 가평 감무를 설치 하면서 이 현을 다시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정덕(正德) 정묘년에 현의 구역 안에 지금 임금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는 것으로써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 1인.
【군명】 근평(斤平)ㆍ가평(嘉平)ㆍ병평.
【성씨】 본현 장(張)ㆍ탁(卓)ㆍ간(簡)ㆍ박 속. 조종 현(玄)ㆍ호(胡)ㆍ이ㆍ형(刑) 일명 형(邢)이라 하기도 한다. 박ㆍ김ㆍ한 내성(來姓)이다.
【산천】 화악산(花岳山)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운악산(雲岳山)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청평산(淸平山) 현 동쪽 춘천 경계에 있다. 가주지산(加注之山) 현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소의산(所衣山) 현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비랑산(非郞山) 현 서쪽 43리 지점에 있다. 은두정산(銀頭頂山) 현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청송산(靑松山) 현 서쪽 25리 지점에 있다. 어리내산(於里內山) 현 남쪽 62리 지점에 있다. 안판탄(按板灘) 현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소양강(昭陽江)에서 나온다. 문이연(汶伊淵)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입석천(立石川) 현 남쪽 43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춘천부 경계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양근군 용진도(龍津渡)에 들어간다.
【토산】 숭어ㆍ잣ㆍ황옥 황옥은 현 남쪽 적촌리(赤村里)에서 산출된다. 산개(山芥)ㆍ벌꿀ㆍ버섯ㆍ신감채(辛甘菜). 『신증』 녹반(綠攀) 군 서쪽 두모곡(豆毛谷)에서 산출한다.
【학교】 향교 현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감천역(甘泉驛)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연동역(連洞驛) 현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적율원(狄栗院)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임초원(林草院) 현 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ㆍ영통사(靈通寺)ㆍ현등사(懸燈寺)ㆍ영취암(靈聚菴)ㆍ영제암(永濟庵)ㆍ혜수암(惠壽庵) 모두 화악산에 있다. 미라암(彌羅庵)ㆍ지장암(地藏庵) 둘 다 운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하나는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조종현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화악산사(花岳山祠) 봄 가을에 본읍에서 제사한다.
【고적】 개탄소(皆呑所)ㆍ지양소(紙壤所) 둘 다 조종현에 있다.
【명환】 본조 성순조(成順祖).
【제영】 쟁영화악진기북(崢嶸華岳鎭其北) 이맹균(李孟均)의 시에, “일찍이 포천(抱川)에 가는 길에 굴파(屈坡)를 넘어서 안장(鞍裝)을 내리고 잠깐 조종(朝宗)에서 쉬었다. 어지러운 산 깊은 골을 뚫고 가는데, 한 가락 길이 꼬불꼬불 굽이고 많다. 비록 말을 꾸짖으며 걷고 건너기 어려워도, 이 고을에 이르니 마음이 이미 시원하다. 높다란 화악산이 북쪽을 누르고, 구멍에는 태고적 눈이 아직도 쌓였다. 가닥진 여러 봉우리 온 고을을 감쌌는데, 천 가지 모습 만 가지 형상이 다 기절(奇絶)하다. 시냇물이 일렁거려 햇볕도 푸르고, 그 속에는 교룡의 굴 있는가 의심된다. 사시로 아침저녁 훌륭한 경치, 그리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의 걸음은 이틀을 묵어 돌아갈 줄 몰라, 추환(蒭豢)을 즐기는 것 보다 더 즐긴다. 여기 사는 백성도 순박한 줄 알겠다. 관아의 뜰에는 송사 없어 고요하여라. 바로 명리장(名利場)을 벗어나 여기에다 살 터 잡고, 평생토록 거닐며 풍월을 즐기고 싶다. 위에 성군(聖君)이 있어 들에 남긴 어진 이 없으니, 어찌 장저(長沮)ㆍ걸익(桀溺) 같이 길이 하직하리. 내일 아침 발길을 돌려 홍진(紅塵)에 들어가면, 꿈속에서 옛길 찾느라 수고하겠지.”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20년에 춘천(春川)으로 넣었으나, 32년에 다시 본 도로 환원하여 군으로 하였다가 그해에 포천(抱川)에 속하게 하더니 잠시 후 다시 들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숙종 23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역적 영창(榮昌)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3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 1인. 양주진관(楊州鎭管)의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였다.
【토산】 인삼ㆍ오미자(五味子)가 난다.
【방면】 군내(郡內)면 끝이 20리이다. 남면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조종(朝宗)면 처음이 30리, 끝이 80리이다. 북면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서면 처음이 10리, 끝이 70리이다. 탄소(呑所)와 지양소(紙壤所)가 모두 조종현에 갖추어져 있다.
【사원】 잠곡서원(潛谷書院) 숙종 때 세웠으며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고읍】 조종(朝宗)읍 서북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의 복사매(伏斯買)이며, 심천(深川)이라고도 한다. 가평군(加平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조종이라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춘주(春州)에 소속되었다가 본조 태조 5년에 이에 속하게 되었다.
김육(金堉) 개성 편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