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나?

[김순진.]

정말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나?

1994년 5월 20일
65.3킬로그램. 요도는 아직도 아프다. 그리고 코도 찍찍거린다. 아침 일찍 담당 레지던트가 왔다. 오전에 두 가지 검사를 하고 오후에 투석을 해야 하니 바쁘게 서두르라고 하고 나간다.
“우리가 서두른다고 빨리 되나? 병원 측에서 서둘러서 해 줘야지 “
레지던트가 나간 다음 앞의 환자가 투덜거린다. 하기야 그렇다 우리는 병원 측에서 정해 주는 스케줄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같은 병원이지만 각 과마다 규칙이 다 다르고, 서로 협조가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시간을 정해 놓고 가도 대략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식사가 나왔다.
임상병리사가 검사용 혈액을 뽑아 간다 그러나 앞의 환자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창 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왜 식사를 안 하세요?”
세수를 하고 나온 아내가 앞의 환자한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직 피를 안 뽑아 갔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까 검사실에서 왔다 갔잖아요
“그냥 약물을 넣었어요.”
“그게 피를 뽑아 간 거예요.”
요즘 검사실에서는 진공 시험관에 바늘을 꽃아 피를 뽑는다. 그러니 바늘이 혈관에 꽃히는 순간 저절로 피가 뽑히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피가 보이지 않을 수가 있다. 진공 시험관이 임상병리사 손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피가 보이지 않아서 안 뽑은 줄 알았지요. 일단 약을 주사하여 피를 맑게 한 다음 뽑아 가려는 줄 알았지요.”
앞의 환자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저씨 , 그러다가는 남들이 피를 다 뽑아가도 모르겠어요.”
아내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데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피를 뽑아 갔느냐고 묻는다
“몰라요 누가 주사만 놓고 갔어요.”
앞의 환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피를 뽑아 간 줄도 몰랐던 사실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임상병리사들은 대개 말이 없는 편이다. 아침에 급히 들어와 “팔 내놓으세요” 하고 피를 뽑는다. 그때 느끼는 소외감은 환자들을 우울하게 한다. 병원의 입장에서 보면 환자도 일종의 고객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대를 받는 고객이란 환자들 뿐일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피 좀 뽑아 가겠습니다 팔을 걷어 주세요.”
이렇게 말했더라면 환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위안을 느끼겠는가. 무뚝뚝한 것은 임상병리사 뿐만이 아니다. 접수 수납에서부터 병원의 모든 종사자들은 마네킹처럼 차갑다. 그들을 대할 때마다 ‘아프지 말아야지’ 하고 절로 한숨을 짓는다
9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간호 보조원이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왔다. 그를 따라 암병동으로 갔다 검사원은 여자였다 그녀가 침대에 올라가 누우라고 한다 배에 약을 발라 주는데 그 느낌은 몹시 차갑고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배를 불룩하세요.”
그녀는 마이크 같은 것으로 아랫배를 이리저리 훌고 다닌다. 그러면 화면으로 뱃속이 보이는데 배를 불룩불룩할 때마다 숨은 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뱃속이 보이는 것이 신기하여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면 그때마다 검사원은 벽을 보라고 한다
‘화면을 볼 수 있게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환자권리장전)에 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의사는 환자기록을 영어로 휘갈겨 쓰고, 이렇게 초음파 검사를 할 경우에는 화면을 볼 수 없게 한다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려야 검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쪽에 화면 하나 더 놓는 친절도 필요한 것이아닐까. 검사를 받는 동안의 그 지루함을 화면을 보면서 메꿀 수 있을 것이다.
초음파 검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한 번 검사한 일이 있다. 아마 신장의 모양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때는 남자 검사원이었는데 차가운 침대 위에서 한 시간이 나 고생했다
“배를 불룩하세요. 寺쉬지 마세요.’
남자 검사원은 배를 훈기만 할 뿐 좀체로 숨을 쉬라는 말이 없었다 상대가 어느 걱도 고통을 느끼는지 전혀 짐작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검사받기가 훨씬 편하다 숨을 충분히 쉴 수 있게 한 다음 다시 “배를 불룩하세요” 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늦게 나오세요. 당신보다 늦게 들어간 사람도 일찍 나왔는데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 땅딸보는 벌써 병실로 간 모양이다 그는 나와 같은 날 수술을 받을 사람이다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나는 아내한테 그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었다 검사를 받으러 갈 때마다 나는 늘 어느 학생과 마주치는데 입을 지퍼로 잠가놓은 듯한 그 땅딸보가 나만 없으면 아내한테 별 얘기를 다 하는 모양이다.
그는 돈가스 전문 요리사로, 특히 소스를 잘 만드는데 남다른 비법이 있어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다 물리쳤다고 한다 경기도 원당읍에서 직접 식당을 경영하는데, 지금은 꽤 유명한 업소로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병 때문에 사내 구실도 제대로 못해 아내에게 늘 미안해 하는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 우더라도 자신이 모르게만 하면 괜찮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바람을 피웠대:1”
“아니 , 그런 일이 없다나 봐.”
“자기 모르게 바람을 피우라고 했다면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 말이야.”
막내 동생의 콩팥을 이식받는다는 땅딸보를 생각하면 수호지:b에 나오는 무대가 연상되었다.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그의 얼굴은 바보스러을 정도로 선량해 보였다.
아내는 중간 예납을 하러 원무과로 가고 나는 병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한 시간을 잤던 모양이다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위장 사진을 찍으라고 간호 보조원이 온 것이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역시 땅딸보가 서 있었다. 학생이 저 쪽 병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셋은 제12촬영실로 갔다
나는 제12촬영실로 가는 동안 가슴을 조였다 위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시경 검사가 얼마나 힘든가는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어젯밤부터 걱정을 했던 것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솔로탑이라는 위장약을 마셨다. 걸쭉하고 하얀 액체로 먹기 힘든 것은 아니었으나 괜히 꺼림칙했다. 위의 모양을 찍으려고 그걸 마시는 모양인데 뱃속에 들어가 돌덩이처럼 굳어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위로 올라가세요.”
나는 선반 위로 올라갔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시경이 아니고 그냥 위장 사진을 찍는 것이라 다행이다.
나는 선반 위에 누워 이리저리 딩굴면서 촬영을 했다. 그리고 중간에 엑스레이 기사가 가루로 된 태글 발포 과립(엑스레이 이중조명용 발포제)을 입에 넣어 주고 주사기로 물을 밀어 넣었다.
“그냥 삼키세요” 하고 말하는 기사를 보고 있는데, 뭔가 새콤한 것이 목으로 넘어간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이다. 그것을 삼킨 다음 몇 차례 더 딩굴며 촬영을 했다.
“암실 앞에 가서 기 다리세요.”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데 엑스레이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가라고 했는데, 나만 기다리라고 한다 불안하다 중대한 다른 이상이 발견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에 하나라도 암의 양성반응을 발견했다면 수술이고 뭐고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암실 앞 의자에서 기다리고 아내는 박기일 교수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박기일 교수는 우리 나라 이식 의학계의 최고 권위자다. 내가 투석을 받을 때만 해도 환자들 사이에서 그 분은 전설 속의 인물이었다. 어떻게나 수술을 잘하는지 환자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에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할 거라는 소문이었다
“박기일 박사를 만나 보세요. 지난번 메릴랜드 연수 때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수술받기 전에 서로 알게 되면 한 바늘이라도 더 정성스럽게 꿰맬 게 아니에요.”
입원하기 전에 이례외과 김 원장은 소개장을 써 주었다. 아내는 그 소개장을 들고 의과대학으로 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박기일 교수가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해 보았다
“박건호 씨 , 따라오세요.”
방사선과 의사는 나를 다시 제IB촬영실로 데려 갔다. 보충 촬영을 한다는 것이다.
“위 내시경을 찍은 적이 있어요?”
“속이 쓰리지 않으세요?”
나는 의사의 계속적인 질문을 받으면서 위에 문제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질문들은 몹시 기분이 나쁜 것이고 일시에 먹구름이 덮혀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
“아니 에요. 좀더 정밀 촬영을 하려고 해요.
나는 다시 걸쭉한 솔로탑을 먹고 촬영을 시작했다 선반 위에서 이리저리 딩굴면서도 생각은 내가 살아온 40여 년의 세월을 더듬고 있었다 어쩌면 그 40여 년의 세월은 선반 위에서 딩구는 것처럼 흔들리며 이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병실에 돌아오니 간식이 나왔는데, 앞의 환자는 자기 것인 줄 알고 콘은 먹고 젤리는 나에게 준다 주방 아줌마들이 아무 말없이 획 집어 던지듯 놓고 가니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옆의 환자에게 아이스 콘이 나을 이유가 없다 그는 식도를 다쳐 입원한 사람이기 때문이
침대에 누워 연세대학교 교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조그만 알약 두 알을 가지고 온다. 설사약이다. 촬영할 때 먹었던 위 액을 대변으로 쏟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약을 먹고 한 시간이 넘어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투석을 하러 갈 시간이 다 된어 가는데 조바심이 난다. 주사바늘 두 개를 꽃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대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대변을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그때 아내가 박기일 박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박기일 교수는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던
대· . 신경과 김진수 선생한테 얘기 들었나 봐”
“김 진수 선생 한테 ?”
김진수 박사는 1989년 뇌졸중으로 입원했을 때 나를 담당했던 주치의다. 그때 나는 뇌졸중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의 마비와 언어장애 때문에 김진수 선생한테 쭉 치료를 받아오다 두 번째 뇌졸중으로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사당동 한방병원으로 옮겼던 것이다
내가 한방병원으로 옮긴 것은 김 박사가 뚜렷한 치료는 하지 않고 혈압만 재고 그저 예방약으로 티크리드, 로날 등을 조제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기일 박사를 만나고 돌아온 아내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김진수 선생이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석을 하는 동안 인공신장실로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본부 박진탁 목사님이 오셨다. 제공자가 1인실을 원하지만 그냥 2인실에 있으라 하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1인실로 해 주고 싶다고 했다 멀정한 살을 찢고 고통을 느끼면서 건강한 콩팥을 나에게 제공할 사람인데 그까짓 1인실이 문제냐 싶었다 그보다 더 한 것을 원한다 해도 아까을 것이 없을 것 같다.
“제공자가 1인실을 원하면 거절하는 환자는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니 우리 스케줄대로 해 주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박 목사님이 얘기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호화 병실을 쓰면 그 뜻이 바래l진:다는 말씀이었다
그리나 나는 보았다 박정환 군의 침대 위에는 커다란 예수 사진이 있었다. 그가 1인실을 원하는 것은 더욱 간절한 기도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여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성격 나름이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사색하기 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박 목사님은 이어 “퇴원을 하시면 제공자를 두 번 정도만 만나세요. 처음에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자꾸 만나다 보면 기다려지는 게 사람이에요.”하고 말씀하셨다. 장기를 제공받은 사람이 장기를 제공한 사람에게 부담을 느끼다가 자살한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나는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불길한 것이 뒤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모른 척하고 돌아설 수 없는 것이 인간 관계다 지금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속으로 1인실로 바꿔 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제공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 제공자를 2인실에 그냥 있게 한다면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울 것 같았다
사실 박정환 군이나 그의 가족을 대하면 마치 죄인 같은 생각이 든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박정환 군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1인실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이식수술을 받으세요?”
박 목사님이 돌아가자 투석을 받던 옆의 환자가 물었다 강한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경상도사내임이 분명하다. 그는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참 용기도 좋으십니다” 하고 말한다. 그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나는 퉁명스럽게 “용기가 좋다니요?”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경상도 사내는 “만약 수술을 받다 실패하면 낭패를 보는 겁니다” 하고 말한 다음 수술에 실패했을 경우 그 후유증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 후유증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라고 한다. 그때 병실에서 저녁식사를 가져오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여간 불안해 하는 얼굴이 아니다 더구나 남의 신장을 이식하면 수명이 5년밖에 안 된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안절부절못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식수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원했던 신장이식 수술인가 신장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투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3일 그리고 한 번 병원에 갈 때마다 네 시간씩 혈액 정화기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다. 수술이 결정되기 전 지난 ,)개월 간의 투석은 악몽의 날들이었다. 아침이 와서 눈을 뜨고 밤이 와서 잠을 자는 지루한 하루하루였다 그렇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비록 5년이 아니라 단 1년을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 자유는 바로 신장이식 수술로 인해 찾아지는 것이 아닌가. 수술을 받다 실패하여 목숨을 잃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간호사가 경상도 사내에게 식사를 갖다 준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는 입원하지 않은 환자에게도 식사를 제공하는 모양이다 투석을 받는 모든 환자에게 식사가 배급된다.
투석을 끝내고 17병동 간호사실로 갔다. 간식이 잘못 배달된 것 같다고 했으나 모든 간호사들의 반응이 시큰등하다 얘기를 한 내가 무안할 지경이다 그런 나를 아내가 병실로 끌고 간다.. 그러나 만약 옆자리 환자가 간식을 먹고 설사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간호사들의 무관심에 화가 난다 이제 병원에서 나이팅게일은 사라진 모양이다 간호사나 병원 종사자들이 친절하지 못한 것은 열악한 근무 조건 때문이 라고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 환자가 만원이면 호황이란 말일 테고, 호황을 누리면서도 환자들에게 소홀한 이유는 무엇이며 직원들 숫자를 더 늘리지 않는 이유는무엇일까.
배가 살살 아파온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설사인 줄 알았는데 엉지 손가락만한 된똥 한 덩어리가 나왔다. 회색빛이다 그런 덩어리가 뱃속에 그냥 있으면 탈이 나도 크게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낮에 방사선과에서 먹은 솔로탑 때문인 모양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병실 복토 끝 의자에 앉아 딴을 내다보았다.
가까이는 신촌의 거리가, 멀리로는 여의도의 63빌딩이 불빛에 을씨년스럽다. 다시 건강한 모습이 되어 저 불빛 속을 걸어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아득한 느낌이다
간호사가 나를 보자 혈압을 재고 간다. 그때 오른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 담당 레지던트가 내린다. 나는 그를 붙들고 낮에 두 번아나 위 사진을 찍었는데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레지던트는 “아직 위 사진을 보지 못했어요. 별일 없겠지요” 하고 말하며 간호사실 쪽으로 갔다. ?연초에 장염으로 입원을 했었지만 위에 이상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고 거북하다든지 소화가 안 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병실로 돌아와 짬뽕을 시켰다. 아내가 저녁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키는 김에 군만두를 추가했다. 두 개 정도만 먹으려고 하다가 다섯 개나 먹었다. 투석을 하여 체중을 빼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집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세환이, 세준이가 학교에 원음을 벗어 놓고 왔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스웨터를 입혀 보내라고 부탁을 한다.
아내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극성스러운 어머니다. 좋게 말하면 맹모(孟母)의 삼천지교(三遷之敎)라고나 할까 교육 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두 아들 모두 사립학교인 성동초등학교에넣었다.
둘째아들 세준이는 추첨으로 들어갔지만 첫아들 세환이는 4학 년에 막 올라온 작년 초에 전학을 했다. 세환이는 몇 년 전에 추첨에서 떨어졌다. 할 수 없이 동네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아내는 늘 성동초등학교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세준이가 추첨에서 붙자 굳이 세환이도 전학을 했던 것이다. 교편을 잡고 있는 큰 처형의 주선이었다
성동초등학교는 잠실대교 건너 구의등에 있다 한 학급에 학생 수가 40명 정도라 담임 선생님이 일일이 신경쓰기 좋다고 한다. 그래서 중고등 학교 이상의 학비가 들지만 생활 형편이 괜찮은 서울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사립학교에 넣지 못해 안달이다
나는 세준이가 추첨되던 날을 생각해 본다 그날 아이들은 교실에서 TY로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고 학부모들은 강당에서 추첩을 했다 맨 먼저 교장이 추첨함에서 수험번호 하나를 뽑고, 그 번호의 어머니가 다시 열 개를 뽑았다. 번호를 부를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70번째 어머니가 71번부터 80번의 번호를 뽑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긴장했다 이제 확률은 점점 줄어들어 추첨의 대상은 열 명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얼굴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77번까지도 세준이의 번호는 없었다. 아내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일었다. 결국 추첨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내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다른 학부모들은 밖으로 나가느라고 강당 안은 몹시 술렁대고 있었다. 그 찰나였다 “91번1”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치 감전당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바로 세준이의 수험번호였다 90명을 뽑는 추첨에서 80번째로 뽑힌 행운이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나는 감청색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두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수술을 받고 건강해지면 돌아오는 여름방학 때는 LA 디즈니랜드라도 다녀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환이는 1학년 여름방학 때 다녀온 적이 있지만 세준이는 너무 어려서 데려가지 못했다.
나는 ‘그까짓 목숨!’ 하다가도 두 아들을 생각하며 더 살아야 할 까닭을 발견한다. 늦게 결혼하여 늦게 얻은 세환이, 세준이, 그 철없는 두 아들이 빨리 자라 자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살고 싶다. 그러자면 신장이식 수술이 잘 끝나고 이후에도 건강관리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언제 잠이 들었던가. 뱃속이 꾸루룩거려 눈을 떴다. 새벽 두 시쯤이었다. 아내는 간이침대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잠들어 있고 간호사실에서 뭔가 딸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고요하다
나는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앉아 힘을 주는데 소변도 몇 방을 찔끔 묻어 나왔다. 그때 찢어질 듯한 요도의 통증이 참기 어려을 지경이었다. 소변은 보지 않고 대변만 보려고 하니 잘 안 된다. 그렇다고 대변을 안 볼 수도 없고 환장할 지경이다 이를 악물고 대변을 본다. 굵은 똥 두 덩어리가 통증과 함께 나온다 산모의 고통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까스로 대변을 보고 옷을 추스리며 변기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시멘트처럼 딱딱한 두 개의 똥덩어리가 보인다. 분명히 물을 내렸는데 변기가 막힌 모양이다 변기에 고인 물도 뿌연 색깔이다. 그러나 속은 한결 시원하다. 새삼스럽게 배설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눈을 붙여 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러다가 잠들기 전에 소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된다 요도가 아물 때까지 그 고통은 계속될 것 같기 때문이다.
투석을 받으면서부터는 몇 방을 나오지는 않지만 소변이 마렵다는 느낌은 너무 자주 찾아온다 어서 빨리 한 달이 잠을 자듯이 훌쩍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