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다어망(茶语网)에 올라온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희가 다양한 이무차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원료의 공급처중 한 곳 이기도 합니다. 이무 마흑에 대하여 좀더 친근하게 이해 할 수 있는 글이라 소개합니다.
전언(前言)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마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올해 91세의 할머니가 반세기전 마흑으로 시집을 간 후 겪었던 일이며 그 후 할머니가 차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수밖에 없었던 일화입니다.
할머니의 삶이 번번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할머니는 결코 넘어지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다원을 보며 꿋꿋하게 이겨왔습니다. 본 기자가 인터뷰 중 눈물을 흘렸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모두 읽은 후 여러분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높은 수준의 방법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흑촌. 운남 서쌍반납 맹납현 이무향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무 고차산중 다원의 면적이 가장 크며 가장 많은 생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마다 다원이 있으며 곳곳에 원시림이 있습니다. 고차원의 면적은 3400무 정도 이며 주로 교목차 위주로 년 생산량은 48톤 정도입니다. 오래 전 마흑은 이무정산이라 불리웠으며 이무차산지의 핵심적인 산지 이기도 합니다.
91세의 고회선<高会仙> 할머니는 집 앞마당에서 조용히 앉아 광주리에 있는 황편을 고르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누렁이 역시 마당에 축 늘어져 주인과 함께 적막함을 즐깁니다. 300미터정도 떨어진 다른 집 마당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요란하게 잔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무 마흑촌에 결혼식이 있는 날입니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며 마흑촌 사람 모두가 결혼식을 축하하는 술을 마시며 오늘의 경사를 함께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녀에게 시켜 결혼 축하금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할머니 집은 고요했습니다. 할머니는 조용히 황편을 고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마흑의 결혼식은 할머니의 마음 한구석에 있던 반세기 이전 자신의 결혼식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말이지 나 역시 낙수동에서 이곳 마흑으로 시집을 왔어. 내 남편은 대추색 말을 타고 왔는데 뒤로 세 마리의 말이 따르고 악대도 함께 했지 그리고 삼백의 은화와 많은 천을 가지고 와서 나를 데려갔어”
할머니는 낙수동에서 마흑으로 시집을 왔고 그것은 1941년의 일입니다. 계산해 보니 74년전의 일입니다. 할머니는 무려 74년을 묵묵히 이곳 마흑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74년중 44년은 남편없이 홀로 마흑촌을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고회선 할머니는 아마도 마흑촌의 근대 역사를 말하는데 있어 가장 공신력있는 목격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기자는 오늘 고회선 할머니의 지나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할머니만의 이야기가 아닌 마흑에 관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1924년- 이무낙수동 – 유복자
이해 가을에 낙수동 고씨 집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여자아이는 출산과 동시에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마치 앞으로 자신이 겪을 고통스러운 삶을 아는 듯 하였습니다. : 이 아이의 부친은 자신이 태어나기 한달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고회선 입니다. 하느님은 이 아이의 출생부터 유복자라는 어려움을 줍니다. 이 아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 없이 떠들어 회자되는 것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의 고씨 집안은 낙수동에서 대식구의 집안이었습니다. 30여명의 가족이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 모두가 그의 큰 아버지에 의지하여 생활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는 장사꾼 이셨어 우리 모든 식구가 큰아버지에 의지해서 먹고 살 수 있었지” 할머니는 큰아버지에 대해 여전히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바로 아편을 판매하는 상인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무, 운남 뿐아니라 심지어 중국 전역에서도 쉽게 찾아 볼수 있는 생업수단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천했던 그 시절 어느 정도에 있어 아편은 차와도 비슷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용품과도 같았습니다. 단지 이윤이 높고 위험성이 좀더 높을 뿐이었습니다.
차를 이야기 함에 있어 할머니는 일찍이 차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할머니는 12살부터 두명의 언니와 함께 산에 가서 차를 채엽하여 생활비를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아래 하루종일 일을 하였습니다. 고회선의 얼굴은 검게 탔지만 자태가 늘씬하고 아름다워 모두에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소문은 외지에 알려졌고 중매를 하는 사람이 고씨 집안에 찾아와 낙수동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마흑의 하씨 집안과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1941년- 이무마흑- 새색시
당시 하씨 집안의 주인은 하금성 이었습니다.
1934년 하금성은 “성흥창”의 차장을 설립합니다. 직접 채엽한 차엽을 살청하고 유념하여 긴압차를 만들어 말에 차를 싣고 운남
성흥창은 당시 마흑에서 가장 부유하였으며 고씨 집안의 여식과 혼담을 나눈 것은 하금성의 아들인 하명광 이었습니다.
고회선이 시집을 가던 그날 처음으로 남편인 하명광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 우리 남편은 키가 크고 잘생겼어. 남편은 큰 적삼을 입고 겉에는 마갑을 둘렀지. 대추색의 말을 타고온 검은 얼굴의 남편은 정말 보기가 좋았어”
하명광은 학교를 다니며 배운 지식인 이지만 혼인이라는 큰 대사는 부친의 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중매쟁이로부터 길일을 받은후 대추색의 말을 타고 그 뒤로 세 마리의 말과 악대를 대동하고 대단한 규모로 낙수동 고씨 집안으로 신부를 맞으러 갔습니다. 거기에 맞추어 고씨 집안에서는 신부측의 습관대로 요와 이불, 궤짝, 상자, 걸상, 빨래도구, 바구니등을 혼수로 준비하여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회선이 시집올 당시 가져왔던 혼수>
지금에 와서도 할머니는 그날 마흑으로 시집오던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그날 내가 손수 만든 청색의 혼인복을 입었고 검은색 헝겊신을 신었어. 그리고 머리에는 화환을 썼지. 그렇게 반시간 가량 걸려 나를 데리러온 행렬과 함께 낙수동에서 마흑까지 왔어”
1945년 -이무마흑 -차를 파는 낭군
“푸후후” 대추색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활기없는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할머니는 한 웅큼 마른 풀을 말에게 던져줍니다. 그때서야 말은 조용히 풀을 먹습니다.
남편 하명광은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바닥에 늘어놓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명광이 외지에 나가 차를 팔고 그 돈으로 사온 여러가지 서양의 물건들이었습니다. 총명했던 하명광은 성흥창의 차를 외지에 팔고 현지 마흑에 없는 물건들을 들여와 내수를 하였습니다.
고회선이 말하길 “성훙창”은 처음 외지에 차를 팔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규모가 커져서 나중에는 괄풍채 쪽부터 시작하여 더 먼 곳까지 나가 차를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씨 집안의 남자들이 차를 운반하는 도구는 말과 소였습니다. 성흥창에서 만든 가장 좋은 차는 30통이 한 담(担) 이었습니다. 한 담(担) 은 대략 150근 정도입니다.
성흥창의 일년 생산량은 대략50에서 60담(担) 정도 되며 같은 시기에 마흑에는 성흥창 이외에 두 곳의 차장이 더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에 도착해서 차를 판매하면 지폐를 받게 되는데 프랑스의 지폐였습니다.칼리온 은행은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여 프랑스 식민지에서 화폐를 발행하였으며 1926년 광주만에 분소를 설립하고 1945년 일본이 광주만을 점령하기 까지 존재하였습니다.
1947년- 이무마흑 - 분주하게 차를 만들다.
하씨 집안의 남자들은 성흥창에서 만든 차를 외지에 판매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하씨 집안의 여인들은 집안 일을 돌보았고 한편으로 차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습니다. 고회선은 어려서부터 차를 채엽하고 차를 만든 경험이 있어 남편의 지시아래 성흥창에서 차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회선이 말하길 당시 차를 만들 때는 7명이 한 조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차의 무게를 제고 차를 담고 눌러 차를 만드는 등의 일은 모두 분업화가 되었으며 차장에서 고용한 공인의 공임은 공정에 따라 1위엔 에서 3위엔 으로 차등을 두었다고 합니다.
성흥창이 차를 판매하고 벌어드린 수입은 점점 풍족해졌으며 총명했던 하명광은 촌민들에게 외지에서 사온 물건을 팔아 더 많은 수입을 거두었습니다. 고회선은 결혼 후 일남일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하씨 집안의 행복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쇠약해 지듯이 이러한 법칙은 고회선에게도 어김없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참담했으며 참으로 현실적이었습니다. 하명광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1949년- 이무마흑 - 대전환
당시 이무 마흑 하씨집안의 성흥창과 같이 큰 규모를 갖추고 큰 다원을 가지고 있는 부류는 “자본가” 혹은 “대지주”라는 이름으로 핍박받게 됩니다.
1951년에 와서 성흥창은 휴업을 하게 됩니다. 농민을 핍박했다는 신고를 받은 하명광은 당시 마흑촌의 다른 다섯 사람과 같이 자본가, 지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체포되어 이무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욱 불행한 일은 하명광은 얼마 후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 고회선은 당시 이 소식을 듣고 몇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배고파 울기 시작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밥을 지어줍니다.
고회선 마음에 오랜 동안 멈출 수 없는 폭풍우가 찾아 왔고 자신은 마치 큰 바다에 홀로 있는 작은 배와도 같았습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러한 기억은 고회선 에게는 마음 깊숙히 꺼내고 싶지 않은 상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남편이 옥중에서 죽게 된 지난 일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그녀의 잠재의식 중에 이미 잊어버리기로 결심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회선 역시 스스로 죽고자 마음을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결혼 한지 10년, 27세의 나이에 이렇게 남편을 잃게 되었는데 누군들 이러한 처지에서 쉽게 버틸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하씨 집안은 대식구였으며 고회선 마저 없다면 누가 이들을 보살피겠습니까?
1958년- 이무 마흑-지주의 아내
누구에게나 자신의 운명이 있는 것처럼 고회선 에게 고난은 항상 당연한 듯 따라 다녔습니다.
남편인 하명광의 죄로 하씨 집안은 집과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고회선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모초로 만든 움집을 짓고 하씨 집안 사람들은 그곳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생활하게 됩니다. 고회선은 지주의 아내라는 꼬리표 때문에 곡식이나 옥수수등의 먹을 것을 배급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욕설을 합니다. 혹은 다른 남자를 만나면 지주의 아내 라는 꼬리표를 땔 수 있을테고 아이들을 하씨 집안에 두고 자신은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회선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온후 자신은 이미 하씨 집안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부모 모두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두 딸을 쉽게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여 쉽게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크게 숨을 들어 마신 후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집스럽고 강건한 이 여인은 이렇게 산산히 부서진 하씨 집안을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겉으로 강건함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그녀로 인하여 하씨 집안은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핍박 받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등소평의 시대에 와서 하씨 집안의 일은 다시 조사를 받게 되고 정부는 하씨의 이전 집을 고회선에게 돌려줍니다.
1971년- 이무마흑- 홀몸의 객
고회선의 일생은 고독하였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전 이미 부친은 세상을 떠났고 결혼후 10년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고통은 항상 그녀와 함께 하였습니다.
1953년 고회선의 시아버지 하금성이 세상을 떠난후 1962년과 1963년 그녀의 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5년 고회선의 아들은 맹납농장에 정착후 돌아오는 일이 적었습니다. 1971년 고회선의 딸 역시 만수 차농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렇게 대략 1971년 이후 고회선은 혼자의 몸으로 살게됩니다. 1982년 정부는 하씨 집안의 집을 고회선의 명의로 넘겨줍니다. 그때서야 고회선은 초가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옮겨 혼자의 몸으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습니다.
집을 그녀에게 돌려줌과 동시에 정부는 그녀에게도 가족연합생산도급책임제를 부여합니다. 그녀 역시 6무의 땅을 받아 곡식을 심고 5무의 다원을 얻어 차를 생산할 수 있게됩니다. 그녀는 고수차를 보며 다시 힘을 얻었고 열심히 다원을 관리해갔습니다. 차를 만들어 식량뿐 아니라 약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남겨두었던 성흥창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5무 다원 안의 차나무는 모두 최소 일백년 이상의 수령을 갖추었습니다. 고회선은 다른 집과는 달리 이 다원에 소수차를 심지 않았습니다. 혼자의 몸이었기에 차나무를 심을 노동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이무마흑- 이방인
고회선의 차는 처음엔 공급 수매합작사에 일률적으로 판매를 해왔습니다. 대략 5-6마오정도의 가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판매를 하였고 2007년에 와서 40-50위엔으로 가격이 올랐습니다. 이것은 고회선에게는 의외의 일이었으며 놀랍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점점 마흑촌에는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차의 가격은 점점 높아졌으며 공급수매합작사는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차를 수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집 차의 가격도 점점 올라 모차의 가격이 1000위엔을 훌쩍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몇 십만 위엔의 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编辑跟高会仙聊天的时候,一位名叫李揆汎的韩国客商走到院坝,跟高会仙道别。李揆汎夫妇在中国已经做了很多年的普洱茶生意,之前是把普洱茶销回韩国,现在已经把主要市场放到中国北方。
(李揆汎与高会仙)
奶奶人很好,她的故事很传奇。我现在每年要跟她收毛茶,销到北方去。”赶在春茶季来到高会仙家收茶的李揆汎已经把茶叶都压饼装箱,今年就要驱车踏上返程。高会仙紧紧地握着他的手,叮嘱他一定要常来。
高会仙之所以对李揆汎夫妇如此依依不舍,并不是因为看重他们来自家收茶,而是因为李揆汎夫妇每年除了来收茶之外,也会不定期地来看望自己。
2015년- 이무마흑- 일과수
금전이 고회선에게 준 기쁨은 그녀에게 있어 틀림없이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91세의 고령이 되었고 그녀가 이곳에서 몇 십년간 겪었던 폭풍우와도 같았던 고통들중 아주 미세한 일부가 현실적인 기쁨으로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동무가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그녀에게는 더 필요하고 그녀가 바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 좋게도 고회선의 외손자와 외손녀가 가끔 찾아와 그녀와 함께 합니다. 때마침 그녀의 외손녀가 만수에서 찾아왔습니다.
“우리 외손녀가 나를 잘 챙겨줘. 이 새집도 우리 외손녀가 계획해 준거야” 고회선은 그의 외손녀 손을 잡고 우리를 보며 손녀 자랑을 합니다. 앞에 보이는 집은 이전 하씨 집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지은 집입니다. 윗층에는 차를 쇄청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아랫층엔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고회선의 손녀는 규칙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그녀와 함께 합니다. 일반적으로 차를 채엽하는 시기에 외지에서 찾아와 고회선을 도와 차를 만듭니다. 올해 91세 고령의 나이이지만 고회선은 상당히 건강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녀가 직접 다원에서 차를 채엽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직접 채엽하는 일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모든 일을 손녀에게 맡겼습니다. “손녀가 외지에서 일을 해도 많은 돈을 벌지 못해. 한 달에 7-8백위엔 정도인데 차라리 다원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거야 ”
고회선은 검고 거칠은 두손으로 바구니에 있는 차중에서 황편을 고르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손녀 생활을 계획하며 스스로 즐거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회선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다원이 손녀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고회선은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강건함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머니.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사시면 외롭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강하고 고집 세게 말했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
하지만 몇 초 후 할머니의 눈가가 빨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소매로 황급하게 눈물을 닦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말합니다. “사실. 몸이 아프면 외롭게 느껴져”
우리는 그 순간 그렇게 물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2015년- 이무마흑- 홍소육
요 몇 년간 고회선 집은 좋은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마흑 전체가 마찬가지이며 이무 모든 지역이 이전보다 살기 좋아졌습니다. 지금의 고차수 역시 옛날의 그 차나무 입니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이전 차마고도의 번화함이 재현된듯 합니다.
이무 보이차의 명성이 점점 퍼져나가면서 마흑촌의 명성도 함께 퍼져나갑니다.
거기에 성흥창의 이름 역시 하씨 집안의 후손에 의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략 7-8년전 하금성의 후손인 하천강이 고회선의 동의를 받아 성흥창 차창을 다시 설립합니다.
오랜시간 이야기를 하고 차를 마시니 쉽게 배고픔이 찾아옵니다. 고회선은 자신들이 항상 먹는 음식을 차려내옵니다. 초채차단과 홍소육은 고회선이 가장 잘 하는 음식입니다. 또한 두 가지 음식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 두 가지 음식이면 고회선은 밥 두 공기는 쉽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회선이 차려준 홍소육을 먹어보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다른 곳에서 먹던 맛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홍대추를 가미하였으며 설탕으로 간을 맞추었습니다. 입에 넣는 순간 온화한 단맛이 혀끝을 자극하며 전체 입안을 감싸고 목구멍에서 잠시 멈춘 후 온몸으로 펴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좀더 먹어” 고회선이 다정하게 말하며 한편으로는 우리들 밥공기 위에 홍소육을 직접 건내주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배부르게 먹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이 한 사발의 홍소육은 고회선 삶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한사발의 달달한 홍소육은 이전에 자신의 남편에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일 것입니다.
그 것은 오랜시간이 지남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