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돌아보며
주희경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세상잡사(雜事)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지고 주체할 수 없어 학교 교사(校舍)뒤 낙엽 쌓인 오솔길을 거닐다 상념에 젖어본다.
15年煎,
그땐 꿈도 컸고 욕심도 많았었다.
지금 국일학교의 정원장님과 뜻이 맞아 약간학교를 운영해보자고 일을 시작했다. 학교 퇴근 후면 의례히 정원장과 만나 계획을 세웠다. 매일매일 밤 늦도록 일을 해도 지치지도, 힘든 줄도 몰랐다. 지금은 작고하셔 안 계시지만, 아버니께서 “너희 둘이는 시집갈 생각은 않고 뭘 하느라 밤이나 낮이나 붙어 다니느냐.” 며 걱정을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땐 어찌 그리도 시간이 빨리 가던지 맨주먹에 가진 거라곤 단지 의욕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겁 없이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이 믿는 장덕필 신부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었다. 일을 하다가 막히면 봉천동 성당으로 달려가 자문을 구했고, 그때마다 구체적인 조언(助言)과 실행방법을 제시하는 등 도움을 주시며 우리들이 난관에 부딪치면 좌절 할 때마다 용기를 주시고 위로와 함께 물질적 지원도 꽤 많이 여러 차례 해 주셨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 너무 염치없이 귀찮게만 해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단순히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하느님의 섭리가 계셨던 것 같다.(장신부님과 정교장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 친구들이 만난 것은 23年煎 명수대 성당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부터였고 장신부님께서 명수대 보좌에서 명동 보좌등을 거치시고 봉천동 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하시고 우리들이 문을 연 교실이 임대료가 싼 봉천동 산 꼭대기 조그만 가겟방이었다. 또, 내 첫 부이학교가 봉천 중학교였고 조규란 선생 댁이 사당동이었다.
그때 학생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미용사 ◯◯(졸업 후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가족 모두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봉제공◯◯, 삼립빵직공◯◯, 소아마비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 배움에의 욕구가 강했던◯◯(목발로 고갯길을 어머니와 함께 오르며 두눈이 너무도 맑았던 그녀는 고입검정에 합격하고 총신대 음대2학년 과정을 졸업하였다. 지금은 어디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으리라.)
낮에 하는 일은 각기 다 달라도, 밤이면 야학에 모여 졸린 눈을 깜빡이며 못 배움으로 인해 당하던 설움을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던 다섯 평 교실에서의 시간이 그들에겐 하루 중 가장 즐겁고 마음 푸근한 시간이라고 했었다.
1회 졸업식때 졸업사(송사도 없고 답사도 없는)를 읽으며, 계속 울먹이던 졸업생 대표, 덩달아 학생들도 교사들도, 내빈으로 참석했던 많은 고마움을 주셨던 분들도 함께 부둥켜 안고 눈시울을 적셨던 그 기억을 지금도 콧날을 시큰하게 하곤 한다.
‘지금은 한 가정을 꾸미고 다들 잘 살겠지.’ 진정 보고싶은 얼굴들이다.
음으로, 양으로, 모든 일에 도움을 주시던 장신부님께서 행정학 공부를 하시러 미국으로 떠나시고 정교장님도 사회사업의 이론적 체계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나도 뒤늦게 가정을 갖고 국일야간학교의 존폐여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친구 양헬레나 수녀 어머니 조차순 사무장니은 학교의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셨고 친구 조규란 선생님은 세 살박이 막내를 보살피며 교무회의등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안연자 선생님은 각종 행사와 모든 학교 살리을 알뜰하게 맡나 주셨다.
이제는 정원장님이 계셔서 학무적으로나, 실제 이론면에서 막힘없이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지만,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우리 친구들의 마음은 늘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다.
아무쪼록 정원장님의 정열과 이상(理想)을 펼 수 있는 장(場)으로서 국일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대하면서 난필(亂筆)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