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여 행 일 정 |
식 사 |
제1일 11/19 (목) |
울 산 부 산 상 해 성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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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차량 MU 5044
MU 5409 전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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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12:35
13:20
16: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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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출발 출발지:울산 문화예술회관 주차장입구 남구청 옆(09:30집결) 부산출발 김해공항에서 세종여행사 직원과 미팅 미팅자 : 최원형 소장(010-3690-2685) 수속을 도와줌 상해도착 국내선으로 이동 * 짐은 바로 성도로 보냅니다. 상해에서 확인요망 상해 출발 성도 도착 가이드 미팅 후 석식 호텔로 이동 호텔 투숙 |
중:기내식 석:현지식 |
HOTEL:캠빈스키부루호텔 혹은 동급 | |||||
제2일 11/20 (금) |
성 도 청 련 성 도 |
전용차 |
전 일 |
호텔조식후 <성도의 누정> 무후사[제갈공명, 유비,] 설도의[망강루, 음시루,완천정, 탁금루] 등 관광후 성도출발(약4시간 30분소요) <이백과 두보의 누정> 이태백의[농서원,태백사,분죽루,비선정] 성도로 귀환 두보초당[비정,서룽초당,공부사,기념관] 등 관광후 호텔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캠빈스키부루호텔 혹은 동급 | |||||
제3일 11/21 (토) |
성 도 무 한 |
MU2538 전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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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10:45 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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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조식후 무한으로 이동 무한도착 중국3대누각 황학루 문학공원 내-굴원의[창량정,행음각,귤송정], 범중언의 [선월정] 이백의[방응대],유종원의 [애내정] ,왕발의 [장천루] 노숙및 백아 종자기고사 호텔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무한호텔 혹은 동급 | |||||
제4일 11/22 (일) |
무 한 악 양 멱 라 악 양 |
전용차 |
전 일 |
호텔 조식 후 악양으로 이동(약 3시간소요) 중국3대 누각 악양루,두보의 [회보정] 멱라로 이동( 92키로 약 3시간소요) 굴원의 [굴자사,독성정]등 악양으로 이동 (약3시간 소요) 호텔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태화 호텔 | |||||
제5일 11/23 (월) |
황 주 구 강 여 산 |
전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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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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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후 황주로 이동 (약3시간소요) 황주의 [적벽부(소동파)] 구강으로 이동 (약3시간소요) 구강의 심양루,백거이의 [비파정,연수정]관광후 구강출발(약 1시간 소요) 여산도착 호텔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용만온천호텔 또는 동급 | |||||
제6일 11/24 (화) |
여 산 남 창 상 해 |
전용차
MU 5592 |
전 일
16:15 17:30 |
호텔 조식 후 이백의 [여산폭포],도연명의 [시상], 파양호의 [석종산(소동파)], 남창으로 이동 (약2시간소요) 중국3대누각 남창 등왕각 , 남창출발 상해도착호텔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상항홀리데이 또는 동급 | |||||
제7일 11/25 |
상 해 부 산 |
MU5043 |
08:50 11:35 13:30 |
조식 후 상해 출발 부산 도착 울산 도착 |
조:호텔식 |
첫째 날(2009. 11. 19일)
첫 중국여행이라 상당한 설레임과 기대를 안고 집결지인 문화 예술 회관 옆 문화공원 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 보다 다소 일찍 도착 하여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아 여행가방과 노트북이 든 가방을 보도에 놓아둔 채 공원을 한 동안 서성이고 있을 때 평소 낯익은 얼굴 두 사람이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이어서 미니버스가 도착하고 출발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동행할 여행객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 중에는 아는 사람이 있기에 첫 중국여행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완화시켜 주었다. 전 예총 회장을 지내신 박00시인은 이번에 팀을 이끌고 가는 문학 답사팀 단장을 비롯하여 김00 사진작가님, 그리고 조00사진작가님, 등등
우리들을 김해 공항까지 태우고 갈 버스는 매우 깔끔했으며 운전기사도 친절하게 우리의 짐을 하나하나 받아서 버스 앞자리에 차근차근 실어 주었으며 곧 이어 여행사 사장님의 인사 말씀과 여행에 코스와 주의 할 점을 이야기 하고 여행 경비 중에 현지의 가이드비와 운전기사 팁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듣고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 했으나 여행을 마친 다음에 추가되는 부분이 있다면 각자가 부담 하자는 결론에 도달하고 김해 공항을 향하여 버스는 출발을 했다.
여행자 명단에 누정취재팀 팀장에 올라 있는 00일보 부장이라는 사람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체구가 단단한 젊은 사람이었으며 금년이 환갑이라는 사학을 전공한 송 00박사와 취재팀을 이루고 우리 문학 답사팀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취재팀 2명과 답사팀 8명. 합쳐 10명인 셈이었다.
단체 여행이란 여행 중에 행동이 제약된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에 여행 만큼이나 소중한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류가 있다는 점에서 늘 기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여행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도 세련된 분들과 동행을 한다는 사실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 에게는 중국 여행이 거의 처음이나 다름 없는 관계로 동행하는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바, 연령이나 직업, 관련 여행에 대한 상식 등등을 고려할 때, 이번 여행에 동행하는 분들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점은 울산을 출발해 김해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내 확인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합류하기로 한 두 분과 일행들의 자기소개가 있었고, 여행사 소장이라는 사람과 간단한 미팅이 있었다.
중국 여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의 사항. 각자 여권 및 귀중품 챙기기. 달러화와 중국 위엔화 환전등.
그때에 갑자기 문제가 발생 했다.
무형문화재 학춤 보존회 회장이신 김00선생님이 구여권으로 비자 신청을 해 놓고 새로 발급 받은 여권을 지참했기 때문에 출국이 불가능 하다고 한다.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방법을 강구 했으나 대책이 서지 않아 할 수 없이 학춤 보존 연구 회장이신 김00스님은 출국을 포기하고 결국은 일행이 9명으로 줄고 말았다.
서둘러 소지품이 들어 있는 짐을 부치고 검색대를 통과하여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 일행 중 몇 분은 면세점에 들러 진열된 상품들을 둘러보려고 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부지런히 탑승을 했다.
상해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동방 항공사 소속 MU5044편으로 12시 35분에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이륙 하였다.
잠시 후 비행 궤도를 잡았다고 느껴질 때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미스 월드에 뽑힐 듯하게 아름다운 여승무원들이 기내식을 배달해 주었고 이어서 음료수를 나누어주었다.
김해 공항을 출발하여 한 시간 남짓 지나니까 상해에 도착된다는 안내 방송이 중국말과 한국말로 방송이 되었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상해의 외곽지역은 농지의 경지정리가 직사각형으로 잘돼 있다는 느낌이었고 풍력발전인지는 모르지만 풍차 같은 구조물이 가지런히 서서 돌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성도로 가는 환승공항으로 상해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조선족 3세라고 하나 한국말이 유창한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옮기고 대기하기를 두어 시간, 대기실은 무척이나 소란스럽고 시끄러웠다. 여기에서 휴대전화를 국제 로밍으로 바꾸니까 현지시간이 자동으로 뜬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도 사람의 목소리가 크다고 하지만 중국인들은 한층 더 시끄러웠고 더구나 휴대전화로 대화하는 목소리는 가히 소음수준이었다.
두 시간이 넘게 대기하고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하고 더구나 시끄러워 밖을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시간이 되어 성도 행 비행기를 탑승하게 되었는데 이 비행기는 다소 작게 느껴졌고 잠시 후 중국어로 안내 방송이 있은 후 이륙하려고 활주로를 향하더니 다시 계류장으로 돌아와서는 한 시간 넘게 감감 무소식으로 서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누구 한사람 의아해 하지도 않고 왜 이륙을 하지 않는지 물어 보는 이도 없다. 중국인이 만만디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고 우리 일행이 타고 가는 비행기는 상해를 이륙하여 성도로 향해 날기 시작하였고 기내식으로 이름 모를 빵과 쌀 과자 같은 것을 먹고 이른바 야간 비행이었다.
사회주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 성도 국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첫날 여정은 일행들의성향을 은밀히 탐색하며 그렇게 흘러갔다.
공항에는 세종여행사라는 자그마한 피켓을 든 교포 3세인 현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었고 우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깊숙한 땅에서 나름대로의 설레임을 안고 남은 여정을 가늠하였다.
호텔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촉나라 개는 해만 보면 짖는다'는 가이드의 성도소개에 대해 의아했으나 성도는 안개가 많은 도시로 1년에 햇빛 보는 날이 100일 정도로 성도 주민들은 대부분 관절통을 앓고 있다고 소개한다.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며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 및 식량을 소유한 성도평원의 중부에 위치한 사천성의 수도이다. 분지지형으로 4계절 온화한 기후여서 연평균온도 16.3℃로 혹한과 혹서가 없고 겨울에도 따뜻하고 강우량이 풍부해 땅이 기름져 농사 짓기에도 최적의 조건이다. 1992년에 개방도시로 지정되어 서남부 지역의 과학, 기술, 상업, 경제,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총인구는 980만 명이며, 전체 면적은 12,400㎢이다. 또한 성도는 전국시대부터 있어온 2000년 역사의 문화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촉(蜀)의 도읍지였고 진(秦)·전한(前漢) 때는 촉군(蜀郡)이 관할하는 청두현(成都縣)이 설치되었으며, 삼국시대 때 촉한을 통일한 유비(劉備)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또 당(唐)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하였고, 수당(隨唐) 시대 때는 장안(長安), 양주(揚州), 둔황(敦煌)과 더불어 4대 도시였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역사를 겪어온 도시인만큼 많은 사적과 유적지가 있다. 그 중 제갈 량(諸葛亮)을 모시는 무후사(武侯祠)를 비롯하여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피난을 와서 시를 짓던 두보초당(杜甫草堂)·망강루(望江樓)가 있으며 두보는 47세 때 이곳에 초당을 짓고 4년 동안 거주하면서 240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초당의 넓이는 20㏊가 조금 넘지만, 당초에는 이렇게 큰 것이 아니었고 1500년과 1811년 에 확장공사를 했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詩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의 건축과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새 성도 시내에 들어섰고 늦은 시간이었으나 여행 가이드가 미리 예약해 놓은 저녁 식사를 하려고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이른바 유명한 사천요리를 맛볼 수 있는 기대에 부풀어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종업원(현지에서는 복무원이라고 한다)이 날라다주는 요리를 조금씩 음미하기 시작했는데 맵고 짜고는 둘째 치고 이름 모를 향신료 때문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밥은 이른바 알랑미(안남미安南 ; Annam米)밥이었는데 우리나라 6.25당시에 먹어 본 밥알이 길죽하고 입으로 불면 날아 갈 것 같이 끈기가 전혀 없는 그런 밥이었다.
상해에서 성도로 오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어서인지 별로 시장하지도 않았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기에 대충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성도에서 제일 좋다는 호텔이라고 하였으나 우리나라 모텔수준이었고 난방이 되지 않고 히터를 틀었으나 찬바람만 나오고 있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불평도 못하고 인터넷회선이 있기에 가지고 간 노트북으로 여행지를 검색하려고 하였으나 인터넷이 느려서 포기하고 대충 씻고 하룻밤을 보냈다.
둘째날 2009. 11. 20
이백의 비림과 농서원 태백사를 보기위해 호텔을 일찍 나섰다.
말 그대로 비석이 숲을 이룰 만큼 한대부터 당대까지의 비석들과 묘지석을 몽땅 모아놓았다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이백(701-762)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당(唐)의 수도 장안(지금의 Xian)에 나타났을 때, 풍류로 이름 높은 광객(狂客) 하지장(賀知章)을 만나 어울렸는데, 이백의 시를 보고 대뜸 그를 귀양 온 적선(謫仙)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초속(超俗)적 기풍에 대한 찬사이면서 불안정한 아웃사이더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고 한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본디 초나라 광인(狂人), 봉가를 불러 공자(孔子)를 비웃었나니, "我本楚狂人 鳳歌笑孔丘(아본초광인 봉가소공구)”하였기에 그의 현실과 꿈의 문지방에 선 태도로 인해 비록 “영달하면 함께 천하를 구하고, 곤궁하면 홀로 그 몸을 닦는다."達則兼善天下 窮則獨善基身(달칙겸성천하 궁칙독선기신)”는 유교적 신념을 가졌어도 양쪽 모두 실패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세상을 구하는 겸선(兼善)’의 희망은 궁중의 간신배나 교활한 세도가들에 몰리어 퇴직금 받고 시골로 쫓겨나야 했고 사금환산(賜金還山), “홀로 닦는 독선(獨善)” 현실은 도교(道敎)의 늪에 탐닉되어 그의 만년 가까이 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 좌절로 황음광가(荒飮狂歌)하고, 이속(離俗)하여 도가에 입적(入籍) 단약(丹藥)을 구우며 물속의 달과 같은 허상(虛像)을 허상인줄 알면서 보았던 것이라고 하지만, 정든 벗을 반기며 술을 나누고 달 밝은 밤을 함께 지새며 청담(淸談)을 나누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와 지금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두보는 이태백을 두고 주중선(酒中仙)이라 불렀으며, 이태백 스스로는 적선(適仙 : 지상에 귀양 온 신선) 이라 칭했다.
술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태백의 아류로 생각하고 그의 경지를 동경하곤 하였는데, 그는 월하독작(月下獨酌) 이란 시에서 "석잔이면 큰 도(大道)에 통하고 한말이면 자연과 어우러진다" 하고 읊으며 취중의 호연한 심정을 토로했다.)
벗과 둘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노라니 산꽃이 저절로 피네, 한잔 또 한잔 흥취가 무르익었네!
이제 내 취하여 잠이 오나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게나,
이백의 옛집 농서원(朧西院)과 태백루는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 가 없다고 한다.
이백의 여동생 이름이 월원(月圓)인데 그 무덤 둘레를 싸고 있는 돌에 짧은 시가 많이 있었는데 비교적 내용이 쉬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닫혀 있는 농서원의 문 앞에서 동행한 동국대학교 김00박사의 이백의 생애와 월원의 시에 대하여 능숙한 강의에 정신이 쏠려서 월원의 시 한수를 노트하지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여한으로 남는다.
청평조사(淸平調詞)
-이백(李白)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노화농) : 살랑이는 봄바람, 영롱한 이슬일레라
若非群玉山頭見(야비군옥산두견) :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
會向瑤台月下逢(회향요태월하봉) : 요대의 달 아래서 만날 선녀여!!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노응향) : 한 떨기 농염한 꽃, 이슬도 향기 머금어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 무산녀의 애절함은 견줄 수 없고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 비길 이 있을까?
可憐飛燕倚新妝(가련비연의신장) : 비연이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량상환) :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듯
長得君王帶笑看(장득군왕대소간) : 바라보는 임금님 웃음도 가시질 않네.
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 :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
沈香亭北倚欄干(심향정배의난간) : 침향정 북 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
천보산 남쪽 산기슭에는 이백이 20여 년간 살았던 생가 농서원(隴西院)이 있다. 농서원(隴西院)은 지난 쓰촨성(四川省) 지진 피해를 입어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생가 입구엔 누이동생 월원(月圓)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백의 누이동생으로 역시 시-서-화-금으로 당대에 소문난 월원(月圓), 인근에는 누이동생 월원(月圓)을 위해 이백이 지어주었다는 분죽루(粉竹樓)가 새롭게 단장돼 있고 농서원(隴西院)에서 서쪽 200여m 떨어진 개울가에는 이백이 공부를 결심한 마침계(磨針溪)라는 시내가 있다.
널리 알려진 마침계(磨針溪)는 이백이 어려서 놀기만 하다가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노인을 만나 공부를 결심한 장소이다. 이 백은 그날 이후 크게 뉘우치고 광산(匡山)에 가서 공부를 계속 했다고 한다.
功書時間 (공서시간)
貴在分秒必爭 (귀재분초필쟁)
常之曰 (상지왈)
功到自然成 (공도자연성)
공부할 때는 짧은 시간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중요하다.
늘 말하기를 "공력이 차면 자연 이루어진다. "라고 한다.
學究天人筆參造化(학구천인필참조화)요
長不七尺心雄萬夫(장불칠척필웅만부)라
風流文彩魁當世(풍류문채괴당세)요
富貴浮雲允謫仙 (부귀부운윤적선)이라.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원리를 궁구하고 필력은 천지조화에 참여할 만하고
키는 칠척이 안 되지만 마음에 품은 기개는 만부를 당해낼만 하네.
풍류와 문장은 당대에 으뜸이고
부귀를 구름같이 여긴 진실로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이로다.
첫 번째 대련은 이백이 쓴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있는 글귀를 딴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백(李白)[백과 사전]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이백(李白)의 생애
제1기(출생~25세)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익주(益州:지금의 쓰촨 성에 있음)의 자사(刺史) 소정(蘇頲)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와 함께 민산 산[岷山]의 남쪽에 은거하는 등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제2기(25~42세)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음)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했다. 맹호연(孟浩然:689~740)과의 교제도 이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5세 무렵에는 산둥[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후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산둥의 추라이 산[徂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제3기(42~44세)
742년(天寶 1) 가을 처음 장안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우선 자극궁(紫極宮:도교사원)에서 당시 저명한 태자 빈객 하지장(賀知章:659~744)을 만나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그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것은 이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이 이때 나왔다. 조정에 나가는 일은 누구보다도 이백 자신이 희망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궁정시인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로 인해 744년 장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백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굴절된 고독감을 느꼈다. 이 3년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다수의 작품과 다양한 체험으로 수놓아진 중요한 시기였다.
제4기(44~56세)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뤄양[洛陽]에서 두보(杜甫: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이 만남으로써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흥미가 깊은 시기이다. 다만 상호 영향관계에 있어서 두보가 이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관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의 나이차와 그 시점에서의 명성과 역량의 차이라는 일반적인 원인 외에도 같은 시대의 시인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백은 동시대의 시인을 언급한 시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두보는 같은 시대의 시인을 읊조린 경우, 그 시인의 작시 기량과 자질을 칭찬한 작품이 많다. 두보 및 고적(高適:702경~765)과의 직접적인 교유는 6개월 내지 1년 반 정도로 끝나고, 이백은 양쯔 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완전한 방랑생활은 아니었으며, 양원(梁園:지금의 허난 성[河南省]에 있음)과 산둥 성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었다. 장안에서 추방된 후 약 10년간의 이 시기가 제2차 방랑시기이다.
제5기(56~62세)
755년(天寶 14)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12월 뤄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肅宗]가 영무(靈武:닝샤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즉위했다. 당시 이백은 양쯔 강을 따라 선성(宣城: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음)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루산 산[盧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기 위해 참가했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영왕의 군대는 적군(賊軍)으로 간주되었고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도 체포되어 심양(潯陽: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 시[九江市])의 감옥에 갇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단 석방되었으나, 대역죄가 추가되어 결국 멀리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북부)으로 유배되었다. 759년(乾元 2년) 3월 이백은 야랑으로 가던 도중 양쯔 강 상류의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사면 통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자유을 얻은 이백은 양쯔 강 중류의 둥팅 호[洞庭湖] 부근에서 시인 가지(賈至:718~772)를 만난 뒤 강남의 온화한 풍토에서 지냈다. 762년(寶應 1) 62세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후이 성에 속함)의 현령이었던 족숙(族叔:일족의 숙부 세대에 속함)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구당서 舊唐書〉에는 여러 해에 걸친 과도한 음주가 그 원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그해 11월 무렵 이양빙의 손에 시문의 초고를 맡기고 죽었다. 수군에 참가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양쯔 강에서 보낸 6여 년의 기간을 만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품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행·이별·음주·달빛·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때문에 이백의 작품에는 각 제재의 기본적인 성격이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1,000여 년에 걸친 이백 시의 읽기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시사'(詩史)로 불리는 두보의 시집이 대체로 제작연대로 배열된 데 비해, 이백의 시집은 각 시대를 통해 오로지 제재로 구분된 '분류본'이 중심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작품의 제작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외적 조건이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두보의 시와는 달리 개별 작품의 창작 상황을 사상(捨象)시킨 일반적인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과 제작연대가 불확실하더라도 작품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등이 내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백 시의 주요한 제재를 보면, 공통된 발상으로서 시공감각의 확대에 대한 지향, 미확정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2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의 시에서 보이는 아득히 먼 시공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 이별의 시에서 보여지는 장래를 알 수 없는 흔들리는 심상(心象)의 상태, 음주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수용하기 힘든 고양감, 심적 세계의 확대, 순간의 영원화, 광대 또는 영원한 시공에서 미지의 세계인 밝은 달빛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설정된 신선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자유로운 비상 등 가장 이백적인 감각을 지닌 제재들 외에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규원(閨怨)의 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노래하는 변새시, 역사를 장식한 장대한 드라마를 미미한 인간세계의 한순간의 꿈으로 노래한 회고시 등 이백은 다른 시인과 더불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두보·한유(韓愈:768~824)·백거이(白居易:772~846) 등이 이룩한 시사(時事)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 서사적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 또는 시에 의해 인생과 자연계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 등은 이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두보와 한유는 이백의 대표적 제재인 이별에서는 그리 저명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에는 미숙했으며, 특히 7언율시에서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볼 만한 작품이 없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백거이의 작품은 비교적 균형있는 분포를 보인다. 또 한유의 대표작에는 장편 고체시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또 그의 대표작 중 7언절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결국 이 시형이 가진 표현기능의 존재방식은 이백에게 있어서 시적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물상
이백이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전기자료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그는 당시의 시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장안에서의 방만한 생활과 영왕의 수군에 참가했을 때의 낙관성에서 보여지듯이, 정치가로서는 그리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현종이나 영왕 또는 지방의 유력자들도 시인으로서의 이백이 자신의 궁정이나 막하에 있기를 바랐으며, 그에게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이백은 정치적으로는 평생 불만이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는 심경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실패는 시인 이백에게 더욱 많은 시간과 의욕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과 다원적인 시각을 제공했다. 만약 그가 장안에서 궁정시인으로서 성공하고 관리로서 출세했다면, 많은 군중시와 응소시(應詔詩)의 명작을 낳기는 했겠지만, 자유롭고 변화가 심한 이백의 시세계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결국 재야의 시인으로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국문학사 측면으로서는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의 사상과 시풍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비평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테면 도교적·유교적·낭만적·고전적·정열적·객체적·쾌락적·민요적·애국적 등등, 거기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요소가 지적되는 것도 별로 신기할 바가 없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이만큼 평가가 다양한 예도 드물다. 그의 자유로움과 변환성은 이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작품 전체가 어느 한 가지 기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또는 다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본(傳本)
그의 시문은 사후 이양빙에 의해 〈초당집 草堂集〉(10권)으로 묶여졌다. 또 친구 위호(魏顥)도 〈이한림집 李翰林集〉을 펴냈다. 이들 당대의 이백시집은 일찍이 산실되었다. 북송의 요사(樂史)에 의한 〈이한림집〉 20권과 〈이한림별집〉 10권도 일찍이 산실되었다. 다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宋本)이 명대에 중간된 〈이한림집〉 30권으로, 소수만 남아 있다. 또 이것들과는 별도로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요사의 판본을 대폭 증보하여 분류한 책을 펴냈으며, 저명한 문학자 증공(曾鞏)이 재정리한 뒤 쑤저우[蘇州]의 장관 안처선(晏處善)에 의해 1080년에 간행되었다. 이 안씨 간본(蘇州本)은 실전되었지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 〈이태백문집〉 30권이 현존 최고(最古)의 전본으로서, 일본 도쿄의 세이카도 문고[靜嘉堂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주석서로는 남송 양제현(楊齊賢)의 주에 원초(元初) 소자윤(蕭子贇)이 보충한 〈분류보주이태백시 分類補注李太白詩〉 25권이 가장 앞선 것이다. 청대의 왕기(王琦)는 양(楊)·소(簫) 2가(家)의 주를 보정하고, 여기에 명대 호진형(胡震亨)의 주 〈이시통 李詩通〉과 자신의 주를 첨가하여 상세한 집주를 만들고, 나아가 산문에도 주를 달았으며, 연보와 관련자료도 종합하여 〈이태백문집〉 36권을 간행했다. 이것은 이백 시의 주석사(注釋史)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헌으로 손꼽힌다.
이 근처에 太華 太寶 太白,이런 지명들이 있는데 이백의 자인 태백도 여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생긴다.
무후사를 답사키로 한 일정을 다소 바꿔 오전에는 두보초당과 청양궁 답사키로 하였고, 오
후에는 일정대로 이태백 기념관을 답사키로 하였다.
우리와 함께 할 버스에서 내려다 본 실질적인 성도의 첫날 풍경은 생소함 그 자체였다.
물 양동이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물을 길어 나르는 아낙네에서부터 인력거로 출근하는 회사원, 자동차보다도 더 많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벤츠나 렉서스, BMW같은 최신식 승용차들까지 내가 보는 중국은 1940년대부터 2000년대의 서울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은근히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의 통제되고 절제된 모습을 기대하였건만, 우리 눈에 비친 성도의 첫 인상은 다양한 계층이 혼재된 채 자유주의 국가를 능가하는 무질서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을 보고는 참 이상한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불어 무질서함 속에서도 묘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중국이라는 거대 더불어 중국이라는 나라의 잠재력이 느껴져, 더러는 섬뜩하다고 할 정도의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아마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세계는 미국을 가리켜 유일강대국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못할 것이다.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성도 중심가와 연해 자리 잡고 있다. 규모 또한 초당이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않게 6만평이라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180평이었던 두보초당의 규모는 6만평으로 늘어났지만, 배로 오고갔다는 초당 앞의 완화계는 오히려 한낱 개울에 불과할 정도로 그 규모가 축소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두보초당을 흔히 완화초당(浣花草堂)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보가 이곳에 머문 시기는 사실 두보 전 생애의 극히 일부분인 4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광 코스의 하나로 개발한 중국인들의 발상은 참으로 경이롭기만 하다. 이는 두보와 관련된 유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을 빛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이백이나 두보 등과 같이 현대까지도 그 이름이 온전히 전해지는 대가들의 유적은 중국의 어느 한 곳이 아닌 구석구석에서 산재되어 있으며, 그런 유적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여행객을 유혹하곤 한다.
강유시에 있는 이백(李白)기념관을 답사하였다.
촉도난(蜀道難)
噫吁戱 危乎高哉
희우희 위호고재
아아 ! 아찔하게 높고도 험하구나 !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촉도지난 난어상청천
촉으로 가는 길 어렵고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
蠶叢及魚鳧 開國何茫然
잠총급어부 개국하망연
장총과 어부가 촉 나라를 개국한지 그 얼마나 아득한가.
爾來四萬八千歲 始與秦塞通人煙
이내사만팔천세 시여진새통인연
그로부터 사만 팔 천년 동안 관중 땅 진과 내왕 길이 없었고
西當太白有鳥道 可以橫絶峨眉顚
서당태백유조도 가이횡절아미전
서쪽 태백산 날개 길 따라 겨우 아미산에 올랐네.
地崩山 磪壯士死
지붕산 최장사사
비녀 맞은 축 장사들 산 무너져 죽고
然後天梯石棧方鉤連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연후천제석잔방구련 상유륙룡회일지고표
구 후로 하늘 높다란 절벽에 매달아 길대신 이어지고
위로는 육룡이 끌던 해수레도 돌아섰던 높은 고표산
下有衝波逆折之 川 黃鶴之飛尙不得過
하유충파역절지회천 황학지비상부득과
아래는 암석 절벽 치는 물결과 엇꺾여 흐르는 억센 물결
신선 탔던 황학도 날아 넘지 못했네.
猿努欲度愁攀援 靑泥何盤盤
원노욕도수반원 청니하반반
원숭이 넘으려 해도 붙잡을 데 없고
청미령 까마득히 높이 서리고
百步九折嶺巖巒
백보구절영암만
백 걸음 아홉 번 꺾어 돌 바위 봉우리를 돌아야하네.
雯參歷井仰脅息 以手撫膺坐長歎
문삼력정앙협식 이수무응좌장탄
하늘의 삼성별 어루만지고 정성별 지나니 숨이 막혀
손으로 앞가슴 쓸며 주저앉아 장탄식 몰아 내뿜네.
問君西遊何時還 畏途嶄巖不可攀
문군서유하시환 외도참암부가반
그대 서촉 언제 떠나려나 ?
무서운길 미끄러운 바위 오를 수 없고
但見悲鳥號古木 雄飛雌從繞林間
단견비조호고목 웅비자종요림간
오직 고목에서 슬피 우는 새들
암놈들 수놈 따라 날아 돌고
又聞子規啼 夜月愁空山
우문자규제 야월수공산
또한 두견새 밤마다 울어 빈 산을 슬퍼할 따름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촉도지난 난어상청천
촉으로 가는 길 가기 어려워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使人聽此凋朱顔 連峰去天不盈尺
사인청차조주안 연봉거천부영척
그 곳 말만 들어도 홍안소년 백발 노인으로 시들 것을
연봉은 하늘과 한 자도 못되고
枯松倒掛倚絶壁 飛湍瀑流爭喧匯
고송도괘의절벽 비단폭류쟁훤회
매마른 소나무 절벽에 거꾸로 매달렸고
내닫는 여울과 튀는 폭포수 서로 다투어 소란하고
砯崖轉石萬壑雷
빙애전석만학뇌
벼랑을 치고 돌을 굴려온 골짜기 우레소리 들리네.
其險也如此
기험야여차
이렇듯 험란 하거늘
嗟爾遠道之人 胡爲乎來哉
차이원도지인 호위호내재
그대 먼 길 따라 온 손이여 어이하여 왔는가 ?
劍閣崢嶸而崔嵬
검각쟁영이최외
검각은 우뚝뾰죽 높이 솟아
一夫當關 萬夫莫開
일부당관 만부막개
한사람이 관문 막으면 만 사람이 관문 뚫지 못하네
所守或匪親 化爲狼與豺
소수혹비친 화위낭여시
지키는 이 친족 아니면 언제 이리 승냥이 될지 몰라
朝避猛虎 夕避長蛇
조피맹호 석피장사
아침에 모진 호랑이 피하고 밤에 긴 뱀을 피해도
磨牙 血 殺人如麻
마아연혈 살인여마
이를 갈고 피를 빨아 마귀처럼 사람을 죽이네.
錦城雖云樂 不如早還家
금성수운낙 부여조환가
금성이 비록 좋다고 하나 집으로 돌아감만 못하고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촉도지난 난어상청천
촉으로 가기 어려워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
側身西望常咨嗟
측신서망상자차
몸 추켜세우고 서쪽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네.
이백기념관이 있는 강유시는 성도시내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곳이다. 다만 일행중의 김00교수가 동양 고전에 심취해 있는 연구원인 관계로 배움의 기회로 여기는 우리는 꽤나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강유시에 접어들 때부터 느낀 점은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계획도시로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내 전체가 새로운 단장을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새로 건설되는 집들은 거의 흰색 벽면으로 깔끔하게 단장을 해 한눈에 계획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관내에는 태백당, 태백서옥, 효아재,회 사헌 등의 건축물과 서화전시관, 석우상, 이백조각상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서화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은 명,청시대 때부터 근대에 이르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나 모두 둘러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기념관은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둘러보았는데, 이백의 대표작인 정야사(靜夜思)가 씌어진 곳에서는 이 시를 노래로 불러 일행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백을 그린 작품이나 조각을 보면, 이백이 얼마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술과 풍류를 아는 시인으로서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강유시는 온통 이백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길가에는 이백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이 곳곳에 나붙어 있고 이를 문화상품으로 적극 활용하는 듯 하다고 했으며 이백과 관련된 곳이면 뭐든 이용하려 한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를 산 대문장가 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둘은 각각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 삶에 있어서만큼은 판이하였다. 이러한 점은 두 사람의 작품에도 그대로 들어나 웬만한 사람은 작품만 보고도 누구의 작품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번 여행 중에 참으로 인상 깊었던 일은 공부사(시사당을 지나 자리 잡은 공부사. '공부'는 두보가 청두(省都)에서 얻은 벼슬에서 이름을 따왔다. - 두보의 찰흙 상이 안치된 공부사 내부. 지금의 두보초당은 명, 청 시대 때 중수한 것이다.) 앞의 광장에서 긴 막대에다 스펀지를 끼워서 마치 큰 붓과 같이 만들어서 물을 찍어 보도 위에 글씨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차림새로 보아 넉넉지는 않는 모습이었으나 글씨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글씨 또한 명필수준이었음을 잊을 수 가 없다.
일행 중의 동국대 김00교수께서는 정년퇴직 후에 서예를 계획했으나 생각을 바꿔야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시던 말씀이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여행 중의 식사는 비교적 무난한 편이었으나, 음식을 비교적 많이 가리는 내게는 여행 중 가장 불편했던 문제 중의 하나였다.
식사는 "살아 있는 것이면 뭐든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늘 메뉴에 포함되어 있었고, 갈 때만 해도 사천 지역의 음식이 상당히 맵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실제 음식을 먹어본 바로는 예상과는 달리 별로 매운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향신료의 향이 너무 진하다는 것과 맵기보다는 예상과 달리 다소 짜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상과 일치하는 것은 중국 음식 특유의 기름기가 많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쨌던 이 또한 즐거우면서도 곤혹스러운 새로운 문화 체험의 하나였다. 더불어 향후 유사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음식을 많이 가리는 사람에게는 여행 전에 이 부분에 상당히 신경을 쓰라고 권하고 싶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종일 뿌연 안개와 습한 날씨에 묻혀 있는 성도의 시계는 늘 오후 4시에 멈춰져 있는 것 같다. 비로소 '촉나라 개는 해만 보면 짖는다'는 가이드의 말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둘째 날 저녁이 지나면서부터 음식에서 만큼은 얼큰한 라면과 짝퉁 중화요리인 짜장면이 왜 그리도 간절한지, 식사 시간 내내 귀국을 하면 맨 먼저 라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식사 후 들른 곳은 금성죽원(錦城竹園)으로, 일명 설도공원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공원의 규모는 웬만한 아파트 단지를 능가하는 13만 평방미터에 이르는데, 공원 내에는 망강루를 비롯해서 5채의 누각이 남아 있다. 망강루는 그 높이가 거의 10층 이상 규모의 건물과 맞먹는 27.9m에 이르는데 이곳에 올라 강 건너를 바라보면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성도의 또 다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세와 현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 망양루가 바로 그곳이다.
성도의 공원들을 둘러보며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어느 공원에서나 쉽게 대나무군(群)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나무가 곧은 선비의 지조를 의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보 초당, 이백 기념관, 청양루 등과 금성죽원 이후에 들러본 무후사 등에서도 늘 느꼈던 부분이다.
하지만 금성죽원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공원에 보았던 대나무군은 그야 말로 왜소해 보일 뿐이다. 공원의 이름에서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공원 전체가 150여종에 달하는 대나무 숲으로 뒤덮혀 있다. 때문에 금성죽원은 설도공원이라는 또 다른 이름 외에 죽자공원(竹子公園)으로 불러지기도 한다.
금성죽원이 설도공원(薛濤公園)으로도 불리워지는 것은 공원 내에 800년대를 전후해 시와 행서에 능했던 여류문인 설도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설도의 유적으로는 설도정(薛濤井), 완전정(浣箋亭), 음시루 초석(吟詩樓礎石) 등이 있으며 설도의 무덤 또한 이곳에 있다.
설도(薛濤)[백과 사전]
중국 당나라의 시인(779~830).설도(薛濤)의 자는 홍도(洪度)홍도(弘度). 성도(成都)에서 어렸을 때부터 시. 문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설도(薛濤)의 선조는 당나라의 즉천무후(則天武后) 시대의 유명한 장수로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케 한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 오며 도교의 사제로 명문가의 후예였으나 실연한 사연으로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지냈으며 비분 상심의 감정을 붓 끝에 모아 시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생몰 년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두보가 사망한 해에 그녀의 나이가 두 서너 살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장안(長安)출생이었지만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게 되고 모친도 곧이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설도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어린 나이에 악기(樂妓 - 기예(技藝)를 하는 기녀 - 몸을 파는 기생은 아님)가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기 드문 재녀(才女)로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뛰어난 미모로 당시 사천절도사를 지낸 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여자에게 그런 선례가 없다고 반대하는 참모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도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등과 교류가 많았다고 전해 온다.
특히 설도(薛濤)는 원진(元鎭)과의 정분이 각별하였다고 한다.
원진이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 사천감찰어사로 오게 되었는데 설도(薛濤)는 당시 나이가 10년이나 연하인 원진과 정분이 나게 되었으나 이미 아내가 있는 원진은 설도와 며칠을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나고 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서 평생 동안 홀로 지냈다고 한다.
원진은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정혼 했으나 타고난 난봉끼로 원진은 이를 배신하고 당시 절강성 소홍의 유명한 명기였던 유재춘이라는 여자를 농락하여 자살케 한 바도 있으며 그러고도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을 해서 출세한 인물임을 뒤늦게 알게 된 설도는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원진은 스스로 깨달은바가 있어 당대에 유명한 앵앵전(鶯鶯傳)을 쓰고 훗날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주제가 되었다.
설도는 머리도 몸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를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시를 써서 전송하는 시전(詩箋)으로 썼다고 며 이 설도전을 황실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진품(珍品)이 되었다고 한다.
시성(詩聖) 두보는 만년에 성도의 서쪽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살다가 죽었는데 설도도 만년에 그 근처에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菖蒲)와 대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청(淸)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우고 그녀가 좋아 했던 대나무를 심어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가면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었다는 설도정(薛濤井)과 설도전을 만들던 완전정(浣箋亭)을 세우고 누정에서 시를 읊었다는 음시루(吟詩樓)의 초석이 있으며 시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를 1백40여 종이나 심어 숲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여류시인 설도의 춘망사를 소개하자면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진 시인 김억이 번안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동심초'는 '춘망사'의 일부분이라고 합니다.
춘망사(春望詞)
花 開 不 同 賞 (화개불동상) 꽃이 펴도 함께 바라볼 수(이) 없고
花 落 不 同 悲 (화락불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이) 없네
欲 問 相 思 處 (욕문상사처)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花 開 花 落 時 (화개화락시) 꽃이 피고 지는 때에 흐르지
攬 草 結 同 心 (남초결동심) 풀 뜯어 동심으로 매듭 지어
將 以 遺 知 音 (장이유지음) 님께 보내려 생각했건만
春 愁 正 斷 絶 (춘수정단절) 봄 시름에 속절없이 끊겨 버리고
春 鳥 復 哀 吟 (춘조부애음) 봄 새는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 花 日 將 老 (풍화일장로)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 期 猶 渺 渺 (가기유묘묘) 아름다운 기약 아직도 아득하여라
不 結 同 心 人 (불결동심인) 한맘으로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 結 同 心 草 (공결동심초) 헛되이 동심초만 맺고 있구나
那 堪 花 滿 枝 (나감화만지)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飜 作 兩 相 思 (번작량상사) 날리며 그리움으로 번지는구나
玉 箸 垂 朝 鏡 (옥저수조경) 옥 같은 눈물 아침 거울에 어리는데
春 風 知 不 知 (춘풍지불지) 봄바람아 너는 아는가 모르는가
동심초
1.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2.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성도 내 유적 중 마지막 답사지는 삼국지의 전당으로 불린다는 무후사(武候祠)로, 일행이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아직도 한소열 묘(漢昭烈廟)인데, 이는 제갈공명을 일컫는 무후가 한소열의 신하이기 때문이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가 흔히 접했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묘사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에 들르면 삼국지연의를 통해 자주 접했던 유비와 제갈량을 비롯,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조상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특히 삼국지연의가 촉한의 입장에서 서술했던 관계로, 삼국의 다른 이국이었던 위나 오의 인물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공명을 모신 무후사는 소열의 사당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소열의 사당에서 몇 계단 내려가야 한다. 이는 공명이 유비의 신하였기 때문으로 군신관계라는 뿌리깊은 유교 사상이 저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후사에 들어서면, 무후사 좌우에 공명이 후주에 올린 전후출사표(前後出師表)가 유려한 필치로 쓰여 있다. 출사표는 공명의 선제 유비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후주 유선에 대한 당부의 글로 후세에 이르러서도 참다운 신하의 상을 보여주는 지침서라 할 만큼, 나라 사랑이 절절이 나타나 있는 명문이다.
출사표(出師表)는 원래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表文)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중국 삼국 시대의 촉한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제갈량의 출사표로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았다는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그 당시의 죽은 선제 소열제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담겨 있는 글로 오늘날까지 크게 칭송받고 있다.
전출사표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년)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184~234)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다.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전해지며 그 원문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전출사표(前出師表) 제갈량(諸葛亮)
臣亮言: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조 .今天下三分,益州疲敝,此誠危急存亡之秋也。
신양언: 선제창업미반이 중도붕조하시고, 금천하삼분에 익주피폐하니, 차성위급존망지추야로 소이다.
然侍衛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蓋追先帝之殊遇,欲報之於陛下也。
연이나 시위지신이 불해어내하고 충지지사 망신어외자는 개추선제지수우하여 욕보지어폐하야니이다.
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之遺德,恢宏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引喩失義,以塞忠諫之路也。
성의개장성청하사 이관선제지유덕하며 회홍지사지기요, 불의망자비박하야 인유실의하야 이색충간지로야니이다.
宮中府中,俱爲一體;陟罰臧否,不宜異同: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宜付有司,論其刑賞,以昭陛下平明之治:
궁중부중이 구위일체하야 척벌장부를 불의이동이라, 약유작간범과와 급위충선자는 의부유사하야 논기형상하야 이소폐하평명지치요:
不宜偏私,使內外異法也。侍中侍郞郭攸之、費褘、董允等,此皆良實,志慮忠純,是以先帝簡拔以遺陛。
불의 편사하야 사내외이법야니이다. 시중 시랑 곽유지 비위 동윤등은 차개 양실하고 지려 충순이라, 시이선제간발하야 이유폐하니이다.
愚以爲宮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然後施行,必得裨補闕漏,有所廣益。
우이위궁중지사는 사무대소이 실이자지 연후 시행하시면, 필득비보궐누하여 유소광익이요,
將軍向寵,性行淑均,暢曉軍事,試用之於昔日,先帝稱之曰「能」,是以衆議擧寵以爲督。
장군 향총은 성행이 숙균하고 효창 군사하여 시용지어석일에 선제칭지왈 [능이라]하였스니, 시이중의거총이위독하니,`
愚以爲營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必能使行陣和穆,優劣得所也。
우이위정중지사는 사무대소이 실이자지하시면 필능사행지화목하고 우열득소야니이다.
親賢臣,遠小人,此先漢所以興隆也;親小人,遠賢臣,此後漢所以傾頹也。
친현신 원소인은 차 선한소이흥륜야요, 친소인 원현신은 차 후한소이경퇴야라,
先帝在時,每與臣論此事,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선제재시에 매여신으로 논차사에 미상불탄식 통한어 환령야시니이다.
侍中、尙書、長史、參軍,此悉貞亮死節之臣也。願陛下親之,信之,則漢室之隆,可計日而待也。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차실 정량 사절지신야니이다. 원폐하는 친지, 신지즉 한실지융을 가계일이대야니이다.
臣本布衣,躬耕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
신본포의로 궁경남양하여 구전성명어난세하고 불구문달어제후하니,
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馳驅。
선제불이신비비하시고 외자왕굴하사 삼고신어초려지중하야 자신이당세지사하시니 유시감격하여 수허선제이치구라.
後値傾覆,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先帝知臣謹愼,故臨崩寄臣以大事也。
후치경복하여 수임어패군지제하고 봉명어위란지간이 이래 이십유일년의로소이다.
선제지신근신고로 임붕에 기신이 대사야시니이다.
受命以來,夙夜憂慮,恐付託不效,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深入不毛。
수명이래로 숙야우려하여 공부탁불효하야 이상선제지명이라, 고로 오월도로하여 심입불모라.
今南方已定,甲兵已足,當奬帥三軍,北定中原,庶竭駑鈍,攘除姦凶,興復漢室,還於舊都:
금남방이 이정하고 갑병이 이족하니 당장사삼군하여 북정중원하여 서갈노둔하여 양제간흉하고 흥복한실하여 환어구도라.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至於斟酌損益,進盡忠言,則攸之、褘、允等之任也。
차 신소이보선제이충폐하지직분야오, 지어짐작손익하고 진진충언은 즉유지, 위, 윤등지 임야로소이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不效則治臣之罪,以告先帝之靈?若無興復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以彰其慢。
원폐하탁신이 토적흥복지호하사 불효즉치신지죄하시고, 이고선제지령하소서.
약무흥복지언즉 책유지, 위, 윤등지 구하사, 이창기만하소서.
陛下亦宜自謀,以諮諏善道,察納雅言,深追先帝遺詔。臣不勝受恩感激!今當遠離,臨表涕泣,不知所云。
폐하역의자모하여 이자추선도하여 찰남아언하여 심추선제유조하소서.
신불승수은감격이라 금당원리에 임표체읍하여 부지소운이로소이다.
전 출사표(풀이) 제갈량
선제(촉한의 소열황제인 유비)께서 창업하신지 반도 안돼 중도에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져 익주가 피폐해 졌으니, 이는 실로 위급존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시위하는 신하들이 안에서 마음을 놓지 않고 충성스럽고 뜻있는 군사들이 밖에서 자신의 안위조차 잊음은, 선제의 특별하신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에게 그것을 갚고자 함이오니, 진실로 마땅히 성인의 덕을 펴고 베푸시어 그것으로 선제의 남기신 덕을 빛내시고 지사의 기개를 널리 하실 일이요, 스스로를 재주가 없다 여기시어 옳음을 잃어버림으로써 충성스런 간언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궁중과 승상부는 모두 하나의 몸이오니 상줌과 벌줌 착함과 착하지 않음을 달리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간사한 일을 한자와 죄를 지은 자들과 충성스럽고 착한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유사에게 맡겨 그 죄와 상을 논의함으로써 폐하의 공명정대하신 이치를 밝히실 일이요, 치우치고 사사롭게 처리하여 안팎으로 하여금 법을 달리하셔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시중시랑인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은 이들은 모두 다 어질고 착실하며 뜻과 사려가 충성스럽고 순수하니, 이러한 까닭으로 선제께서 골라 뽑아 폐하게 내려 주신 것이오니, 제 생각에는 궁중의 일들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반드시 빠뜨리고 부족한 것을 메꾸어 더욱 득 됨이 있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착하고 공평하고 군사의 일에 밝아 시험 삼아 지난날에 임용됨에 선제께서 능력이 있노라 칭송하셨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모두들의 의논으로 상총을 도독으로 천거한 것이니, 저의 생각에는 군중의 일들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두 그에게 물으신다면, 반드시 진을 행함에는 화목하며 우열을 얻을 것입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배를 멀리함은. 이는 선한(전한)의 흥륭했던 까닭이요,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어진신하를 멀리 함은 이는 후한이 기울고 퇴폐한 까인 것입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 언제나 신과 더불어 이 일에 대하여 의논하시면서 환제와 영제를 탄식하고 통한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시중상서와 장사 참군은 이들은 모두 올곧은 믿음으로 죽어서도 절조를 바꾸지 않을 사람들이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믿어주신다면 한실의 흥륭을 가히 날을 헤아리면서 기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일개 백성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면서 구차하게 난세에서 목숨을 유지하였지 제후들에게서 벼슬로 출세하고자 하지 않았었는데, 선제께서는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를 굽히시어 저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오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러한 이유로 감격하여 드디어 선제의 청을 허락하여 따라다녔었는데, 후에 기울고 뒤집어짐을 당하여 임무를 패군하는 때에 맡고 명을 위급하고 어려운 사이에 받듦이 벌써 21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의 근신함을 아시었기 때문에 돌아가실 즈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으니, 명을 받은 이래 새벽 일찍부터 밤늦도록 근심하고 탄식하여 혹시라도 맡기신 일에 효험이 없어 선제의 밝으심을 손상시킬까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숙이 들어가 남만지방을 이미 평정하여 병갑이 이미 풍족해 진지라, 마땅히 3군을 이끌고 북으로 중원을 정벌하여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간사한 흉적들을 없애 한실을 다시 일으켜 옛 도읍지(장안)로 돌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선제의 두터우신 은혜를 갚고 폐하에게 충성하는 직분인 것입니다.
손해와 이익을 짐작하여 나아가 충성스런 말을 다하는 일에 대해서는 유지 위 윤등의 임무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저에게는 적을 토벌하여 한실을 다시 일으키는 효험을 맡기시어, 효험이 없다면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그로써 선제의 영령에 고하시고, 유지 위 윤등의 잘못을 꾸짖어 그로써 그들의 태만함을 징창하시고 폐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를 도모하사 좋은 길로 물으시고 아름다운 말을 살펴 받아들여 깊이 선제의 남기신 말씀을 좇으시오 소서.
신은 받은 은혜를 못 이겨 감격하여 이제 멀리 길 떠남에 당하여 표문(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워라 말 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출처] 전출사표(前出師表)|작성자 영천선비
후출사표
중국 삼국시대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184~234)이 당시 위(魏)나라와의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세를 재정비한 후에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올린 두번째 상소문이다. 1차 북벌 이전에도 제갈량은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에 후세에선 이 출사표를 후출사표라 부른다. 내용이 전출사표와 더불어 매끄러우나 후세 사람의 윤색이라는 평이 있고 조작된 것이라는 평이 있다.
후출사표(後出師表)-제갈량(諸葛亮)
先帝慮漢賊不兩立(선제려한적불량립)하고 : 선제께서 염려하시기를, 한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王業不偏安(왕업불편안)이라 : 왕업은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故(고)로 : 그러므로
託臣以討賊也(탁신이토적야)니이다 :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以先帝之明(이선제지명)으로 : 선제의 밝으심으로은
量臣之才(양신지재)하시되 :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되
固知臣伐賊(고지신벌적)이 : 진실로 알고 계시기를, 신이 역적을 치는 데에
才弱賊彊也(재약적강야)니이다 : 저의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然(연)이나 : 그러나
不伐賊(불벌적)이면 : 역적을 치지 않으면
王業亦亡(왕업역망)이니 : 또한 왕업이 망할 것이니
惟坐而待亡(유좌이대망)으론 : 다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孰與伐之(숙여벌지)리이까 : 누구와 더불어 그것을 치겠습니까
是故(시고)로 : 이러한 까닭에
託臣而不疑也(탁신이불의야)시니이다 : 신에게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臣受命之日(신수명지일)에 : 신은 그 같은 선제의 명을 받은 뒤로
寢不安席(침불안석)하며 :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食不甘味(식불감미)하여 :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아니했습니다.
思惟北征(사유북정)이면 : 생각하기를, 북으로 위를 치려하면
宜先入南(의선입남)일새 : 의당히 먼저 남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故(고)로 : 그래서
五月渡瀘(오월도로)하여 :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너
深入不毛(심입불모)하여 :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幷日而食(병일이식)하니이다 :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臣非不自惜也(신비불자석야)나 : 신이 자신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지만
顧王業不可得偏安於蜀都(고왕업불가득편안어촉도)니 : 왕업을 돌아보니, 성도에서 만족해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故(고)로 : 그래서
冒危難(모위난)하여 :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以奉先帝之遺意(이봉선제지유의)어늘 :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而議者謂爲非計(이의자위위비계)니이다 :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했었습니다.
今賊適疲於西(금적적피어서)하고 : 이제 적은 마침 서쪽에서 지쳐 있고
又務於東(우무어동)이니이다 : 동쪽에서도 오나라 에게 힘을 다 쓴 끝입니다.
兵法(병법)에 : 병법에
乘勞(승로)라 하니 :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此進趨之時也(차진추지시야)니이다 :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謹陳其事如左(근진기사여좌)하노이다 : 그 일에 관해 삼가 아뢰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高帝明並日月(고제명병일월)하시고 : 고제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나 달과 같고
謀臣淵深(모신연심)이나 : 곁에서 돕는 신하들은 그 슬기로음이 깊은 못과 같습니다
然涉險被創(연섭험피창)하여 : 그러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危然後安(위연후안)하니이다 :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시었습니다.
今陛下未及高帝(금폐하미급고제)하시고 :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謀臣不如良平(모신불여량평)이어늘 :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이나 진평만 못하시면서도
而欲以長策取勝(이욕이장책취승)하여 : 긴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시며
坐定天下(좌정천하)하니 :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此(차) 는: 이것이 바
臣之未解一也(신지미해일야)니이다 : 로 신이 아직 알지 못할 첫번째 일입니다.
劉繇王朗(유요왕랑)은 : 유요와 왕랑은
各據州郡(각거주군)하여 : 모두 일찍이 큰 고을을 차지하여,
論安言計(논안언계)에 : 평안함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는
動引聖人(동인성인)하되 : 걸핏하면 성인의 말을 인용하였으나
群疑滿腹(군의만복)하고 : 여러 의문은 뱃속에 가득하고
衆難塞胸(중난색흉)하여 :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가 꽉 메게 했을 뿐입니다.
今歲不戰(금세불전)하고 : 올해도 싸우지 아니하고
明年不征(명년불정)이라가 : 이듬해도 싸우러 가지 아니하다가
使孫策坐大(사손책좌대)하여 : 마침내는 손권이 앉은 채로
遂幷江東(수병강동)하니 : 마침내 강동을 차지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此(차)는 : 이것이
臣之未解二也(신지미해이야)니이다 : 바로 신이 풀지 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曹操智計殊絶於人(조조지계수절어인)하여 :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其用兵也(기용병야)가 : 군사를 부림에는
髣髴孫吳(방불손오)나 : 손자·오자를 닮았으나,
然困於南陽(연곤어남양)하고 : 남양에서 곤궁에 빠지고
險於烏巢(험어오소)하고 : 오소에서 험한 꼴을 당하며,
危於祁連(위어기련)하고 : 기련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偪於黎陽(핍어려양)하고 : 여양에서 쫓기고,
幾敗北山(기패북산)하고 : 북산에서 거의 패망하고,
殆死潼關(태사동관)하여 : 동관에서는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然後僞定一時爾(연후위정일시이)어늘 : 그러한 뒤에야 한때의 안정을 얻에 되었습니다.
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황신재약이욕이불위이정지)하니 : 그런데 하물며 신하들이 재주도 약하면서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하니
此(차)는 : 이 점이
臣之未解三也(신지미해삼야)니이다 : 그게 신이 아직도 알지 못할 세번째 일입니다.
曹操五攻昌覇不下(조조오공창패불하)하고 :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四越巢湖不成(사월소호불성)하고 :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任用李服而李服圖之(임용리복이리복도지)하고 : 이복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委任夏侯而夏侯敗亡(위임하후이하후패망)하니 : 하후에게 맡겼으나 하후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先帝每稱操爲能(선제매칭조위능)하시되 :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가 능력 있어 할 수 있다고 하였어도
猶有此失(유유차실)이어늘 : 오히려 그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況臣駑下(황신노하)하니 : 하물며 신같이 무디고 재주없는 사람이
何能必勝(하능필승)이리오 : 어떻게 반드시 이기길 수 있겠습니까
此(차)는 : 이것이
臣之未解四也(신지미해사야)니이다 :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네번째 일입니다.
自臣到漢中(자신도한중)으로 : 신이 한중에 온 때부터
中間朞年耳(중간기년이)나 : 한 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然喪趙雲陽群馬玉閻芝丁立白壽劉郃鄧銅等(연상조운양군마옥염지정립백수유합등동등)과 : 그러나 조운·양군·마옥·염지·정립·백수·유합·동등과
及曲長屯將七十餘人(급곡장둔장칠십여인)과 : 부나 곡에 주둔하는 장수 일흔 여명
突將無前(돌장무전)의 : 가로 막는 적이 없는 돌진한 장군의
賨叟靑羌散騎武騎一千餘人(종수청강산기무기일천여인)하니 : 빈수·청광이며 산기·무기등 일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此皆數十年之內(차개수십년지내)의 :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所糾合四方之精銳(소규합사방지정예)요 : 여러 지방에서 모아들인 정예병이요
非一州之所有(비일주지소유)니이다 : 한 고을에서 얻을 수 있는 병사들은 아니었습니다.
若復數年(약부수년)이면 :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則損三分之二也(칙손삼분지이야)리니 : 이들 셋 중 둘은 줄어들 것이니
當何以圖敵(당하이도적)이리니까 :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此(차)는 : 이점이
臣之未解五也(신지미해오야)니이다 :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다섯번째 일입니다.
今民窮兵疲(금민궁병피)라도 :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而事不可息(이사불가식)이니 :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事不可息(사불가식)이면 :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면
則住與行(칙주여행)이 : 머물러 방어하는 것이나 나아가 싸우는 것이나
勞費正等(노비정등)이어늘 : 그 노력과 비용은 같아
而不及蚤圖之(이불급조도지)하고 :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欲以一州之地(욕이일주지지)로 :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으로
與賊持久(여적지구)하니 : 적과 지구전을 하려고 합니다
此(차)는 : 이점이
臣之未解六也(신지미해육야)니이다 : 신이 아직도 알 수 없는 여섯번째 일입니다.
夫難平者事也(부난평자사야)니이다 : 무릇 어려움을 평정하는 일은 하나의 큰 일입니다
昔先齊敗軍於楚(석선제패군어초)하시니 : 지난날 선제께서 초 땅에서 싸움에 패전하셨습니다
當此時(당차시)하여 : 이 때를 당하여
曺操拊手(조조부수)하여 : 조조는 손뼉을 치며
謂天下已定(위천하이정)이러니 :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했습니다.
然後先帝東連吳越(연후선제동련오월)하고 : 그러나 뒤에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월과 동맹을 맺고
西取巴蜀(서취파촉)하여 : 서쪽으로 파촉을 점령하고
擧兵北征(거병북정)에 : 군사를 이끌고 북쪽을 정벌함에
夏侯授首(하후수수)하니 : 마침내는 하후연에게서 목을 내놓게 되었으니
此操之失計(차조지실계)요 :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서
而漢事將成也(이한사장성야)니이다 : 우리 한나라의 천하동일 과업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然後吳更違盟(연후오갱위맹)하여 : 그러한 뒤에 오가 다시 맹약을 어겨
關羽毁敗(관우훼패)하고 : 관우는 싸움에 져서 죽고
秭歸蹉跌(자귀차질)하며 : 선제께서는 자귀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曹丕稱帝(조비칭제)하니 : 조비는 다시 천자를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凡事如是(범사여시)하여 : 무릇 이리 이와 같아
難可逆見(난가역견)이니이다 : 미리 헤아려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臣鞠躬盡瘁(신국궁진췌)하여 :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死而後已(사이후이)요 :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
至於成敗利鈍(지어성패이둔)하여는 :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非臣之明所能逆覩也(비신지명소능역도야)로소이다 : 신의 총명이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무후사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곳은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으로, 다른 왕릉에 비해 그 규모가 초라하다고 느껴질 만큼 자그마했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 천천히 보고 또 보려합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