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잦은바위골 - 희야봉 - (천화대) - 왕관봉 - 설악골

[권재형]

왕관봉정상에서...

2003년 6월 7일

천 화 대

그 지고의 경치, 장난꾸러기 조물주가 맘껏 주물러 기묘한 모양으로 세워놓은 곳. 저 발아래 적벽과 장군봉이 우리를 우러르고 천불동 장수들이 면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걸린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이 머리 위에 빙 둘러쳐져 있고 바다 위에 울산바위가 떠 있는 곳, 가슴은 벅차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냥 흐뭇하다. 대원들은 싱글벙글 웃음만 흘린다.

이렇게 시작되는 산행기록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2014년 9월 21일

용소골에서 출발하여 범봉까지 범봉 안부에서 잦은바위골 내려가려고 하였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서 설악골로 내려섰지요. 그날 꼭 다시 찾아오고야 말겠다면서 다짐하였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2015년 7월 5일 새벽달을 보며

오늘은 잦은바위골에서 희야봉과 왕관봉을 향해 올라가는 코스입니다. 새벽달이 권금성 위쪽 중천을 밝히고 있습니다. 날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지난 목요일 밤에 자동차사고가 나는 불길한 꿈을 꾸었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계곡에 발을 들입니다.

잦은바위골에 들다

사면을 따르는 순조로운 너무나 순조로운 길이 오히려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계곡으로 떨어져 내려갑니다.

20m폭포는 층층이 휘돌아 비단같이 떨어지는 폭포수였습니다. 밧줄이 없으면 오르지 못하는 곳곳에는 밧줄이 내려져 있어서 이동은 신속했습니다. 쇄기바위가 신비롭게 걸쳐있는 위험지대도 지나고 바나나바위를 보면서 내려선 계곡에서는 얼기설기 걸쳐놓은 슬링을 잡고 씨름 하면서 길쭉한 동굴이 파인 50m폭포에 도착했습니다. 낫처럼 기억자로 굽어 떨어지는 폭포는 수억 년 세월의 힘으로 저 동굴을 파 들어갔을 것입니다. 폭포 옆으로 올라가는 바윗길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50m 폭포는 위에서 보면 아찔해서 더욱 매력적입니다. 카메라맨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폭포에 바짝 다가서서 셔터를 눌러댑니다.

100m 폭포, 설악산 독주폭포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장대한 폭포입니다. 물줄기만 좀 더 굵게 떨어진다면 대승폭포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아득한 폭포가 아늑하다 느껴지면 일어서야할 때입니다.

희야봉에 오르다

밧줄을 잡고 몸을 바위에 비비며 희야봉안부에 올랐습니다. 지체 없이 희야봉으로 향합니다.

희야봉은 장도를 길게 누인 형상입니다. 그 칼날의 서슬이 번쩍번쩍 빛을 발해서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산에 들면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범도 잡을 만큼 용맹한 대원들이 선뜻 칼날에 붙습니다. 그리고 번개같이 희야봉을 농락합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비발디의 여름이 저 범봉에서 이곳 희야봉으로 내려옵니다. 잦은바위골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올라옵니다. 희야봉에 올라앉은 대원들은 천상의 음악에 맞춰 칼날 위에 서서 춤을 춥니다. 저 맨 꼭대기에 고신님이 우뚝 서있습니다.

희야봉 안부에서 점심을 먹다

한바탕 굿판을 끝낸 뒤여서인지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도시락을 떠보지만 바위군상들이 방해를 놓아서 밥맛마저 없습니다. 하늘정원에서의 식사는 실패입니다. 허겁지겁 도시락을 접어 넣고 왕관봉으로 향합니다.

왕관봉에 오르다

희야봉 안부에서 왕관봉까지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바위군락이 제 멋대로 늘어선 그야말로 거대한 바위정원입니다. 이곳 릿지길에서 내려다보는 왕관봉은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참한 처자의 모습입니다. 이쯤에서 주변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저 맨 꼭대기 백두대간에는 공룡능선이 하늘에 맞닿아 있고 1275봉과 노인봉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습니다. 그 아래로 범봉과 희야봉까지 웅장한 바위능선은 동양화 한 폭이 됩니다. 건너편에 화채봉, 칠성봉, 집선봉, 권금성으로 이어지는 화채능선이 아득하게 둘러쌉니다. 동해에 솟은 울산바위는 그림의 배경과 같아서 주연이 되지 못합니다. 삐쭉빼쭉 바위를 오르고 돌아서 왕관봉 안부에 내려섰습니다. 위에서 그렇게 예쁘게 보였던 왕관봉이 여기서는 숨이 컥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위압적입니다. 그래도 나와는 구면인 만큼 우리 대원들에게만은 허락해 주십사하고 말을 걸어봅니다. 천화대릿지를 한눈에 보려면 왕관봉에 올라서야합니다. 의암님이 앞장서서 왕관봉에 손바닥을 댑니다. 그리고 번개같이 올라갑니다. 의암님 배낭에서 10m보조 자일을 끄집어내어 던져 올립니다. 의암님이 자일을 내려줍니다. 동화속의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착해서 내려준 튼튼한 동아줄입니다. 후다닥 무릎이 깨지는지 팔꿈치가 까지는지 그런 일은 사소한 일입니다. 재영님이 오르고 뒤이어 묵재님과 금아님이 노련한 솜씨로 왕관봉에 올랐습니다. 왕관봉 꼭대기에는 자일을 수십 겹 두를 수 있는 목탁 손잡이 같은 구멍이 뚫어져 있습니다. 자연이 빚어놓은 예술품인데 아무리 봐도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똑깍똑깍 초침이 돌아가는 속도와 같이 덜덜덜 다리가 떨리고 덜컹덜컹 심장이 뜁니다. 머리는 돌아내려가라고 지시하지만 몸은 왕관봉에 둘러쳐놓은 확보 줄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을 찬찬히 다독여봅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핍니다. 장엄한 경치보다는 같이 있는 금아님, 묵재님, 의암님, 재영님 얼굴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 나름 자신이 최고임을 자랑하는 석주길, 염라길, 흑범길, 칠형제봉릿지 등은 하찮게 보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았으니 이것으로 대만족입니다. 나는 후다닥 볼품없이 내려섰지만 뒤따라 내려오는 묵재님과 금아님은 천상의 선인(仙人)이 내려오듯 가뿐 사뿐 내려섭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설악산 바윗길에서 빠지라고 하면 서운해 하실 대청봉님과 나의 엇길 동기 달수님이 희야봉 안부에서 점심을 드시고 바로 등 뒤에 있는 왕관봉 하산 길을 외면하고 설악골로 내려선 사건입니다. 그 와중에도 왕관봉 꼭대기는 챙겼다는 환희의 한 토막입니다.

설악골에 내려서다

염라길과 흑범길을 좌우에 늘여 세우고 설악골을 향해 내려갑니다. 날씨는 맑아서 까닥까닥 마른 염라슬립(slip)을 내려가는 대원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룹니다. 왕관봉을 오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중희님의 하소연을 들을 때에는 나도 안타까워서 다시 돌아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음은 어쩌면 축복일지 모릅니다. 작년에 볼품없었던 설악골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맑은 소와 담은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여자 대원들은 여러 갈래의 폭포가 떨어지는 담에 들어 선녀의 날개옷을 벗었고 남자 대원들은 넓은 소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습니다. 나무꾼과 선녀의 그림이 완성되는 설악골 풍경화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화창한 날, 잦은바위골에 빠져들어 난관을 극복하며 희야봉과 왕관봉에 오를 수 있었음에, 또한 아무른 사고 없이 산행을 마칠 수 있었음에 대장님과 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동행에 같이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홀로 갈 수 없는 계곡이 있습니다.

함께 가야만 하는 산이 있습니다.

...

두렵고

설레고

떨리는

...

나무는 투명한 물에 들어

하늘이 되고

길은 열리지 않아

자일을 휘감고 오르는

이십

오십

일백

높아지는 만큼

곧추선 폭포

여기가 바로

잦은바위골!

칼바위 심장에 솜다리 보송보송

바위봉에 탄성 울리니 스르르 구름 흩어지고

범봉 저기 높디높게 솟았는데

어찌하여 너에게 왕관을 올렸을꼬?

...

칼잡이 희야봉에 왕관이라니요?

거인 범봉에 어울릴까요?

봉긋 비딱 애교스런

나 참 예쁘죠!!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여야만 받아주는 

그래서 더욱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달리고 또 매달리는 산이 있으니

하나는 지리요 또 하나는 설악이어라!

산 행 날 짜 : 2015년 7월 5일 일요일

산행지 날씨 : 구름 조금(영상15 - 영상23)

산 행 거 리 : 도상거리 약10km

산 행 시 간 : 9시간

대          원 : 권재형(마루금산악회)

행 정 지 역 :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솜다리(펌)

주요지점 통과시간

04시 10분 : 신흥사매표소 출발

05시 05분 : 잦은바위골 입구 도착

(이정표 비선대 1km, 대청봉7km)

05시 37분 : 20m폭포 도착

06시 33분 : 50m폭포 도착

06시 54분 : 100m폭포 도착

08시 09분 : 희야봉 도착

(라이프리지 안자일렌 필요, 맨손으로 정상 위험하지만 가능)

08시 50분 : 희야봉 안부에서 아침

(왕관봉 방향 좁은 길 잘 찾아야함)

09시 50분 : 왕관봉정상

(10m 자일 필요)

11시 57분 : 설악동입구 도착

12시 58분 : 설악산 C지구주차장 도착

(택시5명 6천원)

왕관봉정상

참고자료사진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