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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어버린 그곳
프리티 황희순
“영창아 영창대군을 어디로 데려갔느냐”
“네 이놈 주상! 내가 대비니라, 내가 네 어미니라”
“주상~ 영창을 데려다 주세요.” 하며 통곡하고 애원했던 인목대비의 한이 절절해 문틈이나 기둥에도 스며들어 미풍만 불어도 통곡의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곳.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비였던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위폐 시키고 광해군은 나이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인목대비의 품에서 떼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하였다가 죽게 하고 인목대비 또한 서인으로 폐출되어 오랜 세월 아픔을 겪으며 유폐되어있던 곳이 바로 서궁(덕수궁)이다.
사적 제 124호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원래 조선조 제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후에는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幽閉)되었던 곳으로 광해군은 이 경운궁을 다시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卽조堂)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즉조당과 석어당(昔御堂)만 남기고 그 밖의 건물들은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후 고종황제가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러시아 공관(公館)에서 환궁(還宮)하면서 다시 왕궁(王宮)으로 사용하기까지 270년 동안 별궁(別宮)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관에서 환궁 후 이곳을 경운궁이라 부르고 그 규모도 확장하였다. 그 후 1904년 궁궐 내에 불이나 많은 건물이 타버렸으며 1906년 불에 탄 건물을 복구하고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改名)하였다. 덕수궁 터에는 1909년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석조전(石造殿)이 세워졌으며 1938년에는 서관이 지어져 이왕직(李王職) 박물관(博物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 터에는 미국과 영국대사관을 비롯하여 지난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18,635평에 대한문(大漢門), 중화문(中和門), 광명문(光明門), 중화전(中和殿), 석어당(昔御堂), 준명당(俊明堂), 즉조당(卽조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석조전(石造殿) 등이 있다.
얼마 전 시청 쪽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앞에 보이는 덕수궁 정문에 마음이 끌렸다.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에 소풍시즌이 오면 짝꿍 손잡고 하나, 둘 구령을 붙여가며 그 길을 걸어서 봄, 가을 소풍으로 덕수궁, 창경원(창경궁)으로 다니던 생각에 친근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또 오랜만에 한가하게 시간도 남았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내가 늘 ‘나의 집이 궁궐이야’ 하며 친구 또는 언니, 오빠한테도 이야기해 기절해 넘어가게 만드는 공주근성이 살짝 손을 잡아 끌어당기고 있다.
나의 집이 어떻게 변했나, 들어가 봐야지 하는 묘한 설렘도 있고 여기 들렸다가 광화문 세종대왕 할아버지한테 인사가야지 하는 생각에 혼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데 천원이란다.
‘엄청 싸네. 예전에도 이랬나,’ 하며 의아한 마음으로 궁궐 문을 들어서려는데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다는 소리에 구경하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잠시 남대문 교대의식이 생각이 났다. 내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울 큰언니는 나를 아기처럼 데리고 다니며 버스를 탈 때면 당신이 먼저 카드를 찍고는 여기다 카드를 찍는 거야하며 내릴 때는 또 찍어야 한다면서 가르치고 또 설명을 하고…,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으면 내가 자폐나 뭐 그런 아이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만큼의 과잉보호를 하느라 이건 어쩌구, 저건 어쩌구 하면서 울 언니와 함께 남대문시장구경을 나왔을 때 남대문 교대식을 보고 신기하고 뿌듯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더니 울 언니는 여기뿐이 아니고 경복궁부터 덕수궁까지 있다고 설명을 했지만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된 것은 1996년부터라고 한다.
수문장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관청인 수문장청 소속, 종6품의 무관이며 궁성문의 수호책임자로 수문군을 지휘한다. 조선시대 왕궁에는 수문군이라는 군대가 있어 궁궐 문을 개폐,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영국왕실의 근위병 교대의식과 비견되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한국의 전통궁중문화 재현행사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수문자의 인솔 하에 참하(종9품)―수문군(기수6명, 군사8명)―승정원주서-액정서사약-취라척(11명)의 순서로 수문까지 300m 가량을 행진하여 궁을 지키던 수문장과 교대를 위해 도착한 수문장이 군호를 확인하고 약시함을 수문군의 참하가 교대군의 참하에게 인계한 후 엄고수의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수문군과 교대군이 마주서서 교대를 하는 것으로 종료된다.
교대의식의 임무
- 승정원 주서 : 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의 관리로 교대의식의 감독관
- 액정서 사약 : 궁성문의 열쇠를 관리하며 교대의식을 감독
- 수문장 : 궁성문을 경비하는 수문군의 책임자
- 참하 : 수문장을 보좌하는 임무수행
- 수문군 : 기수 4명과 군사 6병으로 구성되어 궁성문의 경비를 담당
- 엄고수 : 교대의식 중북으로 교대 간 신호를 보내는 임무수행
한편, 덕수궁 수문장의 교대식 진행절차를 보면
- 군호 하부의식 : 암호를 내리는 의식으로 암호는 매일 세 글자 이내로 정하여 국왕의 승낙을 받은 후 수문장 및 수문군에게 알려주는 절차이다.
- 군호응대 : 1, 2대 수문군들이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암호(군호)를 서로 묻고 답하는 절차이다. 이후 초엄→중엄→삼엄 단계로 이어진다.
초엄은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있는 약시함을 인계하는 절차, 중엄은 부신(증표)을 맞춰보고 순장패를 인계하는 절차 , 삼엄은 수문군들이 서로 교대하는 절차이다.
- 예필 : 왕궁수문장교대의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절차이다.
- 순라의식 : 교대의식을 마친 수문군들이 순찰하는 의식으로 절차가 마무리된다.
약 20여 분에 걸쳐 품위 있고 절도 있는 수문군의 교대의식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수문장 교대의식은 수문장과 수문군들이 금궁을 제대로 잘 지키는지 감독하는 문관이 있고 약시함(열쇄 보관함)의 인수인계 과정을 감독하는 이 등이 있어 삼엄한 경계를 유지 한다. 엄고수가 엄고(북)를 치면서부터 교대의식은 시작되며 취라척의 군악에 맞추어 진행 된다. 긴 창에 형형색색으로 꾸며져 부착한 깃발과 갑옷과 칼, 화살 등으로 잘 무장 돼 있다.
서울의 한복판에 옛 군악 소리가 울려 퍼지니까 도로에도 버스 안에서도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수문장 교대식은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도 열리고 있는데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담당하고 덕수궁은 서울시가 주관한다고 한다. 경복궁이 조선초기의 의식을 따른 것이라면 덕수궁은 조선후기의 의식을 따른 것으로 의상과 깃발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수문장 교대식은 비나 눈이 오는 날과 휴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11시, 2시, 3시30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열린다고 한다.
영국의 근위대 교대식과 비교해 하나도 뒤지지 않는 우리나라의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뿌듯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도 가볍게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는 순간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 미술관 전시홍보 현수막이었다. 나는 궁궐에 들어왔는데 미술관전시홍보라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참고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중화문의 문살은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로 뒤덮여 차마 민망해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중화전의 천장의 색은 시커먼 모습으로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고 기둥들만 새로 칠을 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저기 흘러내린 흔적과 바닥은 더러워서 볼 수가 없다. 임금님이 앉으셨던 곳은 그곳이 용상이기를 거부한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답고 화려한 색은 시커멓게 변해서 예전의 화려함이나 위엄은 찾을 수가 없고 건물마다 먼지가 쌓여있고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어 옆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는데 자국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궁궐을 어떻게 설명할까하는 생각에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사진조차 찍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뒤돌아 나오고 말았다.
내가 3년 전에 왔을 때에는 이렇게 먼지가 쌓이고 버려진 느낌은 아니었고 또한 전각을 보수하는 곳도 있어서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버려지는 느낌이다. 굳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을 표현하자면 폐궁이었다.
연못 옆에는 커피숍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손짓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옆의 미술관은 웅장한 모습으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너무 대조적인 모습에 말을 잊게 한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해서 조선시대의 화려했던 궁궐이 미술관 정원으로 전락해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전각 안의 가득한 먼지와 더러운 커튼 그리고 문살에 쌓인 먼지의 두께가 덕수궁의 지나온 삶의 무게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전통문화유산인 궁궐은 폐궁으로 만들어 놓고 옆의 시청건물은 문화유산이라고 보존하자면서 많은 투자를 해서 복원을 하니 건물을 하나도 훼손을 하면 되니 안 되니 하면서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서로 싸움을 하고 서로 우위에 있으려고 신문이나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서로 헐뜯기에 열을 올리면서 수백억대의 막대한 투자로 공사를 했는데도 많은 분들이 시청의 모습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는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런데 궁궐보다 시청이 더 값어치가 있을까?
예전에 남대문이 불에 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인재로 화재가 났지만 문화재보호를 위해 조심해서 불을 꺼야한다면서 제대로 불길을 잡지 못해 완전히 태워버리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 같이 애통하고 통곡을 하던 사람들이 지금의 덕수궁의 모습은 눈에 안 보이는지? 사람이나 물건이나 특히 건물은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금방 상하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폐가로 만들어 놓은 덕수궁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후회를 하고 안타까워하려는지? 있을 때 잘 지키고 보존하지 않으면 또 다시 남대문화재 같은 대참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덕수궁을 폐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문화재란!
문화재는 조상들이 남긴 건물·조각·공예품·서적·서예·고문서 등의 유물·유적 가운데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거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형문화재와 연주·무용·음악·공예·기술 등에서부터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무형문화재 및 기념물·민속자료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여 후세에 잘 물려주기 위해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였다.
분명, 덕수궁은 문화재이면서 조선시대 궁궐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현재의 모습은 예전의 웅장함이나 궁궐로서의 위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공원 같은 궁궐?
혹시 여러분은 언제 덕수궁에 다녀오셨습니까?
겉치레만 있는 궁궐 아닌 폐궁을 보고 외국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이라고 소개를 할까? 문화유산인 궁궐이 먼지만 가득 쌓여있고 금방 무너지게 생겼다고 하지 않을까? 지난번 남대문 불이 났던 때를 떠올리면서 한국 사람들은 겉 다르고 속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또는 자기네 나라의 문화유산도 지키고 가꿀 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비웃지나 않을지?
방금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들어온 고궁인데 실상은 이렇듯 먼지만 가득한 궁궐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돌아보는 사람도 남아있는 유산도 없어질까 두렵기만 하다.
한 지역의 공원도 꽃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다시 심고 가꾸며 나무를 잘라주고 먼지를 청소 한다. 그런데 궁궐이 공원보다 못해서 청소도 하지 않고 버려두는 것일까!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청소도 안하고 더러운 커튼에 문살 가득채운 먼지에….
그런데 외국인까지 관광을 오는데 조금 단장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궁궐을 공원화 시킨다고 커피숍을 만들고 벤치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이 공원 같은 궁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참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남아있는 유산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것을 가꾸고 지키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공원 같은 궁궐보다는 궁궐다운 공원을 만들 수는 없을까?
일산호수공원을 생각해본다. 그곳은 얼마를 들여서 공원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잔디보호”, “들어가지 마시오.” 이런 문구는 없다.
잔디밭에 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으며 자연경관을 구경하고 아이들은 마음껏 잔디위에서 뛰어놀고 또 넘어진다 해도 잔디라 쿠션역할을 해주니 다칠 염려도 없어서 부모들은 안심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며 쉼을 가진다. 공원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공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있는 우리나라의 공원을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뛰어놀고 싶어도 놀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다. 잔디조성은 눈으로만 보라고 있는 것이고 “잔디보호” “들어가지 마시오.” 만져서도 들어가서도 안 되는 곳이 공원이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초등(국민)학교 소풍을 덕수궁이나 창경궁(창경원)으로 (예전에 일본에서 창경궁을 격하시키려고 창경원이라 불렀고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길을 만들었다. 이것이 아마도 한국의 맥을 끊어버리려는 일본의 문화 말살정책의 하나였을 것이다.) 6년 동안 번갈아가며 갔었다. 그때는 전망 좋고 평평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동생들이랑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잔디밭에 둘러앉아서 수건돌리기, 보물찾기 등을 하고 반 친구들 하고도 마음껏 뛰어 놀았었다. 이제 그것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지금의 덕수궁을 보면서 어린 시절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놀고, 술래잡기며 보물찾기를 하고 식구들과 점심을 먹던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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