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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8:1-4 공감 (3)
컬투쇼에 보낸 사연입니다. ‘공감’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으며 들으세요.
이 사연을 보내 주신 분이 늦은 저녁 집에 가려고 버스에 탔습니다. 피곤해서 앉아마자 자려고 했는데, 바로 뒤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어머! 오랜만이다. 너 그거 알아, 과일 가게 김 씨랑 반찬 가게 옆에 네랑 바람 난 거 알아.”
“뭐, 그렇게 안 봤는데 웬 일이야? 어머 어머 어머”
처음에는 짜증이 났는데 듣고 보니 흥미진진한 거예요.
“반찬가게 아저씨가 옆에 네 한테 돈을 벌어오라고 그렇게 눈치를 주었나봐. 그런데 마치 과일 가게에서 사람 구한다고 해서 밀어 준거지.”
“세상에, 남편이 도 자리를 깔아줬네 깔아줬어!”
“그렇지 뭐야, 더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알고 지내는 고향 사람이었데!”
“어머나, 어머나! 과거가 있었는데, 그걸 남편이 모르고 마누라를 일하라고 집어넣은 거네.”
아침 드라마를 본 기분이었어요. 어느새 잠이 싹 달아나고 아줌마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제 난리가 났잖아. 글쎄 알고 보니 노총각 김 씨가 노총각이 아니었던 거야. 기러기 아빠였어, 그런데 여태 총각 형색을 한 거지.”
“어머 어머, 반찬 가게 옆에 네도 그걸 몰랐데?”
“몰랐어, 몰랐어! 어제 김 씨 마느라가 들어온 거야. 난리 난거지, 어제 개판 된 거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모르는 아줌마가 다가왔어요.
“아줌마,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하는데 결말을 못 듣고 내릴 것 같아서요. 결말만 빨리 이야기 해 주시면 안돼요.”
그러자 옆에 아줌마가 “그러면 안 되지, 이야기는 자세히 들어야 재미있지. 아줌마 먼저 가요.”
“그렇지 말고 빨리 말해줘요.”
결말이 궁금한 아줌마는 때를 썼어요. “빨리 내려야한다고요.”
그 이야기꾼 아줌마가 망설이다가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결말을 말해 주려고 했어요.
그 때, 건너편 할아버지가 “시끄러! 시끄러!” 짜증난 목소리로 소리쳤죠.
“빨리는 무슨 빨리여. 나는 3정거장이 지났어! 3정거장이 지났는데도 네가 듣고 있단 말이야. 그냥 말해 준대로 그냥 들어”
할아버지 버럭에 재촉하는 아줌마 어떻게 했을까요? 내리지도 않고 다시 자기 자리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꾼 아줌마께 완전 상냥한 말투로 “계속혀! 그래, 외국 갔던 김 씨 마누라가 들어온데 까지 했었어.” 그 이야기꾼 아줌마 한분으로 인해 버스 안이 순식간에 드라마 극장으로 변했어요. 반찬 가게 김 씨랑 과일 가게 옆에 네랑 어떻게 되었냐고요? 뽑아주면 알려 줄게요.
어머어머어머!, 저런저런!, 세상에! 공감 단어들입니다. 남자 둘은 이렇게 못합니다. 여자 둘만이 할 수 있는 대화와 공감입니다. 대단합니다.
장윤정의 ‘어머나’ 아시죠?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음악인 겸 매니저 윤명선 씨입니다. 어머나가 나오기까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2003년 어느 날 윤 씨가 길을 가는데 바로 앞에서 어떤 아기엄마가 ‘어머나!’ 하면서 대(大)자로 넘어졌습니다. 그 때 거의 동시에 바로 옆에서도 ‘어머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를 안고 가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아기가 손으로 얼굴을 치자 놀랐던 것입니다.
그날 ‘어머나’를 10번 이상 들었던 윤 씨는 ‘어머나!’ 이것이다. 무릎을 쳤습니다. 여자들은 놀라도 ‘어머나!’ 슬퍼도 ‘어머나!’ 기뻐도 ‘어머나!’ 반가워도 ‘어머나!’를 하는구나. 이렇게 중독성이 강하면서도 여성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말도 없겠다 싶었습니다. 갑자기 재미난 악상이 떠올랐고 ‘이걸 갖고 노래를 만들면 히트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0분도 채 안 되어 대중가요 ‘어머나’가 만들어졌습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장윤정 특유의 콧소리가 어우러져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게 한 것입니다. 가수 계은숙, 주현미, 송대관, 김혜연 등 8명의 가수에게 ‘노래가 가볍고 깊이가 없다’는 이유로 줄줄이 거절당했습니다. 주현미 씨는 제목을 바꾸면 부르겠다고 했지만 윤 씨가 거부했습니다. 작곡 1년 만에 8전9기 끝에 ‘어머나’로 초대형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보통 다음의 다섯 가지 수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첫째,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합니다. 전혀 듣지 않습니다. 둘째, ‘어’, ‘네네’ 하면서 듣는 척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화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어느 특정한 부분만 가려서 듣는 것입니다. 넷째, 신중한 경청으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에 집중해서 듣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 ‘그래서?’, ‘그러게 말이야’, ‘어머나’ 같은 말을 사용해서 상대방이 계속 말하도록 도와줍니다. 다섯째,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하는 대화 방법입니다. 엄마와 딸의 대화입니다.
“저 오늘 입사원서 제출했어요. 근데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돼요.”
“입사원서 낸 게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네, 지원자가 얼마나 많은지 경쟁률이 오십 대 일이래요.”
“경쟁률이 높아서 신경이 쓰이나보구나.”
“네, 더군다나 1차가 서류전형이라는데······”
“그래, 서류전형은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네, 특히 여자니까 더 그래요. 저 취직 못하면 어떡하죠?”
“그게 걱정이 되는 거구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적성에 맞고 여건도 좋은 자리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 보자.”
“난 엄마하고 이야기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요. 언제나 내 마음을 너무 잘 받아 주는 거 아세요?”
엄마는 딸이 한 말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거나 확인해 줌으로 딸은 하려던 말들을 계속 이어가서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마칠 수 있게 됩니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엄마, 나 피곤하고 졸려요”
“어 우리 아들이 피곤하구나”
“네. 오늘 야구를 해서 그런가 봐요.”
"운동도 피곤할 때까지 하면 안 돼” 이러고 싶지만, 들어주려면
“어, 오늘 야구를 해서 피곤하구나”
“네, 근데 너무 피곤해서 숙제를 하기 싫어요.”
“아니, 숙제를 안 하면 어떡해? 피곤해도 숙제는 해야지!” 말하고 싶지만,
“어~ 피곤해서 숙제하기도 힘든가 보구나.”
이쯤 되면 아이가 숙제를 안 하겠다고 할까봐 초조해서 충고나 훈계를 하고 싶어지지요? 그러나 그걸 넘기고 나면 “네, 정말 피곤해요. 그렇지만 숙제를 안 하면 안 되겠지요?”하고 아이가 조언을 구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때가 바로 부모님들이 충고나 훈계를 하시면 아이들이 잘 받아들이는 시점입니다.
공감하는 단어와 방법을 잘 기억해 두셨다가 말을 들을 때에 잘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과 구원의 메시야가 이사야 44-54장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초라하고 나약하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52:13~53:12절은 그 종의 고통스러운 모습과 고난을 적나라하게 아주 graphic하게(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 확인 해 보겠습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사52:14)
이사야가 본 메시야의 모습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은 '상하였습니다.'예수님의 얼굴형태가 아주 알아볼 수 없도록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의 얼굴이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사53: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3)
구원자의 모습이, 구원을 받아야 할 나보다 더 형편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힘든데 나를 돕겠다는 분이 나보다 더 비참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사야가 계시를 통해 목격한 메시야, 예수님은 비참하게 고난 받는 초라한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고난 받는 종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공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고, 같이 아파하셨습니다. 말씀처럼 우리의 질고(질병)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함께 당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과 아픔을 공감하시고 종으로 지극히 낮아져 오셔서 우리를 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공감부터 하시고 대속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대속물이란 대신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거나 속죄를 하기 위해 바쳐진 물건이나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나의 값은 예수님의 값입니다. 나는 귀하고 소중하고 비싼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그가(예수님이) 찔림은 우리의(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예수님이) 상함은 우리의(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나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나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예수님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나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 이라”(갈 3:13)
나의 허물과 죄악(모든 죄), 질병, 가난, 율법의 저주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값을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친히 대속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다 믿음으로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①눅13장에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몸을 펴지 못한 한 여인을 안수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을 내면서 안식일에 일을 했다며 무리를 선동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6)
예수님은 정답 이전에 18년 동안의 고통을 먼저 공감하셨습니다.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힘들었니?’ 항상 ‘선공감’이십니다. 공감하신 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공감부터 했으면 합니다. 연구 결과 성공 자와 리더는 공감을 잘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여러분도, 잘 들어주고 잘 웃어 주고 아멘 크게 잘하시다 큰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정치계가 싸우고 부부가, 때론 교회가 싸울까요? 정답 갖고 싸우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 먹고, '네가 악하고 내가 선하다.' 선악 싸움, 정답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공감이 있으면 싸움은 피해 갈 줄 믿습니다.
➁마8:1-4, 오늘 읽은 말씀에도 예수님의 공감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최근에는 나병환자들을 존대하는 의미로 ‘한센병’으로 바꿔 부릅니다. 노르웨이 사람 ‘한센’이 처음 이 병을 발견했다고 해서 ‘한센병’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이 병은 예수님 당시에 불치병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아 하늘이 내리는 형벌, 천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거기에 신체 부위가 문드러지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리 수용되는 치욕과 혼자라는 고독의 고통도 컸습니다.
레13:45~46을 보면 당시 나병 환자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케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13:45,46)
당시 율법으로는 나병 환자는 일반인들에게 접근 금지입니다. 심한 경우 돌에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이 없기에 본문에 등장한 그 환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
예수님이 듣고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문둥병자도 깜짝 놀랍겠지만 저도 놀랬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3)
부정하니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이게 맞고 정답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아플 나병환자, 외롭고 고독할 그의 아픔을 아시고 예수님은 공감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아픔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1:41)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손이 그의 마음도 만진 줄 믿습니다.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니 내가 원한다. 너를 고쳐주기를 내가 원한다.”
“내가 너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고 너의 병을 짊어졌으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게 너를 향한 나의 뜻이다.”
나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아파 신음하고 있을 때, 내가 궁핍할 때, 두렵고 답답할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선한 생각을 품고 기도할 때, 애절하게 무언가를 눈물로 구하고 있을 때,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여 살리려 할 때, 우리 주님은 다 아시고 공감하시며 능력을 베풀어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읍시다. 그러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나 주십니다. 이제는 기도하실 때마다 예수님처럼 공감 잘하게 해 달라 기도합시다. 주님 찬양하는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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