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인 대전시계 2구간 종주
2011.12.11(일) 날씨 : 흐림 기온 : 섭씨 영하3도~영상6도 산행거리 : 13km 산행시간 : 6시간 동행:귀연산꾼 36명 마달령 08:30 식장산 갈림길 12:15 360.8봉 09:09 곤룡재 13:32 삼신봉 갈림길 09:44 망덕봉(439m) 13:56 깔딱고개 10:20 계현산성 14:36 구절사 10:55 닭재 14:47 독수리봉(586.5m) 11:07 덕암마을 15:15
<스티브 잡스>
잡스는 기존에 나온 것들 이외에도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이패드용 커리큘럼 교재와 전자 교과서를 만들어 교과서 산업을 와해하고, 책가방을 메고 다니느라 척추가 휘는 학생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는 또한 원조 매킨토시 팀 시절의 팀원이었던 빌 앳킨스과 협력하여 아이폰으로 광도가 좋지 않은 곳에서 촬영해도 픽셀 작업을 통해 사진이 잘 나오게 하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와 뮤직 플레이어, 휴대전화에서 달성한 것을 텔레비전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바로 텔레비전을 단순하고 우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아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통합적인 텔레비전을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기기들 그리고 아이클라우드와도 막힘없이 호환되는 그런 텔레비전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사용자들은 DVD 플레이어와 케이블 채널을 조작하려고 복잡한 리모컨과 씨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는 겁니다. 드디어 그걸 구현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2011년 7월 암이 뼈와 다른 부분까지 퍼졌을 때 의사들은 그것을 또 한 번 정복할 수 있는 표적 약물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윌터 아이작슨이 쓴 ‘Steve Jobs’ 전기 중에서-
<탄현(炭峴)에 서서>
신라군은 말 두 필 정도만 지날 수 있는 탄현을 쉽게 지날 수 없을 것이다. 이곳만 잘 막으면 백제는 사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흥수는 의자왕과 계백장군에게 마지막 병서를 작성하여 전달한다.
하지만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운의 전쟁터였던 탄현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했지만 백제의 뒤늦은 방비로 쉽게 뚫려 버렸다.
북한 공산군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발발한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고, 바로 남하하여 대전을 포위하고 미군 24사단을 공격한다.
딘 소장은 지금의 판암동 지역에서 행방불명되고 후에 진산 이치(배재)근처에서 생포된다. 용감한 기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식장산과 세천 터널을 탈출하려던 기차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만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형은 전쟁이 발생하면 요충지가 되었다.
탄현!
이곳 마달령 탄현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치른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35명을 태운 귀연 캠프는 예전 경부고속도로였던 폐도를 달려 빠르게 마달령으로 이동한다. 지난 1구간이 대청 호반을 끼고 도는 환상의 조망 구간이라면 이번 종주는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백제의 국경선을 지나는 길이다.
백제의 성왕은 탄현을 지나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들은 백골산성에서 김무력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당시 부강한 국력과 막강한 군대로 천하를 호령했던 백제는 관산성 전투와 백골산성 전투로 국가의 흥망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우린 오늘 동북아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던 삼국시대의 요충지대로 신라와 백제가 대립했던 예전 국경지대를 바라보며 종주하는 것이다.
<마달령(탄현) 2구간 시작 지점으로 오르는 산꾼들>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와 백골산성 전투 개념도>
<마달령>
충북 옥천군과 대전시 동구 세천동을 연결하는 고개로 예전 탄현으로 불렸다. 비운의 고개로 역사 속 지명으로 유명한데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재위기간, 서기641-660) 때, 신라는 무력으로 백제를 집어삼키고자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린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맺고 백제 수도 사비성(현재 충남 부여읍)을 향하여 협공을 시작하는데,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와 금강하구에 다다르고, 신라군은 육로를 따라 마달령(탄현, 현재 옥천군과 대전시 경계)을 넘어 공격한다.
방비가 허술했던 백제의 국내 사정으로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지금의 한밭을 거침없이 횡단하여 연산성에 이르게 된다.
두계를 넘어 황산성에 이르는 험로를 지나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과 역사적 전투를 벌이게 되는 중요한 길목이다.
<2구간 종주 시작 지점>
<시경계석>
<360.8봉에서 증약 막걸리로 새참 시간!>
<깔딱 고개를 올라 독수리 봉으로>
360.8봉을 지나 능선은 독수리 봉으로 향한다. 35명의 긴 행렬이 산길을 따라 장관을 이룬다.
200미터나 이어지는 가파른 깔딱 고개에선 모두들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달령에서 해발 600미터의 독수리 봉으로 오르기 위해 넘어야 하는 깔딱 고개다.
삼신봉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을 지나 또 한 번의 오르막은 초반 전체적인 산행 흐름을 더디게 한다.
능선을 도착하여 절벽 아래 위치한 구절사를 끼고 있는 독수리봉을 바라본다. 절벽을 끼고 오늘 산행의 가장 험준한 지형에 독수리봉 산성이 위치한다.
이웃한 신라의 국경지대인 천성장마 산줄기가 흐릿한 날씨에도 기다랗게 장관이다.
고개 건너 지척에 고리산이 웅좌를 틀고 대청 호반을 지킨다.
옥천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용봉과 마성산, 장령산, 대성산, 천태산으로 이어지는데 백제의 산자락과 마주보며 절묘하게 국경으로 맞닿아 있다.
독수리 봉으로 오르기 전 구절사를 바라보며 주변 경관을 바라본다.
<삼신봉 능선 - 둘레산길>
<대청호반 고리산 모습>
<구절사 근처의 갈림길 - 잘못가면 고리산 쪽 능선으로 가므로 주의 >
<구절사>
구절사(龜截寺)는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31-4번지 상동 부락 서북쪽에 솟은 식장산(食藏山)의 영축봉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절의 남쪽은 깊은 계곡의 절벽이고 북쪽과 동쪽은 대전시에 접하는데, 절이 자리한 곳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구절사는 조선 초 1393년(태조 2)에 무학 대사(無學大師)가 이곳을 살피고 산세가 이름을 날릴 현인(賢人)을 배출할 형상이라 생각하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영구암(靈龜庵)이었는데, 그것은 이 절이 들어선 영축봉(靈鷲峰)의 동쪽과 서쪽의 두 정상에 각각 거북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는 영구암이나 구절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일제 초 사찰령에 의한 30본산 본말사의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아 절의 연혁을 더듬어 보기가 쉽지 않다.
1930년대에 이르러 오랜 풍상으로 거의 대부분 전각이 폐허된 상황에 처해 있던 영구암은 그 무렵 한 신도에 의해 중건되었다.
절 아래 마을에 살던 한병석(韓柄奭)이 1933년 이 절에 참배하러 왔다가 유서 깊은 암자가 오랜 풍우로 인하여 태반의 건물이 퇴락한 것을 보고 발원하여 가람을 중건했다.
그 내용은 대웅전에 걸려 있는 〈영구암기(靈龜菴記)〉 현판에 기록 되어 있다.
그 뒤 언제부터인지 영구암을 ‘구절사’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절 뒤의 영축봉을 구절산(龜截山)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1950년 무렵 대웅전이 중건되었고, 1975년에 당시 주지 성진 스님이 제석천룡도와 나한도를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그리고 1979년 칠성각과 산신각이 건립되어 지금과 같은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독수리봉>
독수리봉의 예전 망루가 있던 곳에서 이른 점심을 든다.
35명의 큰 무리가 벌이는 진수성찬은 찬바람이 부는 산정이지만 훈훈한 식탁으로 부족함이 없다.
약간의 눈바람을 맞으며 뜨겁게 끓인 라면과 김치찌개로 풍요로운 시간이 되었다.
가야할 보만식계 능선의 산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며 귀연을 부른다.
<독수리봉 산성>
독수리봉 산성은 식장산의 봉우리 중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구절사 뒤 586m 산봉우리에 있으며 삼국시대(백제계성) 테뫼형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300m이다.
독수리봉 산성지는 군서면 상중리 구절사 뒤 산 정상에 축성되어 있으며 대전시와 옥천군의 경계선에 접해 있다.
식장산 산줄기가 ‘Y’자형을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그 가운데에 해당되며 옥천 쪽에서 식장산을 바라볼 때에는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옥천 쪽인 동쪽은 절벽과 같은 매우 급경사면이고 서쪽인 대전 방향은 상대적으로 다소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축성 형태는 노고성과 같은 축성방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쪽사면에 원형의 모습이 약간 남아 있다.
능선과 맞닿는 남쪽과 북쪽에 문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의 가운데에는 장대지가 있는데 그 넓이는 인근의 다른 성에 비하여 대단히 넓다.
독수리봉 산성지는 식장산의 한 가운데에 해당되며 북쪽으로는 환산성과 이백리 산성 그리고 노고산성 등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멀리 서산성과 관산성이 보이고 제일 가깝게는 용봉산성이 마주 보인다.
남쪽으로는 사양성이 보이며 성의 서북쪽 능선을 따라 500m 정도 떨어진 약간 낮은 산봉우리에 둘레 약 30m 정도의 망루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쇠정골 산성지와 함께 탄현(장고개:자무실고개)을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수리봉 산성지는 고라산과 식장산 줄기에 있는 백제계 산성들 중에 성의 규모도 제일 크고 위치도 제일 높으며 또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다른 여러 성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가 서산성과 관산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옥각리와 월전리에서 공격을 한다면 백제 쪽 지휘소는 독수리봉 산성지가 지휘소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둘레가 약 300m에 달하는 독수리봉산성은 고리산과 식장산 줄기에 있는 백제계 산성들 중에 성의 규모도 제일 크고, 높이도 제일 높으며(587m)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다른 여러 성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6.25동란 때에는 구절산 부근의 패퇴한 인민군과 서대산 공비들이 연합하여 옥천읍을 습격 했었다고 한다.
지명을 보면 구진벼루니, 염장이니, 진터벌이니 이것은 백제가 그곳에 가서 싸운 것에 대한 지명이다.
독수리봉 산성까지 신라군이 왔다는 전설이나 문헌은 없다. 그런데 역사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패했는데 백골산성 전투가 그것이다.
이곳 독수리 봉은 식장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산성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최고 지휘관이 올라와 전투를 지휘한 곳으로 추정이 된다.
그만큼 옥천 길과 금산 방향의 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요충지로 판단되며 산세가 험하여 옛날 신라군이 이곳 식장산 방면으로는 직접 공격이 불가능하였기에 전략적으로 매우 긴요한 요충지로 추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관산성 전투와 백골산성 전투는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에서 벌어진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이곳 독수리봉 산성의 정상부의 면적은 넓다. 약 50여 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보통 성의 장대지는 그리 넓지 않는데 이곳은 매우 넓다.
<식장산(623.6m)>
식장산은 해발 623.6m의 높이로 대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충북 옥천군 군서면과 군복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제시대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지였다는 기록에 연유하여 식장산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있다.
또한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있다 하여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삼국시대 군량미를 숨겼던 대전의 터줏산이며 번화한 대전 시가와 맑은 대청호 푸른 물을 함께 내려다보고 있다. 서쪽 끝에는 주봉이 있으며 가까이에 통신소가 있고 아래쪽에는 고산사, 개심사, 식장사가 있다. 식장산은 멀리서 보면 외따로 서있는 산으로 보일 만큼 산비탈이 급하다.
산기슭에는 신라시대 도선 국가가 창건하고 조선조 인조 수등 국사에 의해 증건 되었다는 유서 깊은 고산사와 구절사 등 유명사찰이 있으며 세천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식장산은 번화한 대전 시가지와 서쪽의 보문산(457.6m), 북쪽의 계족산(423.6m)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북쪽에 자리 잡은 대청호수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넣고 있다.
또한 멀리는 계룡산, 대둔산, 서대산과 마주하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식장산의 높고 빼어난 산세는 신비로움마저 던져주고 그 골짜기 골짜기마다 희귀식물과 숲이 울창하고 수많은 유적과 전설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근래에는 정산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대전 시내 야경이 유명하다.
<2구간 능선 모습>
<식장산과 독수리봉 능선>
<군서면 오동리와 하동리>
<천성장마의 용봉과 마성산 모습>
<장령산과 대성산 - 멀리 천태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 곤룡재로 가는 노정>
제2 송신탑을 지척에 두고 보만식계 능선이 연결되는 고개를 내려선다. 곤룡재에서 오는 산길로는 상당한 오르막을 자랑하며 식장산이 갖춘 높다란 산모습의 하나로 멀리서 보면 장관이다.
누군가는 식장산에서 만인산에 이르는 산길을 걷노라면 무려 33개의 산봉우리를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고약한 지형을 이룬다.
대전 산꾼들에게는 익히 도전해 볼 만한 코스지만 처음 산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특히 대전 시내 주변에 있어서 깔보기 십상인데 실제 종주에 나서면 모두들 설래 설래 고개를 흔든다.
특히 곤룡재를 지나 만덕봉과 계현산성 그리고 닭재로 이어지는 S자 산줄기는 높고 낮은 봉우리와 험로 그리고 심장을 파고드는 쉼 없는 줄 다름에 정신을 못 차린다.
오늘도 몇 몇 산꾼들이 페이스를 잃어 힘들게 대열을 따른다.
그렇지만 노련한 귀연산꾼들은 어려운 구간들을 슬기롭게 지나치며 주변 경관과 조망을 보며 앞 사람의 자취를 따른다.
산에서 익혀진 노하우는 아무리 어려운 여건과 환경에서도 급하거나 흥분하지 않음이다.
군서면의 안정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고 하얗게 뻗은 신작로를 따라 12번 도로가 곤룡재로 달려든다.
예전 사람들이 드나들던 곤룡재는 인적이 끊겼지만 새롭게 뚫린 곤룡터널은 편리한 자동차 교통수단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한다.
<보문산과 식장산>
<곤룡재>
곤룡재(昆龍)는 곤룡티, 골링이, 골롱이라고도 부르며 대전시 동구 낭월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를 경계로 하는 높이 327m의 곤룡산을 남쪽과 북쪽을 횡단하는 고개이다.
낭월동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낭월마을에서 사양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본래 이 곤룡재는 산의 형국이 마치 용과 같다는데서 따와 붙여졌다고 하지만, 지금 이곳에 사는 노인들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양민들은 이곳에 데려와서 대량 학살하여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였으니 골롱이는 골령의 예언적 지명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곤룡재 아래로는 왕복 2차선의 곤룡터널이 뚫려 곤룡재를 넘나드는 사람은 등산객을 제외하곤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군서면 사암리>
<망덕봉>
<계현산성을 넘어 닭재로>
곤룡재를 지나면 꽤나 높아 보이는 망덕봉이 아찔하다. 해발 439미터의 망덕봉은 식장산과 국사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주변 계현산의 요충지로 우뚝하다.
산등성이에는 산성의 모습이 뚜렷한데 주변 조망과 망루의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계현산성(鷄峴山城)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닭재 위의 북쪽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20m이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으나 남동쪽의 성벽 일부분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해발 325.8m 되는 닭재 북쪽 봉우리 꼭대기에 쌓은 성으로 밑에서 1.8m까지의 성벽은 안으로 약간씩 오므리며 쌓다가 그 위 1.5m 정도의 성벽은 거의 수직으로 쌓았다.
이곳에서 백제의 것으로 보여 지는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안에는 남쪽 성벽 부분에 폭 6∼8m의 평평한 대지가 마련되어 있으며, 북쪽에는 장대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남쪽 벽과 북쪽 벽에는 성문터가 보인다. 계현산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마전 방면의 추정리산성, 금성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동으로는 성치산성, 서로는 소호동산성, 사정산성, 보문산성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망덕봉>
<다음 구간 국사봉>
<계현산성>
계현산성의 둘레는 약 220m 정도라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이다. 성벽의 높이도 3.3m가량이라고 하니 성벽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옛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성돌도 거의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성벽을 쌓았던 자취만은 뚜렷하다는 점이다.
동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약간 높은 언덕이 보인다. 장대가 있었던 자리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장대가 북쪽에 있다면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는 남쪽을 바라봤다는 뜻이다.
남쪽에서 침투하는 적을 맞아 싸웠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남쪽에서 침투해오는 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옥천에서 대전으로 넘어오는 통로인 닭재와 대전-금산 간의 통로를 넘어오는 신라군을 감시할 목적으로 쌓았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도 산성 아래 동쪽으로는 대전-금산 간 국도가 지나고 있다. 길은 여러 갈래로 새끼를 치지만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이 중요한 길목이라는 사실엔 변화가 없다.
산성(山城)은 자신의 태생과 소멸에 대하여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고 그대로 서 있지만 많은 부분은 역사적 상상력에 의지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노역으로 끌려와 병마와 싸우고, 힘든 성 쌓기에 고초를 겼었을 당시 백성들의 애환이 들리는 듯하다.
<계현산성>
<계현산성>
계현산성을 지나면 오늘의 종착지 닭재가 멀지 않다. 지나온 망덕봉이 커다랗게 북쪽을 막고 있다.
닭재로 향한 남쪽에는 국사봉이 L자형으로 모습을 보이는데 산꾼들에게는 여름철 악몽 같은 오르막으로 명성이 높다.
쿠션 좋은 내리막을 내려서면 상당히 낮은 지형의 닭재를 만난다. 흡사 예전 성황당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큰 둥구나무와 석탑이 인상적이다.
근래 세워진 휴게시설은 오히려 성황당 모습의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우습다.
<닭재>
닭재는 계현고개라고도 불리며, 예부터 신라와 백제 사이 경계지역으로 영토수호를 위한 격전지로 알려졌다.
근대에 이르러 대전(삼괴동)과 옥천(군서면) 간 주민 이동로로 이용돼 왔다.
명칭의 유래는 길 형태가 닭의 형상을 닮아 붙여졌다고 한다.
“경사가 생기면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소나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닭산에 있는 고개로서 덕산 마을의 뒤쪽에 있는 고개를 말하기도 하는데 산세가 닭의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금계포란형이 있다고 전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부터 마을에 경사가 있으면 닭재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흉사가 있으면 소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닭재를 지나 덕암마을로 내려서는 골짜기에는 예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물이 나오는 샘물터가 있고, 밭을 갈고 농사를 지었던 층계 농토가 확연하다.
오랜 시간 농사를 짓지 않아 황폐화 되었지만 분명한 경작지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닭재>
<덕암 마을로 가는 중에 보이는 계현산성>
<삼괴동(덕암마을)- 둘레산길 4구간 시작점>
삼괴동(덕암마을)은 대전-산내-마전의 길목에 있는데 뺏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뺏은 삼괴동 전체를 말하는 같은 지명이기도 하다
일제 때 보통학교사 이곳에 있었는데 이를 속칭 뺏 학교라고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1937년 낭월로 학교가 옮겨졌다.
<삼괴동 보호수 느티나무>
예전에는 이곳에 세 그루의 느티나무(보호수:덕산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둘레가 7미터 되는 나무인데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가 정자처럼 한곳에 서 있어 나그네의 쉼터가 되었다.
또한 마을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놀던 자리가 되었다 하여 삼괴정 또는 뺏이라 부르던 곳이라 한다.
주변에 천주교 공원 묘역이 있어 상당히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이곳을 지나는 옛길 도로는 플라타너스가 터널을 이루는데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낭월동으로 이어지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
첫댓글 자세한 산행기 잘읽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단하세요. 청산님.찬찬히 읽을수만 있다면 역사 공부도 되겠는걸요
또 기회되면 간간히 찾아 뵙겠습니다.
국가간의 우호관계, 참 허망합니다. 신라의 이웃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고..... 탄현이 부여 근교인줄 알았는데.....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의 100년 우호관계를 이용하여 한강 중상류를 차지하고, 고구려와의 밀약을 바탕으로 백제와의 관계를 끊고 한강 하류를 점령합니다.
그렇게 세운 북한산 순수비는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지요. 이때 성왕을 죽인 김무관(김유신 할아버지)을 중용하고, 대가야와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맺게 됩니다. 흥수와 성충, 윤충, 계백의 충성심을 새겨 듣지 못한 의자왕의 실책도 컸지만 성왕을 잃은 패배감은 역사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야의 패망 원인도 강대국 백제를 도왔다가 신라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죠..관산성, 백골산성, 노고산성...그리고 삼년산성은 동북아시아 대변화의 시발점이었을 겁니다..
청산님 아니면 쓸 수 없는 해박한 역사와 지식이 담긴 산행기 짱 입니다요.....
이번 둘레산 멤버들은 제대로된 가이드와 함게 역사기행 하는 겁니다.
의미 있고 즐거운 산행 축하드립니다.
귀연에 계백장군님은 어디 가셨어요 엉엉
청산님 산행후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