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허난설헌(許筠·許蘭雪軒) 기념관
강릉 초당동(草堂洞)에는 허균·허난설헌(許筠·許蘭雪軒)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난설헌(蘭雪軒)은 강릉에서, 동생 허균은 사천진리(沙川津里)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 균(筠) 생가터인 애일당(愛日堂)이 있고 남매가 실제로 자란 곳은 이곳 초당이며, 마을이름 초당(草堂)은 난설헌 아버지인 허엽(許曄)의 호(號)이다.
허균(許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로, 기념공원에는 홍길동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난설헌(蘭雪軒)은 아명(兒名)이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고 호가 난설헌인데 뛰어난 여류작가로 그녀가 쓴 한시집(漢詩集)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중국과 일본까지도 이름을 떨쳤으니 강릉은 신사임당과 더불어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으로 우리나라 여류작가들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겠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허난설헌 생가(복원) / 난설헌 동상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시재(詩才)를 보였던 난설헌은 23세 때, 자신은 스물일곱(27세)이면 죽을 것을 예견하고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라는 시를 쓰는데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 홍타월상한(紅墮月霜寒) -부용꽃 3·9타래 / 붉은 꽃 떨어지니 달빛만 차갑도다.’...
난설헌은 자신의 예견대로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한다.<三九朶(삼구타)는 3☓9=27, 즉 27세를 가리킨다.>
난설헌은 오언고시(五言古詩) 15수(首), 오언율시(五言律詩) 8수, 칠언고시(七言古詩) 8수, 칠언율시(七言律詩) 13수, 오언절구(五言絶句) 24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42수 등 총 200여 수의 시작(詩作)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도교사상(道敎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신선시(神仙詩)가 128수나 차지한다고 한다.
그녀가 7세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보면 그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데 광한전은 도교(道敎)에서 달 속에 있는 전각(殿閣)을 가리킨다. 남원(南原)의 광한루(廣寒樓)도 그것이다.
그 상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抛梁東 曉騎仙鳳入珠宮(포양동 효기선도입주궁)
-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새벽에 봉황 타고 진주 궁궐에 들어가
平明日出扶桑底 萬縷丹霞射海紅(평명일출부상저 만루단하사해홍)
-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네. <下略>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가면 집안의 내력과 함께 큰아들 봉(崶), 난설헌의 동생인 균(筠)과 난설헌의 불우했던 시집살이와 요절(夭折)한 배경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난설헌의 아버지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엽(許曄)은 정실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서 장남 성(筬)과 2녀를 두었고, 한씨(韓氏)와 사별한 후 후처(後妻)인 강릉김씨(江陵金氏)와의 사이에서 2남(崶, 筠) 1녀(楚姬)를 두어 모두 6남매인데 이 중 아들 셋(筬, 崶, 筠), 그리고 초희(楚姬)와 아버지 엽(曄)까지 다섯 명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서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이라는 칭호를 들은 문장가 집안이다.
그러나 허균이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역모에 연루되어 광해군에 의해 참수되면서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그로 인해 아버지 허엽의 산소까지 파묘(破墓)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다시피 했으나 훗날 수습되어 가족들 산소가 서울에서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옮겨져 가족묘원이 조성되어 안장되었다.
봉(篈)은 금강산으로 가다가 객사(客死)하고 난설헌은 27세에 요절, 막내인 균(筠)은 역모(逆謀)로 참수...
비극적인 가족사(家族史)이지만 초당에 허균·난설헌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집안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고 그들의 자랑인 허씨 오문장(許氏五文章) 비석도 기념공원에 줄을 맞추어 서 있다.
부연(敷衍)으로, 강릉 초당(草堂)하면 언뜻 생각나는 먹거리로 초당두부를 빼 놓을 수 없다.
나는 처가(妻家)가 강릉 송정동(松亭洞)으로 초당의 옆 동네인데 70년대 결혼 초에 처가로 가면 장모님께서 ‘두부를 만들어 줄 테니 바다에 가서 바닷물을 길어오라’고 하셨다. 양동이를 들고 송정해변으로 나가 바닷물을 길어오면 두부를 만들 때 콩 물을 엉키게 하는 물로 보통 간수(소금에서 녹아나오는 짠 물)를 쓰는데 장모님은 바닷물을 간수 대신 사용하셨다. 바닷물을 부으면 간수를 부을 때보다 엉키는 것이 더디지만 만들어 놓으면 두부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이 두부가 ‘초당두부’로, 지금도 초당두부 식당에서는 간수를 쓰지 않고 파이프로 바닷물을 끌어다 간수 대신 쓴다고 한다.
이 초당두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바로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許曄)으로, 호가 초당(草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