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여러 번 다루면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죄스럽고 미안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여기서 눈치 보는 마음이 생겼으리라.
한창 더운 날씨라 사람들이 샘에서 목욕하고 돌아간 후에 되도록 조용히 나를 낳았던 것 같다.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웠다는 미안함, 잠자는 시간에 동네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남사럽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놀림감이 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남을 의식하는 마음이 강한 우리집 분위기에서 자란 내 마음에서 만들어 낸 엄마의 마음이리라.
연기 때문에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젖은 청솔가지로 불 때는 할머니 모습이 이젠 많이 희미해졌다.
물이 그득히 담긴 가마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데 물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그대로다.
고생하시는 할머니 이미지가 손녀를 기다리고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어머니 이미지로 달라졌다.
할머니는 싫다는 마음 없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게 달라졌나 보다.
‘젊은것들이’ 하는 마음은 네 명의 새파란 며느리들이 있어도 직접 시어머니 병시중을 하셔야 했던 할머니의 신세를 내가 감정이입 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스님께서 화력 좋은 청솔가지, 가마솥은 많은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풍요 이미지라 하셨을 때, 귀가 솔깃했다. 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할머니 집 옆에는 샘물이 있었고 디딜방아도 있었으며 우리집 옆에는 빨래터도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모이는 장소였다. 지나고 보니 이것이 뭔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이 나름 중심지였고 대중을 위해 공양 올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샘이나 빨래터를 청소하고 디딜방아도 깨끗이 청소하던 조상님들 마음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넉넉하지 않던 그 시절 대중공양에 인색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대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보였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 불편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니 나눠주기도 그렇고 안 눠주기도 그렇고.
나도 가끔 그런 상황에 매끄럽게 처리를 잘 못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생각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쑥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마루에 걸터앉은 엄마는 숱가락 하나를 가져와야 했다. 우리 먹을 것도 부족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가던 동네 분들도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개방된 장소, 입구에 앉는 것을 싫어한다.
처음 만난 가족 이미지는 참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대외적인 일을 많이 하셨고 자손들을 두루두루 살피는 역할을 하셨는데 어린 나는 아무 일도 안 하시는 분이란 생각을 했다.
또 욕심쟁이라고 생각했던 큰오빠는 장난을 좋아했고 특히 나 놀리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침을 뱉으면 나는 더럽다고 안 먹을 때가 많았다. 이런 나의 반응을 즐겼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보다 훨씬 많이 먹는 오빠는 우리들 보다 몇 배는 먹었어야 하는 데 늘 부족했을 것 같다. 부족한 마음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독차지한다는 그 마음이 지금은 부모님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책임지는 고마운 오빠,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는 오빠로 이미지가 변했다.
언니도 엄마 역할을 대신해 주었고 몸이 약한 언니는 항상 생각이 앞서가고 선구자 역할을 해서 내 인생의 길잡이 안내자였음을 발견했다.
나는 육체노동을 많이 해야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 했다.
내가 처음 만난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내 아이나 남편에 대한 이미지에도 섞여 있었고 결국 나의 색안경을 통해 판단하고 살았으며 아직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방하착했다.
어릴 때 집이 3채가 있었지만, 100% 흡족하지 않은 집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 방을 가지고 싶었는데 늘 단점이 있었다.
이 방은 이래서 저 방은 저래서 마땅하지 않았다. 단점 찾는 선수였다.
한채 한채 집이 지으졌던 때를 기억한다. 소위 착공식과 준공식을 다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직접 짓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두 채가 다 실패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 없었던 집과 살림살이가 하나하나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랐던 나는 언제나 살림살이는 불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갔다.
그래서 뭐든 자꾸 사 모으고 버리지 못했다.
장난감도 그래서 많았나?
바로 뒤에 조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집을 우리는 큰집이라 불렀다.
어른께서 살고 계셔서인지, 집이 커서인지 식구가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방이 앞마당 쪽과 뒤 안에도 빙 둘러 여러 칸이 있었다. 난 항상 뒤 안에 있는 방이 마음에 들었다. 아늑하고 숨을 수 있고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방, 따뜻한 방이 좋았다.
그러나 두 분만 남았을 때, 빈방들이 쓸쓸해 보였고 오갈 때 없는 사촌들이나 객식구가 들어와 사는 집이고, 큰집이 팔린 후 그 집 주인이 별로 잘 풀리지 않는 이유가 이사 때문이라고 쑤군거리는 동네 사람들 말이 들렸고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어서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집의 이미지다.
그래서 항상 방이 많은 큰 집을 동경하며 살았지만, 정작 기회가 주어져도 매수하지 않았던 핑계는 관리가 힘들면 어떻게 하지? 아이들 다 출가하고 텅 비면 어떻게 하나? 또 객식구가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 하나? 안 팔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들이 어릴 때 보고 들었던 것이 프로그램화되어 있었던 이유같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자매지만, 우리 기억 속의 부모 형제는 많이 다르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내 결혼과 엄마의 결혼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전쟁통에 입 하나 줄이려고 시집을 갔다고 하셨다.
힘든 친정엄마 생각해서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나은 환경으로 가는 줄 아셨으리라. 물론 덕분에 내가 태어났지만.
나도 그런 마음이 발견되었다.
결혼할 당시 우리 집과 경제적 차이가 많지는 않지만, 그냥 좀 더 잘 사는 집이길 바랐던 것 갔다. 공무원 월급으로는 우리 집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 둘이 벌면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섞여 있었다. 친정을 그대로 짊어지고 시집을 갔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가고 나니 별반 나은 것이 없었다.
덕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오히려 상대방도 나에게 덕을 보려는 똑같은 마음이 있다는 당연한 인생의 법칙을 늦게 깨달았다.
부모님의 결혼식 장면을 떠올리는데 무슨 옷을 입으셨는지 뭘 타고 시댁으로 오셨는지 분명 여쭤봤는데 대답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식비를 절감하느라 선택한 값싼 웨딩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공항 갈 때 탔던 자동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스님께서 의도하신 질문에 참 정확한 답이었다.
아마도 난 우리 딸들이 시집갈 때는 웨딩드레스에 한을 풀려고 할 것 같다.
결혼식에 온 하객들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골이 나고 시어머님께서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구석진 방을 좋아하고 뒤 안에 숨는 것을 좋아하고 노출되는 장소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마음의 근원지를 생일날 삿갓을 쓰고 마당에 서 계시던 남자분 이미지에서 찾은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마음껏 펼치지 못한 젊은 나이의 요절 등등.
인정받고 싶고 대중 앞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 하면서 노출을 꺼리는 상반된 모습을 발견했다. 싹 방하착하리라.
어떤 일을 할 때 잘못될까 긴장하는 마음, 돌발상황이 일어날까 긴장하는 마음이 아기 낳을 때 이불에 뭔가 묻을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엄마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묻으면 이불을 세탁하면 되는데.
뭔가 태클 거는 사람을 피하고 싶은 마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마음, 객식구 붙을까 봐 큰 집으로 이사 못 가는 마음, 생일날을 다루면서부터 올라온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곧 남편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들키기 싫어서 글을 올리지 못한 마음도 다 날려버렸다.
오빠도 남편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다 게임 좋아하고 장난 좋아하는 중딩 남학생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지금 내가 무척이나 귀여워하고 격려하는 아이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