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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Uncle Mono
이재원 作(2019.3.10.)
인간에 있어서 서사(敍事)는 길 필요가 없다.
짧아도 서사는 서사이다.
오늘도 그 작은 도시는 강을 따라 해가 진다.
길 따라 움직이는 주민들 속에 렌도 살고 있다.
오랜 배고픔으로 키는 작지만 무척 예쁜 소년이다.
하지만 누추한 몰골로 항상 혼자 다닌다.
씻으면 엄청난 모습의 렌이지만 씻지 못한다.
홀로 전기도 없는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서 자취를 한다.
렌이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모노 아저씨를 만났다.
속내라는 동갑(同甲) 여자와 동거를 하는 사이다.
길에서 가끔 같이 걸어가는 그분들을 보곤 한다.
주로 한가한 골목의 둘만의 뒷모습이었다.
다정해 보이지만 저녁의 기운이 오로라처럼 붉게 서려 있었다.
바라보는 렌은 뭔지 모르게 스산하고 쓸쓸함을 느낀다.
모노 아저씨는 삽질하는 공사판의 노가다 출신이다.
어린 렌은 속내라는 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래도 술집에서 허드레와 밤일을 가끔 한다는 소문 정도로는 안다.
인사차 반갑게 말씀을 드렸다.
“아저씨, 어딜 가나요?”
바쁜 모습이었지만 검정군복의 잠바를 걸친 그가 답을 친절이 해 준다.
키 크고 덩치가 나름 큰 아저씨치고는 고마운 일이다.
“나? 속내 외상꽃값 받으러 간다.”
“어떤 놈이 외상으로 해 놓고 며칠째 안 주고 있다.”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줌마께서 고생하신 돈이네요.”
“그렇다.”
“~~~”
“이번에도 안 주면 쇠망치로 공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줄 것이다.”
모노 아저씨는 공사판에서 삽질하는 노가다 출신이다.
맨주먹 싸움도 잘 한다.
오랜 노가다로 손도 거칠고 솥뚜껑처럼 크다.
몸이 너무나 단단하여 읍내 태권도 당수선생이 피할 정도이다.
시비가 붙으면 씨름꾼이고 휴가 차 나온 군인이고 나발이고 간에 족족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주먹이 돌주먹을 넘어 쇠뭉치주먹이었다.
그에게 3류 호신술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시비 거는 족족 이마와 배나 옆구리를 쳐서 쓰러뜨렸다.
당수도장의 젊은 사범과도 시비로 붙었는데 젊은 사범이 상대가 되질 못했다.
길가의 흙바닥에 추풍낙엽처럼 앞으로 거꾸러져 도장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쳐 박혔다.
젊은 사범이 이마와 배, 옆구리를 연타로 맞고 그대로 고개 채로 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은 진적도 있다.
몇 대 맞고는 스르르 쓰러져 안 일어났다.
생면부지의 상이군인출신 장애인에게 진 것이다.
같이 온 장애인의 딸이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노 아저씨는 그 싸움에서 스스로 불타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이처럼 가난한 백성들끼리 사는 그날까지 안 죽고, 여기저기서 서로 부대키며 살고 있다.
비와 눈이 내려도 이야기의 전설을 만들고 만들며 하루하루 연기(煙氣)를 피우며 살고 있다.
나라가 1945년 해방이 되고, 5년도 채 안되어 6·25라는 사변(事變)을 치렀다.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들 순진해서 어지간하면 경찰서까지는 가질 않았다.
집안에 도둑이 들어 쌀이나 돈, 금반지 등이 사라져도 신고를 할 줄 몰랐다.
그래도 나름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인간들이 제법 복잡하게 산다.
하지만 인구 2만에 불과한 읍(邑)단위 시골로 닷새 만에 장(場)이 들어선다.
그 장날이 파장이 되면 시시한 싸움질이 여기저기에 고래고래 시끄럽게 많았다.
파장(罷場)에 겨우 막걸리 따위에 취해 다 큰 남자들이 빈 주전자를 들고 비틀거렸다.
다들 고생하여 새까만 피부로, 영양이 부족하고, 빈한(貧寒)한 빈태(貧態)가 줄줄 흘렀다.
그래도 경찰서와 파출소는 무척 한가했다.
파출소 순경들이 장기나 바둑을 둘 정도이다.
그런 그가 속내 아줌마를 인연으로 만나고 난 뒤로는 노가다를 접었다.
속내 아줌마 덕에 노가다를 안 하고도 살만 했다.
이윽고 렌이 답을 한다.
“예, 잘 다녀오세요.”
누추하지만 작은 예쁜 소년의 어리고 맑은 목소리이다.
길에서 점점 바쁘게 멀어지는 모노 아저씨를 보는 렌은 그날도 배가 무척 고팠다.
며칠 뒤 길에서 모노 아저씨를 만났다.
반가이 인사만 꾸벅 하는데, 모노가 말했다.
“아, 그날! 돈 받아 왔다.”
키 작은 렌이 모노 아저씨를 위로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혹시 시간 있으면 저녁에 우리 집에 올래? 밥 같이 먹자.”
다 받다 오긴 했지만 몇 푼도 안 되는 소액이었다.
그날 저녁, 아줌마께서 아껴둔 그 소액으로 쌀과 쇠고기 등을 장만했다.
렌은 아저씨 아줌마 부부가 해 주신 쌀밥과 쇠고기 국을 맛있게 먹고 왔다.
밥과 국을 함께 말아서 셋이 김치와 나눠 먹었다.
모습이 너무 행복해 마치 한 가족 같았다.
전에도 국수 정도는 수없이 얻어먹었다.
국수는 아저씨가 혼자 있을 때 장만했다.
따끈하게 삶은 국수에 양념을 쳐서, 말아서 젓가락으로 후룩후룩 냠냠 먹었다.
모노 아저씨와 함께 웃으며 서로서로 아이들 마냥 하하하고 먹었다.
그날은 배가 더 불러 더 행복했다.
작고 소소한 읍(邑)의 마을이지만 렌은 무척 큰 도시로 느껴졌다.
동서로 강이 휘감아 흐르고, 산과 들판이 여기저기로 전설과 함께 널려 있었다.
렌은 자취방에 와서 석유램프에 불을 켜고는 조용히 영어책을 폈다.
읍내 대부분의 가정집에는 전기가 들어가지만 렌의 자취방만은 석유램프불이다.
주인집 노파가 전기가 불법이라고 하면서 렌이 자취방에 들어 온 날 전선을 빼갔다.
작은 자취방으로 본채와 거리가 있는 허름하고 부엌이 달린 단칸방이었다.
본채의 기둥에는 푸른색의 녹색 공용 라디오가 달려 있어, 일일 연속극을 들을 수 있었다.
노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자신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다.
렌이 입주하는 날, 전기선을 렌이 보는 앞에서 힘들어 하면서 홀랑 빼갔다.
렌은 우두커니 보고만 있다가, 글자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을 며칠 보냈다.
그러다가 돈을 아껴서 가지고 있다가 장날에 시장에서 석유램프와 석유를 사 왔다.
학교에서 배우는 중1 교과서이다.
‘Tom & Judy’
Tom과 Judy는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교과서 표지에 나오는 미국의 소년소녀이다.
밝은 2층 양옥집의 푸른 잔디밭에 앉아, 서로 정겹게 담소하는 모습이다.
윤기 흐르는 하얀 피부, 단정한 옷차림, 예쁜 금발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풍성해 보였다.
볕이 충분히 내리 쬐이는 따뜻한 모습의 정원이다.
전혀 배가 고픈 모습이 아니다.
렌의 목소리가 낭독으로 문틈에서 밝게 흐르고 있다.
‘Tom said I am a boy. Judy said I am a girl.’
혼자 자취하고 있는 렌의 방에 석유 램프불이 타고 있었다.
다행이 아직 석유가 꽤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렌은 그가 왜 배가 자주 고픈지 모른다.
그냥 밥을 덜 먹어서 그런 줄만 안다.
1년이 지난 몇 달 후 모노 아저씨가 안 보이더니, 아주머니도 같이 영영 안 보였다.
대구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비 오는 어느 날 몹시 추웠다.
자취방에서 혼자 덜덜 떨었다.
배가 또 고팠다.
렌은 그분들이 갑자기 그리웠다.
렌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은 모노 아저씨에게 수차례 얻어먹은 국수 한 그릇들이었다.
그리고 속내 아줌마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해주신 흰 쌀밥과 쇠고기 국물이다.
그럴수록 방안에 찬 공기만 가득 더 냉랭하게 채워졌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6개월 후엔 렌도 작은 그 도시를 떠나 부산으로 왔다.
삭풍(朔風)과 크리스마스의 냉기가 본격적으로 마을을 덮치기 할 때 나왔다.
1970년 가을이 가고 12월 말로 무르익어가는 차가운 한 겨울이었다.
렌은 하얀 눈이 하늘에서 펑펑 내려오기 전에 아무 고민 없이 그곳을 나왔다.
대구와는 정 반대 방향이다.
그런데 밥을 너무 자주 굶어 키가 덜 자랐다.
그 상태로 그곳에서 몸만 빠져 나왔다.
교복도 많이 낡았고, 그의 몸엔 때가 득신 거렸다.
그 작은 도시는 렌의 조상들이 대대로 산 땅이다.
산속의 우거진 숲에는 친족조상들의 묘소가 차례로 그득했다.
마을 북쪽의 자갈강변에 집안 종가의 전답이 지주(地主)의 땅처럼 산허리까지 크게 있었다.
쪼개지고 나누어지고 6·25사변 직전에 개혁까지 당했지만 여전히 크게 있었다.
하지만 렌은 전혀 모르고 있다.
조상 대대로의 그 전답에서 쌀과 감자, 고구마, 보리 등이 수확기 마다 대량으로 산출되었다.
여분은 모두 읍내시장 등으로 가마니채로 팔려 나갔지만 렌은 모르는 전부 남의 일일 뿐이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인 그가 그래도 굶어서 안 죽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너무 자주 굶어서 야위고 야윈 모습으로 창백하게 그곳을 나왔다.
직계의 조상들이 그곳에 수없이 잠들어 있지만, 어린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린 나이로 아직은 조상이 뭔지도 모르는 시기이기도 했다.
무덤의 묘소들이 그에겐 멋진 작은 동산쯤으로만 보였다.
동무들과 병정놀이하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보고도 모르는 나이로 혼자 홀로서기를 못해 모습이 루(褸)하고 추했다.
너무나 허약하고 볼품이 없어, 병든 아이 마냥 불쌍해 보일 정도이다.
그래도 그는 걱정 하나 하지 않았다.
그냥 학교를 빠지지 않고 잘 다녔다.
배가 고프니 더더욱 혼자가 되었다.
혼자! 혼자! 항상 혼자였다.
누추하니 저절로 혼자가 되었다.
마음이 혼자니 몸도 혼자가 되었다.
학교를 3년 다하여 그곳을 하직하듯이 등져도 아무도 몰랐다,
그냥 소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사라져 나왔다.
떠나면서 그는 학교도 친구도 모두 잊어 버렸다.
심지어 3년간 배운 교과서도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잊어 버렸다.
추억의 연기(煙氣)마저도 즉시 다 소각되었다.
공책은 아예 첨부터 없었다.
볼펜과 연필은 몇 자루 있었다.
친구들이 쓰다가 준 것이다.
교실에서는 뚫어지게 칠판만 보다가 학교를 파하곤 했다.
준비부족으로 교사가 체벌을 하면 그냥 맞았다.
매를 보면서도 마음의 눈은 감고 있었다.
한번은 시범케이스로 맞았다.
약한 먹잇감으로 누가 봐도 시범케이스로는 제격이었다.
렌의 몰골로 보면 그런 일을 당하여, 조상들이 봐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착해 보여도 나약하고 왜소하고 또 누추하다보니 별안간 희생타로 당한 것이다.
그는 생존의 세계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그 일로 더 조용해졌다.
1948년에 급조된 20년 남짓의 신생국이라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듬성듬성 너무 많았다.
학교는 멀리서 보면 아지랑이처럼 아득히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하나 신생후진국의 생계형 교사들이 득실거리는 허약하고 빈곤한 곳의 학교이었다.
렌은 섭섭했지만, 넓은 세계의 작은 시궁창에서 지내는 생쥐하나로 자신을 생각했다.
전혀 창피하지는 않았고, 창피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렌이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교내미술대회에서 전교1등을 했다.
3개월 전에 부임한 미술시상담당교사가 렌에게 1등상을 준 것이다.
전교1등이지만 집에서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얼마 후 그 상장은 유실되고 말았다.
그 상장(賞狀)은 정말로 심사가 공평한 상이었다.
담당교사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학부모의 손이 안타 렌이 받을 수 있었다.
렌에겐 무척 커 보이지만, 그곳은 작은 마을보다 조금 큰 단소한 읍(邑)이다.
강이 흐르는 시골로 먹을거리는 풍부하지만 그냥 산촌(山村)이라고 봐도 되는 마을이다.
렌은 그곳을 나오자마자 자취방도, 학교교정도 쓰레기 마냥 금방 잊어버렸다.
국수를 많이 삶아 준 모노 아저씨도 서서히 잊어만 갔다.
마치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크면서 서서히 잊어가는 아이와 같았다.
나이가 어리니 모든 것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모노 아저씨 부부는 그곳을 떠나기 직전에 읍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단다.
그리고 친절한 사진사의 동네 사진관에 가서 두 분이 결혼사진을 찍고, 찾아 갔단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노 아저씨는 천사라고 하고, 속내 아줌마는 보살이라고 했다.
천사라고? 그림에서 천사는 여자던데, 보살은 또 뭐지?
렌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교과서에는 없는 말이다.
그곳을 홀로 등지면서 그가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더럽게 보이는 베게와 솜이 여기저기로 터진 까만 때로 변색된 무명이불,
땀 냄새가 배긴 두꺼운 요와 그 아래로 천천히 냉기가 흐르는 냉골 바닥,
자취방에서 혼자 밤마다 성냥으로 피운 램프등불 정도이다.
책도 연필도 가방도 다 그대로 두고 그냥 나왔다.
그리고는 그마저도 곧 망각(忘却)해 버렸다.
그래도 모노 아저씨는 가끔, 하지만 줄곧 저절로 생각이 났다.
백전무패의 모노 아저씨와 속내라는 보살 아줌마이다.
모노 아저씨가 얼굴과 몸통 등에 골라서 몇 대 맞고는, 스스로 아주 천천히 쓰려져서 안 일어난 일은 렌의 뇌리에 굳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량한 일도 그에게는 완벽한 사치로 오직 남들만의 일이다.
그는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작고 약했다.
그가 아무리 착한들 모노 아저씨처럼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여전히 잘해서 본전이라도 뽑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매일매일 그날의 일당만이라도 무사히 다 받으면 다행이다.
안쓰럽게 보여도 그것으로 그는 항상 족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래도 렌의 정신적 추(樞)는 몇 대 맞고는 그냥 쓰러진 모노 아저씨이다.
쓰러져 가는 그 모습은 마치 도덕을 깊이 아는 철학자와 같았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에 모든 소리를 담아 깊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이가 더할수록 어릴 적의 일들로 얻은 후유증이 너무나 컸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제때의 성장을 놓쳐, 쉽게 잘 떨리고 피멍이 잘 찬다.
어디든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아쉬움이 가슴에 쓰러진 물처럼 스며든다.
그럴 때 마다 체념 속에서 모노 아저씨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는 'The forever My Uncle'이다.
그는 지든 말든 상대를 기다려 준다.
그들은 작고 약한 렌을 우습게봐 렌을 겁주며 다들 맨손으로 온다.
단독 싸움이지만 이것 또한 일종의 대회전이다.
패자로 쓰러지면 정신마저 영원한 패자가 되는 싸움이다.
상대의 승전(勝戰)을 위해 몇 번 밀려서 쓰러지면 불쌍해서 양아치들이 오히려 봐줬다.
모노 아저씨 그분도 이제는 속내 아줌마와 함께 조용히 숙면으로 저 세상에 계실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더 노년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렌이 꾸는 꿈이 따로 하나가 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믿어보는 렌의 오래된 하나의 구석 꿈이다.
살아생전에 더 노인이 되면 자신에 대한 대우가 혹시 조금은 더 나아질까 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희망삼아 영면하기 전의 자신을 스스로 더 위로해 본다.
난 남들보다 약하고 작지만 아무 걱정 없이 건강하기 때문에 더 오래오래 살 거야.
렌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은 생각이 되질 않는다.
공부 끈이 짧아서인지 깊은 생각은 노력해도 잘 안 된다.
매번 생각에 또 생각을 힘써 보지만 항상 허사(虛事)로 끝이 난다.
공부란 다 때가 있는지 촉탁을 놓친 그에겐 적소(適所)에 각인이 그토록 어렵다.
만사에 티끌 하나도 다 찰나의 때가 있는 법처럼 보인다.
그것을 놓치면 종신토록 종신아류(終身亞流)가 될 거처럼 보인다.
렌은 작고 약해 보여도 몸과 마음, 정신이 맑아서 좋았다.
그는 생존을 위해 어떤 정신 하나를 스스로 일찍이 알아서 잘랐다.
그것은 급하면 누구나 행하는 무궁무진한 신(神)의 섭리인 것이다.
어린 렌이 자기의 목숨을 붙들려고 영혼하나를 고의로 자른 것이다.
마치 몽골초원에서 가장을 잃은 아이가 주린 배로 홀로 서 있는 거 같았다.
양젖을 구걸하기 위해 모르는 천막 게르 앞에서 그릇을 들고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
세월의 때가 짙게 묻어 우선 돈이라도 더 벌면 자신에게 더 이로운 것이다.
노후를 위해 넉넉하게 주식과 은행에 돈을 더 모아야하지 않을까 하였다.
렌은 숙고에 숙고하면서 돈은 단 한 푼이라도 더 모으면서 비밀로 나갔다.
시대를 잘 만나 이제는 차가운 단칸방이 아니고 따뜻하고 잘 구비된 원룸에 산다.
죽 내내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돈도 모으며 살고 있다.
세상을 더 알기 위해 배달되는 조간신문은 꼭 챙겨본다.
쉬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쉼 없이 지나가는 차들을 본다.
그때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잔상이 마음속에서 하염없이 뜬다.
검은 액자 속에 모노 아저씨와 속내 아줌마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이다.
또 소반에 높게 포개진 국수그릇과 한 그릇의 흰 쌀밥과 따끈한 쇠고기 국물이 더하여 있다.
그리고 전기를 바로 끊어가는 노파의 뒷모습과 냉기 흐르는 자취방의 램프석유불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는 항상 고프지만 그는 매우 건강하다.
식사를 조금이라도 더 하면 구토(嘔吐)가 오기 때문에 그는 늘 소식(小食)이다.
긴 여망으로 모노 아저씨 부부만큼은 죽기 전에 소식이라도 듣고 갔으면 한다.
별 느낌이 없는 렌도 느낄 만큼 세상은 연이어 빈틈없이 급하게 변하면서 흐른다.
그런 모습에 렌은 수없이 당황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자신을 갈구하는 꿈이 있다.
그것이 렌의 오로지 오래 된 꿈이요, 날로 바라는 희망(希望)이다.
마음에 드는 좋은 집에서, 편안한 노후 속에 조용히 아침에 홀로 영면(永眠)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구비된 큰 원룸에 살고 있다.
모두가 웬만하면 다 받는 노인기초연금도 매달 25일에 행복하게 꼬박꼬박 받고 있다.
그리고 수시로 산발적으로 알림과 함께 통장에 들어오는 주식배당금도 소소하게 있다.
하지만 렌의 사념은 시각(時刻)을 잘 맞추지 못한다.
그 시각에 1층 우편함에는 어떤 고지서가 와 있었다.
떠나온 고향 옆의 면사무소에서 보낸 것이다.
1년에 한번 내야하는 전답보유세금이다.
3곳의 필지인데 합쳐서 3000평이다.
3000평이면 정식 축구장 크기이다.
한 필지는 전답이고 나머지는 묘지 터이다.
묘지 터는 세금이 없고, 전답에 대한 고지서이다.
전답과 묘지 터가 렌도 모르게 친척과 공동소유로 있었다.
저쪽에서 상속분할이 되자 렌에게 고지서가 날아 온 것이다.
그동안 토지세를 필지의 공동대표가 다 내었던 모양이다.
전답의 필지는 300평으로 크지는 않다.
그래도 고구마, 감자, 보리는 나름 크게 생산할 수 있다.
같은 뿌리의 씨족이 그 토지를 알고도 그동안 훔친 격이다.
그러다가 그 가장이 별세하니, 자녀들이 각자 분할상속한 모양이다.
적든 많든 토지세는 공인된 지주가 무조건 내어야하는 세금이다.
이제 렌도 고향땅에서 작지만 실제의 지주(地主)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지주(地主)를 넘어 큰 나라의 대제(大帝)가 될지도 모른다.
혼자 잘 꾸는 꿈속에서 대제국(大帝國)의 황제(皇帝)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묘지 터에는 수많은 묘지들이 차례차례로 묻혀 층층이로 가득히 있을 것이다.
그 가득한 묘지 터의 그믐 밤하늘엔 푸른 은하수가 온 하늘에 그득할 것이다.
이제 그 땅의 주인이 바로 살아생전에 고생하고 또 고생한 노년의 렌인 것이다.
미몽(迷夢)에서 그 땅의 수많은 묘지의 운명이 모조리 렌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태양과 달과 별과 은하수가 수화목금토의 운율에 따라 대하(大河)처럼 흐른다.
렌은 살아 돌아온 황자(皇子)가 되어 풍운을 타고 그 묘지들을 홀로 바라볼 것이다.
부러진 칼로 황자(皇者)를 증명하듯, 천자로 자신을 스스로 영접하고 안내할 것이다.
그는 황위(皇位)에 올라 명실공이 만인만국(萬人萬國)의 대제(大帝)로 올라설 것이다.
이제 자신의 의지로 모노 아저씨 부부처럼 천사도 될 수 있고 보살도 될 수 있다.
또 집세를 받고는 전기선을 떼어 가는 주인집의 노파(老婆)도 될 수 있다.
렌은 아직 그 편지가 온지 모른다.
이렇게 역사는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이어 진다.
잘하면 50여년 만에 고향에 갈지도 모른다.
가면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혼자 돌아볼 것이다.
50년이면 동네와 산천이 적어도 5번은 바뀌었다.
어쩌면 모노 아저씨 부부의 이야기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렌은 일종의 동일률의 사변철학자이다.
세상은 변해도 항상 늘 같은 모습으로 여긴다.
세상이 다만 자기의 가슴 속에서만 나이가 들뿐이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달님과 해님으로 나를 맞아 준다.
그래도 꼭 바뀐다면 밥 먹는 주인공들 정도이다.
그는 모든 역사가 완전하고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없으면 동물이라도 완벽한 세상이라고 본다.
모순(矛盾)이란 삶이 없으면 사라지므로 출생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가끔은 세상을 관조하고 현인(賢人)처럼 느끼지만 바로 끝난다.
자신이 마치 3류 드라마의 잘 나가는 노년(老年)의 주인공 같다.
사색으로 가끔 스스로는 거창하게 생각하지만 항상 결론은 같았고 서툴다.
그래도 렌은 아직도 본인에게 다가와 있는 그 편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노는 날이면 지나가는 차들이 쉼 없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다.
렌은 스스로 자신을 18세기의 프랑스의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다.
높은 귀족은 아니고 시골에서 여유가 넘치는 하급귀족이라고 여긴다.
따지고 보면 사실 그 정도의 신분(身分)은 스스로도 되는 것 같았다.
렌은 지금 그 자리에서 방금 마신 따뜻한 커피의 잔이 식기를 기다린다.
귀족처럼 보이는 두꺼운 진홍색의 고급 영국 본차이나 자기(瓷器)이다.
그의 모든 의복과 신발은 낡아 보이긴 하지만 상당한 고급으로 내실이 있다.
원룸도 나름 큰 고급이고 투룸도 있는 등 입주자들이 꽤 많다.
물론 수시로 자주 보이는 입주자들과 렌은 별개다.
남녀의 금발의 백인과 곱슬머리 흑인여자도 몇이 보인다.
누가 있든 말든 엘리베이터 안에서 렌은 조용히 문(門)만 응시하다가 내린다.
어쩌면 렌이 몇 차례 출소한 전과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묵직하게 너무 말이 없어, 보다가 섬뜩할 수도 있다.
어릴 때 생고생한 왜소한 키의 전형적인 전과자의 모습이다.
입주하는 날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 주는 커피를 마셨다.
마스크를 벗고 마시는 모습에 주인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표기한 나이보다도 너무나 훨씬 어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심미적 눈빛과 선명한 이목구비에 여성미가 물씬 거렸다.
얼굴과 외모에 은은한 지성미가 번지는 가인(佳人)이었다.
예상외의 미적 모습에 흠칫 놀란 주인은 가슴이 흔들리었다.
일순(一瞬) 남자주인의 눈에는 혹시나 하는 의심도 들었다.
느낌으로 묵상(黙想)의 잔혹한 전과자로도 보였다.
그는 그런 무시무시한 전과자들을 영화에서 수없이 봤다.
그 후론 렌의 그 미안(美顔)을 두 번 다시 보기가 쉽지 않았다.
모자와 방역마스크를 깊게 쓴 낡은 낭인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소방점검 차 주인은 일부러 기사들과 렌의 방에 들어갔다.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고는 주인은 다소의 안도감을 가졌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같은 높은 수준의 교양도서가 보인다.
주식에 대한 도서도 보이지만, 건축이나 Flower 등도 보인다.
산행이나 야생화, 음악사나 미술사, 철학이나 법률 등 나름 전문도서이다.
별로 많지 않는 30여권이지만 존경과 외경을 느낄만했다.
주인이 의심하든 말든 렌은 여전히 조용할 뿐이다.
가끔 현자(賢者)처럼 보여도 렌의 머리는 텅텅 빈 강정과 같았다.
여전히 그는 창가에서 따뜻한 커피 잔이 식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
마취된 마냥 오로지 분주히 지나가는 차(車)와 사람들을 보고 또 본다.
하지만 그의 의식만은 고독이나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전하고 아름답고, 건설적이고 멀리 보는 지도자처럼 원대(遠大)했다.
고요히 지나가는 차들과, 연이은 이름 모를 행인만 봐도 배가 불렀다.
건너편 너머엔 높은 쇼핑 건물과 고급백화점도 함께 아파트 숲 사이로 보인다.
탁자 위의 두꺼운 진홍빛 자기(瓷器) 사이로 해골깃발의 해적선이 줄줄이 난무한다.
그 배로 무장한 대영제국의 자유정신과 동료존중과 세계도전의 마음을 깊게 기려본다.
설거지를 마저 마치려고 푸른 앞치마를 탁자 위에 앞에 챙겨 놓고 기다리고 있다.
줄곧 무시당하고 골라서 고생했지만 이제는 그도 여유가 있는 넉넉한 노인(老人)이다.
이제는 'The forever My Uncle'인 모노 아저씨 부부(夫婦)의 소식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영면(永眠)의 문턱에서 그 두 분이 렌을 누구보다 먼저 기다려줄 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만남을 거부하고 거절한지가 오래다.
하지만 모노 아저씨 부부만큼은 피안(彼岸)에서라도 연(緣)으로 만나고 싶은 것이다.
렌은 오래 전에 이미 모든 만남의 영혼을 지운 것이다.
그래도 모노 아저씨 부부만큼은 열외로 하고 싶었다.
그러하지만 모노 아저씨 부부와의 만남도 오로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 만남의 연(緣)이 피안에서는 아예 없는지 모른다.
멸절(滅絶)의 세계에서는 그런 만남 자체는 불가능을 넘어 불능이다.
이미 렌의 책상 앞에는 가입한 상조회사의 이름과 그의 알림판이 크게 붙여져 있다.
‘저의 이름과 생년월일과 가입번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비는 완납했습니다.
독거노인이니 잘 부탁합니다. 장지(葬地) 등은 가장 편안 곳으로 부탁합니다.
더 필요한 돈은 저의 책상 옆에 고정된 금고에 있습니다.
예비 열쇠와 비번은 금고아래 바닥에 다 있습니다.
전문기사님을 부르면 다 풀 수 있습니다.’
렌은 상조회사 알림판을 그의 책상머리에 풀과 테이프로 고착하여 붙이면서 느꼈다.
지나간 자신의 과거 그 모두에 대한 하나하나의 말들이 단 한 줄로 정리되었다.
지나갔지만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의 삶도 결국은 한 마리의 강아지와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먹이를 준 대상을 영혼으로 삼아 뫼비우스의 고리를 걷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뫼비우스는 또 하나의 영혼들에 생명을 걸어준다.
그리고 줄줄이 떨어지는 낙하산들처럼 복불복(福不福)이다.
그 가운데 렌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영혼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그는 돌아가고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모든 것을 느끼면서도 미련과 아쉬움으로 가득 찬다.
그 가운데 그래도 렌은 운이 좋은 편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내일을 위하여 살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록 그가 이웃과의 연(緣)을 중요시 하지만 인연(因緣)으로는 싫은 것이다.
그 누구도 인연으로는 아예 싫은 것이다.
우선 설거지부터 마치고 샤워 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잤으면 한다.
이 따뜻하고 간접 등이 은은히 별처럼 내리는 폭신한 원룸의 큰 침대에서 말이다.
내일의 석양이 또 내릴 내일을 위하여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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