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네
정 성 채
비가 내린다
보슬비 사이로 그는 걷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화창한 봄날
붉은 장미 농원에서도
그 발걸음은 향기에 묻어 있었다
여기저기 하얀 웃음 손짓하는 몸짓
침묵 속에 홀로 걷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눈 내리는 간이역 평행선 철로 끝
푯대에 매달린 기적소리
그 플랫 홈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긴 다리가 그림자를 남기며 그는 걷고 있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파아란
하늘 우러러 분칠하듯 그린 자화상
세모, 네모 그리고 원 속에서 해가 되어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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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정 성 채
나 두 눈에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그대는 부드러운 손.
나 고독에 떨 때
따뜻한
품에 안아주는 그대는 뜨거운 심장.
나 절망에 헤맬 때
한 움큼 빛을 집어
두 눈을 밝혀주는 그대는 등대.
나 영혼이 방황할 때
신의 음성으로
길잡이 해주는 그대는 하느님.
길 잃어 헤맬 때
저 밤하늘의 별자리를
빛내며 인도해 주는 그대는 북두칠성.
그대 있기에 오늘도 이 교차로에 서서
저 높은 곳을 향해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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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꿈
정 성 채
나는 시골의 조그만 농촌에서 태어났다. 봄이 되면 먼 산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향긋한 풀 냄새가 남풍에 실려 오면 나물바구니를 들고 논두렁 밭두렁으로 소꿉친구들과 몰려다녔다.
야산에 진달래가 붉게 피면 학교에 갔다 오다가 책보를 허리춤에 둘러매고,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탐스러운 진달래를 한 아름씩 꺾어다 집안에 꽂아 놓고 온통 봄을 다 끌어 들였다. 아카시아 꽃이 흰 눈처럼 필 때면 그 꽃을 따 먹고, 주렁주렁 따다가 집에 아카시아 향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이 행복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른다. 그때는 모든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교과서도 마분지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학용품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였지만, 나는 그때가 제일 행복하고 삶에 대한 충만감으로 자신 만만했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모기 불을 피워 놓고, 감자, 옥수수를 통째로 구워 먹고 북두칠성 은하수 별자리를 바라보며 끊임없는 이야기에 밤 지새우는 줄도 몰랐다. 매일 밤 이야기 선생님은 아버님이나 언니 또는 동네 높은 학교에 다니는 오빠, 아저씨들이었다. 특히 아버님 이야기에 나는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는 주로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삼국시대부터 유명한 왕과, 장군들의 이야기로부터 고려시대, 이조시대, 한일합방,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셨다. 훌륭한 성군과 충신들의 역할과 폭군과 간신과의 관계 등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나는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하며 꿈을 갖기 시작하였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남존여비사상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개화 되지 않은 집안에서는 여자를 많이 가르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같은 조건이면 남자를 가르치고 여자는 제처 놓았다. 나는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왜냐하면 조금도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최선의 뒷받침을 해주신 덕택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아버님께서는 항상 훌륭한 길을 걷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외국의 훌륭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다. 학자, 과학자, 문인, 교육자, 등 그때 법조계의 여성이 적은 것을 알고 나는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힘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멋지게 변론하여 정의가 승리하고 사회가 평화롭게 발전하도록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공부에 욕심이 많아서 책을 손에서 놓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둘째는 나 자신이 용납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첫째 이여야 식성이 풀렸다. 공부도, 운동도, 예능도, 늘 반에서나 전교에서나 1등이야 하고, 반장이고 어린이 회장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송사도 내가 읽었고, 6학년 졸업식 때 답사도 내가 읽어 졸업생도 울었고, 학부형님들도 다 울었었다.
나는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유능한 여변호사가 되려고 옹골지게 꿈을 다져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합격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었다. 법대 다니는 친척오빠가 사각모를 쓰고 우리 집에 왔었다.
“성채야” 집에 있니?
이 단어가 내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장차 여류 변호사가 꿈이라니, 오늘 우리 법대생들이 모의재판을 하는 날이니, 구경 시켜 주마, 해서 따라 나섰다. 그 큰 강당에 대학생들로 꽉 찼었다. 단발머리 하얀 칼라를 하고 예쁜 고교 소녀가 와서 참관하는 게 기특한 지 오빠 친구들이 다 한 마디씩 칭찬 하니 오빠는 기분이 으쓱하여 그날은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준엄한 판사 앞에 죄인들이 끌려 나오고, 검사, 변호사가 서로 따지고 언성 높이고 야단들이다 나는 이날 이곳을 나오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빠께서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내 꿈은 사라졌어요. 변호사 못 할 짓입니다. 침통했다. 왜 인간이 일생을 사노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즐겁고 행복한 일만 보고 살려고 노력해도 험한 일을 보게 되는 일이 많을 터인데, 변호사하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만을 평생 듣고, 보고 살아야 하니 어찌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후로 나는 무척 방황했다.
그런 후 나는 철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인생의 오묘한 진리, 자연의 섭리, 우주의 신비, 등에 늘 의문을 품고 한때 염세주의 같은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푸라톤, 칸트, 루소,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단테, 럿셀 등 훌륭한 분들의 책에 심취되었었다.
나는 철학자가 되어 독일에 유학 가서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꼭 받아야지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암울하고 방황의 시절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어 그 꿈은 성취 일보 직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내 생애에서 내 뜻대로 안 된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바로 이 시절인 것 같았다. 사람을 키우자 가장 쓸모 있는 인재를 기르자. 그 꿈이 실현되어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가장 존경받는 스승이 되자. 그 덕택에 지금까지도 제자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나를 고달프게 한다. 이것은 즐거운 비명이지만 내 전공을 더 빛나게 공부해야지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열심히 읽고, 배웠고, 썼다.
덕택에 졸업 석사 논문이 최우수 논문으로 추천되어 전국 각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이미 유명해져 있었더라 하던 시인 쉴러의 말이 바로 내가 되었었다.
MBC tv, KBS 라디오, 등 각 매스컴에 출연 요청이 쇄도하고 하루아침에 세 곳을 출연하느라 발목까지 삐었다. 계속 더 전진하여 전문 교육자로 봉사하고자 했더니, 아플 싸! 건강이 훼방을 놓았다. 아! 이젠 그만 쉬라는 뜻인가 보다, 내 사전에 심심하다는 단어는 없었으니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꿈은 버릴 수 없지. 이제 남은 여생, 보고 싶은 책이나 많이 보고, 조용히 글이나 쓰고 살고 싶다고 또 꿈을 갖기 시작했다. 무딘 펜이지만 열심히 또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꿈속에서처럼 내 글이 신인 작품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간은 끊임없이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인 것 같다. 꿈이 없으면 생명의 불꽃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꿈은 꼭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안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꿈이란 어른아이 때 소나기가 지나간 먼 지평선 위에 무지개가 찬란히 나타났을 때 그 무지개를 잡으러 뛰어가면 거기 있다가 아니 저기 저기로 가서 잡으려면 아니 여기 아니 저 산 너머 결국은 무지개를 잡으려던 소녀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득한 지평선의 한 순간 찬란한 무지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