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6강
말씀/ 마가복음 4:1-34
요절/ 마가복음 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마가복음 수양회는 역대 어느 수양회보다 준비기간도 짧고 프로그램도 단순합니다. 그럴수록 말씀에 집중하여 한 말씀을 깊이 받는다면, 역대급 수양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각 사람에게 드러내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 엄청나게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를 띄우고 그 위에 올라 앉으셨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갈릴리바다 마가복음 수양회가 즉석에서 펼쳐진 것입니다. 봄비가 그치고 청명해진 갈릴리 바다 위로 낭랑하신 예수님 말씀이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아마 본문에 기록된 비유는 가장 깊이 와 닿은 말씀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2)
들어보십시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3) 오늘날 농사는 대부분 기계로 이루어지지만, 당시에는 거의 모든 것을 사람 손으로 했습니다. 땅을 갈아엎을 기계가 없었기에 밭에는 미처 캐내지 못한 돌들이 많았습니다. 물기가 많고 기름진 토양에서는 가시덤불 같은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는데도 미처 걷어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도로와 밭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아, 여행자들의 발길로 밭 가운데 오솔길이 나기도 했습니다. 좋은 씨앗을 뿌린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일구고 골라내고 김을 매어야 합니다. 문제는 기계 없이 그런 일을 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4) 흙이 얕은 돌밭, 정확히 말하면 흙 아래 있는 돌을 캐내지 못한 밭에 떨어졌습니다. 해가 돋자 뿌리가 없음으로 말라버렸습니다.(6) 길가도 아니고 돌밭도 아닌 비옥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미처 김매는 손길이 닿지 않았더니 어느 순간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아 결실을 방해했습니다.(7) 그 모든 것들을 피한 땅, 곧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무성하게 자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8)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활 상식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왜 하신대? 오늘은 메시지가 참으로 거시기하구먼”, 궁시렁거리며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몰려든 사람들가운데 실망감이 스물스물 안개처럼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위기를 뚫고 선포하십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시니라” 들을 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선포할지라도 꽝이 된다는 경고입니다. 메신저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 밭을 돌아보라는 도전입니다. 그러자 10절을 보면, 예수님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몇몇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비유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물어왔습니다. 이를 볼 때 들을 귀란 듣는 즉시 척척 깨달아 아는 ‘센스있는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면 물어보는 ‘겸손한 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은 머리 문제가 아니라 마음 문제입니다. 머리가 똑똑해도 마음이 교만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히 듣고 배우려는 귀를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종교적 예식이 그리스도인인가 비그리스도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교회에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절에는 방언을 하느냐, 못하느냐로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외인이냐를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람에게 주셨던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는 말씀이 오래전 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도 주신 말씀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외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말씀을 통해 염려를 물리치고 담대함을 얻었다면, 그것이 하나님 사람의 표시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구원과 영생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증거입니다. 만약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와닿는 것도 없고 믿음도 생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외인이 아닌지, 두렵고 떨림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외인이라는 말씀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외인을 ‘인싸, 아싸’에서의 아싸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인싸로 살아도 되고 아싸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는 아싸로 살면 안됩니다. 12절 말씀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성전은 무너지고 이방인들의 포로로 끌려갈 수 있음’을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나 바벨론의 등장을 보며 하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듣지 않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보아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하나님의 경고의 손길을 보았다면, 이방세계에 끌려가 외인처럼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여줍니다. 또다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바벨론 심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 없는 외인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비유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13) 마음 밭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천상의 메시지를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농부의 추수는 씨를 뿌림으로 시작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말씀을 뿌림으로 시작합니다. 1강 강사 경민 목자는 20여년전 모임에 들어오기를 부담스러워하여 복도에서 말씀을 들었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은 하늘에 무너져도 하지 않는 절대 에고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깊이있게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심어져서 이루어진 역사임을 믿습니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말씀강사와 달리 결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길가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는 딱딱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까요! 안좋은 기억이나 상처가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편견이나 선입견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삐딱한 안경을 쓰고 있으면 기적의 현장에서 저자 직장의 말씀을 들어도 이상하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기독교를 수구집단으로 몰아가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의해 조장된 여론은 사람들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길가밭이 되듯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딱딱해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처나 분위기를 근본 문제로 보지 않고 사탄의 문제로 보십니다.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상처나 분위기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 이면에 역사하는 사탄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상처의 기억이나 사회적 편견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면 무조건 예수님을 배척했느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갖고 십자가 죽음을 예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딱딱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 문제를 크게 생각하게 만들어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사탄을 인식하고 영적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은 말씀을 뿌리는 역사를 방해할 수는 없지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갈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 문제로 반발심을 갖게 하고 은혜 받을 마음을 뒤집어 말씀과 상관없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마음이 딱딱해지고 있다면, 위기의식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말씀이 회개를 원하면 회개하게 하시고 믿음을 원하면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사람이 아닌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할 때, 말씀을 영접하고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는 돌밭으로 인해 뿌리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6,17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 진짜 영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목자님, 일대일 말공 안하면 어쩔 뻔 했어요! 예배에 저를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양을 만나는 것이 많은 목자들의 로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처럼 살 줄 알았던 그가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자 슬그머니 떠나 버립니다. 환난이 원수이고 박해가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난이나 박해를 근본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산을 오르다가 바위 틈을 뚫고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 자랄 수 있을까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북한산의 바위처럼 단단한 자기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체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온유의 달인 성수목자라 할지라도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말씀 앞에 서게 되면 때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요구받습니다.
어떻게 바위같이 단단한 자기 세계를 뚫고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는 세속도시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뿌리가 하루 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니듯이, 말씀에 뿌리내리는 신앙 또한 하루 아침에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본성은 웬만해서는 자기 세계의 껍질을 깨지 않습니다. 환난이나 박해같은 시련을 받을 때, 돌처럼 단단한 자기 세계가 깨어집니다. 교만한 마음이 낮아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붙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박해는 실족할 수 있는 시험이 될 수도 있고 뿌리깊은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양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든 현실문제에 부딪혀 있다면, 문제해결에만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불안과 두려움에 휘둘리다가 실족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포커스를 맞추고 말씀이 주는 방향과 믿음대로 나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는 마음, 환경을 탓하고 조건 문제로만 생각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한 말씀을 깊이 의지하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실족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거목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사무엘 선교사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목자로 살아도 슬픈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으로 운명주의의 바위를 깨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자신 뿐만 아니라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운명주의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지도자로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시련을 받을수록 말씀에 뿌리를 내림으로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가시떨기같은 세력으로 인해 기운이 막힌 것입니다. 18,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예수님은 세가지 가시를 말씀했습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염려나 유혹이나 욕심과 거리가 먼 세계를 살 것 같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현실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는 분이었다면, 제자생활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역사에 전념하는 예수님과 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생각하면, 염려하고 유혹에 끌리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심리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염려하고 유혹을 따라 욕심을 내어야 성공하고 발전할 것처럼 다가옵니다. 어디까지가 염려이고 어디서부터가 대책마련인지, 어디까지가 유혹이고 욕심이며, 어디부터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세상은 온통 염려와 유혹과 욕심을 동력 삼아 무한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황금으로 만든 가시방석, 황금으로 만든 가시침대에 살아야 한다면, 그는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점점 고갈되어 정신병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아무리 빛나는 명분을 가졌을지라도 그 결국은 기운이 막히고 결실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장래를 염려를 하고 또 염려해 해보십시오. 유혹과 욕심을 좇아 여기저기 마구 따라가 보십시오.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고갈되어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불안과 근심, 우울과 무기력하고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승리의 비결로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염려가 올라올 때마다 지금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유혹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붙들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온갖 욕심을 좇지 말고 거룩한 열정을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들이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우리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기 원합니다. 전심으로 헌신했던 분들가운데 현실적으로 이런 결실을 맺지 못해 마음 아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 대부분이 자기당대에 원하는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겨우 이삭 한 사람 약속의 자녀로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탁월한 선지자였는데, ‘공연히 수고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로 낙심과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시공간에 갇혀 있기에, 주의 말씀이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를 다 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시공간의 범위를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고 제자로 살아가는 여정을 추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손길들이 얽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산다면, 우리가 인지하는 못하는 가운데 수많은 결실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시간속에서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불러오는데, 그것을 측량할 수 없기에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말씀을 간직하고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면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도록 등경위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말씀하십니다.(22) 그러므로 들을 귀를 준비하기만 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23)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려보아야 합니다.(24) ‘나의 마음은 겸손한 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 교만과 자기의로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그저 힘든 마음을 위로받는 현자들의 지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구원과 영생,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줄로 여기고 있는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농부는 어제 씨를 뿌리고 오늘 추수하지 않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고 성장합니다.(27) 우리는 수고한 만큼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현관에 있는 단풍나무나 전나무를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농부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 오늘은 이만큼 자랐군, 어제보다 이삭이 0.1mm 자랐네...’ 매번 측량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싹이 나오겠지, 그 다음에는 이삭이 나올거야(28), 그러다 보면 추수할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어제 말씀을 붙들었는데, 오늘 달라지지 않았다며 조바심 낼 것이 아닙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분에게 자주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라는 단어를 지워버리세요. 빨리 좋아지고 빨리 회복되려고 기도하지 마세요. 반드시 좋아집니다. 그것을 믿고 오늘을 잘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하세요” 세상에서 제일 천천히 자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며 인내와 수고를 멈추어 버리면, 그는 어리석은 하늘나라 농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또한 어디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겨자씨 한 알, 눈꼽만큼 아니 눈꼽보다 작은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나 공부하지 않으나, 겨자씨 한 알 정도의 차이처럼 보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 그렇지 않으며 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의 크기와 겨자씨가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된 모습을 보십시오. 이 그림은 예수님 당신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으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또한 골고다 언덕에서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세상에 묻혀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살았습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생명의 구주가 되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모든 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열매맺는 인생을 사는 비결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거기에 있습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세상은 우리를 두렵고 당황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말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 더욱 겸손하고 더욱 간절해져야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나 방향을 잡아야 할 때일수록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 커다란 모임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놓쳐버리면 좁쌀같은 사람, 형편없는 모임으로 전락합니다. 반면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나 모임이라도 말씀을 따라가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풍성해지며 열매를 맺습니다. 내 안에, 내가 속한 가정과 모임안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