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서론 ㅣ
(3) p.25 - 32(15줄까지)
p25
성녀 데레사가 늘 주장하기를,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행위의 탁월성이나 위대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보잘것없고 가장 하찮은 일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라면
그것이 최고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사랑에 따라 그분이 판단하신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행위들을 실천할 수 있음을
성녀는 선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200여 년 전에 코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고의 성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 여러분은 삶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삶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 만족해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되어져야할 때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덕을 추구하는 데 연출해야 할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p26성녀 데레사에게 되돌아가 보자.
성녀는 한 조수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매님의 생활은 겸손하고 숨겨진 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미소하지 않음을 기억하세요.
자매님은 사랑으로 처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병상에서, 성녀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상을 하직한 다음
성녀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시 이르길
"신뢰와 완전한 위탁의 길인,
영적 어린이의 길에 그들이 나서도록 권고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성녀의 자서전 안에 언니 마리아에게 보내는 글,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으셨던 비밀들" 을
말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러하다.
"예수님은 결코 드러나시지도 않고
당신의 목소리를 나로 하여금 듣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은밀히 저를 가르치시지만
당신 사랑의 신적 용광로에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를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품 안에 두려움 없이 잠든 아기처럼 완전한 위탁과도 같습니다.
... 예수님은 위대한 행동들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맡김이며 감사드림입니다.
... 오! 예수님, 당신의 측량할 수 없는 자애에 대해
모든 '작은' 영혼들에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만나신다고 하고
그 영혼이 당신의 무한한 인자를 굳게 믿어 그 자신을 온통 내맡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즐겨 넘쳐흐르도록 내려 주실 것 같이 생각됩니다." (p.26)
p27우리는 코사드가
"현 순간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
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고찰해 보고 있노라면,
성녀 데레사가 남긴 다음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만약 제가 매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현재만을 바라볼 수 있고 과거를 잊으며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는 실망하고 또 실망감을 느끼는데,
이유는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Little Way)" 의 전 목적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만인이 하느님 뜻에 조금도 남김없이 내맡김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녀는 성녀 체실리아를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성녀라고 말했다.
"저를 특별히 기쁘게 한 것은
성녀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것이었고,
그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심이었습니다."
위탁과 신뢰,
이것은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열쇠가 되는 두 개의 단어들이다.
이제 코사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포기의 최상적 중요성에 관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코사드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
p 28 고 영혼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몇 세기 이전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당신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것들에 있어서
당신 존재의 미세한부분들을,
다함이 없고 가장 확실한 섭리에 간절하게
또 완전한 신뢰를 두고 맡길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권고들이
거의 모든 성인들의 글과 설교에 잘 나타난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 코사드는
고상한 영적 가르침을 설교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1675년 그가 태어난 해보다 몇 년 앞서서
로마에 와 자리 잡았던 스페인 신부 미카엘 데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가 쓴
『영적 안내서』(The Spritual Guide) 라는 책이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도움을 받았으며
바티칸의 방 하나를 선사받기도 했다.
그의 책이 나왔을 때는 다섯 명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흔쾌한 승인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예수회원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종교 재판관들이었다.
이 책은 5년에 걸쳐 네가지 언어로 20판을 찍었다.
이 책의 가르침은 순식간에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영성의 기본 서적으로 삼았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불완전한 몰리노스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의 신앙생활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성과 상상력을 통해 또 감각의 절제와 금욕 생활로
p29하느님을 찾는다.
이들은 하느님을 목자와 의사로서, 아버지나 주인으로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려고 힘쓴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며
흔히 정열적인 사람의 행동방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방법이며 초보자들의 길입니다.
비록 이와 같은 방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써는 결코 완덕에 이르지 못합니다.
실상 50년 동안 이 외적 수업을 해왔던
많은 이들의 경우에 하느님은 빠져 있으며
오로지 그런 사람들의 이름만 남아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미지나 형식 혹은 형상과는 무관하게
평정과 내적 휴식에 근거한 크나큰 확신을 가지고
순수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손안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며,
주님의 현존에로 들어 높여진 영과 더불어 영혼의 깊숙한 부분에 숨어듭니다."
물론 몰리노스는 내적인 영성생활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조사하여 미세한 활자로 된 150여 쪽에 이를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위대하고 심금을 울리는 책자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 말미암아 몰리노스는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지내야만 했다.
인간은 너무나 자주 인간적이다.
몰리노스의 글을 읽은 많은 이들은 그가 구원에 대한
손쉬운 방법을 가르쳐주었음을 알았다.
그들은 관상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
그 상태에 이르는데는 멀고도 아주 힘든 여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p30하면서 누구든 관상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영혼들은
관상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것에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일상적인 종교상의 의례를 지키는 일과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애덕의 본분에서
자신들의 의무가 해제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 생각으로는 자기들이 너무나도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므로,
신심에 도움을 주는 물리적 도구들, 즉 묵주, 성상, 성화
그리고 성해 등 모든 것을 멀리하였다.
이는 쉽사리 유혹이나 많은 인간적 행위의 상대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영혼과 사회 질서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몰리노스는 단 두 가지 점에서 잘못을 범하였다.
그는 내적인 영성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성체를 모시기 전,
자신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계속적이며 완전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몰리노스 자신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12년을 살았다.
물론 이것은 가톨릭 신자로서 남긴 잘못된 교리이며 그릇된 행동이다.
그가 범한 두 번째 실수는,
묵상이란 오로지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크리스천 생활을 드높은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묵상을 버리고 그것을 관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두 방법은 좋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찾고 있는 영혼들은 몰리노스가 말하고 있는 방법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p31강요하고 있음을 체험은 말해 준다.
이것은 비록 이단은 아니었다 해도 몰리노스가 여타의 다른 방법보다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선언한 것은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가 교육 수준이 높은 신비론적인 언어에 능통하고
고도로 세련된 대중을 상대로 글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묵상'과 '관상'이 아무런 의미조차도 부여하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들 영혼이 하느님을 발견하였음을 우리는 항시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수천 가지의 길들이 주어져 있다.
예수회원들은 몰리노스를 공박하였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치욕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다.
이 공박은 오래 동안 계속되었으며 복잡한 것이었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마에 있는 종교 재판소의 명에 따라 몰리노스가 1685년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22년(11년-다음백과) 동안 감옥에 갇혀 살았고,
재판소는 그의 저서, 강론 그리고 추종자들의 활약상에 관해
- 1687년 초에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200명이 감옥에 갇혔음-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해 여름, 종교 재판소의 법령은 몰리노스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고 행하였음을 선언했으며,
그의 저서와 추종자들의 저서에서 이끌어 낸
68개의 명제들을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그 내용들은 "신심어린 이들의 귀에는 이단적, 불경적, 공격적이었으며
무례하고 위험스러웠고 그리스도교 윤리를 파괴시키는" 것들이었다.
몰리노스는 무릎을 꿇고 p32모든 그릇된 가르침을 저버리기로 맹세하는
대공개 의식을 치른 다음
도미니꼬회의 한 수도원에서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는 끝내 죄수로서 1679년(1696년-다음백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죄목이었던 이단은 정적주의(Quietism)였으며,
코사드는 이 정적주의에 매우 가깝게 물들었다고 고발되었다.
사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라는 저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오랜 기간 동안 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에 와서 인쇄된 것을 그가 살던 당시에 설교했고,
자신의 책에서와 같은 메시지가 들어 있는 많은 편지들을 썼다.
그는 예수회원이었고 정적주의를 매우 적대시하였다.
그는 몰리노스의 단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로마에 전적인 외교상의 압력을 가한 루이 14세의 신하였다.
코사드는 책들과 충고와 권고 그리고 염경기도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감각을 이용하는 것을 정적주의가 단죄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조심스레 정적주의와 단절한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신께 이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단들을 사용토록 하셨음을
그는 매우 정확하게 짚었다.
첫댓글
테바 24.02.26 05:32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성녀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시 이르길
"신뢰와 완전한 위탁의 길인,
영적 어린이의 길에 그들이 나서도록 권고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Little Way)" 의 전 목적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만인이 하느님 뜻에 조금도 남김없이 내맡김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
[ 우리는 누구나 성인이 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히브 12,14)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뵙기 위해 나는 ‘연옥을 거쳐 갈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 직행할 것인가?’
당신은 과연 ‘연옥 정화의 시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연옥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 직행하는 길이 있다!
분명 있다.
그럼에도 왜 굳이 그곳을 거치려 하는가?
(..)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
그것은 소화 데레사 성녀가 말씀하신 대로
‘아기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듯이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 - 창 화살 제1부 4 -
[ Re:누가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가
지도사제 17.07.27 21:25
(..)
저는 감히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아브라함과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예수님이 사신 삶(영성)을 부정하는 행위"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위탁)하는 삶"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제가 "위탁(의탁)의 영성"을
우리말로 "내맡김의 영성"이라는 말로 사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만들어준 책이
바로 <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인데,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살았던
이 책의 저자 프랑스의 영성가
예수회의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 신부님'의 영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을 중심으로 한 영성서.
저자인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살았던 프랑스의 영성가로서,
당시의 합리론과 계몽주의 사상에 신중심주의인 기회 원인론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영성을 종합하였다.
그러한 영성의 종합이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느님 섭리에 내어맡기는 위탁의 자세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길로 바라보고,
매순간을 현존의 성사로 받아들이는 그의 영성을 통해
하느님 중심주의로
사람과 사물,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특히, 이 책에는
<성녀 소화 데레사>에 대한 영성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성녀 소화 데레사가 말하는 "작은 길(Little Way)"이야 말로
<내맡김의 영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에 대해
돌을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 지도사제 2016. 09.08
이제 이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정말 2000년이 지난 3000년기를 바라보면서
세상으로 드러날 겁니다.
분명히 드러나서
이제 하느님에 대한 근본신앙으로 다시 돌아갈 그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런 길에 함께 들어선 여러분들!
정말 저도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부족한 사람들이예요.
부족하기 때문에 더 주님께 내맡기고 ,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내맡김으로써 그분이 이끌어주시는 그 길을 따라가는거★,
이거 외에 없어요.
데레사 성녀가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와 다름없다.
아기는 할 것이 없어요,
엄마가 주는 젖을 물고, 엄마가 해주는 모든 것을 그냥 하기만 되요.
엄마는 하느님이셔요.
그것도 정말 전능하신 하느님이셔요.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분이 이끌어주시는대로 따라가면 되요★,
이것이 무엇이냐? 소위 ★★★'無爲行'★★★ ]
[ 지도사제 16.11.30 14:55
작은 길(Little Way) = 거룩한 내맡김의 길(Holy Abandoned Way) ]
<"현 순간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 >
[ 신비 19.06.25 07:29
하섭내 2-10
(..)
문제가 되는 것은
매순간 하느님의 뜻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피조물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만족은 현 순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현재 이 순간을 떠나서는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느님의 이름을 빛낸다는 것은
그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생겨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 이름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뜻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하고,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하며,
매번 드러날 때마다 거룩하고
또 그것이 품고 있는 이름들 속에서 거룩합니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
p 28 고 영혼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
아버지, 아버지는 아십니다.
저는 바닷물을 두 바가지 마셔 놓고 갈증에 울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저에게 말씀으로 한번도 책망하지 않으셨지만 언제나 완전한 결과를 주십니다.
그로 인하여 저는 수 없는 반복의 실수와 후회를 끝내게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혼과 정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혼과 정신을 다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작은 일 하나도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아버지의 뜻을 생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 졌습니다.
아버지께 저의 모든 것을 내 맡깁니다.
아버지, 제가 작은 일에, 작은 사람에게,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항상 따릅니다.
그 외에 제가 평화로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