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대한 나의 여정과 새로운 길가기<
-한달 물러나 있기로부터 사색-
지금부터 1세기 전에 뉴욕 유니온 신학자이자 종교사회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도적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아무리 개인이 도덕적일지라도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 사회, 체제의 비도덕성에 경각심을 울린 사람이다. 그는 종교사회학자로서 종교가 문화 수용을 넘어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현실주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사회 변혁에 다가가는 부드러운 방식으로는 대화가 있다. 마셜 로젠버그는 『비폭력대화』를 임상심리학을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개인의 욕구라는 것이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며, 일상에서 실천적 영성으로 작동된다는 설명이었다. 또한 대화를 인식과 실천의 핵심이자 성찰(reflection)과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의 원리로 본 사람은 현대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대화란 무엇인가』? 이전 책은 『창조적 대화론』)과 그의 후계자인 MIT대학 조직학습론자인 윌리엄 아이작스(『대화의 재발견』)였다.
나는 돌이켜보면 늦게야 깨달았지만, 중고등학교시절부터 성서 텍스트를 만나는 방식으로 당시 감리교 소장파목사들인 김영운, 이현주, 최완택 등이 진행한 <공동성서연구>를 토요일과 수련회에서 배웠었다. 특히 스승인 고 최완택 목사님을 통해 공동의 해석과 경험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고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분이 진행한 <민들레공동성서연구모임>에 참석하거나 유학후 귀국해서는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다른 인연도 있었는 데, 그것은 종교간 대화의 특출한 감리교신학자인 고 변선환박사를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만난 것이다. 조직신학영역에서 대화와 토착화(주체화)의 이슈는 학부와 대학원의 큰 과제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박사과정도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 종교학부에서 레너드 스위들러박사(신부)로부터 대화에 대해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나의 과정에 있어 ‘대화’가 중요한 학문적 관점과 내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일상으로 펼쳐야 하는 지는 알지를 못했다. 뭐라고할까 개인의 사적인 관심영역이었지만, 신앙이나, 일상 적용에 있어서는 이질감의 풍토속에 있었기에 그 연결점을 찾지 못했거나, 내 안에서 그것을 표출할 그 어떤 동기유발이 약했던 것이다. 물론, 학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익혀서 실천 영역에 사람들을 만나 적용의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아직 구체화된 경험이 없어서 도저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내 나이 40대 중반까지이다.
이론이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에 적용하는 것과는 분리된 추상화된 배움으로 있다가 대화를 다른 방식으로 알게 된 것은 유학중 마지막 학기에 필라델리피아에서 가까이 있는 퀘이커들이 운영하는 영성센터인 <펜들힐>에서 서클 모임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어린 경험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퀘이커 평화훈련 모델인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과 자매모델인 <청소년평화지킴이(HIPP)>의 훈련과 진행자로서 있으면서 서클에서 대화의 작동원리와 그 결과에 관심과 애정 그리고 헌신을 하게 되고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여기에 다시 브라질 모델인 <회복적 서클>의 훈련과 진행 그리고 파커파머의 <신뢰 서클>, 세월호사건후 직접찾아내어 한국에 보급하기 시작한 <스터디 서클> 등에 의해, 그야말로 국제적인 서클모델들의 일련의 세례를 받고나서야 내 의식이 ‘서클대화’라는 것에 소명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거의 2010년대 중반의 일이다.
AVP를 2007년에 시작했으니 거의 10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그리고 명료하게 개인의 의식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데 있어 서클대화의 중요성이 내 의식에 소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다른 서클형 대화모델들을 접하면서 각자 따로 알고 현장에서 경험하던 모델들이 내 안에서 서서히 통합되면서 ‘서클대화’라는 말을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내 입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서클은 선주민들이 35,000년의 역사 속에서 지켜온 삶의 방식이었고, 신성함에 다가가는 존중과 상호돌봄의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리고 기독교평화운동의 핵심종파들인 <역사적 평화교회> 교단들이 서클에 대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평화감수성 영역에서 그리고 회복적실천의 영역에서 서클문화가 도입되고 있다. 학교 수업, 시민사회의 일반 모임, 훈련 워크숍에서, 그리고 가족모임에서도 서클로 하는 대화문화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다. 회복적 생활교육의 영역에서 특히 서클로 진행하는 것은 이제 정상적인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생활지도의 영역만 국한되지 않고 나는 2020년에 들어와서 아예 일반과목에서 ‘수업서클’의 가능성에 대한 훈련 워크숍을 인도하고 있기도 하다. 교사의 가르침과 배움의 독점을 어떻게 수업의 주제를 가지고 공동지성이 발휘되는 방식으로 서클 형태로 할 것인가에 대한 접근이며, 아예 수업까지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갈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교육계의 학교폭력에 대한 주목에 따라서 주로 회복적서클 진행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꾸준히 각 모델들이 진행자들이 배출되면서 일련의 준비과정을 통해 2020년 1월에 ‘서클진행자 한국 네트워크’라는 느슨한 모임이 노근리 평화공원의 워크숍을 통해 결성되었다. 그 모임에는 70명이 전국에서 모였고, 격년제로 6년동안 성찰모임과 훈련모임을 각각 열기로 하면서 코로나영향으로 인터넷으로 그리고 2023년에는 다시 오프라인으로 약 100명에 가까운 서클 진행자들과 25개 서클진행단체들이 모이는 현상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클의 비전을 함께 자율적으로 나누며, 일련의 기획 과정 모임에서 동의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는 역동적인 그물망 사고와 실천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청과 경찰청의 회복적 대화진행에서 얻은 통찰을 어떻게 사회 전반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하에 ‘이웃대화’(제안은 필자가 했으나, 그 예감과 에너지 그리고 방향은 끝없은 동료진행자들과의 대화속에서 씨앗으로 심겨진 것이었다)의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벌이는 데까지 마음이 서서히 움직여 가고 있다. 이것은 출범식을 2023년 7월에 그 단어를 처음 쓴 안산에서 하기로 하고 가을부터 조금씩 마을과 일상현장으로 들어가는 시작을 맞이하고 있다.
서클 대화는 단순히 참가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비전 그리고 삶의 고통을 연결해서 나누고 고통과 폭력을 줄이며,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동의해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과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상상력과 열정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그래서 서클 대화는 현실의 고통에 다가가며 또한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전략적이고, 시스템적으로 구축하는 일련의 다양한 전위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지난 5월 한달동안 집과 일에서 물러서서 강원도 인제의 숲속에 한 펜션에 머물렀었다. 서클 대화의 흐름과 관련하여 무언가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안내받음을 기다리는 것이 내가 숲에 간 이유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서클대화 흐름과 한국적 상황을 –정치사회적 상황, 개인과 조직의 현실, 그리고 코로나이후의 문명에 있어서 인간실존의 보편적 상황- 가슴에 잠시 담고 어떤 응답이 오는지를 기다리며 지켜보았다.
내 나이를 고려해서 향후 5년간 서클대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늙어감을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한 것까지 포함해서 잠깐씩 다가오는 생각들을 성찰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것이 생겼다.
첫째, 회복적서클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두 가지 영역인 관계대화와 내면대화의 영역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소명으로 가져간다.
지금까지 혼란, 갈등, 폭력에 대한 당사자들의 협력적 대화 모임을 ‘관계대화’ 유형으로 규정하고,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 갈등, 트라우마를 ‘내면대화’로 규정한다면, 이 둘을 연계하는 통합적인, 그리고 전천후 갈등전환진행자들을 위한 훈련매뉴얼을 2년 안에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는 지난 2017년부터 트라우마치유에 대한 서클적용에 대한 임상실습 모임을 계속 진행해왔고,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내면가족치유(IFS)에 대한 학기제 실험실습모임을 가져왔었다. IFS가 회복적서클과 철학과 진행이 유사점이 많은 것을 깨닫고 그동안 이를 습득하고 전하는 모임을 가져왔고, 금년도 말에 회복적서클 진행자이면서 서클철학에 기초한 IFS 진행자모임이 형성되면 그 기반으로 다시 RC를 기초로 한 내면대화 통합과정이 향후에 마련되어 좀더 쉽게 진행되는 모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는 임상심리학의 배타적 장벽과 훈련에 대한 경제적 고비용부담을 없애고, 임상심리영역이 아닌 평화활동에서 필요한 적정기술로 자리매김하는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 된다.
둘째로, 서클에 대한 통합적 비전을 지도로 완성한 것을 이제는 각 영역들이 가시화되는 실천가와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회복적 서클 입문과 심화 그리고 조직운영, 수업서클, 스터디 서클, 내면대화(트라우마치유서클) 등은 2~3년 내로 다른 진행자들을 세워 공동리더십으로 넘긴다. 내가 향후 5년간에 집중해야 할 것은 회복적서클의 관계대화와 내면대화의 통합 모델 형성, 평화영성에 따른 서클활동가의 내면 지원과 역량강화 지원 및 지역 리더십에 대한 상호돌봄 시스템 구축 등에 기여한다. 즉, 서클의 통합적 비전에 따른 가시적인 현실화에 대한 훈련 모델의 완성과 그 실천의 역량과 현장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서는 도미니크 바터가 말한 프랙티스 공간과 회복적 시스템 구축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훈련이 프랙티스 되는 거점들을 형성하며 거기서 파장이 주변으로 번지게 한다. 그리고 평화활동가의 내면을 돌보는 자연치유 리트릿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하여 돌봄의 시스템을 구축한다.
셋째로, 한국의 민주주의 취약성과 반복되는 엘리트 권력의 지배와 독점을 해체하기 위해 장기적인 <서클 거버넌스> 연구와 그 실험적 실천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서클진행 경험으로 보면 의사소통과 권력문제가 실재에 대한 정보 인식 및 상호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중요시하되, 강제와 억압이 없고, 권력이 행사되지 않는 조직, 공동체, NGO 단체, 그리고 창의적인 시민기업가들을 위해 서클이 지닌 자율, 대화, 동의, 협력적 통치, 기쁨, 선택이 일과 조직에 배이는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서클 거버넌스(circle governance)이다. 이것이 다시금 라인홀드 니버를 생각나게 한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의 선한 의도와 의지와 달리 조직 문화가 비도덕적인 시스템인 비극적인 불일치를 해소하고 이제는 서클의 개인적인 퍼실리테이션을 넘어 가정, NGO 조직, 사회적기업, 소규모 직장, 사회복지기관 등에 탈지배체제 문화이자 파트너십의 문화를 형성하는 공공의 공간운영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기획하는 것이다. 경직된 전통적인 조직문화 및 기업문화를 일신시켜 진실성과 효율성을 접목시킴으로서 워라벨(work-life-balance)과 플랫폼의 새로운 소통리더십을 형성하여 힘과 권력이 아닌 지성이라는 정보와 열정이라는 에너지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는 조직문화를 재형성하는 것이다. 서클 거버넌스의 과제가 중요한 다른 이유는 뿔뿌리 민중과 지배엘리트사이에 간극이 커서 중간그룹을 서클거버넌스로 민주화하고 이 중간 그룹들이 아래와 위로 의사결정과 방향에 영향을 미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가치에 따른 실무역량을 세우는 사회변화 실천전략인 것이다.
어차피 쉬러 일에서 한달 물러서 있기가 아니었기에 또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도 인제 주변의 산들과 바다들을 걸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어디에 나의 열정이 움직이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수많은 꽃들과 초목이 펼치는 생기있는 어울림이 내 내면에로 뭔가를 건네주고 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관계에 대한 공공의 책임성을 향해 좀더 다가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두고봐야겠다. 마음의 작정을 글로 남겨 향후 5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다시 반추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찰이 될 것 같아 기록을 남긴다. 혹시 동료들 중에 이러한 신념에 함께 하는 분이 있다면 더 감사한 일이 될 것이다.
(202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