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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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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18대 | 19대 | 20대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 | - |
대도무문(大道無門) : 큰 길에는 막힘이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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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2] | |
이름 | 김영삼(金泳三)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
본관 | 김녕 김씨 |
출신정당 | 자유당→민주당→민정당→민중당→ 신민당→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영부인 | 손명순 |
생몰년도 |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 (향년 88세) |
재임기간 |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
서명 | ![]() |
대한민국의 14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가. 호는 거산(巨山)이며, 대중들에게는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아우르는 3김시대의 3김 중 하나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 운동 투사이기도 하다.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부친 김홍조(2008년 별세)씨와 모친 박부연(60년 별세)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어린시절에 그는 개구쟁이로 알려져 있는데, 한 번은 목이 마르다고 논에 있는 물을 마셨다가 어머니께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이 때 형성된 낙천적인 성격이 훗날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통영중학교 재학시절 조선인을 멸시하던 일본인 교장이 전근을 갔는데, 학생들을 동원해 이삿짐을 나르게 했다. 이때 김영삼은 설탕 부대에 구멍을 뚫어 줄줄 새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중에야 설탕이 줄었다는것을 알게 된 교장[3]은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범인을 찾으라고 했고, 김영삼은 주저하지 않고 자백했다.[4]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 후에도 비행장 건설 등에 조선인들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이 일본인 교감은 김영삼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을 매우 감싸주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일본인들과 많이 싸움이 붙었다고...
해방이 된후 경남중학교[5]에 편입되었는데, 이때부터 꿈이 대통령이었는지,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여놓았다고 한다.(...)[6]
194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고[7][8],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2등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웅변실력에 감탄한 장택상과 가까워 지게된다.
후에 장택상의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웅변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훈병으로 배치된다.
전쟁이 끝난 후, 김영삼은 그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가 된다. 그 후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고, 김영삼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다. 53년 9월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김 영삼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서 3대 총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결심을 굳힌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씨의 입당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5세의 최연소기록으로 당선됐다. 거제군 국회의원 . 이 때 그가 세운 최연소 당선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2위가 전휴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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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하던 시절의 김영삼(우측), 좌측은 그의 일생의 동지이자 라이벌 김대중 |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3선 제한철폐에 반대해,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한다.
자유당을 탈당한후 민주당에 입당한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 그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다.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김영삼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안가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등.)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10] 당시 기사.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군정에서 계속 김영삼을 회유했지만 끝내 거절하였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영삼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11] 출소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도중, 자신이 탄 승용차가 원인 모를 괴한들이 던진 초산에 습격당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참조.
1971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 든다. 유진산 당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1차 경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먿지만, 과반 득표에 실패하면서 2차 경선이 이어졌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철승 쪽 표가 김대중에게 옮겨가면서 김대중에 패배한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원하면서 본인의 75년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유신을 맞게 된다.
민주 투사로서의 김영삼을 볼 수 있는 동영상.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12]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1979년 10월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후[13]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 제명된 후 기자 인터뷰에서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함께 해외에 있다가 망명을 선택한 김대중[14]과 달리 김영삼은 귀국하였고, 정치활동에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하며 강력히 규탄했다.
1974년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선명야당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억압적인 유신체제에서 그런 행동들은 쉽지도 않고 성과도 없어서 신민당은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갈라졌다. 이 온건파는 강경파로부터 사쿠라 라고 불리면서, 유신세력과 야합한다며 욕을 먹었다. 다만 김영삼이 총재가 된 후에는 김영삼 본인이 온건한 대여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기도 하며 논란이 되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타협주의적 태도 항목 참조.
1976년 대표최고위원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에게 패배했다. 이후 얼마간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이철승 총재가 중도통합론을 내세우거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신민당은 유신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는 등, 지속적으로 온건 타협 노선을 걸으며 당내 내홍이 발생하자 이를 비판하며 다시 대여 강경 노선을 천명, 선명 야당, 유신 정권 타도, 민주 회복 등을 내세웠다. 또한 1979년 3월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저지 투쟁을 주도하였다. 1979년 5월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누르고 다시 신민당 총재에 복귀한다.
총재가 된 후 6월 11일에 통일을 위해선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처음에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6월 18일 북한의 부수상 김일의 명의로 환영 담화가 발표되는가 하면, 북한 노동당에서 노동당과 신민당 간 접촉을 위한 에비회담을 제의하면서 정치적 논란이 벌어졌다. 정부 여당에서는 국론 분열울 조장한다며 비난했으며, 반공우익 인사들이 신민당사와 김영삼 자택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정계에서 축출하려는 기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1979년 8월 9일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목표로 시위 중이던 YH무역의 노동자 172명은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신민당은 이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빌려주었고, 이들을 돕던 노동 운동가들 역시 신민당사로 보여들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3일간의 철야농성을 지휘하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신민당사 주변의 경찰들이 당사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8월 11일 20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이를 막던 신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폭행하고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으며 김영삼은 자택까지 끌려나간다.
이 와중에 노동자 1명(김경숙)이 사망한다. 자세한 사항은 YH 사건 참조. 이 사건을 통해 김영삼 축출 기도가 가시화되었는데, 9월 8일 법원에서 신민당 총재직 가처분 결정을 내린다. 9월 12일 뉴욕타임즈 도쿄 지국장 헨리 스톡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화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으며, 이것이 9월 16일에 보도되자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서 그에 대한 제명 조치에 착수했다.[15]
10월 4일 그의 제명안이 변칙 통과되면서 그는 헌정 사상 최초로 제명된 의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참조
이에 대한 반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공화당과 유정회에서는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며[16] 그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고 곧 이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다. 뒤이어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한다. 10.26 사건 후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 박정희의 빈소를 찾았다.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
-전두환 집권당시 가택연금을 선고 받고 나서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단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고 정치적 활동이 보장되는 시기였다.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 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재야 인사들은 새로운 군부 집권을 막으려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를 오가며 양자가 손을 잡도록 중재했으나, 일이 쉽게 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17] 김영삼 본인도 일단은 최규하 정부가 내세운 정치일정론에 반대하며 신속한 개헌을 주장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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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인해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었고 곧 김영삼에게 가택 연금 조치가 취해졌다. 이는 김대중의 사형 선고, 김종필의 보안사령부 감금과 함께 명백한 정치탄압이었다. 이 시기에 장남인 김은철의 결혼식이 있었으나, 가택연금 사태라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80년 가을 신군부의 강요에 의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였고 5공 시기, 정치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당했다. 1981년 연금이 해제되자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를 주축으로 하여 정치규제에 묶인 인사들을 규합할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민주산악회. 그러나 1982년 4월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핸리 스톡스와 북한산 산행을 하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1983년 5월 18일부터 민주화 요구 5개항[18]을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였는데 이것을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두환 정권의 어떠한 회유도 뿌리치며 23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고, 결국 본인의 가택연금 해제를 포함, 일부 억압적 조치의 완화를 받아내며 6월 9일에 단식 농성을 중단한다.
단식 1년 후인 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자신의 계파인 상도동계 외에도 김대중계인 동교동계, 양자에 속하지 않는 범야권 세력을 모두 포함시키는 조직이었다. 이런 야권 결집에 힘입어 연말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이듬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1986년 11월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을 전제로 한 불출마 선언을 하자, 자신은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김대중에게 출마 권유를 할 것이며, 그를 지지할 수도 있다며 화답하기도 했다.
그해 연말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 개헌도 가능하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놓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제 반대파를 이끌고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 조치를 내놓자, 이를 강력히 규탄하고 5월부터 호헌 조치 철폐 및 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한 전면 투쟁에 나섰다. 한 달 반 가량의 거국적인 투쟁 끝에 5공화국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명의로 6.29 선언을 발표하며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김영삼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승리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참패에 이어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제2야당이 되면서 결국 3당 합당의 주역이 된다.
이로서 배신자(...)라는 이미지도 적잖게 생겨났지만, 어찌됐든 거대 정당의 당권을 장악했고, 영남이라는 든든한 지역기반을 등에 업은 계기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이전에 이어 김대중과의 리턴매치가 성사되었으며 정주영이라는 다크호스도 참전함에 따라 3강 구도가 형성되었다. 호남에서는 김대중에게 표를 쏟아부었지만, 영남에 비해서는 수적 열세라... 결국 42%의 여유로운 득표차로(김대중 33.8%) 당선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취임 후 5년 간 긍정적인 영향으로는 금융실명제 실시, 일부 공기업 민영화, 하나회 척결,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제5공화국 책임자 처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쓰레기 종량제 등의 업적이 있다. 이 때는 아래에서 보이듯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여론조사의 공식 지지율이 90%를 넘나들었다. 지금 어른들 역시 김영삼에 대해 '초반에는 정말 최고였고, 좋았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정부의 명칭은 문민정부이다.
그러나 박정희 ~ 전두환 시절 즈음에 지어진 건물들 및 구조물들의 안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시작으로 19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폭발 사고, 같은 해 6월 29일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대형 참사가 잇달아 터지며 정권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19]
또한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20]들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 의혹으로 재임 중이던 1997년 5월 17일 구속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보 사태와 관련해 증언하던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1997년 4월 28일 목을 매 자살하고, 정권 말기에 하이라이트 1997년 외환 위기가 찾아오며 정권 자체가 완전 몰락해 버렸으며, 이 때문에 임기 말 지지율은 10퍼센트대까지 추락했다. 이 드라마틱한 지지율 변화 때문에 김영삼 지지율은 해외에서 연구대상이다. 민주국가에서 도무지 불가능해보이는 90%라는 지지율을 달성한 대통령이 어떻게 저렇게 몰락할 수 있냐고...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ㅡ 퇴임사 中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웠다.
ㅡ 조선일보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임기 막판의 실책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 퇴임을 기록했고 그후에도 각종 측근들의 비리 등으로 초반의 영예가 무색해질 정도로 여러모로 불명예스러운 퇴임의 쓴맛을 봐야 했다. 퇴임 2년 뒤에는 격노한 시민으로부터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의견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어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이명박[21], 박근혜[22]를 지지하기도 했다.적중률 보소 다만 이회창에 대해서는 안좋게 봤던 듯.[23]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서는 아니나다를까, 현재도 배타적이고 악평을 내놓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24] 둘을 용서하고 인정했던 김대중과는 대조되는 부분. 다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내린것에 비해 김구는 '현실적이지 못한 정치인'이라고 악평을 놓기도 했다. 같은 독재자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한 셈이다.
노무현과 김대중의 서거로 장례를 치룰 당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파란만장했던 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지 말년에는 90을 바라보는 고령으로서 몸이 성하지만은 않았다. 뇌졸중도 몇차례 왔다고 하며, 심장병으로 인해 스텐트 시술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각종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으며 폐렴 증세로 1년 6개월간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2014년 10월 12일, 아들 김현철이 SNS에 올린 김영삼의 모습
2015년 11월 19일 정오경 갑작스런 고열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 오전 0시 22분 32초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을 원인으로 서거하게 되었다. 향년 87세.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김현철 씨에게 통합과 화합 이라는 말을 필담으로 써 냈고,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참고로 이 필담을 받아든 김현철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 대통령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15년 11월 22일 장지가 대전현충원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25] 이승만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서 4번째로 안장하게 되는 것으로 이 곳에서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자신과 생전에 애증관계를 맺었던 김대중과 함께 서울현충원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동작구 상도동 근처에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되었기도 하다.
특히 현충원 근처에 있는 고구동산은 생전에 고인이 운동을 나갔을 때 상도동 및 흑석동 주민들과 함께 하였던 흔적이 있기도 하다. 고인은 회고록 말미를 통해서도 고구동산에 올라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고도 회고하기도 하였다.
현충원 안장은 11월 26일 국가장이 거행된 이후 시행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가장은 국장과 국민장이 국가장으로 통합된 이후 처음 치루어지는 국가장이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제3장군묘역 우측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독 묘역이다.
김영삼의 장례식에 장남 김은철은 불참할 수밖에 없는데 공교롭게도 김은철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서 못갔다. 그래서 김현철이 상주 노릇을 했다.
YS는 특유의 직설적 화법이 유명했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ㅡ YH 여공 사태 당시 연설하며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ㅡ 1979년 초 신민당 총재로 당선된 후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ㅡ 1983년 5월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ㅡ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ㅡ 3당 합당 후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ㅡ 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ㅡ 하나회 척결시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ㅡ 금융실명제 관련 담화문 中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ㅡ 1995년 한 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ㅡ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ㅡ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가서
김대중은 숨쉬는 것 빼고 전부 거짓말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ㅡ 2008년 우석대 초청 강연 中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ㅡ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26]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ㅡ 2012년 김문수 지사와의 만남 中 박근혜를 비난하며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거목
대통령을 향한 욕망 앞에 신념을 배신한 정치인
일제강점기의 똥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던 애국지사
국가경영에 실패해서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 국가지도자
요약하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어찌보면 '민주투사로서의 공헌도'와 '국가지도자로서의 역량'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 인물.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의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 체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츨라프 하벨, 루마니아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이온 일리에스쿠와 유사한 케이스.
김영삼이라는 개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는 별개로, 군부 독재의 입김이 확 빠진 본격적인 문민 대통령의 시대가 이 사람을 스타트 라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27] 한국 현대사에 적지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
- 김영삼[28]
박정희의 독재 정권 하에서 야당이 이래저래 무능한, 때로는 여당의 뜻에 순종하기까지 하던 모습을 보이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난 김대중과 함께 신민당을 이끌며 독재 정권에 맞선다. 박정희에게는 김영삼과 김대중은 눈엣가시였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온갖 테러(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겪었다.)나 정치공작, 정치탄압, 가택연금, 형무소 투옥을 견뎌내며 끝까지 맞섰고, 결국 박정희에 의해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의 박탈까지 겪지만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가에겐 희망이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후에는 신군부를 맞닥뜨리게 되고, 김대중과 함께 다시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다.
1983년 5월의 단식투쟁.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한 투쟁이 유명하다. 많은 인물들이 군사정권의 압박 아래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할 때도 목숨이 아홉 개는 있는 거 같은 미친 배짱을 보여주었다.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미국과 일본이 계속해서 김대중 구명을 요구하여 김대중이 결국 사형은 면제되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동안 김영삼은 '날 힘으로 막을 순 없다!' 라고 외치며 한국에 남아 탄압과 압박에도 견디며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결국 전두환이 물러나고 민주공화정 체제가 드디어 시작되자, 당시 야권들이나 국민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이던 각계 인사들 역시 한국에서 탄압 받아가며 운동했던 김영삼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 하나회 척결 등 문민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에게
집권 이후의 하나회 척결 등은 그가 민주주의의 거목으로 불리우게 되는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민주적 혁명을 이룬 국가들이라도 민주정치 초기의 혼란기나 외부로부터의 안보적 위협이 생기면 다시 군부가 들어서는 경우가 허다하다.[29] 그러나 하나회 척결로 확고한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진보 측에서도 '야당들이 여당을 이기긴 힘드니 김영삼이 과거 군부와 손을 잡았다가 결국 본인이 그 군부를 숙청했다는 건 잘한 일이다' 라는 의견과 '그래도 군부와 손을 잡은 것 자체가 신념을 버린 일이다' 라는 의견이 공존하지만, 어찌되었든 하나회를 끌어내린 그 결과만큼은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매우 긍정적인 일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87년도에 김영삼이 김대중에게 대권을 양보하지 않은 명분도 김대중 집권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것을 우려한다는 것이었고, 실제 이미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에도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를 일으킨 선례가 있었으며,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고 내란음모를 뒤집어씌운 전력이 있어서 김대중이 당선된다면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다.[30] 이후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민주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이 있었기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후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해를 한 것도 이러한 요인이 크며,[31]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3당합당과 함께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갔다는 식으로 재평가받고 있기도 하다.[32]
금융실명제의 전격 시행은 대한민국 경제민주화의 큰 공로로 인정받기도 한다. 갑작스런 정책 시행으로 수많은 검은 돈이 날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김재익이 실명제를 고려했으나 결국 이래저래 실패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이걸 철저히 숨기다가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에 예정에 없던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더니 뜬금없이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했고, 즉각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다.[33] 대통령 비밀 지시에 따라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공무원 10여 명이 모 아파트에서 몰래 시행을 준비했으며,대통령의 경제 교사였던 박재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도 비밀로 부치고 벌인 일이었다.[34]
그러나 차명거래가 가능하도록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반쪽 금융실명제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금융실명제 항목 참조.
노태우 시절 지방의원 선거가 재개되어 지방자치제가 일부 부활했는데[35], 김영삼 대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재개되어 풀뿌리 민주정치의 틀을 확립했다. 장면 내각때 처음 도입한 민선 선출 지방자치단체장이 35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3대 선거 중 하나인 전국동시지방선거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다만 지역간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 상황에서 지방자치제를 성급하게 도입하여 낙후지역이 발전할 가능성이 적어졌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수반해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고안된 시 승격 제도인 '도농분리제'[36]가 81년만에 폐지되고 도농복합시 제도가 시행되어, 1995년 이후로 시 승격 요건을 맞춘 지역이 있는 군은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되도록 하였으며, 기존에 도농분리제에 따라 분리되었던 시군들도 대량으로 통합하였다. 동시에 직할시가 '광역자치단체인 시'라는 의미의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일본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 재임중(1995년) 조선총독부 철거 때[37]
임기 시작부터 하나회를 해체하면서 하나회의 두목이랄 수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둘을 법정에 불러 구속시킨다. 당초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해괴한 명분으로 불기소 처분했으나 김영삼의 강력한 의지로 5.18 특별법을 제정. 사형을 구형하는 데 이른다.
이전까지 12.12 혁명이라고 불리던 12.12 군사반란을 반정부 쿠데타로 명명했으며 광주 사태라고 불리던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피해보상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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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직전의 조선총독부[38] |
95년에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시기라서 이에 발맞춰 문민정부다운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의 일환으로 전국에 있는 일재 잔재유물들을 청산했고, 일제의 상징인 조선총독부건물을 해체시킨다. 이전까진 냉전이라는 구도 속에서 군사정권의 판단 하에 밀월로 맺어져있던 한일관계에 큰 마찰이 없었으나 일본이 경제위기를 맞은 이후 내부 정계가 흔들리며 점점 한국을 향해 견제와 공격이 들어오게 되고 마찰이 생겨났다.
김영삼의 발언에 대해 한일 양국의 보수 언론은 '저런 발언은 외교적으로 좋지 않다' 라고 평가했고, 한일 양국의 진보 언론은 '발언이 부적절하긴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저런 발언을 할 만큼 일본이 한국을 자극했기에, 김영삼이 저런 단어를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라고 평했다. [39][40] 다만, 조선총독부 해체 건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일부 있었다.[41][42]
이외에 위에서도 언급돤 도농복합시 제도 실시나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한 것도 이러한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43]
공직자 재산 공개가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도 김영삼 정권부터였으며, 김영삼 본인 일가의 재산을 먼저 공개함으로써 솔선수범하였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대통령 시기의 모든 긍정적 평가를 한번에 뒤집을만한 그야말로 나라가 망할 뻔한 외환 위기는 단연 김영삼 최대의 실책으로 꼽을 수 있다. 이미 한보그룹 부도사태 등에서 경제적 위기가 예측되었음에도, 정부관료들은 한국 경제는 건강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를 드러냈다.
IMF 구제금융의 여파가 어찌나 넘사벽으로 대단했는지 김영삼이 다른 걸 다 잘하고도 불구하고 되려 이게 김영삼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가 민주화 운동을 한 정치인임에는 분명하나 이면에는 타협주의적 태도 역시 갖고 있었다. 물론 민주정치는 곧 타협의 정치라는 점에서 타협의 태도 그 자체가 비판 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타협할 수 없다고 여긴 대상과 타협한다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1975년 5월 21일 신민당 총재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영삼은 1974년 중앙정보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어 개헌 투쟁 및 부정부패 색출규탄운동을 벌이며 강력한 대여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자 4공화국은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응수했다. 또한 월남의 공산화가 이뤄지는 등 대외 정세상의 이유로 대여 투쟁에 다소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김영삼은 청와대에 회담을 제의했고, 그 결과 영수회담이 열렸다.
영수회담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고, 이후로도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영삼은 박 대통령에게 회담 내용을 모두 알리면 통치에 차질이 생긴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며 끝내 전체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리고 이후 김영삼은 개헌투쟁을 보류하거나 김옥선 의원 제명이 추진될 때 당론으로 지키겠다고 선언했다가, 결국 김옥선을 사퇴시키는 등 대여투쟁 노선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대해 당내 비주류 사이에 양자 간 밀약설이 돌기도 했고, 금품수수설도 있었다. 이듬해 신민당 총재는 이철승에게 넘어간다.
이리저리 흘러나온 단편적인 얘기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김영삼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민주화, 직선제를 실시할 것인데, 정권 내 반발 세력을 무마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좀 양보해 달라는 얘기를 하며 감정에 호소하자, 김영삼이 이를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삼을 수행했던 신민당 대변인 이택돈은 박정희가 여야 관계를 현상유지해 주면 자기 다음 대권 주자는 김영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밀약이 있었다고 훗날 주장했다.[44] 반면 이택돈과 함께 김영삼을 수행한 총재 비서실장 박권흠은 김영삼 회고록에 있는 요지에 덧붙여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을 중단하고 구속 언론인 석방을 해 주겠다는 밀약을 받았다는 얘기를 자신에게 했다고 주장했다.[45]
호랑이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
- 1990년 3당 합당 당시
그러나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타협은 민주화 이후에 벌어졌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3당 합당은 김영삼에게는 대통령 당선의 명예를 안겨주었지만, 권력 앞에서 스스로 맞서 싸우던 군부와 손을 잡은 변절자이자 지역감정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김영삼은 이후 정치공학적 전술에 대한 중요성을 체감하게 된다.[46] 그래서 그는 군부세력과 손을 맞잡고 3당 합당을 추진한다. 3당 합당으로 인해 김영삼은 변절자,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과 영호남 지역감정 고조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받고 있다. '구국의 결단',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며 3당합당을 추진한 김영삼 본인은 하나회척결을 단행하고, 개혁 공천을 통해 군사정권 청산에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으나, 오히려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은 정치 세력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세력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한 비판점이다.
김영삼은 집권욕에 눈이 어두워 삼당 합당으로 한국의 민주세력을 배신하고 그를 추종하던 민주세력을 군부정권에 가져다 바쳐서 민주세력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켰다. 3당합당은 김영삼 정권에서 하나회와 민정계 숙청, 자민련 분당으로 사실상 깨지고 지금의 보수세력이 재편되어 3당합당이 계속 이어진것은 아니지만 김영삼의 삼당 합당으로 고착화된 지역주의 정치구도는 김영삼의 지역적 정치 배경인 부산 경남 지역에서 보수세력의 승리가능성을 높혔다.
한국의 민주사회 발전은 이 보수정권 하에서 크게 후퇴하고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 때문에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의 주적이던 박정희의 자녀인 박근혜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고 김영삼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박정희의 유신독재로 회기하려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손해와 기회주의적 정치행보의 악영향이 그의 사후에도 상당시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으며, 그가 발탁한 정치인들중 상당수는 현 여야의 대권주자급으로 성장했고 그중 일부는 과거 3공, 5공 세력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여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김영삼은 집권의 성공하고 군부세력 축출의 앞장섰으나, 대한민국의 고질병으로 여겨지는 영호남 지역갈등의 심화를 더욱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고있으며, 그가 발탁한 인사중 일부가 군사정권 세력을 옹호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며 그가 헌신했던 민주화운동의 진정성과 그 결과물까지도 비판의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또한, 학생 운동권이나 노동운동 등에 대해 과거 군사정권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인 진압을 고집하여 욕을 먹기도 했다. 1995년 한국통신 노조 진압을 위해서 전투경찰을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투입을 강행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참고. 또한 1996년 연말 고용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들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속칭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일으켜 노동계의 대대적인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 국가보안법 개정안(통칭 안기부법)도 같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날로 먹는걸 참 좋아한사람개혁 공천 및 신한국당의 중도화를 위해서 영입한 노동운동가 및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날치기에 순응하는 씁쓸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
ㅡ 박지원 당시 민주당 대변인, 성수대교 붕괴사고 직후[47]
그리고 사실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그리고 홈런으로 1997년 외환 위기까지 역대 헌정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한 정권이라고 할 때 문민정부를 꼽는다. 근래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안전불감증 사고가 대폭 늘어난 때가 바로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참고로, 이건 고등학교 한국사 책에서도 서술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고공화국 참고.
우째 이런 일이...
ㅡ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사건을 듣고
아들의 잘못은 아버지인 저의 책임입니다.
ㅡ 김현철 비리 수사 중 사과 기자회견 中
부정부패 타파의 선구자였던 김영삼이었으나, 그도 측근비리의 비수를 피해가지 못했다. 정권 말 차남 김현철등이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자 김영삼의 지지율은 10%대로 폭락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유가족들의 특례 요구가 인정되어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미 2004년부터 서울현충원의 포화 상태로 대전에 8위의 묘소를 위한 국가원수 묘역을 만들어 뒀고, 다른 안장 대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거나 서울 안장 희망시 봉분없이 현충원 내 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치되는데, 국가원수가 모범을 보이기는 커녕 특례를 남용하고 있다는 것.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 좋은 선례를 남기고 이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따라하면서, 이후 국가원수들도 이를 따라 특례 인정을 줄줄이 요구할 시 거부할 명분이 약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영상물에서는 길용우가 독보적.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삼김시대 등에서 능란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제4공화국에서는 임동진이,[55] 제5공화국에서는 김용건이 맡았다.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에서는 이영하가 맡았다. 야인시대에서는 정명준[56]이 맡았다.
김영삼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ㅡ 김대중[57]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할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양대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특히나 유신 정권 시기에 같은 당에 몸을 담았고,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항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는 김영삼이, 2차는 김대중이 승리하며 둘 다 야당의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김대중과는 역시 정치학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동지이자 라이벌. 어려울 때는 서로 힘을 합쳐 도우며, 박정희와 전두환의 탄압과 압박 속에서도 야권을 이끌어가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관계였다.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던 두 사람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꽃이 피기 시작하자, 결국은 대선 자리에서 갈라서버리고 만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해 군부 출신인 노태우를 당선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는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셨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그리고 JP의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을 거치며 호남과 김대중을 완전히 적으로 돌렸다.
이때부터 그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 후로 여러가지 갈등을 겪는다. 김영삼은 후에 김대중에 대해 '착한 척 하면서 내 뒷조사를 엄청 했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김영삼의 아들이 비리로 잡혀갔을 때 김대중은 임기 내내 한 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고.. imf이후 환란을 몰고 온 무능한 대통령으로 몰려 여론의 외면을 받게 된뒤에도 갈등은 풀리지 않았고[58][59] 어찌되었든 김영삼 계파와 김대중 계파는 그 후로도 대립하며, 양 김씨는 지역감정을 적절히 이용해가며 여러 후폭풍을 낳았다. 김대중 취임 이후로도 위 어록들 외에도 김대중에 대한 폄훼발언은 계속 되어 네로 황제와 비견하며 폭군으로 칭하느니,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았을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에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문안을 간 게 화해 제스쳐의 전부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얼마안가 세상을 떠나 직접적으로 이뤄지진 못했다. 다만, 동교동계(김대중계) 정치인을 찾아가 위로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이뤄지긴 했다고...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심지어 졸고 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평생을 박정희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그의 군부독재에 맞서온지라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와는 대체로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해왔다
김대중 정권 당시 김영삼은 1999년 5월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퇴임 후 처음으로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박정희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부총재를 맡았던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영삼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YS “박정희 정권 결코 미화하면 안된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자신은 박정희 정권과 싸운 사람이고, 그 정권이 자신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른 법이라며 다소 호의적인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박근혜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때는 직접 병문안을 가서 '난 당신 아버지한테 초산 테러 당한적 있는데..'라는 말을 하며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병문안 간 YS "나는 초산테러 당했는데..." 핵직구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와 경쟁했던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면서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김영삼은 2012년 7월 대선을 앞두고도 박 대통령을 상대로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기사링크
2012년 두 사람의 악화된 관계는 절정에 달했는데 그해 총선 공천에서 아들 김현철이 탈락하자 공천 학살을 자행했다며 맹비난을 가했으며, 7월에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를 겨냥해 그 유명한 칠푼이 드립의 시초인 "박근혜 별것 아니다..아주 칠푼이다"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김영삼 "박근혜 별것 아니다..칠푼이다" 혹평> 하지만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박근혜 후보가 방문하자 사이가 다소 누그러졌다. 근데 악수하는 순간에도 박근혜에게 시선을 안줬다는게 함정
다만 그 해 대선 직전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좀 미묘한 부분이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은 김무성 의원 선거 유세에서 나왔고, 뒤이어 김영삼의 조직이었던 민주동지회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지지 선언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 뒤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던 김덕룡 전 의원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던 차남 김현철에 따르면 보수 세력의 승리를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사적으로 이야기한 바는 있으나,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며,[60] 문재인 후보가 상도동에 방문해서 성의있는 모습을 보일 경우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61] 김영삼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전 의원 역시 김영삼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보인 일이 없고 입장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행동을 같이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의 박정희 미화 발언에 격노한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일 측근들이 다 말렸는데도 그대로 취임식장으로 가서 전직대통령들 앉는 자리에 갔는데[62] 박근혜 연설에서 대놓고 자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된다(...) 이런식으로 박근혜 엿을 먹이는구나.
집권 초중반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80퍼센트를 상회했었다.
그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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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이나....[63]
심지어 PC용 퍼즐게임(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플레이 영상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등을 압박하던 이전 정부들과는 다르다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이전 정권까지만해도 풍자 한 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수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 역시 자신의 풍자를 허용해서 여기저기서 노태우를 풍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대놓고 쓰이는 등..) 그러나 노태우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당시는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긴 했지만 하나회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등..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심한 풍자를 할 경우 데려가서 심문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항상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다. 또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도 조갑제 인터뷰에서 밝혔다. 같은 한자덕후로서 죽이 맞았을 듯[64]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인식에 있어서도 중요하다며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참석하는 등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김영삼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다 해서 소위 김영삼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쌍벽을 이루던 계파. 역시 라이벌 현재는 주로 새누리당의 원로급을 맡고 있으며, 대표적인 현역 정치인으로 김무성[65], 서청원, 김덕룡, 김현철[66], 정병국[67] 등이 있다. 은퇴한 이로는 최형우, 김동영[68], 서석재, 박종웅, 강삼재, 신상우, 박관용 등이 있다.
이외에도 김영삼의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으로 한나라계에는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69],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안상수, 정의화, 이완구 등이 있고, 민주당계는 노무현, 손학규 등이 있다. 다만, 이들은 상도동계로 분류되지 않는다. 김영삼과 함께 정치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김영삼 직속(또는 비서)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70] 비슷한 이유로 박지원 의원도 동교동계로 잘 분류되지 않는 편이다.
1984년 김영삼과 민주화운동의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민주화추진협회'가 전신이며, 3당합당을 계기로 동교동계와 완전히 갈라지며 상도동계가 탄생했다.[71] 민주화 운동 동지는 물론 정치적 보좌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위에 익숙한 이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알듯이 현재도 한국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대통령이 2명 나온것만 봐도 후세 정당과 친노나 친이, 친박같은 새로운 계파에서 활약하는 정치인도 이전에는 상도동계에 속해있는 경우도 많았다.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영삼 퇴임 후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지리멸렬해지고, 멤버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친이나 친박[72]같은 새로운 구심축의 등장에 따라 현재까지도 상도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이는 동교동계도 마찬가지지만.) 구심축이던 김영삼도 점점 잊혀져가고 마침내 서거함에 따라 상도동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상도동계 대다수가 현 한나라당 -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소속임에 따라 계보를 따라 속해왔으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깨졌다. 김무성 등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반면, 김덕룡, 김현철 등은 문재인을 지지한 것이다. 보수 정치인과 독재정권의 산물이라는(더욱이 김영삼 본인도 박근혜와의 관계는 신통치 못했다.) 갈림길에서 나뉘어진 이유였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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