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초 교리 12ㅡ불교의 성지 3 녹야원, 쿠시나가라
③ 초전법륜지 : 녹야원(사르나트)
붓다는 5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여 승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최초로 안거(安居)인 우기(雨期)를 여기서 보내게 되고, 이후 이 지방 유력한 자의 아들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들이 비구가 됨으로 인하여 약 60명의 비구로 불어난 승가로 성장했다. 60명의 승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공동체의 규범이 되는 계율(戒律)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탈리폿야자 잎으로 만든 신발을 금지하고 특정한 육식(肉食)을 먹지 않도록 했다. 이후 227개의 계율이 제정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이 최초의 안거기간에 <전법륜경>을 비롯해서 10개의 경을 설했다고 전해지며, 안거가 끝나자 고타마는 영취산이 있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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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 전경
그 후 사르나트에는 승원(僧院)이 더욱 커져서 많은 수의 비구들이 수행 공동체를 형성했다. 7세기 당나라 인도 구법승 현장이 이곳 사르나트의 성지를 찾았을 때, 1천 5백 명의 소승(테라와다 상좌부) 비구들이 수행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승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법당 중앙에는 고타마 붓다가 법륜을 굴리는 소상이 있었다고 대당서역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다멕 스투파는 다르마 차크라 스투파라고도 불린다. 붓다가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답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름이 28.5m 기단을 포함한 높이는 33.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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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멕 스투파
다마라치까 스투파는 붓다가 처음 설법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운 스투파로 탑안에 기원을 적은 명문도 보관되어 있다.
아쇼카 왕이 처음 탑을 세운 뒤 여섯 번에 걸친 보완공사가 더해졌다 나중에는 높이가 3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가 되었지만 1794년 바라나시의 마하자라가 자기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을 쓰기 위해 탑을 허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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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라치카 스투파 기단의 모습(위의 큰 원 모양)
④ 열반지 : 쿠시나가라
쿠시나가라 외곽의 사라 숲에 도착한 부처님은 “자, 아난아! 이 한 쌍의 사라 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이 되도록 침상을 준비하여라. 나는 피로하므로 누워 쉬고 싶다.”고 말했다. “잘 알았사옵니다. 부처님이시여!” 대답한 아난다 존자(尊者)는 침상을 준비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허리를 아래로 하고 발은 겹친 채, 사자가 눕는 듯한 모습으로 바르게 누웠다. 그 때 한 쌍의 사라 나무는 제철도 아닌데 갑작스레 온통 꽃을 피웠다. 꽃잎이 부처님의 전신에 한 잎 한 잎 떨어져 공양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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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나가라 열반상
이것을 본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아난다야! 지금 이렇게 한 쌍의 사라 나무는 제철도 아닌데, 꽃이 피어 여래를 공양하고 있다. 그러나 아난다야! 이러한 일만이 여래를 경애⋅존경⋅숭배하며 공양하는 일은 아니다. 비구 비구니 재가 남⋅녀신자 등이 진리와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깊게 여래를 경애⋅존경⋅숭배하며, 공양하는 것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우리들은 진리와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며, 진리에 따라 행동하자’고 배워야 한다.”
아난다 존자가 다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입멸하시면 모실 수 없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난다야!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느니라. 나의 사후에도 신앙심 두터운 양가의 자제들은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며,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며, 깊은 종교심을 발로(發露)할 것이니라. 그것은 어떤 장소인가. ‘이곳에서 여래는 태어나셨다’는 여래의 탄생지에서 양가의 아들들은 종교심을 증장(增長)시킬 것이다.
다음으로 ‘이곳에서 여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다’는, 여래가 정각을 얻은 땅에서 양가의 자제들은 깊은 종교심을 느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여래는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는, 여래의 최초 설법지에서 양가의 자제들은 신앙심을 돈독히 할 것이며, ‘이곳에서 여래는 남김 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드셨다’는, 여래의 입멸지에서 사람들은 깊은 종교심을 느낄 것이다. 아난아! 마음이 청정하고 신앙심이 돈독하여 영지(靈地)를 순례하며 걷는 이는, 죽어 육체가 멸한 후 좋은 것에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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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나가르 열반당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사라 숲에 도착했을 즈음, 외도를 수행자 수밧다도 쿠시나가라에 있었다. 그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을 뵙고 싶었다. 아난다 존자를 찾아가 말했다.
“오늘 밤 부처님이 입멸할거라는 소식을 들었오. 나에게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게 해주시오.”
“수밧다여! 그럴 수 없소. 부처님께서는 지금 매우 지쳐 있소. 부디 여래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마시오.”
두 번 세 번 외도행자 수밧다는 간청했다. 아난다 존자는 끝내 거절했다. 말다툼하는 것이 부처님 귀에도 들렸다.
“그만두어라, 아난다야! 수밧다를 가로막지 말아라. 수밧다가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지, 나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의문에 따라 내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수밧다는 빨리 이해할 것이다.”
수밧다는 부처님이 쉬는 곳으로 들어갔다.
부처님 가르침인 사성제⋅팔정도를 들은 수밧다는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저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듯하옵니다.”며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됐다. 수밧다와의 대화 도중 부처님은 자신의 인생을 게송으로 들려준다.
스물 아홉의 왕성한 젊음에
집 나와 출가하니 수밧다여!
오로지 선(善)함을 위함이었네.
출가 성취하니 그 날로부터
세월은 빨리 가네 수밧다여!
50여 년의 세월이.
추구하여 노니는 진리의 영역,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출가의 길.
이것 떠나서는 사문 아니리.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했다. “아난다야! 내가 입멸한 뒤,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 모른다. ‘이제는 선사(先師)의 말씀만 남았지 우리들의 큰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입멸한 후에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설해왔던 법(法)과 율(律), 이것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부처님은 이어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만약 너희들 가운데 부처님과 그 가르침·승가에 대해, 혹은 수행의 길이나 방법에 대해 의혹이나 의문이 있는 이가 있다면, 무엇이라도 물어라. 내가 입멸한 다음에 ‘아 한때 부처님께서는 눈앞에 계셔서, 우리들은 직접 물어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이렇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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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잘례를 치른 곳
두 번 세 번 비구들에게 말했지만, 누구 한 사람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설했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알리겠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 간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 너희들의 수행을 완성하여라.”
부처님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그리곤 열반에 들었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지는 듯했다고 경전은 적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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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다비장소에 아쇼카왕이 탑을 세움
첫댓글 인도 불교 성지의 탑들을 보면 그 크기와 모양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르마 차크라 스투파' 탑의 모양을 살펴보면
경주의 첨성대가 그 축소 모양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탑 모양과 중간에 위치한 창문의 모양도 비숫하여
탑을 조성한 남다른 의미가 있을거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첨성대의 경우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해설도 여러가지이지만
아직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으며,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했다는 설화가 지배적이지만 다른 의견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첨성대 밑 기초 받침대의 돌이 모두 12개(1년은 12달)이며
둥근 원으로 쌓아 올린 돌의 계단이 24층으로 1년은 24 절기이며
총 층수가 28층인 것은 28대 진덕여왕이 완성하였으며
28층의 구조에 사용된 돌의 갯수가 365 + 작은 돌 하나,
1년 365일에 윤년을 더한 것이라하며
맨 위의 원과 정사각형의 넓이가 같은 것은 당시 원주율을 3.14가 아닌 3으로 계산한 결과라 합니다.
이렇게 의견도 여러가지이기에
첨성대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과제가 있어
안심정사 법우님들 중 역사 건축에 관심이 있으면
좋은 연구 자료가 될것입니다.
오늘도 무진 전법사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