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시민사회에 도서관이 등장했고,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compulsory schooling은 국민 의식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효율 높은 곳이었고, 공교육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영리 목적을 제외하면 특정 이데올로기를 학생에게 전하고, 거부 시 괘씸죄를 적용하여 직업 선택에 있어 불리한 위치에 서게 합니다. 이러한 학교는 사회의 영향을 받아 인물 배출하는 공장 구실을 해왔습니다. 여기에서 주문된 인물이 나오면 국가 공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학생 과실입니다. 국·공립학교는 이를 수행하기 위한 올바른 도구로 여겨졌고, 교복 통일, 교과서 통일, 의무 출석, 주문에 맞는 행동, 시험이라는 일종의 흐름을 가져왔습니다.
입시 위주로 표방되는 온갖 형식치레, 패배에 따른 고통 |
교육정책의 핵심은 학문이 추구하는 색다른 가치를 구현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을 통해 실현하는 인간성과 일정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제반 가치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가 곧 교육이라며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학교 안에 기술, 가정 등을 집어넣고는 소위 말하는 자리싸움도 벌어집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교육은 삶의 한 양상으로 모두에 관계된 업무입니다. 관습 전달에 만족하기보다 진실한 판단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함양했으면 합니다. 여기에서 체득된 경험은 말, 글 그리고 행적 등의 매개물로 표현되는데, 이 표현은 해석 대상이지, 당사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기초·응용연구, 모델화, 대량 생산 그리고 보급이라는 과정을 여러 분야에 적용하여 성과 내고 있으나 교육에서만큼은 그 속도가 더딥니다. 그 이유는 신념을 상대하는 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수학을 가르칠 때 물리학과 연관 지어서 가르쳐야 할까요?
現 한미연합부사령관님이 17년 전 저의 대대장님이셨는데, 더 커서 말 잘하라고 독려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
여러분도 더 커서 말 잘하시고, 온라인(보이스피싱 포함)을 맹신하지 마세요. |
논리는 말 또는 글의 이치이자 논증(주장+근거)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논리학은 이러한 이치를 따집니다. 쉽게 말해, 형식논리를 탐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식논리의 기본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입니다. 변증논리에서는 이를 비판하는데, 형식논리가 정적이어서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인물의 논쟁을 앞세운 귀류법(p가 아님을 가정하고, 이로부터 자기모순을 끌어냄)을 적용합니다. 심지어 플라톤은 학문 체계가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중국의 논리도 상대를 논파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변증논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