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상부를 나와 관공사조처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려 하니 한참을 걸어가 타야한다. 오후에 보저우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기에 마음이 급하다. 조승상부 앞에서 택시를 타고(9元관) 관우가 조조에 의탁했던 것을 정리하고 유비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는 파릉교(灞陵橋)로 간다. 조조는 관우를 보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만나주지 않았지만, 관우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지런히 뒤를 따라 바로 파릉교에서 만난다.
파릉교에 도착하니 관공사조처(關公辭曺處, 관우가 조조에게 하직한 곳)라 쓴 현판이 걸린 건물이 나를 맞는다. 이 현판을 자세히 보니 관공사조처(關公辭曺處)란 글씨는 중국 현대문학가이자 사학자인 곽말약(郭末若)이 쓴 글씨다.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곽말약이 쓴 편액이 많다. 강택민이나 모택동이 쓴 것도 꽤 있는데, 곽말약이 쓴 게 더 많은 것 같다.
그 뒤로 관우와 조조가 이별하는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조각한 '조승상배송관공조소(曺丞相拜送關公彫塑, 승상인 조조가 관우를 보내는 장면의 조각)'란 조형물이 보인다. 왼쪽이 조조와 그 일행이고 오른쪽이 관우와 유비의 두 부인이 탄 마차다.
중앙엔 석량하(石梁河)라는 작은 강을 가로지르는 파릉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조조와 관우가 두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있지만 오른쪽 마차 속에 탄 유비의 두 부인인 밖의 사정이 궁금한지 창문을 열고 불안한 눈치로 밖을 내다보고 있고 왼쪽의 조조 뒤를 따라온 무장들의 모습을 보니 관우를 죽여야 한다고 수근거리는 것 같다. 이 조형물을 보며 관우의 유비를 향한 일편단심도 멋지지만 관우를 유비에게 돌려보내는 조조의 대담한 결단과 아량이 훨씬 멋진 것 같다. 조조는 여비에 보태라고 노잣돈과 전포를 주었는데 관우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전포만 청룡언월도 칼끝으로 걷어 챙겼다고 한다. 건방지고 오만불손해 보이자 조조의 장수들이 조조에게 관우를 손보겠다고 나서자 조조는 ‘장수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저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부하 장수를 말렸다하니 조조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와 관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9년 유비는 서주(徐州)를 차지하고 군벌을 형성해 가고 있었는데 유비는 서주로 오기 전 헌제가 동승(董承)에게 조조를 암살하란 밀명을 내렸을 때, 조조의 안마당인 허창<허도(許都)>에서 그 밀명에 동조해서 서명까지 한 사람으로 이 밀명이 발각돼 관련자들은 전부 죽었지만 유비는 발각되기 전 먼저 쉬창에서 빠져나와 살아남았다. 한편 황제를 등에 업은 조조는 북방 최대 군벌인 원소와 갈등이 커져 가고 있어 원소를 치기 전, 자신의 배후를 급습할 수 있는 유비 먼저 정벌하러 서주로 진군한다. 결과는 유비가 대패해 가족들도 거두지도 못한 채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장비는 망탕산으로 도망갔으며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인과 함께 조조에게 포로가 된다. 그런데 소설에서 관우는 <첫째,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항복할 뿐이다. 둘째, 두 형수를 예우하여야 한다. 셋째, 유비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유비에게 가겠다.>는 세가지 조건을 내걸고 항복한다. 조조는 관우의 뛰어난 무공과 그의 충직함을 높이 사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적군의 장수나 참모 가운데 비열한 놈이 아니거나 도저히 마음속으로 항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죽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대체로 자기 수하로 받아들이는 게 조조의 장점이다.
그 후, 조조는 관우를 마음속으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저택을 내주며 미녀도 보내주고 한수정후란 관직과 여포가 타던 적토마를 주고 3일에 한번 작은 잔치를, 5일에 한번 큰 잔치를 여는 등 상당한 향응을 베풀었다. 조조는 관우가 충직한 사람이라 그냥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 공을 세우면 그것으로 신세진 것을 갚았다고 생각하고 유비에게로 갈 것이라고 생각해 전투에서 공을 세울 기회도 주지를 않았지만 조조군이 원소군과 맞서 조조의 무장들이 도저히 상대하지 못하던 원소군의 안량과 문추 두 장군에게 고전할 때 관우가 나타나자 조조는 할 수 없이 관우를 내보냈고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연달아 죽이며 조조에게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전투 후 관우는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신세도 갚았고 당초 조건대로 유비가 있는 곳도 알았으니 허도를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하러 가지만, 관우를 조조는 아예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가지 못하게 했으나 관우는 그 동안 조조에게 받았던 금은보화를 깔끔하게 정리해 남겨두고 떠난다. 결국 관우의 마음까지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조조는 몸소 나아가 "누구에게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을 하면서 관우와 작별한다. 이때 조조는 이별의 선물로 전포(戰袍)와 금은보화를 건넸으나, 관우는 전포만 받아서 떠난다. 물론 조조의 부하들은 관우를 그냥 보내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조조는 돌아가도록 내버려 둔다.
관우가 허도를 빠져나가 북쪽으로 가는데 관문에선 통행증이 없는 관우를 보낼 수 없다고 맞서다가 다섯 개의 관문을 지키던 여섯 장수가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죽음을 당한다. 이것을 오관육참장(五關六斬將)이라고 한다.
조조와 관우가 파릉교에서 이별한 10년 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동오와 촉한 연합군의 화공에 대패하고 패주하는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을 때, 조조가 옛 정를 생각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자 관우는 조조를 놓아주는 또 하나 조조와 관우의 극적인 화용도(華容道) 만남이다.
끝으로 관우가 맥성에서 육손에게 포로로 잡혀 오나라 손권이 관우의 목을 베어 그 목을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가 관우의 목이 담긴 상자를 열자 죽은 관우의 머리가 큰 소리를 치고 이에 크게 놀란 조조는 그날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 관우와 조조의 마지막 만남이다.
조조와 관우 이야기는 역사서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돼 있다. 진수의 삼국지 무제기(三國志 武帝記)에는 "유비의 부장 관우가 하비에 주둔했을 때 조조가 재차 관우를 공격하자 투항했다. -중략- 원소군의 맹장 안량과 문추가 두 차례의 전투에서 죽자 원소군은 크게 흔들렸다. 조조는 군대를 관도로 보냈다. 원소는 나아가 양무(陽武)를 지켰고 관우는 이틈을 타서 유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고 기록되어 있고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장강의 수전에서 크게 패하여 화용도로 철수했는데 길이 나빠 크게 고생했으며 군사도 많이 잃었다는 게 전부다. 조조가 철수하는 도중 관우와 마주친 적도 그에게 잡힐 뻔한 일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조조는 220년 그의 나이 66세에 두풍(頭風)이란 병에 걸려 죽는다. 무슨 병이라 할지라도, 당시에 66세까지 살았다가 죽으면 자연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관우의 귀신이 쫓아와서 조조를 죽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즉, 관우의 세 가지 항복조건, 오관육참장,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 준 것, 관우 귀신에 놀라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부 소설 삼국지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기억이나 마음속에 관우는 가장 멋진 삼국지 인물의 하나로 각인돼 있고 조조는 관우를 붙잡지 못해 알랑거리고 살살거린 간교한 놈으로 남아 있다. 소설 삼국지와 역사 삼국지를 합쳐서 그 결과를 놓고 보면, 관우만큼 철저하게 미화(美化)된 인물은 없다. 제갈량도 상당히 미화되었지만 관우만큼 미화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다.
▶ 망매교(望梅橋)
▶ 청매정(靑梅亭)
▶ 청매정에서 조조와 유비가 천하의 영웅을 논하는 모습
관우와 조조가 이별하는 조소를 뒤로 하고 걷다보면 망매교(望梅橋)란 조그만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를 건너면 청매정(靑梅亭)이란 정자가 보인다. 그 정자 안에는 갓 수확한 청매실과 떡(?)을 탁자에 두고 조조는 서서, 유비는 앉아서 둘이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삼국지에서 청매자주논영웅(靑梅煮酒論英雄)이라는 조조와 유비가 만나 천하의 영웅을 논하는 모습이다.
청매자주논영웅(靑梅煮酒論英雄)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조에게 유비가 의탁하고 있을 때 유비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원대한 꿈을 내색하지 않고 들키지도 말아야 했기에 자신의 숨은 뜻을 감추기 위해 마당 한쪽을 갈아 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는 등 자신의 웅지를 조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마침 매실이 익어갈 때, 허도의 조조는 유비가 영웅의 그릇임을 알고 어느 날 자기 집 후원 정자로 불러 매실로 담근 술을 마시던 중 먹구름이 일고 광풍이 불자 유비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 유비와 천하 영웅을 논하는 조조
조조는 예전에 군사와 행군할 때 물이 없어 갈증을 느껴 모두 고통스러워 할 때 군사에게 저 산만 넘어가면 그곳에 매실 밭이 있어 마음껏 청 매실을 따먹을 수 있다는 말에 모든 군사가 매실을 떠올리며 입에 침이 고이고 갈증을 잊고 진군할 수 있었다는 자기 자랑을 하고 이어서 "먹구름 속에서는 용이 나고 광풍은 호랑이를 불러온다고 하는데 용은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으며 오를 수도 있고 숨을 수도 있소. 봄이 깊어진 지금 용이 때를 타고 변화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뜻을 얻어 사해를 종횡하는 것 같소. 용이란 물건은 세상에 영웅과 비교할 수 있소." "지금 유공은 천하에 영웅이 누구라 생각합니까?" 유비가 영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 조조는 머리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더 이상 유비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자 손가락으로 자신과 유비를 가리키며 "지금 천하의 영웅은 바로 당신과 나 두 사람뿐이오!"라고 한다. 순간 유비는 속내를 조조가 읽은 것 같아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린다. 그 때, 때맞추어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조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유비는 놀란 듯 젓가락 떨어뜨리고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조조는 그런 유비의 모습을 보고 껄껄 웃으며 "사내대장부가 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단 말이오?"하며 지금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던 유비를 천하를 쟁패하려는 웅지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늘 남을 속이기 잘하는 조조가 이렇게 유비의 연기력에 완벽히 당한 것이다.
청매정 건너편 숲에는 먼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정자라는 뜻의 전행정(餞行亭)이 있다. 관우와 조조의 이별을 기념해 여기다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조조는 뒤 쫓아 관우를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졸라대던 수하 장수에게 "그냥 둬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주인이 있는 법, 추격하지 마라!"라며 다시 한 번 조조의 대담함을 보여준 곳이다.
▶ 충의신무(忠義神武)라는 비석
돌로 만든 관우 상 앞에 관우를 기리는 충의신무(忠義神武)라는 비석이 첫 번째 파릉교 앞에 있다. 청나라 광서 연간에 만들어진 것인데, 관우에 대한 우상화 내지 신격화는 청나라 시절에 가장 열렬했던 것 같다.
▶ 파릉교 앞 적토마를 탄 관우 석상
청룡연월도 들고 말을 탄 주인공은 바로 관우인데 그의 애마 적토마의 꼴이 너무 우스꽝스럽다. 적토마가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다리가 너무 짧고 못 먹여서 그런지 말이 너무 작아 청룡연월도를 들고 관우가 적토마에 오르면 한발작도 못가 주저 앉을 것 같다.
▶ 파릉교
관공사조처 안으로 들어가면 조조와 관우가 말을 탄 채로 작별인사를 했다는 파릉교가 두 개가 있다.
원래 조조와 관우가 이별했던 다리는 팔리교(八里橋)였는데 당나라 때 장안의 파릉교가 "버들가지 꺾어서 이별하는 곳"으로 유명해지자, 이곳도 조조와 관우의 이별 이야기가 있어 소설 속에서 파릉교로 개명해 이야기를 씀으로 이제는 파릉교로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다리는 반원형의 교공(橋孔)이 세 개였고, 다리의 전체 길이는 90m나 됐으며, 다리 위로는 마차 두 대가 서로 교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한나라 당시의 그림(漢畵像砖)을 참고하여 1990년에 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파릉교, 즉 팔리교는 언제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리가 걸쳐진 그리 크지 않은 하천의 이름은 청니하(淸泥河)로 지금도 쉬창 시내의 서쪽 멀지 않은 곳을 흐르고 있다고 한다.
관우기마상 옆에 있는 부서진 비석엔 한관제조포처(漢關帝挑袍處)라고 써 있다. 한나라의 신하였던 관우 황제가 조조가 이별의 선물로 건넨 선물 가운데 전포(戰袍)만을 골라서(挑) 청룡언월도 창끝으로 집어 올려 받은 곳이란 뜻이다.
▶ 관제묘 안의 파릉교
1990년 재현한 파릉교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관제묘 안에 들어가면 또 다른 파릉교가 있다. 청나라 때 남아있던 파릉교는 길이가 21m였고, 다리 아래 반원 형태의 교공(橋孔)이 세 개인 돌다리인데 1962년 다리가 부서져 물에 빠져 잠겼는데, 물에 잠긴 일부를 건져다가 이곳에 복원한 다리가 바로 이 다리다. 이로서 완전히 새로 만든 파릉교와 그래도 옛것이 묻어있는 파릉교 두 개가 있는 셈이다.
▶ 시출오관(始出五關)란 현판이 걸린 석패방
관우기마석상이 있는 파릉교를 지나면 넓은 광장 정면에 시출오관(始出五關)란 현판이 걸린 석패방이 보이는데
▶ 관공사조처 관제묘 산문
광장 우측에 있는 관제묘는 관우의 머리가 묻힌 뤄양 관제묘, 관우가 죽음을 당해 몸이 묻힌 당양 관제묘, 관우의 출생지에 있는 관우의 옷과 혼이 묻힌 산시성 윈청과 셰저우 관제묘를 4대 관제묘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끼지도 못하지만 관공사조처 관제묘는 "관우의 실제 족적이 남아 있는 8대 관제묘의 하나"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다.
관제묘로 들어가는 산문 좌우에는 관우가 탔다는 적토마상과 백마상이 금방이라도 문을 뛰쳐 나갈 것 같은 모양으로 서 있고 그 앞에는 사자, 원숭이 등의 석상이 배치돼 있다.
산문을 지나면 좌측엔 종루(鐘樓)가, 우측에는 고루(鼓樓)가 있는데 모두 관람객에게 개방하고 있어 관람객들이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 무재신전(武財神殿)
▶ 무재신전(武財神殿) 내 관우상
그 뒤편 무재신전(武財神殿) 앞 향대에는 어른 키만한 향이 타고 있어 매케한 향이 진동하고 있다. 무재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오른 손으로 쓰다듬고 왼손에는 돈을 들고 있는 붉은 관우상이 있다. 관우가 훌륭한 무장이었고 충의의 화신으로 소설 삼국지에서 묘사됐지만 현대에는 재물신, 즉 돈 벌어주는 중국 무재신(武財神)이다.
▶ 관우가 재물신으로 된 것에 대한 설명판
관우가 재신으로 전환된 것에 대한 설명이 이 관제묘에 있는데 재미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관우는 경서(經書)에 뛰어나고 산학(算學)에도 뛰어나다. 조조에게 하직하고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조조가 준 재물을 봉인해서 반납할 때 이를 기록하는 장부를 만들어 원(原), 수(收), 출(出), 존(存)으로 나눠 기록했다. 관우의 이런 장부 기장방법은 상업발전 과정에서 장부기장 방법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관우의 신의와 청백, 그리고 신뢰가 관우 인격의 근본이 되었던 바, 훗날 사람들은 문재신(文財神)인 조공명(趙公明)과 구별하여 무재신(武財神)으로 관우를 받들었다." 이 설명에 의하면 관우가 중국상업부기 변천사에서 뭔가 영향을 끼쳤다는데, 이걸 믿어야 하나?
▶ 한수정후대전 내 관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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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보화를 관우에게 바치는 조상과 관우 두 부인 조상
맨 뒷편에는 한수정후대전(漢壽亭侯大殿)이 있는데 청룡연월도를 비껴 들고 적토마에 오른 관우의 모습이 매우 화려하다. 옆에는 관우의 두 부인이 마차를 탄 조상과 관우에게 금은보화를 올리는 조상이 있어 관우가 무신이자 재물신임을 말해 주고 있다. 관우가 사용한 것으로 소설 속에 나오는 청룡언월도지만 당시엔 청룡언월도는 없었다. 언월도는 당송 시대에 등장한 무기로 훈련할 때 사용하여 위엄을 나타내는 용도였을 뿐 실전에선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우의 청룡연월도 역시 소설 삼국지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 관우의 일생을 길게 한 장으로 그린 관제성속도
관제묘 담장 한쪽에는 관우의 일생을 길게 한 장으로 이어지도록 그린 관제성속도(關帝聖續圖)란 그림이 있다. 한 장인 것처럼 길게 이어 그린 그림을 속도(續圖)라고 한다. 그 가운데 몇몇 부분이 기억난다.
▶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벤 그림
반동탁 연합군을 터프하게 막아내던 "동탁의 무장 화웅의 목을 술이 식기 전에 베어옴(溫酒斬華雄)"으로써, 관우가 소설 삼국지 속에서 중원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장면. 그러나 실제로 화웅을 죽인 사람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다. 용맹함으로 유명한 손견이 죽인 화웅이, 소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죽인 걸로 둔갑한다. 손견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어서도 억울하지만, 자신이 화웅을 죽여서 세운 명성을 소설 삼국지에 강탈당해서도 억울할 것 같다.
▶ 조조에게 항복하고 허도로 가는 그림
포로가 되어 허도로 들어가는 관우의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조조에게 항복한 게 아니라 한나라에 항복해서 저리도 당당한가?
▶ 밤마다 춘추를 읽는 관우
조조는 관우를 환대해 관우의 마음을 사려는 그림이다. 여포가 타던 적토마도 주고, 미녀도 주고, 저택도 주고, 금은보화도 주고 잔치도 베풀어 주었건만 관우는 조조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밤이면 춘추란 책만 읽었다고 한다.
▶ 관우가 시죽도를 그리는 그림
조조에게 잡혀있을 때 관우가 유비에게 시죽도(詩竹圖)를 그리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나 역사 삼국지에는 물론 소설 삼국지에도 등장하지 않는 시죽도를 관우가 직접 그리고 있다. 시죽도는 소설 삼국지 속에서 관우가 유비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대나무 잎으로 한글자 한글자 형상화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관우가 죽은 지 천년도 더 지난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관우에 관한 한 중국에서는 그 허구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 조조가 떠나는 관우에게 선물을 주는 그림
결국 관우가 조조를 떠나고 조조는 선물을 주면서 보낸다. 그런데 조조가 무슨 제사 지내는 폼으로 선물을 주는데 관우는 그 가운데 전포 하나만 선물로 받는다. 그것도 청룡연월도 칼 끝으로.
▶ 뒤쫓아 온 조조의 장수를 죽이는 관우
관우가 조조 진영에서 호사를 하다가 돌아가자 장비가 믿을 수 없다고 하고 관우는 뒤쫓아 온 조조 측의 장수 하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충의를 증명한다. 이것 역시 소설삼국지의 이야기.
▶ 형주전투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대승을 거두는 그림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수공을 펼쳐서 조조에게 대승을 거둔다. 역사서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관우의 대승이다.
▶ 독 화살을 맞은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명의 화타에게 수술을 받는 장면
독 화살을 맞은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명의 화타에게 수술을 받는다. 수술 받은 것은 역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를 치료한 의사가 화타는 아니다. 관우가 화살을 맞기 11년 전에 죽은 화타가 소설 삼국지에 등장해서 관우를 치료하니 죽은 화타가 살아 돌아온 건지? 화타 귀신이 수술한 건지?
▶ 맥성전투에서 아들 관평과 함께 육손에게 잡혀가는 그림
맥성에서 관우는 동오의 육손을 우습게 여겼다가 육손에게 포로로 잡혀 손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 목이 조조한테로 보내지고 조조는 낙양에서 성대히 장례를 치러 준다.
관우의 생을 그린 속도를 보고 나니 벌써 오후 두시가 넘었다. 이제 서둘러 관공사조처를 나와 호텔로 가 짐을 찾아 보저우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