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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묄렌도르프는 그 섬이 조선의 영토이므로 영국이 강제로 점령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항의하고,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각국에 호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대답이 궁색하여 조선의 독립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나) 민영익이 “불이야”소리를 외치며 밖으로 나가자 도랑에 숨어 있던 자객이 뛰어나와 그를 찔러 부상을 입혔고, 연회에 참석했던 손님들이 모두 놀라 웅성거렸다. 일당(日黨)은 이때 청당(淸黨)을 모두 죽이려고 했지만 민영익 한 명만을 부상시켰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다) 일본군은 위해위를 점령한 다음 다시 유공도로 진격하면서 수뢰정을 항구 안으로 잠입시켜 정원호를 격침시켰다. … 정여창은 진원호로 바꿔 타고 항전하여 수일간 혼전이 거듭됐는데, 청의 수뢰정 12척이 도망가려다가 일본군에게 격침당했다.
(라) 군중들이 믿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승정원에 명하여 국상령을 공포하라고 했으나 승지 조병호, 김학진 등이 반대했으므로 다른 사람을 시켜 공포하게 하니 비로소 군중들이 물러갔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상복을 입었는데 대원군이 왕비의 시신을 난중에 찾지 못했다고 하여 의관장으로 결정했다. |
① (가) 무렵 이홍장은 친러파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② (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홍영식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③ (다)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④ (라) 사건 직후 이범진 등은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⑤ 시기 순으로 나열하면 (나)-(가)-(다)-(라)가 된다.
[해설] ①
(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1885)
(나) 갑신정변(1884)
(다) 청일전쟁(1894)
(라) 임오군란(1882)
(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1885)
① (가) 무렵 이홍장은 친러파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한국사 통론 391∼392>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유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극동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이미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여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였고 그 후 블라디보스톡에 군항을 개설하여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의 기지로 삼아 계속 조선으로의 세력침투를 꾀하고 있었다. 이 때 조선에 와 있던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능란한 외교수완을 발휘해 당시 청의 과도한 내정간섭으로 인해 반청의 경향을 보이던 조선정부에 접근하여 궁중에 친러세력을 심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움직여 러시아 세력이 조선에서 크게 강화되는 내용의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다.
이에 청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조선의 정계에 영향력이 큰 민비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던 영국도 러시아의 조선침투를 견제하기 위하여 동양함대를 보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포대를 쌓아 요새화하였다(1885). 그러나 이후에 러시아는 조선과 육로통상조약을 맺어 경흥에서 국경무역을 하게 되었고(1888), 또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이것은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나) 갑신정변(1884)
② (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홍영식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홍영식은 살해되었다.
<구뿌샘 근대편 66∼67쪽>
급진개화파는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자 19일 개혁 내용을 담은 80여 개조 정령을 발표하였다. 새 정부는 정치적으로 청에 대한 사대 외교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를 세우려고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지조법을 제정하고, 재정 기관을 일원화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 발전을 꾀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으로 정치 참여 기회를 넓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 등의 개혁 구상은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19일 오후 청군이 공격해오자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이 철수해버렸다. 일본으로서는 청나라와 충돌하는 것이 시기상조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화 정책에 피해를 본 서울 상인과 빈민들도 급진개화파를 친일파로 보고 이들을 공격하였다. 결국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살해되고,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등 9명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다) 청일전쟁(1894) 중 위해위 전투
③ (다)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 군국기무처 설치(1차 갑오개혁)이 먼저이고, 위해위 전투는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구뿌샘 근대편 124쪽>
일본은 조선 정부와 농민군의 타협 노력에 불안을 느끼고 1894년 6월 21일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에 난입한 뒤 기존 정권을 쓰러뜨리고 신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곧 이어 6월 23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함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 이는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또한 일본은 7월 27일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일종의 비상 개혁 추진 기구였다. 여기에는 대원군 계열, 동도서기 계열, 친일개화 계열 등 다양한 정파가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어윤중으로 대표되는 동도서기 계열이 1894년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이른바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출범하기 전까지 주도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수행하고 있어 사사건건 개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의결된 개혁안은 무려 208건에 이르렀는데, 주로 농민군이 요구한 사항과 1880년대 이래 정부가 추진한 개혁 내용이 반영되었다. 여기에는 조세 제도 및 재정 제도의 개혁을 비롯하여 신분제 폐기, 관리 선발 제도 개선 등이 포함되었다.
<한국사 금성출판사 2009개정판 241쪽 지도>
위해위 전투 : 1895년 2월 (기억으로는 한국근현대사 수능이나 모의고사에서 출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지도를 찾지 못해서 2009개정판의 내용을 올렸습니다.)
(라) 임오군란(1882) - 이 사료 또한 한국근현대사 수능에서 간혹 출제된 것입니다. 주어진 자료를 을미사변으로 오해하는 경우 아래 ④내용을 사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임오군란과 춘생문 사건은 인과관계상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④ (라) 사건 직후 이범진 등은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찾는 우리역사 489쪽>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다음에 자신이 죽을 차례임을 예감하고 경복궁을 벗어나 서양공사관들이 몰려있는 정동으로 피신하려 했다. 이에 이범진 ‧ 이재순 등 정동구락부의 친위관료들이 미국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11월 27일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 후 친위관료들은 다시금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가 타는 가마에 고종과 태자를 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모셨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이것은 잠시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어 친일관료의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김홍집 ‧ 정병하 등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고, 어윤중은 용인으로 피난 중 지방민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도망하였으며,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완용 ‧ 이범진 ‧ 윤치호 등이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⑤ 시기 순으로 나열하면 (나)-(가)-(다)-(라)가 된다.
(라) 임오군란(1882)
(나) 갑신정변(1884)
(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1885)
(다) 청일전쟁(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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