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 비유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
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
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저희가 돌
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
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
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14)
하늘의 것은, 그것을 얻고자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기에 성영님을 의지하여 구
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구하려고 동서 사
방으로 찾아다니는 그 수고 끝에 얻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처럼 우리가 하늘
의 보화를 찾으려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수고하여 얻게 되면 그 행복과 기쁨은 말로 할 수 없
는 것입니다. 그같이 오늘 성영님께서 이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늘의 보화를 찾을 수 있게 하
신 그 큰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으신 우리의 주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만나는 관계가 되어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본문 2에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것이 천국이라고 하셨으니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이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했더니 오기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
이고 청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고 종들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임금으로 비유한 것은 임금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절대 주권자이기 때문입
니다. 임금의 말은 곧 법입니다. 살릴 권한과 죽일 권한이 있어요. 그러나 임금의 권한으로 무조건
죽이고 무조건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통치권자에게 다스림을 받는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임금이 사랑과 공의를 기초로 하여 법을 세우고 그 법 체제 아래서 다스립니다. 그
래서 하나님을 임금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기록이 없던 신구약 중간사를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이며, 유대인들에게 희미
한 메시아 언약을 깨워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려는 것으로서, 곧 예수님 자신에 대한 비유입니다.
모든 비유의 초점이 다 예수님입니다. 만일에 비유의 초점을 인간에다 두면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
하는 불법입니다. 2에서 자기 아들을 위하여 한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고'라는 말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천국 잔치를 베풀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
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는, 다시 말해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베푼 잔치에 들어온 자가 아니니,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임금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 잔치이니만큼, 얼마나 귀한 것들로 풍성하고 다양하게
준비되었지 않겠습니까? 일반인들은 접해보지 못한 아주 귀한 산해진미로 차린 잔칫상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주 영화롭게 하려고 완벽하게 준비하였으니, 청함 받은 모든 사
람은 와서 그 아들 안에서 준비하여 차려놓은 것을 받아먹고 배부름의 만족으로 기쁘고 즐거운
잔치가 되자고 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천국 잔치를 의미합니다. 천국 잔치는 무엇이 준비되었는가?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서 베푸신 하나님의 부유, 즉 죄 용서와 치료와 구원과 의와 부활의 생명, 영생하는 생명과 생명
안에 있는 안식의 평강과 희락, 이 같은 엄청난 하늘의 새로운 것들을, 쇠하지 않고 마르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행복으로 가득 찬 영원한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임금만이 준비할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마음껏 먹고 행복한 날을 누릴 수 있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 배설한 이 천국 잔치에 들어오면 하나님만이 준비하실 수 있는, 오직 아들을 통해
서만 주실 수 있는 신비한 복을 마음껏 받아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에서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했습니다. 여기서 청한 사람
들은 구약 백성을 의미하고 특히 구약성경 말라기 이전의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오셨을 때까지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신앙의 변질이 왔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정
욕을 좇아갔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촉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 종들
을 보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시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외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답변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떠났다고 하느냐? 주님을 열심히 잘 섬기고 제
물을 바쳐 제사하는 일도 잘하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가 언제 주님을 떠났다고 그러느냐고 나옵니다
눈이 어두워지니 육신을 좇으며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자신들의 죄악상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
다. 돌아볼 힘을 빼앗겨버렸습니다. 깨닫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그다음 4에서 7까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
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
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하신
내용은 말라기 이후에 생겨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대제사장, 제사장들입니다. 이때의 유대
인들은 선지자의 외치는 말을 아예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비웃고 하나님을 어기는
자들이라고 심한 모욕을 퍼부으며 6에서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
을 어떻게 모욕했는지 어떻게 잡아 죽였는지를 우리가 보았지 않습니까? 선지자들은 돌로 맞아 죽
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너희
머리 위로 돌아갈 것이라고 외치니, 지금 자신들은 죄인들과는 달리 거룩한 삶을 살면서 안식일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백성에게 율법을 잘 지키도록 단속하며 지도하고
있는데, 어디서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는 놈이 함부로 나와서 거짓 선동을 하고 다니느냐! 저것은
율법을 범하라고 백성을 선동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니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에 오라 하니 5에서 하나는 어디로 갔다고 하는 것입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
으로 갔다. 또 하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자기 상업차로 갔다. 자기 것을 장사하러 갔다는 말입니
다. 그러면 무엇을 자기 밭이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 밭에 갔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
까? 자기 밭은 곡식이나 채소를 심는 자기 밭을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유로 말씀
하신 것으로서 곧 자기 밭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자기 마음, 자기중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 자기중심으로 나갔다는 말입니다. 인간 자기중심이 바로 자기
밭입니다. 자기 밭은 곧 자기이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심고 싶은 것을 심고 자기가 원하는 씨를
뿌리고 자기의 좋은 것을 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중심이 되어 하나님에게서 나갔다는 것을 자기 밭으로 갔다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장사해야 하는데 자기 것으로 장사했다는 말씀입니다.
눅14장에서는 자기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샀다는 것은 팔아 버렸던 자기 것을 도로 사들였다고 하
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던 유대인이 다시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것을 세워 하나님
말씀을 자기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하여 자기 말씀이 되게 하였다. 인간의 교훈이 되게 했다는 말씀
입니다. 그리고 상업 차 갔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잔치
에 오라고 청하였는데 하나님의 잔치에는 관심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세운 자기 것을 장사
하기 위해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을 장사하기 위해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는 말
은, 말씀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에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말씀을 자기 머리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들이게 했다 그 말입니다. 아까 자기 밭을 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여 따르던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기다
리던 유대인들이, 어느 때부터 선지자와 선지자의 말을 버리고 율법 위에다 자기 생각, 자기 사상
을 올려놓고 자기에게 맞는 것으로 열심히 장사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머리들로 연구하여 보겠다고 서로 자기 생각을 주고받으며 머리들을 맞대고
연구하여 얻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 유대 백성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쳤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
것을 상업차로 갔다고, 장사하러 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말씀 전해드렸으니 이제는
척척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질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일을 땅의 일로 바꾸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리고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바로 세상 정욕에 빠져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세상과 혼인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과 한몸을 이루었으므로 하나님의 잔치에는
갈 수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중심이었던 유대인들이 팔아 버렸던 자기중심을 다시 사
서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좋은 대로 자기들의 비위에 맞는 것으로 밭을 만들고, 그것을
또 백성들에게 열심히 심어주는 밭농사 했다는 말입니다. 장사치처럼 열심히 사도록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밖으로 나가 사단의 나라의 자식들이 돼버렸음으로써, 그같이 하나님의
종을 살인한 자는 진멸하고 그 동네는 불사른다는 결론을 본문 7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안타까움이 뭐냐! 사람들이 말씀을 말하고 해석하여 전해주는 것이, 사단의 자식
들이 돼버린 이 유대인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하나는 소를 샀기 때문에, 하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하나는 자기 밭을 샀기 때문에 천국 잔치에 올 수 없다고 한 것을 자기들 방식
대로, 자기 머리가 아는 것들로 해석하여 말하고 있으니 도무지 사람들 속에서 귀신이 쫓겨나지 않
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 예배나 행사나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출석해서 은혜받고 복을 받아야 하는데, 목사님이 '무엇을 해야 한다'하면 안 나오고, '예배 나와
라'하면 바쁘다고 안 나오고, '기도회 나와라'하면 무슨 일이 있어서 못 나온다고 하고,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부르시는데 다 자기 볼일이 더 우선이 되어서 순종들 안 한다고, 그러니 무슨 은혜를
받겠느냐고, 무슨 복들을 받겠느냐고, 이런 식의 귀신 씻나락 까먹는 개소리들로 비유 풀이를 해주
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개소리들의 가르침들로 쭉정이 만들고 거짓 믿음 만들고,
가라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예배나 기도나 열심히 안 한다고 무슨 은혜를 받고 복을 받겠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했다, 즉 사단의 자식들로 나가버
렸으므로 멸망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말씀한 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에서 동네를 불사른다
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판 예고가
일차적으로 AD 70년경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군대를 들어서 예루살렘 성을 욱여싸고
포위하여 모든 동네를 점령하고 유대인의 남녀노소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살육전을 하게
두셨던 것입니다. 동네를 불사르고 예루살렘 성전과 건축물들을 무너뜨려, 조각조각으로 초토화가
돼버렸습니다. 그곳에서 도망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이처럼 살게 되었고, 이천여 년 동
안 나라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라도 아끼지 않고 심판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이 돼야 한다는 것을 깨
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신앙과 생활이 되지 않으면, 자기 백성이
라도 아끼지 않고 심판해 버리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이방인들은 얼마나 더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신다는 것, 이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방인인 우리가 소를 사고 장가들고 자기 밭을 두고 자기 상업을 하는 것은, 멸망의 자리에 있다
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물질욕에 있고,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맺은
자기 중심으로 살고, 세상 것을 취하고 세상을 따르는 것이면, 구원이 아니라 그것은 멸망의 자리
입니다. 만날 뭐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라 하니까, 듣기 좋은 말만 듣는
것에 길들어서, 하나님을 그렇게밖에 알지 아니하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이 설마 하고
자기 마음을 믿고 있지만, 그러나 자기 백성이라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하십니다.
말씀대로! 아셨습니까?
그다음 혼인 잔치에 먼저 청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청을 거절하고 다른 곳으로 다 가버렸으니, 즉
사단에게로 가버렸으니 하나님께는 합당치 않습니다. 하여 사거리 길에 서서.....사거리는 사방 각
지의 사람들이 오가는 교차로를 말하는데, 그곳에 가서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셨
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여 언약하실 때, 창22:18에 네 씨로 말미암아
즉 네 후손에서 나실 구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언약하신 대로 이제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하여 사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대로 잔치에 오라고 청하라 하신 겁니
다. 자기 길로 나가 자기주장대로 살면서 죄를 밥 먹듯 짓고 사는 자들, 가인의 길로 나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심판 아래 있는 줄도 모르는 그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청하라 말입니다. 살기를 원하는
자, 구원 얻기를 원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고, 그동안 온갖 죄를 짓고 살았을지라도, 그 죄를 용서
받고 살기를 원하는 자는, 죄에서 건져 천국 잔치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그것을 전하고 청하여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오신 때가 천국 잔치 때입니다. 비로소 메시
아 언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린 그들로서는 천국 잔치가 돼야 합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하는 것은 신약 시대를 말합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하는 '악한 자, 선한 자'는 마음이 나쁘고 못된
사람, 마음이 좋고 착한 사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이미 다 들으셨잖아요? 악은 복음 듣고 들어와서, 즉 천국 잔치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일, 예수님과
의 관계에 대한 영적인 일보다는, 세상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인본으로 믿는
다고 하는 것을 바로 악한 자라고 하고, 선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달아서 그 뜻으로 오신 예수
님을 온전히 믿고 오직 예수님으로 사는 영적인 사람을 선한 자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었지요? 하나
님이 차려놓은 잔칫상과 같은 말씀을 육신의 것으로 연결하는 인본과 자기중심이 악입니다. 말씀에
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고, 죄에 속한, 하나님과 원수 맺은, 자기중심인 인본을 팔아 버리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 그것이 선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 천국 잔치를 배설한 이때는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그 잔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 악한 자의 드러난 모습이 뭡니까? 11, 12에 하나님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13에서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내
던져도 될 텐데, 이미 거기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고통받을 지옥인데, 왜 수족을 결박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육체로 있는 세상에서는 누구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지옥에 한번 던져지면 선택할
수 없는 영원한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표현입니다. 육체로 있을 때만 기회다. 그곳은 자유가 없
다 그 말입니다. 슬피 울 수밖에 없고 분노밖에 남는 것이 없는 곳,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를 갈
수밖에 없는 곳임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소설책이 아니에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은 누구
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너무나 자세히 알려주신 것이요. 또한 인간이 지음을
받은 목적이 있는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을 어영부
영할 수 없습니다. 정말 어영부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차라리 세상 학문 쌓는데, 머리 개발하
는 데 온 에너지 다 쏟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의 높아진 세상 지식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 영적인
뜻과 의도를 왜곡시키는 큰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높아진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는
악한 자 되지 말고, 차라리 지식의 길로 가는 것에서 돌이켜 성경을 아는 것에 온 마음을 쓰는 것
이 합당할 것입니다. 인생 길게 살아보려고 하도 노력들을 하니까, 그 노력에 의해 땅에서 한 백
년은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 이후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 들어간다면 그 쌓은 지식
이 많은들 무엇하겠으며, 세상의 명예 지위가 크고 높은들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육체로 있을
때만 기회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천국 잔치에 들어오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잔치 예복을 반드시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의 혼인을 위하여 베푼 잔치이므로 그 잔치에 맞는 예복을 입어야만, 함께 아주 큰 기쁨의
잔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베푼 잔치이니,
임금의 그 의도와 마음을 헤아려 영광된 초대에 보내주신 예복을 입고 들어와야 합니다. 바깥 신
분으로는 임금 앞에 올 수도 설 수도 없습니다. 별별 사람, 별별 직업, 별별 신분이 다 있을 것이
니, 그 바깥 신분으로는 임금을 만나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주는 예복을 입으면 그
사람 신분이 무엇이 되었든지 묻지 않고, 임금이 친구로 맞아들여 함께 잔치에 기쁨을 나누겠다고
하는 것이 임금의 의도요 뜻입니다. 그래서 잔치에 들어가는 자격은 반드시 임금과 마주할 수 있
는 임금의 신분에 맞는 예복, 세상 신분, 자기 신분을 가려줄 임금이 주는 예복입니다. 오로지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 지극한 마음 때문에 베푼 혼인 잔치
이니, 가려져야 할 세상의 천한 신분, 더럽고 악한 죄인의 신분을 임금이 보낸 예복으로 가리고,
임금과 함께 앉는 그 영광된 자리, 친구처럼 맞아서 차려놓은 온갖 산해진미의 진귀한 것을 가져
다 먹으라고 권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임금을 자기의 경험으로 가질 수 있는,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은 곧 임금이 주는 예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청한 사람들을 보려고 들어오니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어째서 예복을 입
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유구무언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한 것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구원은 각각으로 누구든지 예복
을 입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가려야 할 자기 신분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임금이 예복을 보내어 청한 뜻을 무시했습니다. 임금의 말을 경홀히 여겼고 관심 두
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보였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데 모든 초점을 둔 아버지의 관대한
사랑을 무시하듯이 하였습니다. 임금이 모욕을 당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온 것은
예복을 입어야 할 의도는 알지 아니하고, 자기의 좋은 대로 생각하고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의 관심은 임금이 차려놓은 산해진미의 음식, 자기 배를 불릴 수 있는 그것에만 마음이 있었습니
다. 다시 말해 자기 정욕의 배를 불릴 수 있다는 것에만 마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잔치를
배설한 임금의 질문에 유구무언 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러 나와서 뭐합니까?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 모든 초점이 아들이신 예수님께 두었다는 그 아버지의 영적인 뜻에는 관심 없고, 예복을 입게
하려고 보내신 말씀 속에서 뭐만 보냐? 자기의 바라고 원하는 것, 세상 것으로 복을 받아 잘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 두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는 눈이 그런 곳으로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복 받은 이유가 어디 있나? 그것 연구하느라 예수님은 놓쳐버립니다. 믿는 이유
가 정신 개발과 지식 쌓으므로 만족하고 세상 것으로 잘 돼보고 싶은 것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놓치고, 이삭이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받았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
이삭의 복을 받으라고, 그리고 별미 가져오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이런 인
간의 더러운 죄의 욕망을 채워주는 데 있는 것처럼 말씀을 요리하는 악한 짓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인간의 오만한 머리들이 말입니다.
별미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별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별미이신 예수님으
로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입맛에 맞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하신 상징적
사건입니다. 아셨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혹 속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이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
비유에서 말씀하는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교회 나온 지
오래지 않은 사람도 들어서 다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으로 예복을 입었나! 어떻게 해
야 예복을 입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는 것을 말한다는 것, 그냥 들은 것으로도 된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그것으로 옷
입었다고 생각해버립니다.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벌거벗은 채로 있는 자신의 영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옷 입는 것과 오늘 비유에서 예복을 입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먼저
예복을 입지 않으면 예수님으로 옷 입지 못합니다. 혼인 잔치 배설한 그곳에 악한 자로 있을 수는
있으나 예수님으로 옷 입은 신부가 될 수 없기에 쫓겨나는 것입니다. 예복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의 말씀으로 자신을 철저히 알고, 즉 죄지은 영혼으로 영원히 사망에 처하게 된 자신을 알고, 또한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성전 제사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되
는 아버지의 사정과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에 빠져 영원한 사망에 처하여진 자신을 알고 인
정하여 통감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으로 밀미암아 죄에서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시고 몸 찢기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생명을 내놓으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으로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영부영 믿는다는 말로 옷
입을 수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죄에서도 하나님과 관계의 영적인 십계명의 죄에서도 온전히
돌이키고 버리고 깨끗이 하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 안의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으로 옷 입기 위한 예복의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되는
예복을 입어야만 예수님으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듣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믿음이 진정이기
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은 세상 것으로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피
로 죄를 씻고 의로 옷 입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차리신 잔칫상은 아들 예수님으로
주시려는 천국입니다. 천국의 것으로 배부르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영의 사람이 받아 먹어
야 하는, 예수님으로 주시는 천국의 것,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새김질하여 이루어지는 그 능력, 자
유케 된 능력으로 살게 되니 영혼의 기쁨이 넘치고, 그 영적 능력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롬13:14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情慾)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
습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하는 것이지,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3:27에 누구
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
고 함께 산 것이면 그것이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마13장에 보면 보화 비유나 진주 비유
에서도 분명히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즉 보화(예수님=천국)를 사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
를 팔아야 한다. 세상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가져야 하는 것, 구해야 하는 것이 천국이요. 세상의 모
든 것을 포기하고 얻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천국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살려면 자기중심인 자기 밭에서 나는 것으로 성경 말씀을 장사하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오늘 유대인들로 보이셨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자기중심을 다시 사는 바람에 예수님에게서 떨
어져 나간 가지가 돼서 영원한 심판의 자리로 던져지게 됐는데, 오늘날도 어쩌면 그리도 이 비유를
들어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모르고, 자기 밭의 말씀들을 전하고 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비유 말씀만 듣는다 해도 여러분이 생각해볼 수 있잖습니까? 얼마나 자기
밭 말들이 나오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 지식에 의한 믿음이 되지 못하니,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
냐 하실 때 유구무언일 수 밖엔 없고, 자기 속에 자기 대답이 있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
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지으시고 우리에게 잘 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 아니냐?
그래서 복을 주시고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계신다는 것,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하나님이 나
에게 화려하고 멋진 세상의 옷을 입혀주시면, 내 평생 하나님만 자랑하고 찬양하고 살 것이라고 약
속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내 맘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 그걸 왜 물으시냐? 나 잘되게 해주면 내
가 그것을 나 혼자 잘 먹겠다는 것 아니지 않으냐?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하겠
다고, 열심히 복음 전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복 입지 않았으면 그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신 적 없으십니다. 예복 입
지 않고, 예수님으로 옷 입지 않고 하는 일 하나님과는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변명을 필요로 하
시지도 듣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보내신 예복이 없으면, 그대로 수족이 결박당하여 저
어두운 지옥에 던져지는 것임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4에
뭐라고 했습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셨으니 정말 이런 말씀 앞
에 자신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
는, 성영님으로 가진 확신 있는 신앙인가 말입니다.
오늘 12에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친구여'라고 했습니다. 요15:13-15에 예수님께서 사람
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
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
습니다. 친구는 허물이 없는 사이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고민 따위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입니다.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눕니다. 그렇듯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전부
다 알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또 우리에게 그것을 다 말씀
하여 알게 하셨습니다. 진정 친구이면 친구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의 목숨을 걸고
친구를 구하려 하듯이,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듯이, 예수님께서도 자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
린다는 것입니다. 죽음 위기에 있는 자기 친구를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대신 죽으신
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실 것인데, 그 친구가 누구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놓을 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자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 것
으로 아니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드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자, 예수님을 위해 기
꺼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입니다. 그를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이요 그를 친
구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예복 입지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하듯이 비밀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알도록 그 예복을 입을
말씀을 다 보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친구 때문이라고 말
씀하셨으니,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사랑하시는 친구가 되어 있습니까? 자기 목숨을 버린 이유!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으신 사랑을, 대속의 은혜와 함
께, 말씀으로 우리 영, 혼, 육이 살게 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 믿음과 사랑을 외면한 것이면, 그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것이요, 자기로 옷 입은 것이 되어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므로 바깥 어두움에 내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그때는 정말 몰
라서 그랬으니, 제가 너무 미련했으니 한 번만 봐 주세요" "나 너 기억에 없다" "예수님 저 모르
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철야 기도, 새벽 기도 다녔고 예배 때마다 빠짐없이 잘 다녔는데, 예수
님이 저를 모르시다니요! 우리 교회서 나 없으면 교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정도의 위치에 제
가 있었는데 저를 모르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저 누구누구예요!" "그럼 그 교회 가서나 물어봐
라 난 너 모른다." "예수님! 나도 예수님은 믿는데 뭔 말이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해서 말씀에는
제가 관심 두지 못했어요, 아시다시피 먹고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중요하게 여기지 못했어요. 그
것은 좀 봐 주셔야 하잖아요" "그럼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추구하던 세상에 가서 물어봐라, 난 너
모른다. 너희 속에 세상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가득 들어서 세상을 놓지 않으려고 너희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으니 너희 뜻대로 되었느니라." 심은 대로 거둔 것이 되었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심겨 있으면 세상이 가는 곳으로 갈 것이
요, 예수님께 심겨졌으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로 삼 년 반 동안을 함께 동고동락하던 가룟 유다를 통해 이 실제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성경에 그 모델, 그 실례가 다 있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관심을 두었고
세상 명예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오늘날 세상 것으로 잘 되고자 하는데
마음을 두고 믿는다는 사람들과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는 스스로 망할 길로 들어간
것입니다. 돈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결국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돈 받고
넘겨주려고 군병들과 함께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26:50에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셨습니다.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이 누구인
지 유다 앞에서 다 보이셨고 숨긴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표적도 죄를 사하시는 권
세도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다 보여 알게 하셨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네가 욕심
으로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보지 못해 생명의 구원을 버리겠다면 너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룟 유다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삼 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듣고 보았음에도
믿지 못하고 저주로 떨어질 수가 있느냐 하고 의아해하지만,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세상 물욕에 잡혀 있으면, 세상 명예욕에 잡혀 있으면, 세상 것들에 마음이 붙들려
있으면, 세상 것으로 목적이 되어 있으면, 자기중심이면, 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 구원받았다고
해도 그 구원은 막혀 있다는 것이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마13:49,50에 천국으로 초청하는 잔치 자리에 와서 있는 자 중에서 천사들이 악
인을, 즉 예복을 입지 않는 자를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했습니다. 마25장에 열 처녀
비유에서도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 중에 다섯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연고로 신랑을 맞지
못한 상태에서 문이 닫혀버렸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니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로 들어가고 문이 닫혀버렸지 않습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문이 닫히니 문을 열어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이제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믿음을 다른 사
람에게 나눠줄 수도 없고 내 믿음으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수도 없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성영
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 말씀을 보내셨다고 하는, 이 말씀 앞에서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중심으로 행하는 것, 세상 것에 마음이 붙들려 있는 것, 육신의 일로
싸우고 다투는 것, 다 내어던짐을 받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지혜와 능력이 있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의 말씀으로 우리 믿음을 도우신 삼위의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12 장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 비유.p301-p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