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요1:19~24/28>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이 곧바로 공생애에 관한 이야기로 진입해 들어간다.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태초가 언급되었다. 여기서 태초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영원함 속에 있던 천국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이 천국에서 IX의 공생애를 곧바로 연결시킨다. 마치 예수께서 영원한 천국에 계시다가 방금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천국에 계시던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지금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IX 안에는 영원함 속에 계시는 아버지 ㅎ님의 성품과 인격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버지의 신성한 성품인 선, 사랑, 의, 거룩, 지혜지식, 자비와 긍휼, 용서, 오래참음 등의 은혜와 진리가 IX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인격성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아버지를 마주 대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신다.
이렇게 ㅎ님의 형상으로 오신 IX의 출현을 예고하는 세례 요한의 기록 또한 특이할 수밖에 없다. 지금 공부하는 요1장의 이 시점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려는 순간이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기 직전에 먼저 세례 요한을 언급한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유대인들의 대표였던 산헤드린공회를 말한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요한을 판단할 사람들을 골라 보내었던 것이다.
마3장을 보면, 당시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그가 선포하는 말씀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뭔가 큰 울림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질타를 하는가하면, 권세자 헤롯 왕의 비리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 대담한 언행을 보고 ‘이 사람이 선지자인가? 혹은 메시야인가?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활동은 온 이스라엘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산헤드린공회는 요한에 대해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을 보냈는데, 이들은 오늘날로 빗대면 교단총회 산하의 이단 검열을 하는 공식기구였을 것이다. 24절을 보면 이들을 보낸 자들이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현장목회를 하는 목사에 해당된다. 이들이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세례요한에 대한 대중들의 쏠림 현상을 심각하게 여겨서(손님들을 뺏김으로) 상급기관인 산헤드린에 요청해서 요한에 대한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이 세례 요한을 만나서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요한 본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공공기관에 가면 우선 신분증을 제시한 후에 일을 처리하듯이 이들은 먼저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자 했다. 그런데 정작 요한의 대답은 이들의 질문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지만 산헤드린공회가 파송한 대표단의 질문과 세례 요한의 대답은 계속 엇박자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 대표단의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거의 동문서답과도 같다. “나는 누구다”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대답을 한다. 당시 대중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는 세례요한의 과감하고도 도발적인 언행의 모습을 보고 아마도 메시야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를 간파한 세례요한이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도 가 아니라, 앞에 정관사를 THE를 붙여서 호칭하는 그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구약에서부터 예언 되었던 옛 언약의 완성자로 ㅎ님 나라를 세울 메시야를 말한다. 그래서 요한은 서둘러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부인하는 것이다.(번역..누락)
20절은 보면 세례요한의 증거가 분명하게 또박또박 부인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번역에는 누락이 되었지만 원문에는 아주 상세하게 기록된 접속사가 ‘카이’가 3번이나 나온다. 카이는 ‘그리고’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가 ‘컨페스’인데, 고백하다(커밍아웃)과 같은 의미이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에 대해 속을 다 뒤집어 보이면서 증거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27절에서처럼(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다고~말함/당시 가장 미천한 종이 손님의 신발 끈을 풀고 물로 씻김..그런데 자신은 그럴 자격도 없다고~)자신에 대해 바닥까지 부인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자기부인의 자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오늘날 목사들을 보면 어떠한가? 조금만 사람들이 모여들면 우쭐해져서 금방 자기자랑이 튀어 나온다. ‘내가 ㅎ님의 참종이야, 그러니 내 말대로 해야 천국 갈 수 있고, 복 받으니 시키는 대로 충성해!’ 이런 기조로 흘러간다. 혹은 직접적인 표현을 안할 지라도 거드름피우며 교만에 찬 목소리로 강대상에서 반 협박성 어조로 충성과 헌금 강요 등은 너무도 흔히 목격되는 장면들이다. 심한 목사는 이단의 교주처럼 자칭 메시야인양 허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는데 거짓 선지자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얼마나 달콤한 말로 귀를 긁어주었으면 군중들이 몰려들까? 기복주의와 성공주의를 쏟아내며 충성한 만큼 복 받는다는 감언이설을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지만 은혜의 복음을 모르는 곳, 거기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암튼, 요한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육신의 혈통적 배경이나 능력의 어떠함에 두지를 않았다. 사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출생 배경과는 많이 다르다. 예수님은 가문도 알수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례 요한은 눅1장을 보면, 아비야 제사장 반열에 속한 사가랴를 아버지로 두고 있었고, 아론의 자손에 속했던 엘리사벳이라는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레위인이었고 제사장 집안의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금수저였다.
요한이 가족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이었다면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달라졌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나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아론 계통의 엘리사벳이다.”라고 대답했다면 대표단은 금세 납득하고 고개 숙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부모나 레위지파로써 규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예수님만을 유일한 관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21절에 질문이 이어진다. ‘네가 엘리야냐?’ 당시 유대인의 생각에는 ㅎ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선지서의 기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엘리야는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바로 그 엘리야를 뜻한다. 그러자 요한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런데 주님은 마11장, 마17장에서 두 번이나 ‘세례요한이 너희가 기다리던 엘리야’라고 말씀했다. 무엇이 맞는가? 주님의 말씀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세례요한의 사명이 바로 구약의 예언된 엘리야의 사역과 동등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한 말이 맞다.
그들의 질문은 계속된다. 엘리야가 아니면 네가 ‘그 선지자냐?’ 묻는다. 여기서 말하는 “그 선지자”란 모세가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였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물론 모세가 말한 장차 올 그 선지자는 IX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모두 아니라고 부정한 세례 요한은 23절에서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한다.
소리는 ‘자기 형체’가 없다. 이를 통해 증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증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마음이 빼앗겨선 안 된다. 자기 목소리를 낼 때 그리스도는 가리워 질뿐이다. 소리가 자신의 존재감인 형체를 드러낼 때 그리스도는 가리워질 수밖에 없다.
고후11:2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한다. 중매쟁이가 신부나 신랑보다 더 멋있게 등장하면 곤란하다. 신부 들러리가 신부보다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자신이 ‘소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도는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품은 질그릇에 불과하다. 질그릇이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감을 뽐내면 안에 숨겨진 보배가 빛을 내지 못하는 이치를 모른다. 그래서 자기 신앙의 경건한 모습, 선한 행동, 구제에 힘쓰면서 이를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될 것으로 오해한다.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알아보자.
마7:15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고 말한다. 누가 거짓 선지자일까요? 속은 이리와 같은 포악한 탐심으로 가득한데 겉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자들이다. 양의 옷이란? 경건함의 옷을 말한다.
양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바리새인들을 말한다. 마6:1절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고 말씀한다. 자신의 경건한 삶을 자랑하는 자들이 양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경건주의를 앞세우고 있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하는데, 경건을 앞세워 특별한 사람처럼 행동하여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사기행각이다. 특히 세습하는 교회에서 목사가 자기 자식에게 특명을 내리는 것이 종교적 경건이다(예/ 철저한 새벽예배 참석, 온전한 십일조, 성경 다독, 기도생활 등으로 탁월성을 돋보이게 부각시킨다. 경건의 옷을 입혀서 대중들이 존경하고 따르게 유도하는 것이다.)
교회는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자신이 어둠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빛인 그리스도가 증거 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바로 이러한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자였다. 경건함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IX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교회가 할 일은 자신들이 죄인 중의 괴수됨을 증거하는 일이다. 경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죄인된 자신들의 실체를 보여주어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딤전1:12-16> 읽고,
12절. 나를 능하게 하셨다?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람의 눈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어 있다. 빛은 어둠에서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나의 경건을 보여주는 일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에 관심이 없다. 우리의 속마음을 보실 뿐이다. 우리에게 경건함의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요구하고 있다. 목사 자신이 경건함의 본을 보이며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한다. 이들이 거짓 선지자이다. 소리로 존재해야 하는 목사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 교회는 천국 문을 굳게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궁전에서 외치지 않았다.
(마11:7~8)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광야는 사람이 꾸며낸 인공적이고 화려함을 갖춘 도시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죄인의 모습 그대로 원래부터 있던 인간의 처음자리인 티끌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체성을 일컬어 광야라고 한다. 말 그대로 광야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경건의 옷을 거부하고 죄인을 비유하는 약대 털옷을 입고 오직 하늘 양식의 상징인 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던 자가 세례요한이다.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과 십자가 복음은 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육신의 윤택함과 복음은 함께 가지 못한다. 복음은 화려한 성전에서 선포된 적이 없다. 종교인들은 화려한 성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성전을 찾아간다. 그러나 죄인들은 광야로 나아간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쳤다.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광야로 나아갔던 자들은 누구였을까? 광야까지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까지 나아가 열악한 환경에서 오직 회개만 외치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등장한다면 이게 신기한 일이고 기적이다. 광야로 나아가는 자들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다.
누가 이 광야의 마음일까요? 죄인된 자신의 비참한 실상에 눈이 열린 자들이다. 이러한 광야된 마음은 이 땅의 복이나 말하는 설교, 처세술, 성공의 비결, 행복한 가정의 비결, 교회 성장의 비결, 내적 치유, 위로, 성령의 체험 같은 설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광야된 마음이 듣는 설교는 따로 있다. 죄인을 찾아 회개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설교이다.
오늘날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한 광야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이미 현대적 첨단 시설에 마음을 뺏긴 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땅의 것들을 고려한다. 집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성가대가 있는지, 어린이를 맡아 줄 기관이나 시설이 있는지, 주차장이 있는지, 유명 인사들이 있는지, 여기에 더하여 각종 취미생활이나 스포츠를 즐길 시스템이 있는지를 찾는다..(안산 유명한 레포츠 교회, 일명 꿈의 교회..모든 걸 제공하는 교회->신앙+ 교제, 취미, 운동, 상담, 비즈니스, 힐링 등 종합센터다), 말씀 보다는 사람 간 교제와 어울림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이들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에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 교회는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세례 요한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사도들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이들은 관심이 없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에 목말라 하는 죄인의 갈급한 심정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복음은 오직 광야에서만 선포되어진다. 한마디로 ㅎ님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먼저 광야된 마음으로 안배하여 심령이 가난하게 하신다. 이렇게 들을 귀를 주신 후 생명의 복음을 듣게 하시는 것이다.
눅10:38이하, 마리아가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생명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바로 광야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도 마리아가 주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와 달리 마르다는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 주님을 육적인 봉사와 섬김으로 칭찬과 복을 받겠다는 종교심으로 차 있었다. 내 마음이 광야인지 세상인지 복음이 전파될 때 정확히 드러난다. 광야된 마음에만 복음이 생명으로 다가온다. 말씀에 정말 갈급한가?(광야다), 발치~ 한마디라도
25~27절 읽고, 유대인들의 질문은 이어진다. 25절,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따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자격증?). 산헤드린공회는 세례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하라고 허락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 때와 똑같았다. “도대체 누가 허락한 권세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라는 것이 이들의 궁금증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답변은 동문서답과 같았다. 대표단은 왜 세례를 베푸냐고 물었는데 요한은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흔히 말귀를 못 알아듣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릴 때 사오정이라고 하는데 요한의 모습이 이러했다. 왜였을까?
이 대화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기다리던 메시야(그리스도)인 것을 알았고 모든 의식이 예수님을 향해 꽂혀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단이 무슨 질문을 하든 그 대답은 예수님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었기에 눈앞에 누가 있건 개의치 않고 주님만을 향하게 된 것이다. 세례요한은 6절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는 ㅎ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산헤드린 대표단에게 구구절절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기에 본론만 말하는 것이다.
23절,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사역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그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깨달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또 25절에서 “왜 세례를 베푸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였다.
이렇게 대답한 것 또한 예수님만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사실 세례요한이 왜 세례를 베푸는가? ㅎ님이 시켜서 하는 거지 자기 뜻이 아니다. 그런 걸 어떻게 그들에게 말하겠는가? 알아듣지를 못할 테니..안한 거다)
이러한 자세를 보고 주님은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칭찬을 하신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구약의 역할은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서, 시가서 등 모두가 모아져서 세례요한으로 압축된다고 보면 맞는다. 그 요한이 지금 고대하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있으니 얼마나 충실하게 그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그래서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마치자. 언제부터 세례의식을 행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구약에서 세례는 아니지만 세례의 의미를 드러내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노아의 홍수(벧전3.20)와 출애굽 때의 홍해 사건(고전10.2)과 할례의식(골2:11)이다. 여기서 세례는 곧 즉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성막 제사의 번제단과 물두멍에서 예표된 것이었다.
번제단에서의 죽음이 곧 물두멍에서의 죄 씻음과 동등한 의미를 가진다.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 이렇게 죽은 자가 성막 안에 들어가서 ㅎ님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을 역사 속에서 펼친 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서 ㅎ님의 말씀을 받는 사건으로 성취되었다(어린양은 예수의 죽음이고 홍해사건은 나의 죽음이다). 여기서 홍해사건이 바로 물에서 죽는 물두멍의 실제인 세례이다. 옛사람이 죽어 죄 씻김을 받는 일이다. 이것을 다시 복음과 연결한다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가 ㅎ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13장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후에 세족식 때에 하신 말씀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온 몸이 깨끗이 씻기었다’고 하셨다. 주님이 일러준 말이란 방금하신 말씀인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새언약의 피다’라는 십자가복음이다. 주님의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따라서 성막에서의 번제단과 손을 씻는 물두멍의 정결예식은 곧 장차 도래할 십자가 사건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장로의 유전인 정결예식으로 변질되어 음식을 먹기 전에 손발을 씻는 종교의식이 되고 말았다.
<막7:1~8> 읽고, 복음을 모르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면 종교인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것은 매 시대마다 계속 있어왔던 일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윤리 도덕적인 실천해야할 규범으로 생각한다. 3절에서처럼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4절에서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에 힘쓰고 애쓰는 것처럼, 오늘날 대다수 교회가 착한 사람되자, 좋은 사람되자, 구제에 힘쓰자, 본이 되는 삶을 살자,~라는 구호로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인 설교들은 사람을 살리는 IX의 생명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래서 7~8절에서, ㅎ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질타를 하신다. ㅎ님의 계명이란 십자가 복음을 말한다. 모든 율법과 선지서가 말하는 바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아닌가? 그러므로 ㅎ님의 계명이란 복음이다. 정작 생명이 되는 복음은 버리고 인간들이 더 고상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ㅎ님의 뜻인 것처럼,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한다면 그게 입술로는 ㅎ님을 찾으나 마음은 ㅎ님과 상관없는 자로 만드는 사람의 계명이다.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예수를 왕 삼으려고 쫓아온 무리들을 향해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셔야 영생한다’고하니까 어려운 말이라고 다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설교는 택한 백성만 알아듣고 모이라고 주시는 ㅎ님의 말씀이지 어중이떠중이 다 불러 모으는 게 설교가 아닌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알아듣고 남은 자만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이다. 아니 주님의 양이기에 끝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기 있는 설교는 어떠한가?
천연적인 사람들이 다 수긍하는 윤리 도덕적인 사람,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되기, 성도다운 사람 되기, 마음 다스리기, 행복한 가정, 좋은 아빠, 좋은 엄마, 사회 정화 운동, 행복한 가정, 좋은 이웃되기 등을 좋은 설교, 건강한 설교라고 환호하며 모여든다. 이런 설교는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도 유발한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 결연한 결심도 하게 되고, 의지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여기에 적당한 간증까지 곁들여서 ‘누가 이렇게 살았데요’ 그러면 공감을 불러 일으켜서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마음에 절절이 감동이 울려 퍼져서 은혜 받았다고 입을 모아 칭송한다.
자, 이런 내용을 절에 가서 설교하면 어떨까요? 예수 이야기는 빼고 똑같은 말을 절에 가서 한다면 거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똑같이 감동을 받고 똑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목사가 동국대 같은 불교 대학교나 절에 가서 설교 했는데 스님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 치는 일이 생긴다면 어찌된 일일까? 성경은 이런 걸 설교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 보편적 가치관을 가지고 인간끼리 합의해 놓은 것을 선이라고 규정해서 그것을 추구하고 독려하는 것을 ㅎ님은 죄악이라고 한다.
설교란 ㅎ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설교란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분명히 ㅎ님의 택한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한다(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 저희에게는 허락이 안됐다.)하심. 그래서 사6장에서도 이사야를 보내면서 ‘말씀전해, 복음전해’ 그러면서 ‘귀 막아라’, 그러신다. 열어서 설득시켜라가 아니다. 십자가 복음은 불택자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다. 들으면 졸리기만 하지 전혀 마음에 울림이나 끌림이 없다. 왜일까?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설교란 영원세계인 ㅎ님 나라와 ㅎ님의 일하심, IX와 십자가와 은혜와 IX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못 알아듣는다. 그래야 승려들이 못알아 듣는다. 절에 가서 예수, 십자가, 피, 은혜 이런 거 이야기 해보라, 어떻게 그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 칠수 있나? 그렇게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는 예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은혜 이야기는, 그 안에 말씀이 있는 자, 아들이 있는 자, 그들만 이해한다.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은 내 실력이 아니다.
가령 제가 헬라어로 설교를 한다면(하지도 못하지만), 만약 한다면 누가 알아듣겠는가? 헬라어를 안에 가지고 있는 자라야 알아듣는다. 그처럼 이미 그리스도의 성령이 자신 안에 계셔야 복음이 들려지고 공감하며 같이 기쁨에 겨워 감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하신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이다. 물세례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가 죄와 허물로 죽어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임을 깨닫게 해서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율법과 같다.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다.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다. 이것을 함축하여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라고 한다.
나는 빛이 아니요, 빛을 소개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외쳤던 세례요한처럼, 우리는 그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질그릇에 불과하다. 그 질그릇이 깨뜨려질 때, 그 안의 보배가 빛나고 영광된 모습을 드러내듯이 우리는 매사에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구세주이신 IX만 높이고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티끌 같은 질그릇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한 영이 되사 ㅎ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 주신 IX를 찬양합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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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