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의 세계 ⑨-2
제2장 세존의 생애 – 깨달음에의 길, 열반에의 길
제1절 카필라바스투(샤캬족과 그의 도성)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3) 티라우라 콧트
무케르지가 카필라바스투이 성터로 추정한 티라우라 콧트 유적은 네팔령 타우리하와에서 북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타우리하와는 인도 국경에 인접한 룸비니 현의 한 도시군(都市群)인데, 룸비니 방면에서는 최근에 이르러 겨우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해진 비교적 작은 도시이다. 원래 현도(懸都)인 바이라와나 세존 탄생지인 룸비니와의 왕래에는 일단 인도 땅으로 나왔다가 다시 네팔의 영토로 들어가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남북으로의 통행은 비교적 용이한데 비해서, 이 왕복 길은 히말라야의 앞산에서 흘러내리는 몇 줄기 하천을 횡단해야만 하기 때문에 도로의 건설이 어려웠던 것이다.
한 경전에는 샤캬족의 영토를 ‘설산의 중턱’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히말라야의 앞산까지는 수십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며, 넓디넓은 논밭 가운데 여기저기 남아있는 원시림 중의 하나로 덮여 있는 나지막한 언덕의 한 구획이 티라우라 콧트의 유적이다. 겨울철의 건조기에는 농민들이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여 그 원시림에서 베어낸 목재를 운반한다. 수레의 행렬은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면서 줄을 이어가고, 그 배후에는 백설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의 몇몇 봉우리들이 웅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티라우라 콧트는 누벽으로 둘러싸인 대략 직사각형의 성곽 유적이다. 누벽은 남북이 약 500m이며, 동서가 약 450m, 그리고 바깥둘레가 약 2,000m이다. 그 북서쪽에는 유적의 곁을 흐르는 반 강가 강에 의하여 침식이 된 자리도 보인다. 원래는 흙담이었으나 그 후에 그 위로 벽돌 누벽이 쌓여졌다. 누벽의 주위에는 바이샬리의 도성 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호가 빙둘러서 파여져 있다. 동∙남∙서쪽 각 누벽에는 복수도 된 문의 흔적들이 보이며, 서문 유적에서는 쿠샨시대(2세기)의 수문실 자리가 발굴되고 있다. 또 철재를 깔고 벽돌과 벽돌 조각으로 포장된 도로의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거기서는 당시의 수레바퀴 자국도 확인할 수 있다.
누벽의 내부에는 작은 언덕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고, 발굴 결과 벽돌로 만든 유적이 몇 개 발견되었다.
서남쪽 성벽 가까이에는 대장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근처에서는 흙으로 만든 용로(溶爐), 물통, 구리 동전 등이 출토되고 있다. 여기서는 무기와 아울러 농기구, 동전, 일반 가정용 철제품이 한 공장에서 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철재는 남쪽 성벽 문밖에 위치한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따라서 이 지역에도 직공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철제품의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인도에서는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부락 이외에도 생활에 필요한 기구의 생산을 담당한 사람들의 부락이 있어서, 같은 기술을 가진 직공들이 도시의 안팎에 모여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던 많은 예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전에는 바라나시 교외에 목수의 부락과 대장장이의 부락으로 이루어진 취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따라서 티라우라 콧트의 주변에도 이와 마찬가지 성격을 지닌 부락이 있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최근의 발굴에서는 균형잡힌 구리 공작상, 많은 쇠못, 코일 모양으로 감긴 금∙은∙동 박편(薄片)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기술적으로도 상당히 진보된 제품들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은 슝가와 쿠샨 양시대의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채색토기, 북방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도 다수 출토되고 있다. 특히 후자는 기원전 600~200년경의 계층을 특징짓는 것으로, 주로 북쪽의 델리 북동부 하스티나프라에서 남쪽의 라자그리하(라자가하, 왕사성) 근방에 이르기까지 갠지스 강의 연안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토기는 표면이 단단하고 검은빛이 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현재로서는 티라우라 콧트 주변이 그 분포의 북한계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점토로 구워 만든 작은 상(테라코타)은 슝가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지모신상을 비롯한 쿠샨 시대의 것이 다수 출토되는데 인간상이나 혹달린 소, 오리, 코끼리 등의 동물상, 그리고 짐수레나 장난감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구리나 은으로 제작된 돈도 큐샨 시대의 것을 중심으로 많이 출토되어 있으나, 주목되는 것은 티라우라 콧트의 누벽 서쪽에 인접해 있는 시바가르프 지구에서 발견된 30여 개의 구멍 뚫린 쇠돈들이다.
은이나 구리의 작은 조각에 무늬를 두들겨서 나타내는 방법으로 제작된 이 돈은 주조에 의한 제조 기술이 출현하기 이전의 것에 속하며, 그 모양도 주조한 것보다 약간 작다. 시바가르프에서 출토된 동전에는 태양, 여섯 개의 무기, 언덕 위에 뜬 초생달, 손, 코끼리, 꼭대기에 쌍날개를 가진 뱀 두 마리가 감겨 있는 지팡이 등 마우리야 시대의 표식이 새겨진 것이 많지만, 몇 개는 얇고 큰 직사각형으로서 마우리야 시대 이전의 것들도 추정된다. 동전은 성벽 내부에서도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큐샨 시대의 것이 가장 많고, 카니쉬카왕의 동전을 정점으로 웨마 카드피세스왕, 후비수카왕의 동전이 출토되고 있다.
지명, 사원명, 개인명 등을 기록한 테라고타제의 인장이나 표식은 직접적인 자료가 빈곤한 인도 고대사의 해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티라우라 콧트에서는 그 지명을 나타내는 인장이나 표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표식의 수도 매우 적어서 서문 가까이에서 브라흐미 문자로 ‘Dalilasa’라고 적힌 것과 ‘Negame’라고 적힌 것이 각각 한 개씩 발견되었고, 성안 중앙의 유적에서 혹달린 소의 그림이 있는 것과 문자가 새겨진 것 등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인장은 편지의 봉인이나 짐을 묶는 끈의 봉인에 사용되었는데, 혹달린 소의 무늬가 있는 인장 뒷면에는 한 가닥의 끈 자국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티라우라 콧트의 발굴 결과는 이 도시가 인도의 다른 고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수세기에 걸쳐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의 거주 구역은 누벽의 내부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인접된 사방으로 널려 있었으며, 북∙서∙남쪽 근교에서는 슝가 시대를 중심으로 그 전후, 즉 마우리야 시대의후기에서 쿠산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채색토기, 흑색토기, 인물과 동물의 테라코타, 탄화된 쌀알과 각종 동전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장은 카필라바스투의 불교 유적에 대해서, 궁성 안팎에 슛도다나왕이나 마야부인이 거처하던 곳의 흔적과 세존이 데바닷타와 힘을 겨룬 자리 등, 세존의 연고지에 세워진 정사나 탑이 다수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무케르지는 티라우라 콧트의 북벽 안쪽에서 16면을 가진 8각형의 스투파를 발굴했으며, 최근의 발굴에서도 누벽의 북쪽 360m 지점에서 직경이 각각 15.6m와 7.8m가 되는 같은 모습의 스투파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들을 어느 유적에 귀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티라우라 콧트 주변의 유적
티라우라 콧트 주변인 타라이 지방에는 이밖에도 불교 유적을 포함한 많은 고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니가리 사가르에서 볼 수 있는 카나카무니불의 유적을 설명하고 있는 아쇼카왕의 석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무케르지는 그 동남쪽에 있는 티라우라 콧트 유적을 법현과 현장의 기록에 나와 있는 카나카무니불 탄생지로 추정하고서, 석주가 이곳으로부터 니가리 사가르 연못가로 옮겨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티라우라 콧트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00m 정도 되는 대략 정사각형의 유적인데, 사방은 누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누벽 위에는 여기저기에 대량의 벽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동쪽과 북쪽은 호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내부에는 솟아오른 곳 몇 군데와 연못의 흔적인 것 같은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본격적인 발굴은 아직 실시되고 있지 않다. 또 무케르지는 크라쿳찬다불의 탄생지로 티라우라 콧트 남서쪽 피팔리 유적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줄 만한 확고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퓨라 박사는 같은 해인 1895년 티라우라 콧트의 북북동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사가르와의 유적을 발굴하고 한 개의 큰 스투파와 17개의 작은 스투파에서 다수의 사리(유골)와 사리 용기를 발견했다. 퓨라 박사는 이것을 경전이나 「대당서역기」에서 볼 수 있는 사건, 즉 코살라 국왕 비두다바(위두다바)에 의하여 살육된 샤캬족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스투파군(群)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물론 이와 다른 해석도 매우 많다.
티라우라 콧트 서남쪽 약 6km 지점의 코티하와에도 아쇼카왕의 석주가 남아 있다. 이 석주는 건립 당시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명문이 없기 때문에 그 유래는 알 도리가 없다. 곁에는 표면을 벽돌로 만든 커다란 스투파 터가 있는데, 그 위에는 인가(人家)가 밀집되어 있는 관계로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유적은 현장이 본 크라쿳찬다불 탄생지에 상당히 가깝다. 그러나 석주는 윗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크라쿳찬다불의 유골을 모신 스투파 옆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석주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이 티라우라 콧트와 그 주변에는 경전이나 법현, 현장의 기록과 대응하는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지만, 이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5) 피푸라하와
한편, 카필라바스투가 룸비니 서쪽 약 15km 지점에 있다고 한 법현의 기록에 근거하여 티라우라 콧트의 남동쪽 약 25km 지점, 즉 인도-네팔 국경에서 1km 정도 인도 영내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피루라하와와 그 일대의 유적을 카필라바스투의 성터라고 주장하는 설이 일찍부터 빈센트 스미스 같은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왔는데, 수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이 지역의 재발굴에 의해서 많은 유물이 새로 출토되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약 10시간 정도를 달리면 사라수의 숲이 점점이 있는 고라크푸르 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세존의 열반지인 쿠쉬나가르를 대략 그 정동쪽에 두고 있으며, 또 지명에서 유래하는 고라크나트 사원 등 문화적으로도 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는 활기찬 거리이다. 여기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수시간 국경도시 노가르를 지나 라프티 강의 지류를 건너고, 비르도푸르 마을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우회하는 룸비니를 향한 길과 갈라져, 네팔 국경을 향해서 약 9km 쯤 북쪽으로 더 나아가면 피푸라하와와 간와리야의 두 유적이 나온다.
평탄한 북 인도의 전원으로 둘러싸인 피푸라하와의 유적은 벽돌을 쌓아올린 큰 스투파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넓은 중간 마당을 향해서 방과 방이 열을 지어 있는 형태로 승방을 배치한 승원이다.
1898년 인도에 주재하던 영국이 윌리엄 펩페는 빈센트 스미스의 시사에 따라 기부(基部)의 직경이 약 35m이고 높이가 6.5m인 큰 스투파를 발굴해내고, 정상에서 약 3m 되는 곳에서 동석(凍石)으로 만든 작은 용기 하나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진흙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속에는 수정과 금으로 만든 장신구와 구슬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발굴을 계속한 결과 정상으로부터 약 5.4m 아래쪽에서 남북으로 놓인 양질의 사암제 대석관(大石棺)을 발견했다. 그 뚜껑은 약간 손상이 되어 있었지만, 안에는 동석으로 만든 항아리가 4개, 수정으로 만든 대접이 1개, 그밖에 금은의 박편과 장식품, 귀석(貴石), 구슬 등 다수의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높이 15cm, 직경 10cm의 동석으로 만든 사리 용기인데 뚜껑의 표면에는 아쇼카왕의 명문에서와 마찬가지의 브라흐미 문자로 “이것은 샤캬족의 부처인 세존의 유골 용기로서 명예로운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라고 판독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해독은 영국의 동양학자 프리트처럼, “불타의 친족인 샤캬족의 유골”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만일 이것이 정말로 세존의 유골을 담은 것이라면 피푸라하와의 스투파야말로 후술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세존의 입적 후에 샤캬족이 얻은 1/8의 부처님 사리를 봉납한 것이 틀림없으며, 또 「마하파리닙바나 숫탄타」가 전하는 내용과도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근 70년 간 의 침묵을 깨고 1970년에 인도 정부 고고학국의 손으로 재개된 발굴의 결과, 이 스투파는 2번에 걸쳐 증축이 되었다는 사실과 가장 새로운 것은 벽돌로 된 네모난 기단 부분이고, 이 기단의 측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 등이 입증되었다.
또 기단 하부에는 점토제 스투파가 있으며, 먼저 펩페가 발굴한 사리 용기가 들었던 대석관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그 아래 약 60cm 되는 곳에 이 점토제 스푸파에 박힌 형태로 여러 장의 벽돌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 남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1972년에 확인되었다. 이 작은 방 속의 적색 채문토기(赤色彩紋土器) 뚜껑 밑에는 동석으로 만든 2개의 사리용기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유골이 들어 있었다. 용기의 크기는 남쪽 것이 직경 9cm에 높이 16cm였으며, 북쪽 것이 직경 7cm에 높이 9cm였다.
이들 용기는 토기의 출토 상황으로 미루어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펩페가 발견한 용기보다 연대적으로 더 오래된 것으로서 명문은 없다.
점토제 스투파의 밑바닥이 자연적으로 토양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스투파는 최종적으로 3개의 층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각층에서마다 사리 용기가 출토된 셈이 된다.
스투파를 순회하는 요도(繞道)가 펩페 발견의 석관이 출토된 층에 속하는 2곳에서 발견된 것과 낡은 층에 사용된 벽돌의 크기가 모두 마우리야 시대로 추정되면서도 다소 다르다는 점에서 볼 때, 펩페가 발견한 사리 용기와 최하층에서 발견된 사리 용기는 각각 다른 시기에 봉납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를 분명히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출토되지 않고 있다.
피푸라하와의 발굴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성과는 스투파 동쪽 승원 유적에서 출토된 40여개가 넘는 테라코타제 표식과 항아리 뚜껑이다. 표식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승원 터의 지표에서 1.05~1.55m 깊이에 산재해 있고, 어느 것이나 직경 약 3cm 되는 불규칙한 원형이다. 그 중에는 승방의 작은 감실에 놓인 상태로 출토된 것도 있다. 표면에는 1~2세기경의 브라흐미 문자로 3~4 행에 걸쳐 “옴(인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소리). 카필라바스투의 데바푸트라 승원 비구 상가의(소유)”라고 판독되는 것, 그리고 비구의 이름으로 생각되는 글이 적혀 있는 것(2개) 등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이 판명되었다. 한편 항아리의 뚜껑에는 직경이 약 7cm 정도 되는 크기로 자그마한 손잡이 뒷면에 표식에서와 같은 문자와 글자체로 이것이 카필라바스투의 데바푸트라 승원 비구 상가의 소유물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데바푸트라(하늘의 아들)’란 스스로 이 명칭을 사요한 쿠산 왕조의 카니쉬카왕(재위 144~170년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이들 출토품으로 이 지방이 카필라바스투나 혹은 마하 카필라바스투라고 불리며, 카니쉬카왕에 의해서 승원이 건설되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실은 휴대와 운반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위치가 바뀔 수도 있지만, 많은 수량의 표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 승원의 존재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스투파 동쪽에 있는 승원의 북동쪽 구석에 위치한 한 방에서는 불에 타서 탄화된 벼도 다량 출토되었다.
피푸라하와 유적이 스투파를 중심으로 한 승원 유적인데 반해서, 그 서남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한 간와리야 유적은 승원과 일반인들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의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5년 이후의 발굴로 출토된 벽돌 건축물의 하나는 사방 30m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26개의 방이 중간 마당을 통해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다. 그 30m 북동쪽에는 26m 사방으로, 21개의 방이 있는 똑같은 형식의 건축물이 인접해 있다. 또한 두 개의 중간 마당과 베란다를 에워싸고 많은 방이 줄지어 있는, 학교로 추정되는 유적과 승원 터도 발견된다.
간와리야의 발굴자인 K.M. 슈리바스타바는 이 유적의 계층을 4기(期)로 나누어 출토된 토기에서 최고층(最高層)을 B.C 800~600년, 제2기를 B.C 600~200년, 제3기를 B.C 100~A.D 100년, 제4기를 큐샨 시대에서 4세기경까지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연꽃 대좌 위에서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을 누르는 명상인(瞑想印)을 맺는 테라코타제의 불좌상, 아쇼카왕 석주의 머리 부분의 아바카스에서 볼 수 있는 코끼리∙사자∙소∙법륜∙화환과 동일한 무늬의 직경 14cm 정도의 사암제 원판, 구리로 만든 사발, 구슬, 석제 추, 구리나 은제이 돈 등이 각 시대의 층위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 간와리야의 역사는 매우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피푸라하와의 스투파나 승원 유적과의 관련성도 종합해서, 이 근방을 카필라바스투로 추정하는 설명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6) 카필라바스투의 도성
문헌상으로 볼 때 세존이 거주하던 성의 규모가 어떠했는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세존의 생애를 전하는 후기의 경전에는 그 장대함과 화려함을 기록하고 있고, 산치의 부조 조각에도 그 일부가 표현되어 있지만, 슛도다나왕이 옛날에는 다만 라자라고만 불렸던 일이나 다른 도성 유적 등에서 미루어 볼 때 그 규모는 그다지 컸던 것 같지 않다. 17세기에 현장은 황폐해 있기는 하지만 “궁성은 주위가 14~15리, 그리고 성벽은 벽돌로 쌓아올렸고 기초는 더욱 높고 견고하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물로 후대에 증축된 것을 보고나서 행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인도의 도시 조영법(造營法)에 대해서는 마우리야 왕조의 재상 카우틸랴가 저술한 「아르타 샤스트라」에 다음과 같은 상세한 기술이 있다.
국경 방위를 위하여 강이나 호수 가운데의 모래톱과 섬에는 수성(水城)과 구릉을 구축하고, 동굴에는 산성, 사막에는 사막성, 늪이나 밀림 지대에는 임성(林城)을 세운다. 각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는 도성은 두 강이 합류하는 곳이나 물이 마르지 않는 호수∙못∙호의 옆에 제각기 지형에 따라서 원형이나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건조하고 수륙 양로로 통하는 시장 도시가 되어야만 한다. 도시를 둘러싸는 누벽은 기초부분에 흙을 쌓은 다음, 코끼리나 소가 밟아서 다지며 거기에 가시가 있는 관목이나 독이 있는 덩굴을 심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린다. 수레가 왕래하는 길은 단단한 타라 나무를 밑바닥으로 하고, 그 위에 넓은 석판을 깔아서 돌로 포장을 하며, 결코 나무를 깔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의 신이 즐겨 그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누벽에는 망루와 누문(樓門), 그리고 대규모의 성문을 축조하고 병사들의 방과 무기고 등을 설치한다.
성내에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왕의 궁전을 동향이나 북향으로 짓고, 동북부에 궁정 승관(宮廷僧官)의 주택, 동부에 향료나 곡실류 혹은 조미료를 취급하는 상인, 남부에 도시∙식료∙상업∙공업∙군대를 담당하는 각부 장관, 그리고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과 기녀, 음악가, 서부에는 양털이나 실 또는 무기 제조업자의 주거지, 북부에는 금속과 보석 제조업자 및 바라문의 주거지를 건조한다. 성의 네 구석에는 각종 공장과 창고를 건조하고, 조합과 운송업자들이 살게 한다. 성 밖이나 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차이탸(영수, 靈樹 또는 영장, 靈場/ 팔리어 : 쩨띠야)를 마련하고, 묘지는 북쪽이나 동쪽을 원칙으로 하되, 최상 계층에 속하는 묘지는 남쪽에 설치한다. 주민 열 가구를 한 조로 해서 하나의 우물을 파고, 상품∙원료∙무기∙코끼리∙말∙수레 등의 저장창고도 만든다.
이상의 「아르타 샤스트라」가 설명하는 축성법은 왕권이 발달한 마가다국과 같은 통일국가에서 시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마가다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지금의 비하르 주 퍼트나)는 갠지스와 손, 칸다키 등 3대강의 합류점 남안에 건설되어 육로뿐만 아니라 수운의 혜택도 다분히 받고 있다. 도로의 기반이나 저장 창고의 토대, 또는 누벽이나 배수구 등에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는 것은 「아르타 샤스트라」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의 경전에서도 볼 수 있는 언급인데, 파탈리푸트라의 발굴 결과, 이들 제반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대규모의 목조 건축물이 출토되었다.
위와 같은 성채 도시는 같은 시대의 쉬라바스티, 바이샬리, 카우샴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또 그 전통은 오늘에 이르러 델리나 알라하바드, 바라나시, 퍼트나 등, 갠지스와 야무나 두 강 유역의 주요 도시들이 같은 지형적 조건 하에서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그 존재의 계속성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세존 시대의 카필라바스투가 소규모의 도성이었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추정할 수 있지만, 「아르타 샤스트라」의 기술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분명하지 않다. 또 그 위치에 대해서도 티라우라 콧트, 간와리야의 두 유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티라우라 콧트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기는 하나, 지명을 기록한 증거물이 결여되어 있다. 한편, 표식이 출토된 피푸라하와-간와리야 일대에서 현장의 기록과 같은 성벽 터는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또 피푸라하와에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부처님 사리탑(8분탑의 하나)에 대해서는 법현이나 현장 모두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카필라바스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아쇼카왕 석주와 도성 사이의 위치관계 및 샤캬족 살육의 현장과 그 공양 스투파의 소재지 등에 관해서도 경전이나 여행기 등을 통한 문헌적 연구와 아울러 더욱더 면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세존이 자신의 청년시절을 보낸 이 도성의 소재지는 한층 더 명백하게 밝혀질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많은 의문 속에 싸여 있는 수도 카필라바스투를 떠나서, 세존 탄생의 무대인 슛도다나왕의 유원이었던 룸비니로 시야를 옮겨 보기로 하자.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