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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讓
<비문 전면>
通政大夫宮闕都監羅公德讓之墓
配淑夫人咸平李氏
<비문 후면>
宮闕都監羅州羅公墓碣銘 幷序
往昔龍蛇(왕석용사)/지난날 1592년(임진) 1593년(계사)에
板蕩之際(판탕지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가 결딴나는 위급한 때
誠臣烈士磊落相望(성신열사뇌락상망)/ 충성스러운 신하와 열사(烈士)들도 작은 일이라고 거리낌 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而故通政大夫闕都監羅公諱德讓(이고통정대부궐도감나공휘덕양)/ 故人이 된 통정대부 궁궐도감 羅德讓은
以韋布之士(이위포지사) / 초야의 선비로서
挺身奮義(정신분의) / 몸소 앞장 의기(意氣)를 떨쳐
誓死討賊(서사토적) / 죽기를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如非忠君愛國出於誠心(여비충군애국출어성심) / 어찌 성심에서 나온 충군애국(忠君愛國)이 아니었으면
不可能也(불가능야) / 할 수 없는 것입니다.
亦足爲後世爲人臣者矣(역족위후세위인신자의) / 또한 후세에 신하된 자의 모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公沒三百有餘年(공몰삼백유여년) / 공(公)이 죽고 3백여 년이 되어
後孫謀樹顯刻于墜(후손모수현각우추)/ 후손이 묘소 앞에 비문을 세울 것을 모의하여
使鍾聲鍾烈(사종성종열) / 종성(鍾聲)과 종렬(鍾烈)로 하여금
徵余銘(징여명)/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요구하기에
世好難辭(세호난사) / 대대로 이어온 좋은 세의(世誼)로 사양하기 어려워
按狀以叙之(안상이서지) / 행장(行狀)을 살펴 다음과 같이 서술하노라.
公字得之(공자득지) /공(公)의 자(字)는 득지(得之)로
系出羅州(계출나주) / 핏줄의 계통은 나주에서 나왔으며
以將軍諱富爲鼻祖(이장군휘부위비조) / 감문위상장군 부(富)가 비조(鼻祖)가 되며
屢傳(루전) / 여러 대를 내려와
諱公彦(휘공언) / 이름이 공언(公彦)으로
討賊有功封羅城君(토적유공봉나성군) / 적(賊)을 토벌하는데 공로가 있어 나성군(羅城君)에 봉작되었으며
入我朝(입아조) / 조선조에 들어와
諱自康務安縣監(휘자강무안현감) / 자강(自康)은 무안(務安)현감을 하였으며
生諱繼祖將仕郞(생휘계조장사랑) / 이분이 낳은 계조(繼祖)는 장사랑(將仕郞)으로
寔公高祖也(식공고조야) / 이분이 공(公)의 고조가 되며
曾祖諱逸孫(증조휘일손) / 증조는 이름이 일손(逸孫)으로
直長贈都承旨(직장증도승지) / 직장(直長/종7품)을 하고 사후에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으며
己卯名賢流(기묘명현류) /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전합니다.
祖諱昶弼善(조휘창필선) / 조부 이름은 창(昶)으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하였으며
筆法著名(필법저명) / 필법(筆法)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考諱士愔(고휘사음) / 아버지의 이름은 사음(士愔)으로
有才勇(유재용) /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以漢陰李相公薦(이한음이상공천) / 한음 이상공(李相公/李德馨)이 천거를 하여
拜折衝將軍副護軍(배절충장군부호군) / 절충장군(折衝將軍)과 부호군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妣利川徐氏(비이천서씨) / 어머니 이천서씨는
掌仕郞允智女(장사랑윤지여) / 장사랑(掌仕郞/종9품) 서윤지(徐允智)의 따님입니다.
公以明宗戊申生(공이명종무신생) / 공(公) 명종 무신년〔1548년 명종3〕에 태어나
孝友純篤(효우순독) / 효성과 우애가 순일하고 돈독하였으며
亦有氣節(역유기절) / 또한 기개와 절조가 있어
人皆期以遠大(인개기이원대) /사람들이 모두 원대하리라 기대하였는데
及島夷猖獗(급도이창궐) / 섬 오랑캐가 창궐하게 되자
生靈危在朝夕(생영위재조석) / 살아 있는 백성들의 위험이 아침저녁으로 있어
公乃痛憤(공내통분) / 공(公)이 이에 원통하고 분해하며
遂杖義(수장의) / 마침내 의(義)를 지켜서
從健齊金公千鎰(종건제김공천일) / 건재 김천일(健齊 金千鎰)을 따라
以募義旅(이모의려) / 의병을 불러 모으고
以建旗(이건기) / 깃발을 세우고
分自任粮機轉運之責(분자임량기전운지책) / 스스로의 임무를 양식과 기계를 전운(轉運)하는 책임을 분담하였으며
冒死直前籌劃(모사직전주획) /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며 사정이나 형편을 헤아려 계획하며
甚精調度於水原之柵江華之陣(심정조도어수원지책강화지진) / 수원의 성채(城砦)와 강화도의 군진(軍陣)에 매우 정밀하게 양식과 기계를 정도(程度)에 맞게 처리하였으며
操從於晉陽之守(조종어진양지수) / 진주성(晉州城) 지키는 것을 조종하고
其於善山天兵所之饋餉(기어선산천병소지궤향) / 선산(善山)의 천병소(天兵所)에 이르기까지 음식과 군량을 보냈으니
亦轉漕之力也(역전조지력야) / 또한 공(公)이 전조(轉漕)에 힘쓴 것이 많았습니다.
往來元帥權公陣(왕래원수권공진) / 원수 권율(權慄) 장군의 진(陣)을 왕래하면서
隨補戎服機械(수보융복기계) / 곧바로 융복(戎服)과 기계(機械)를 보충하였으며
且與李大胤崔尙重等(차여이대윤최상중등) / 또한 이대윤(李大胤) 최상중(崔尙重) 등과 함께
迭相殫力轉漕無虞(질상탄력전조무우) /서로 번갈아 가며 탄력적으로 전조(轉漕) 하니 아무런 근심이 없었습니다.
按撫使鶴峯金公誠一/ 이에 안무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은
以爲三南漕運 /삼남(三南)에서 조운(漕運)하는 것으로는
湖南爲最善(호남위최선) / 호남이 가장 잘하였다고
啓薦除官(계천제관) / 임금께 알려 벼슬을 제수하도록 천거를 하였습니다.
亂定後(난정후)/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에
每恨不以爲與三壯士同殉(매한불이위여삼장사동순) /매양 삼장사(三壯士)와 더불어 같이 순절(殉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습니다.
以絶念進取(이절염진취) / 벼슬길 나아갈 생각을 끊고
晦身嵁巖(회신감암) /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기고
沒身自靖焉(몰신자정언) / 종신초록 자정(自靖)하다가
仁祖庚午四月二十七日卒 / 인조 경오년(1630년) 4월27일 졸하니
享年八十三 / 향년 83세였습니다.
葬于州西長興洞枕子之原 / 고을 서쪽 장흥동에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였습니다.
配咸平李氏(배함평이씨) / 배 함평이씨는
佐郞絳女(좌랑강여) / 좌랑(佐郞) 강(絳)의 따님으로
有女士風(유여사풍) /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습니다.
墓用魯禮(묘용노례) / 묘는 노(魯)나라의 옛 제도를 따라 썼습니다.
育五男(육오남) / 다섯 아들을 길렀는데
海龍海鵬海龜逸參奉有孝學 / 장자 해룡(海龍). 차자 해붕(海鵬), 삼자 해구(海龜)는 유일(遺逸)로 참봉이 되고 효행과 학행이 있었습니다
海鳳進士(해봉진사) / 제4자 해봉은 진사로
與仲兄受業于沙溪金先生(여중형수업우사계김선생) / 중형 해구(海龜)와 함께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海鶴參奉(해학참봉) / 제5자 해학(海鶴)은 참봉이 되었습니다.
孫曾以下多不盡錄(손증이하다불진록) / 손자,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嗚呼(오호) / 오호,
公之世寢遠(공지세침원) / 공(公)은 대대로 전해오는 능침이 멀어지고
文蹟殘缺(문적잔결) / 상고(詳考)할 문서와 장부가 멸실되고 이지러져서
謹以難詳(근이난상) / 삼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而惟其忠愛之誠(이유기충애지성) / 오직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이
卓然如是(탁연여시) / 이처럼 우뚝하기에
則雖百世可徵也(칙수백세가징야) / 비록 백세가 지났어도 징험(徵驗)할만 합니다.
乃爲之銘曰(내위지명왈) / 이에 명(銘)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忠義之誠(충의지성) / 충의의 정성과
才智之名(재지지명) / 재주와 지혜로 이름 났는데
適時板蕩(적시판탕) / 때마침 왜적들이 국정을 문란케 하니
敵愾殫誠(적개탄성) / 왜적과 싸우려는 의기로 정성을 다하니
起自草野(기자초야) / 초야에서 스스로 일어나
大振義聲(대진의성) / 의로운 명성을 크게 떨쳤고
亂定斂藏(난정렴장) / 왜란이 평정된 후에 재능을 감추고 은거하며
絶意復榮(절의부영) / 마음을 끊어도 거듭하여 영예롭구나.
沒身自靖(몰신자정) / 종신토록 자정(自靖)하니
志操之淸(지조지청) / 지조가 청고(淸高)하도다.
長興之原(장흥지원) / 장흥동(長興洞)의 언덕은
有山崢嶸(유산쟁영) / 산이 험준함이 있어도
我銘闡幽(아명천유) / 이내 명(銘)으로 숨은 것을 밝혔으니
以表其塋(이표기영) / 무덤에 표하는 바입니다.
時靑己天中節(시청기천중절) / 때는 푸르러 이미 단오절에
恩津宋在晟撰(은진송재성찬) / 은진 송재성(宋在晟) 짓고
靑松沈翰求謹書(청송심한구근서) / 청송 심한구(沈翰求) 삼가 쓰다
丙午三月日謹竪(병오삼월일근수) / 1966년 3월 일 삼가 비를 세우다
첫댓글
南磵公 年譜-5
박사님 우리선대 卒년을 바로 잡아야 될것같군요..
번역과 해설 /羅千洙(나주목 향토연구회 부회장)
萬曆四十六年戊午, 光海君 十年, 三十五歲(만력사십육년무오, 광해군 십년, 삼십오세)/1618년 무오년 광해군 10년, 서른다섯 살이 되다,
春侍通政公患侯(춘시통정공환후)/봄에 통정공의 환후에 시중들었다.
時沉疴二載有奇湯藥不掇(시침아이재유기탕약불철)/때는 2년간 지병으로 기이한 탕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危谻斷斷指(위갹단단지)/위독해지자
夏四月二十七日丁通政公憂/여름인 4월27일에 아버지의 喪을 당하였다.
聞師睡隱公訃(문사수은공부)/스승 수은공께서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다.
五月初六日(오월초육일)/5월초6일이다.
수은公도 1618년 타계...
내가 어디를 찾을 지 모르겠으니 그 부분을 내려 받아 메일로 부탁해요, 또는 카톡으로 보내요
崔尙重 (1551-1604)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 영의정 최항(崔恒)의 6대 손이며
, 최준원(崔濬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언수(崔彦粹)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최영(崔潁)이며,
어머니는 현감 송구(宋駒)의 딸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에 제향되었다.
민족대백과에서...